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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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북송 말기~남송 초기의 무장으로, 금나라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의 명장이자 서예가. 자는 붕거(鵬挙). 시호는 '''충무(忠武)'''.[2] 남송의 영종이 1204년에 악왕(鄂王)에 봉했기 때문에 흔히 '악왕'이라고도 부른다. 중국(특히 한족)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거의 이순신급 명장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국가를 지키려다가 마지막에 간신의 억울한 모함으로 죽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명장인 원숭환과도 이미지가 겹치는 편이다.[3]성난 머리칼은 관을 뚫을 지경인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 지르니, 장사의 감회가 끓어오른다.
삼십년간 쌓은 공명이 한갓 먼지에 불과하고,
팔천리 내달렸던 길도 그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없구나.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젊었던 머리칼은 어느새 희어졌으니 비감한 마음만 애절할 뿐
정강의 치욕은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로서의 한을 어느 때나 풀 수 있을 것인가.
전차를 몰고 하란산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
배 고프면 오랑캐의 살로 배를 채우며, 목 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옛 산하를 다시 되찾은 후에 황제를 만나 뵈러 가리라.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 정부의 변화한 역사관으로 교과서에서는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를 지양하고 있으며 이와 별개로 불분명한 기록과 과장된 전공으로 학계에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
2. 생애
송사 <악비전>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고니처럼 큰 새가 지붕 위에 앉아서 이름이 비(飛)가 되었다고 한다. 또 그가 어렸을 때 황하가 범람해 그의 어머니가 악비를 안은 채 커다란 바구니를 타고 홍수에서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북송이 멸망할 무렵에 의용군을 조직해 금나라에 항거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송에서 장군이 되어 악가군을 조직해 수많은 무공을 세운 명장이다. 얼마나 강했는지 금나라 병사들은 ''''태산을 흔드는 건 쉽지만 악비의 군사를 흔드는 건 어렵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4번에 걸쳐서 북벌을 했는데 4번째 북벌에서는 악가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를 여러 번 쳐부수고 낙양과 정주 등을 회복했으며,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에서 불과 40여리 떨어진 주선진까지 점령했다. 이 때 금나라 대장 올출은 여러번 패전하자 개봉을 버리고 퇴각하려고 했으나, 한 문관의 만류로 개봉을 끝까지 수비한다. 그 문관은 올출의 말고삐를 잡으며 "예로부터 간신이 조정에서 전횡하면 외지에서 아무리 능력 있는 장군도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곧 송나라 내부에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올출은 문관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 이 악비의 북벌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악비의 후손이 쓴 일종의 행장인 금타졸편(金佗稡编)과 금타속편(金佗续编)에 기초하기 때문에 거의 믿을 수 없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주선진 전투만 봐도 그 출처는 악비의 후손이 쓴 행장과 송사 악비열전 정도가 전부이며 앞의 기록들 외에는 과연 주선진 전투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정말로 존재했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조차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기록들을 보면 금나라와 송나라는 이 당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고, 주선진 전투는 설령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단순히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주선진 전투의 병력에 대해서도 악비군은 5백명인데 금나라의 군사를 10만 명으로 잡아 엄청난 대첩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만약 이 묘사가 사실이라면 이런 대단한 전투를 치뤄 악비가 이겨 카이펑의 코앞에서 금나라의 주력을 박살내고도 송나라는 이후 수도를 수복하려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고 다른 사가들은 하다못해 주선진 전투에서 이겼는데 송나라군이 카이펑으로 왜 진군하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없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송나라가 카이펑을 되찾을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을 그냥 무시해버렸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악비는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전쟁시에는 이를 금했다. 그러나 금나라 수도 근처의 황룡부까지 진격하면 병사들에게 거나하게 먹자고 약속하고 다음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악비의 주전론은 금과 화친해야한다는 주화파 재상 진회와 여러차례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는데, 북송이 멸망한 뒤 북쪽에 있던 한족들은 여진족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남송인의 일부는 여진족과 싸워 국토를 회복해야한다는 의견이 들끓었으며 악비는 그 주전파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송의 황제 고종의 마음도 진회쪽에 더 기울어져 있던 터라 그를 12번이나 불러 소환시키고 악비는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죽기 전에 유언으로 "나의 결백한 마음은 하늘의 태양처럼 밝을 것이다."라 하였다 한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는데, 일설에는 살가죽을 벗겨 죽였다고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독살당했을 것으로 본다.
이때 악비의 전우이자 또다른 주전파인 한세충이 "악비의 죄상이 무엇입니까?"라며 따지자 진회는 '''"아마 있을지도 모르오"'''(막수유, 莫須有)라는 궁색한 대답을 했고, 이에 기가 막힌 한세충은 '''"고작 그 세 글자로 천하가 납득하겠소이까?!"'''라며 한탄했다 한다.
이후 진회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적극적으로 매국을 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라에 충성을 한 신하였지만 지금도 진회를 까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후대 중국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 중 하나다. 사실 당대에도 진회의 평은 좋지 않았던 것이 진회는 재상이 되었을때 안하무인으로 매우 오만했으며 문자의 옥을 일으켜 자신의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정도로 잔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알려진다. 특히 진회의 권력은 진회를 발탁한 황제인 고종 본인조차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커져서, 진회 사후에는 진씨 일족이 멸족당한다. 악비는 미천한 신분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죽어서는 최고의 시호와 왕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진회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평가는 허구한날 오물을 뒤집어 쓰는 4인방 동상이 잘 보여준다.
3. 악비의 무덤
악비의 시체를 진회가 훼손할 것을 염려한 옥지기가 시신을 자신의 집에 있는 나무 밑에 묻었고, 자신이 죽을 무렵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후에 악비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효종때 악비의 묘는 크게 지어졌고 1204년 과거 고종때 있던 일을 재평가하여 악비를 악왕(鄂王)으로 추봉하고 커다란 동상도 만들어지게 되어 무덤은 악왕묘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매국노 진회는 물론 그 부인 왕씨, 묵기설,[4] 장준[5] 과 함께 무릎 꿇고 있는 동상이 만들어져 악비 동상 앞에 놓이게 된다.
참고로 아내의 동상까지 만들어진 것은, 진회가 악비를 죽일 죄명을 찾지 못해서 고민할 때, 아내의 조언으로 묻지마 처형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도 부부에게 침을 많이 뱉어서 지금 악왕묘를 가보면 동상에 침을 뱉지 말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근데 사람들이 아직도 싫어하는지 침이나 쓰레기 투척은 예사고 오물 투척도 툭하면 일어난다고 한다.
초기에는 이러한 사태로 오물이 넘치자 현장에서 관리할 수 있는 공안들을 배치했는데 정작 그 공안들이 더 적극적으로 오물을 투척하거나 심지어 경비용으로 준 총으로 내려치는 등의 문제가 있어 현재는 상시로 공안을 배치하지 않고 있으며 적발되더라도 공안이 오물 투척을 한 사람을 폭력을 안 쓰고 팔짱 끼고 끌고 가는 수준에서 그친다고 한다. 하지만 악왕묘 역시 문화대혁명의 마수는 피해가지 못해서, 홍위병들이 악비의 묘를 파헤치고 유골을 불로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에 적대적인 편이었다. 외몽골 독립은 중국 입장에서 주권 상실이었지만 당시에 곽말약이라는 공산주의 학자는 신문에 글까지 쓰면서 찬양했을 정도. 그리고 악비는 농민반란 진압에 참여한 일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게 민중사관을 표방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성향에도 맞지 않았던 것 같다.
4.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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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는 오랫동안 중국의 한족 왕조에서 호국 영웅으로 존경받았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는 중화민족과 다민족국가 개념을 주장하는 중국 정부에 의해 구국의 영웅이라는 인물상이 폄훼되고 있다. 반대로 전통적인 간신의 상징이었던 진회는 상술한 논리에 의해 민족융합의 선구자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이는 중국 국내 외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실시하면서 여진족(만주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을 끌어안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악비에 대한 찬양은 좀 사그라들었다. 이를테면 교과서 등에서 악비를 가리키는 '한족의 영웅' 등의 표현을, '중국의 영웅' 등으로 소수민족들을 고려한 표현으로 바꾸는 식이다.
정치적인 문제와 별개로 학계에서는 이전부터 악비의 전공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비의 전공은 '''악비 후손들이 쓴 행장'''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며, 정사인 송사 악비전 역시 이 행장을 바탕으로 저술한 데다 몇백 명의 보병으로 몇만 명의 기병을 몰살시켰다는 식의 황당한 전과가 많아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 금사(金史)를 보면 악비가 패한 기록 역시 여럿 나오는 데다 악비의 전공은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이 안 되거나 하다못해 공신력 있는 사서에 채택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여러 모로 사료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악비의 최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선진 전투만 봐도 동시대 '''남송'''의 사서인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繫年要錄)[6] 이나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7] 에는 아예 주선진 전투가 나오지도 않는다. 괜히 송사 악비전의 기록에 신뢰성이 없다고 학자들이 비판하는 게 아니다. 악비전 기록만 보면 8천으로 조성의 10만 대군을 이기고 불과 5백명 가지고 주선진에서 올출의 10만 대군을 털었다는 얘기나 8백명으로 왕선등의 도적 50만 명 이상을 남훈문에서 격파했다는 얘기가 줄줄이 나오니...물론 악비급으로 소수의 군세로 다수의 군대를 턴 명장들이 없는것은 아니니 악비도 그 급이라고 한다면야 아예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지만서도 말이다.
또한 최근에는 그간 악비의 명성에 묻혀 당시 전공을 세운 종택[8] , 종사도, 한세충, 맹공 등 그동안 악비에 가려 상대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다른 인물들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악비의 처세술 또한 좋지 않다고 지적받는데, 그는 평소 우직한 성격답게 송고종의 어그로를 끄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금군에게 함락 직전이었던 임안과 송고종을 구한 후 악비는 송고종에게 황태자 책봉을 건의한 것이다. 악비 입장에선 국가의 후계 구도를 든든히 하자는 의도였을지 모르나, 송고종 입장에선 그야말로 위세등등해진 군벌 세력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어그로로 보였을 수도 있다. 때문인지 이후 송고종은 악비를 견제하고자 주화론을 주장한 진회를 지지한다.[9]
실제로 말 그대로 정치에는 까막눈이었던 악비는 재상 이강을 비난했던 흑역사도 있었다. 이강이 어떤 인물이었냐 하면,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할 때 일개 문관의 신분으로 개봉 수성전을 지휘하여 격퇴시켰던 구국의 영웅이며, 그 능력과 명성 때문에 고종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싫어하면서도 민심 수습 차원에서 그를 재상으로 기용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황잠선, 왕백언 같은 주화파[10] 와 동일하게 취급하며 비난했으니 제대로 팀킬.
현대 들어선 많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악비의 시《만강홍》(滿江紅)이 명나라 시대의 위작(...)이라는 판정도 받았으나 지금까지도 진위 여부에 대해 많은 견해가 있으며 위작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악비라는 인물이 보통 장수를 뛰어넘는 명장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악비가 충무의 시호를 받고 왕으로 추숭된 후 대대로 칭송 받는 이유는 악비가 생전에 공적이 뛰어난 무장이였음을 알 수있다. 정사 기록이라고 하여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어떤 장수의 전공을 조작하거나 과장할 수는 있어도 졸장을 명장으로 띄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공적이 과장됨이 있고 없고 차이이다.
5. 기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이지란/퉁두란,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그의 먼 직계후손이라는 카더라성 주장이 있다. 족보상으로 따지면 악비 쪽이 한참 조상님이 된다고. 청해 이씨 족보에서는 남송의 명장 악비가 간신 진회의 참소로 죽게 되자 악비의 다섯째 아들인 악정(岳霆)이 화를 피해 북쪽으로 올라가 여진족 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주장을 따르면 이지란은 악비의 7대손이 된다.
또한 그 이지란의 여진족 사촌의 후손이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라고 한다. 정확히는 이지란의 출신이 여진족 중에서도 건주여진 출신인데, 종형제 중 하나가 같은 부족의 맹가첩목아(猛哥帖木耳)이고, 그의 6대손이 누르하치. 하지만 '''머나먼 직계 후손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가 금나라의 명목상 후신인 후금, 즉 청나라가 되고 말았으니(...) 영원히 고통받는 악비. 실제 청나라에서는 알게 모르게 '''악비 신앙을 탄압'''하고 그 대신 관우를 밀어줬다고 한다.
다만 '''정말 악비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사람들은 온갖 영웅들의 후손을 자처하기도 했으므로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씨와 악씨 후손들의 하플로그룹을 검사해서 정말 악비 후손인지 검사해본다면 모르겠으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의 만행으로 그의 유해가 재가 되었으므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하튼 현대에는 악씨와 이씨간의 문중 차원의 공식적인 교류도 하는 등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다.
등 뒤에는 젊었을 때 새긴 '''정충보국'''(精忠報國: 진심으로 충성해 나라에 보답한다)이라는 문신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 문신을 어머니가 새겼다고도 하나, 진위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름이 같아서인지 야사에서는 장'''비'''의 환생(...)이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훗날 세월이 흘러 명나라 시대에 원숭환이라는 명나라를 지탱하던 장수가 악비와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6. 대중문화에서
김용의 무협 소설 중에서 남송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사조영웅전》,《신조협려》에는 악비가 쓴 병법서인 무목유서가 등장한다. 사조영웅전 본편에서는 주로 무목유서 안에 수록된 무공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며 곽정이 이것을 익히게 되는데, 후일 신조협려에서 중년이 된 곽정이 양양성을 몽고군으로부터 수호할 때는 곽정이 왕년에 무목유서로 병법을 공부했다는 말이 나온다. 일개 무림인이었고 딱히 두뇌형 캐릭터도 아니었던 곽정을 의병 비슷한 신분이긴 하지만 국가수호의 명장으로 키워낸 것이 악비가 남긴 병법서라는 떡밥.
악비를 섬기는 사당은 악왕묘라고 한다. 그런데 악비보다 약간 이전 시대를 다룬 수호전에서 악왕묘가 나온다. 후수호전에서 악비가 특별출연했다(덤으로 한세충도).[11]
무협소설에서는 이 악비의 후손들이 세웠다는 무림세가인 산동악가가 나오기도 한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악비인 만큼 야사도 몇가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중 하나는 악비의 성품을 보여준다.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청년 시절의 악비가 어느 부자집에 하룻밤 신세를 졌는데 그 집은 전염병으로 아리따운 딸과 하인들만 남고 가족들이 모두 죽은 상태였다. 딸이 울며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을 아내로 거둬달라 청했는데 올곧은 악비는 부모의 허락도 없는데 함부로 홀로 남은 여성을 아내로 거둘수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시신만 수습하여 극진하게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딸이 악비와 작별인사를 하며 말하길, '선비님은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시신을 거두고 제를 올려주셨으니 훗날 그 이름이 빛날 충신이 되실것입니다. 하지만 산 사람인 저의 청을 거절하시고 거둬주시지 않으니 그 끝이 좋지 못하실듯 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악비가 떠나자 자결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악비는 남송의 충신으로 길이 남았지만 결국 모함을 받아 죽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야사가 있다.[12]
만화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는 송고종에게 북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회가 이를 반대하자 황궁에서 퇴청한 후에 진회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진회가 금나라에게 이길 수 없고 금나라에 있는 송휘종, 송흠종을 죽일 것이라 하자 분노하고 다음날에 9족과 함께 처형된다.
목만 남은 채로 살아있다가 엔란(앵란)으로부터 죽은 자를 3일간 살릴 수 있는 금황구침을 맞고 좀비인 상태에서 살아나면서 엔란과 함께 나머지 금황구침 8개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며, 한세충과 함께 메이의 조부, 메이의 숙조부로부터 의학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의술, 명성을 흠모해 속가제자가 되었고 진회와도 동문이라고 한다.
청나라 시대 소설 설악전전(説岳全傳)을 각색하[13] 여 만든 사극 정충악비가 있다.
소설로는 위에서 언급한 설악전전이 제일 유명하지만 퀼리티는 기대하지 말자. 스토리 라인은 판타지 급으로 아주 역사와는 거리가 멀고[14] 파워 밸런스도 엉망이라 전쟁의 승부는 우주급 맹장이 아니면 법술을 쓰는 종교인들이 좌우지한다.
6.1.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나온다. 일러스트도 39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미청년으로 나왔다. 물론 삼국지 한정으로 미래무장이다. 능력치는 정치력 빼고 삼국지 무장들과 고대무장들, 심지어 삼국지 시리즈에 잠시 등장했던 노부나가의 야망의 무장들보다 능력치가 '''매우 좋다'''. 상술되어있듯 악비에 대한 재평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이 게임 속에선 대놓고 먼치킨형 능력치를 보여준다. 11편에서부터 지력이 78으로 내려가나 12편에서 80대 중반으로 늘어나며 거의 완전체가 되었다. 그리고 12편부터 미래무장(고숙, 양대안, 진경지, 위지공, 진경, 이세적, 진양옥, 정성공)이 대거 삭제가 되었는데 악비만 나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95/무력 91/지력 87/정치력 56. 보병, 기병, 궁병 관련 전법은 각각 2개 이상에 궁기병, 지식, 모략, 책략 관련 병법은 1개인 완전체 무장이다. 의리와 지력이 높으니 이간지랄과 허보도 안 통한다.
삼국지 10에서는 지력 80, 정치력 37으로 내려가고 매력 97이 추가되었다. 특기 수는 14개이며 주로 장합과 조운과 비슷한 편이다.
삼국지11에서는 통솔력 95/무력 91/지력 78/정치력 31/'''매력 98'''의 능력치이다. 지력이 70대 후반으로 너프됐지만 특기가 '''통찰'''이기 때문에 계략이 먹히지 않는다. 말그대로 개사기 무장이다. 다만 병종적성은 창적성 S 외에는 병기 빼고 올A란 점으로 밸런스가 어느 정도 맞는 편이다. 아무리 창병적성이 S지만 창장이 아니면 거의 방어력이 약한 부대에 불과하고, 가능한다면 지도를 가진 무장과 조합하여 병과적성(극병, 노병, 기병)를 키워주는 게 좋다. 친애무장은 관우와 강유. 혐오무장은 초주이다.
삼국지 12에서도 젊은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보다 상승하여 '''통솔력 99'''/'''무력 91'''/지력 86/정치력 31이고 병종은 기병. 전법은 '''의용병'''으로 안 그래도 기병 자체가 완전체 병종이라 무시무시한 성능을 자랑한다. 또 내정 특기는 연병, 병심, 감시, 보수, 일기에 신무장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호걸과 귀모 특기를 동시에 가진 무장이다. 게다가 기병이라 신속도 있다. 매력 삭제로 인한 보상책인지 지력이 꽤 높아져서 군사 특기를 얻으면 군사로 사용해도 좋다.
삼국지 13에서도 등장한다. 능력치는 12편 시절과 마찬가지로 통솔력 99, 무력 91, 지력 86, 정치 31. 특기는 훈련 9, 순찰 9, 위풍 7, 신속 8, 분전 9, 연전 9, 공성 5, 수영 7, 일기 8, 호걸 8, 귀모 4에 병과적성은 창병이 S이며 기병과 궁병이 A다. 전법은 사자분신 중신특성은 창술조련.
삼국지 14에서는 통솔력 96/무력 92/지력 78/정치력 31/매력 95의 능력치로 11에 비해 매력이 3 떨어지고 통솔력과 무력이 1증가했다. 개성은 황금개성인 투장과 통찰 그리고 호걸, 불굴, 담력을 보유하고 있고 전법으론 단기구, 연노, 대갈, 교란, 구축을 보유하고 있는 매우 좋은 무장이다.
6.2. 영걸전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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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무목악왕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병과는 중기병. 능력치는 무력 94, 지력 79, 통솔 99, 민첩 88, 행운 77.
[1] 현재의 허난성(河南) 안양시(安阳市) 탕음현(湯陰縣)[2] 1178년 송효종이 무목(武穆)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1225년 송이종이 시호를 충무(忠武)라고 바꾸었다. 참고로 중국 인물 중 충무(공/후)란 시호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제갈량과 곽자의 등이 있다.[3] 원숭환을 죽인 건 숭정제지만 원숭환이 활동하는 동안 위충현의 방해를 끊임없이 받았다.[4] 万俟卨, 여기서 万俟는 만사가 아닌 墨棋(mo qi)와 같은 발음으로 묵기라 읽는다. 진회를 도와준 간신. 후에 일을 잘못해 쫒겨나 유배생활을 했다가 진회 사후 재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고향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묵기라는 성씨를 모두 개성(改姓)해버렸고 그 성씨는 현존하지 않는다.[5] 원래 항전파였으나 나중에 악비를 배신했다.[6] 남송의 이심전(李心傳, 1166∼1243)이 남송 초기의 대요를 적은 역사책. 200권. 1127년부터 1166년까지의 40년간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였다.[7] 휘종, 흠종, 고종 등 3조(朝)의 치세를 기록한 책으로 12세기 중의 약 50년간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간의 전쟁과 화평의 교섭관계를 기록하였다. 남송의 서몽신(徐夢莘)이 200여 종의 자료에 입각하여 편년체로 편집한 250권으로 된 저서이다. 1194년에 완성되었다.[8] 宗澤. 1059 ~ 1128. 북송 말의 장군으로, 일명 "강을 건너라!"("過河! 過河!")란 유언으로 유명하다. 남송군을 이끌며 금의 공격을 수없이 막아낸 장군이다. 북벌에 대한 의지를 죽을때까지 버린적이 없던터라 틈만 나면 고종에게 북벌을 간언했으나 고종과 문신들이 북벌은 무리임을 말하며 건의가 항상 묵살당했다. 다나카 요시키는 창룡전에서 해당 고사를 얘기하면서 "제갈량과 더불어 '한 사람의 죽음에 전군이 통곡한' 사례"라며 극찬한 바 있다. 악비 또한 종택에게 발탁받아 휘하에서 활동한 바 있다.[9] 사실 애초에 고종 자신이 주화론자이기도 했다. 상기된 것처럼 악비의 전공이 어느정도 부풀려진 것을 감안하면, 고종 입장에선 송의 멸망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금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꺼림칙하긴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는 고종의 선대였던 휘종이나 흠종이 금에 뒤통수 치다가 결국 포로로 끌려가고, 고종의 후계자였던 효종 역시 북벌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점에서도 어느정도 드러난다. 고종 자신도 황제가 되기 전 잠시지만 금에 포로로 갔던 적이 있었고.[10] 당시 인식에서 영토를 빼앗고 굴욕을 준 철천지원수인 금과 화의하겠다는 주화파는 매국노와 거의 동등한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11] 단, 여기서 원문 언급은 악왕묘가 아닌 악묘로 악비가 아닌 오악(태산, 화산, 숭산, 형산, 항산)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12] 여담이지만, 임진왜란 초기 탄금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신립과 관련해서도 이 비슷한 야사가 전한다.[13] ...였다고는 하나 소설 자체에 병맛스런 전개가 많은편이라 오히려 정사를 뼈대로 하고 적당한 오리지널 요소와 소설의 요소들을 아주 약간 섞었다고 하는게 다 타당하다.[14] 칭기즈 칸이 한세충과 대결을 벌리는데 신분 설정이 훗날 황제가 될 쿠빌라이 칸의 아버지라서 쉴드가 자동으로 쳐지는가 하면, 악비가 죽자 금나라가 침공하는데 악비의 아들의 반격으로 금나라 본토까지 쳐들어가서 항복을 받아낸다는 등등 초월적인 전개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