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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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世忠
(1089 ~ 1151)

'''진만인적'''

송사 한세충 열전에서 왕연의 평가

1. 개요
2. 생애
2.1. 북송시기
2.2. 남송시기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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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나라명장.''' 자는 양신(良臣). 오늘날의 섬서성 연안 출신이다.
악비와 더불어 금나라에 대항했던 송나라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그 활약은 악비에 버금갈 정도이다. 악비, 장준, 유광세와 함께 남송 중흥사장으로 불린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여러 차례 공적을 올렸고 방랍의 난을 진압할 때 장군 왕연에게 진(眞) 만인적(萬人敵)[1]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송사(宋史)>에 의하면 "의를 익히고 재물을 경시하였으며 군을 지키는 것은 엄중하였고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하였다"는 기록처럼 무예와 의리가 뛰어났고 법을 지키며 병사들을 잘 통솔해 당시 백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금나라사묘아리고려척준경과는 동시대의 인물로 VS 놀이에서 가끔 언급되는 인물.

2. 생애



2.1. 북송시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부터 술 마시길 좋아하고 호걸다웠으며 마술(馬術)이 뛰어났고 완력이 강하여 무예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한세충이 군대에 들어가기 전 한 점쟁이가 말하길 한세충이 마땅히 삼공(三公)이 된다 하니, 한세충이 점쟁이가 자신을 모욕한다고 여겨 노하여 그를 때렸다고 하는데 후일 한세충의 활약상이나 출세길을 생각하면 그 점쟁이가 관상을 좀 볼 줄 알았던것 같다.
18세 때부터 군에 임관하였는데, 활을 강하게 당기고 달리면서 활을 쏘니, 삼군(三軍)에서 용감하여 으뜸이 되었다 하였다. 한세충이 군에 임관할 당시 송나라는 서하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18살의 한세충 역시 변경 지대의 은주성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서하 장수는 송나라 군대를 보자 나가서 싸우기보다 성을 굳게 지키는 작전을 세우나 '''한세충이 관문을 부수고 적장을 찾아 목을 벤 뒤 성 밖으로 내던져''' 기세가 오른 다른 송나라 병사들 역시 뒤질새라 성을 타고 올라가 성을 함락했다.
이후 호평령(蒿平嶺) 전투에선 정예군사를 인솔하여 격렬하게 싸우다가 서하군이 포위를 풀고 돌아갔는데 잠시 후에 다시 샛길로 나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을 홀로 거느리며 죽도록 싸우니, 서하군이 물러났다. 이때 한세충이 뒤돌아 보니 한 무사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 물어보았는데 주변에서 그를 서하 국왕 사위인 올위라 하자 재빨리 말을 돌려 기습하여 목을 베어버렸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한세충이 공적을 더한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하여 그에게 포상을 크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실제 그의 무공을 본 병사들은 이를 공평하지 않다 하였다.
이후 1121년에 송나라는 요나라로부터 땅을 되찾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다가 패했는데 한세충은 50여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후방을 막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이에 한세충은 병력을 높은 고지대에 배치시키고, 곧장 적진에 뛰어들어 군기를 든 병사 2명을 사로잡아왔고, 사기가 오른 50명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추격하던 요나라 병사 2천명을 패퇴시켰다.
그러다 송휘종이 문인활동한다고 계속 사고를 터뜨리며 백성들을 못살게 굴자 결국 반란군이 독립국가를 세우는 수준까지 갔던 '방랍의 난'이 발생하는데, 한세충은 이를 진압하는데 분투하고 적군의 본거지를 함락시키며 방랍을 사로잡는 등의 공적을 세워 승절랑으로 승진했다.
송흠종이 즉위하고 금나라가 침공하자 준주에 주둔하던 송관군 수만 명은 바로 붕괴되어 버렸는데 이 와중에 여기에 있었던 한세충은 창 한자루를 휘두르며 수십겹으로 둘러쌓인 금나라 병사들의 진영을 돌파하는가 하면, 자신이 건너고 나서 남아있던 다리에 불을 질러 적의 추격을 잠깐이나마 저지하기도 했다.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에 각지에서 도적, 반란군이 일어나자 1천 병사로 전란중에 갑자기 들고 일어난 산동의 반란군 수만 명을 격파하거나[2] 대담하게 단기필마로 반란군에 들어가서는 "대군이 도착했으니 너희들은 싸우면 죽은 목숨이다. 속히 항복하라!" 고 호통을 쳐서 수천의 병세로 수만의 반란군을 항복시키는 등의 활약을 보여주었다.[3]
이후 금나라와의 싸움에선 조주성에서 주둔했는데 군량이 떨어져 사람들이 달아나자고 했으나 무시하였다, 때마침 폭설이 내렸는데, 한세충은 이를 노려 밤중에, 결사대 3백 명으로써 적의 진영을 공격하니, 금군이 놀라 혼란하였고, 이 와중에 대추장이 창에 맞아 죽는 등 자기들 사이에 서로 몽둥이로 때리고 칼로 찌르다가 급기야 모두 달아났다. 이 정도면 이 인간흉기에게 이런 상황은 그저 예사로운 수준(...).

2.2. 남송시기


송고종 시기 묘부, 유정언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연과 환관을 주살하고 동시에 고종 황제에게 퇴위를 강요한 '명수의 난' 때는 수도인 임안부를 반란군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황제를 구출하는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1128년, 반란군 가운데 금산의 장우와 경동의 이민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러 왔다. 두 무리는 항복하러 왔음에도 무장을 풀지 않고 성밖에 주둔하니 양주성의 민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그러자 한세충이 장우의 군영으로 홀로 들어가 조정에 충성하도록 회유하니 무리들이 따랐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장우의 1만 병력은 모두 한세충에게 예속되었으며 그 동안 겨우 수천밖에 통솔할 수 없던 한세충은 드디어 1만여명의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장군다운 위치에 오른다.
이리하여 1만 군대를 거느린 한세충은 북진하였는데 당시 금나와와의 공방전을 통해 개봉을 지키던 종택은 반란군 중에 세력이 가장 컸던 정진을 설득시켜 개봉 사수전에 투입하였는데 종택은 반란군 우두머리 정진에게 사면과 동시에 경성 도순검사라는 관직을 내린다. 당시 항복한 반란군 수는 수십만에 달했고 완안희윤이 하남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한세충과 정진을 부장으로 삼아 완안희윤군을 공격하게 하니 이를 이 전투를 문가사(文家寺) 전투라고 한다.
당시 금나라군은 남하중에 여러갈래로 쪼개져 있었고 총사 종한도 기병 6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밑에 있던 완안의윤의 군대는 이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문제는 정진이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 이에 한세충의 1만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설상가상으로 정진의 부대는 한세충군을 두고 도주한다(...). 결국 한세충을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하여 포위를 뚫고 개봉으로 살아돌아온 한세충과 그 부하는 수천의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한세충은 개봉으로 돌아오자마자 전장에서 이탈한 정진의 한 부대를 불러 모아 모조리 참해버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진이 한세충을 적반하장으로 죽이려고 하였고(...) 개봉성내에서는 한세충군과 정진군 사이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며칠간 벌어지게 된다.
패전으로 인한 부대의 심각한 손실 및 한세충 자신의 부상, 그리고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인해 한세충은 병력을 이끌고 개봉성에서 나가 버리고 곧 고종의 소환 명령으로 남하하게 되는데, 이후 정진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다.
이후 회양에 주둔하던 한세충은 산동의 병력과 연합하여 복주를 구원하란 명을 받게 되고 복주로 향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금나라 총사령관 종한이 정예병 1만을 이끌고 고종이 있는 양주를 급습하게 된다. 한세충과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종한과의 첫 대전이었다. 금의 최정예 병과 맞붙은 한세충은 중과부적이라 여겨 야밤에 회군을 단행하다가 목양에서 군이 전멸당하였고 한세충은 염성으로 도주하게 되며 이 전투로 한세충을 보좌하던 전 반란군 장우는 전사한다. 이에 종한은 이 기세를 틈타 회양에 기병 3천을 이끌고 들어가 팽성을 함락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한세충 일생일대의 패전은 끝났다.
이후에도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수십년동안 전쟁을 치르며 많은 공적을 쌓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황천탕 전투.
1129년 10월 완안아골타의 4남인 완안종필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송군을 격파하면서 남하, 결국 장강을 건너 임안부를 공격하자 고종은 '''약탈이 끝나서 금군이 떠난 후에 임안부로 돌아오겠다'''는 이뭐병 같은 말을 하고서는 해상으로 도망쳤다.이에 금군은 미친듯이 약탈하고 다음해인 1130년 초에 의기양양하게 북쪽으로 되돌아갔는데, 그 귀로길에 기다린 것은 바로 한세충과 그의 아내 양홍옥이 이끄는 정예병인 한가군 8천명이었다. 한세충 역시 각지에서 송군이 격파될 때 진강에서 강음으로 후퇴했는데 금군이 되돌아갈 때 금군을 격파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한세충은 친히 함대를 거느리고 진강으로 달려가 먼저 진을 치고 장강 남안에서 군사를 수송하기 위해 움직이던 금나라 선단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또 미리 매복해있던 한가군 역시 금군을 패배시키자 완안종필은 기일을 정해 회전을 제의했고 한세충은 이를 받아들여 격돌했는데 이때 한세충의 부인 양홍옥이 십여장 위 망루에서 화살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친히 북을 두드리며 지휘하였다. 싸움은 십여차례나 계속 이어졌고 결국 금군은 배가 뒤집히고 사람이 빠져 군대가 흐트러져 도강은 실패했다.
패배하여 도하가 불가능해진 금군은 그동안 약탈한 물건을 돌려주며 돌아가고자 했지만 한세충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편 북쪽의 금군이 완안종필을 구원하려고 남쪽으로 내려왔고 결국 황천탕에서 48일간 송군의 포위, 대치 국면이 이어졌다. 한세충은 바다 군함으로 박금산 밑으로 나아가 미리 강 속에 많은 쇠사슬을 둘러, 금나라 병사가 탄 배는 차례차례 쇠사슬에 의해 침몰해 나갔다. 이에 완안종필은 할 수 없이 한세충한테 몇차례나 화친을 청했으나 한세충의 대답은 "그러면 너희가 잡아간 이궁(휘종, 흠종)을 돌려주고 송나라의 강토를 회복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협상은 불가.
결국 완안종필은 부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물길을 뚫고 달아난 후 강 수면이 잠잠한 틈을 타서 작은 배로 강에 나가게 하였다. 그는 큰 해선이 풍력을 얻지 못해 운행이 느리고 작은 배는 바람이 없어 질풍같이 달릴 수 있는 것을 보고 활수들을 파견하여 불화살을 쏘아 대해선의 장막을 맹렬히 공격하게 하였는데 삽시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리우고 완안종필은 장수 손세순과 엄윤을 전사시키고 탈출에 성공한다. 이에 한세충은 남은 군대를 거두어 진강으로 돌아왔다. 비록 완안종필은 놓쳤지만 8천의 병사로 10만 대군을 격파한 큰 승리였다.
이후에도 한세충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듭 공적을 세워 마침내는 추밀사, 함안군왕, 진남절도사, 무안절도사, 영국절도사 등을 겸하기에 이르렀고 악비와 더불어 송나라 군대의 기둥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지키는 초주(楚州) 지역은 10여년간 금인들이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다.[4] 그러다 군권을 빼앗기고 전우 악비가 재상 진회의 모함에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진회에게 격렬하게 항의[5]하였으나 결국 악비는 처형당했고 한세충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서호에서 은둔하다 결국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6]
그의 활약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송사 열전은 1권에 보통 6~8명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는데, 한세충의 경우 공적이 너무나 많아 1권 분량을 혼자서 다 채우고 있을 정도다.

3. 미디어 믹스


김용사조영웅전에서는 직접 등장은 하지 않지만 그가 지었다는 시가 등장한다. 곽정이 그걸 보고 '잘은 모르겠지만 충의와 사내다움이 넘쳐나네염' 이라고 평가를 하며 구국의 충신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만화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 악비와는 동문으로 의원인 메이의 조부, 메이의 숙조부에게 의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의술, 명성에 흠모해 속가제자가 되었으며, 인도에서 의학을 수행하고 있던 메이의 숙조부를 찾아갔다. 그 덕분에 좀비 상태로 썩어가던 동문인 악비를 침을 통해 스승이 되돌릴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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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3

삼국지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삼국지 13 PK에서 고대무장으로 추가되었다. 2017년 3월 23일 추가된 DLC로 구할수 있는데 공짜니까 부담없이 사용하자.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93/98/76/42로 준수한 능력치를 부여 받았다. 그 장비와 동일한 무력에 3높은 통솔력, 70대 중반의 높은 지력을 부여 받았으며, 전법은 본인의 명성에 걸맞게 장비와 동일한 만인적[7]
전투계통 특기로는 위풍5/분전8/연전8/견수5/수련9/일기7/호걸9를 부여받았는데, 신속과 공성이 아예 1도 없는건 좀 뼈아프다. 신속의 경우엔 같이 등장하는 아내 양홍옥이 무려 신속 5이므로 인연 맺고 부장으로 붙여줘도 좋다. 양홍옥의 전법을 쓰지 못하는 점은 아쉽지만, 사제 트레이너를 사용하여 부장전법을 사용하는것도 한 방법이다.
병과는 창병/기병/궁병 순으로 S/A/A를 부여받았는데, 이번 작의 병과가 짜단 걸 생각하면 매우 준수하게 받은 편으로 어느 병종이든 중신특성을 받아 S를 찍어줄 수 있는 범용성을 갖추었다.
전수특기는 호걸, 중신특성은 호단맹진이며, 이상위명은 만부부당으로 어째 관우와 장비를 적절히 섞어 놓은 것 같은 느낌.[8] 다만, 그 악비가 병종과 특기 양측에서 아예 역대급 스탯을 부여받아버리는 바람에, 둘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한세충이 심하게 처져 보인다.
이번 편엔 아내 양홍옥과 함께 참전했는데, 당혹스럽게도 인간관계가 따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서로 알지 못하는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 대신 숨겨진 속성으로 부부 모두 상성이 50이며, 75(이는 유비 세력의 상성이기도 하다)인 악비와도 가깝다.

[1] 이 평가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장수는 항우, 관우, 장비 정도이며 야사까지 포함하면 여포까지 포함된다. 실제로 중국사에서 만인지적으로 언급되는게 여포를 포함한 이다섯이며 많은 중국인들도 이다섯명이 만인지적인데에는 거의 동의하는편 단 이다섯명중 한세충이 가장 존재감이 미비하다.[2] 아예 달아나는 부대는 후방의 부대가 초살하라고 명령까지 하면서 배수진을 친 끝에 얻은 승리였다.[3] 그렇게 호통을 쳐서 반란군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킨 다음엔 태연하게 이들과 같이 고기뜯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 부대는 항복하고 실제 한세충의 군세를 보고 나서야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병력인 것을 알고 후회했다고.[4] 사실 송사 악비전의 논란에 가려져서 그렇지, 송사 한세충전도 오류가 있는 부분이 있다. 송사 한세충 열전에 따르면 한세충이 무녕안화군절도사(武甯安化軍節度使), 경동회동로선무처치사(京東淮東路宣撫處置使)로 초주(楚州)에 관청을 세운것은(置司楚州) 송고종 소흥 6년인 1136년의 일이고 이때 한세충이 풀숲(가시나무)을 헤쳐 군부를 세우고 병사들과 함께 요역을 했다고 나오는데 정작 소흥 11년인 1141년에 초주(楚州)에 한세충이 있은지 10여년에 병사는 근 3만명에 금인들이 감히 이곳을 범하지 못했다고 나와있다. 불과 초주에 온지 5년밖에 안 되었는데 갑자기 기간이 2배로 뻥튀기 된 것이다.[5] 이 때 한세충이 악비가 모반을 한다는 증거를 대라고 하자 진회는 우물쭈물하며 막수유(莫須有, 있을 지도 모른다)라 말했고 한세충은 한탄하며 "그 세 글자로는 천하를 납득시킬 수 없다"고 했다.[6] 일설에는 당시에 아내인 양홍옥과 같이 은둔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선 해당 문서를 참고.[7] 이로써 만인적도 고대무장 포함 유일한 전법은 아니게 되었다. 관우의 군신은 고대무장 백기가 공유[8] 전법과 중신특성은 장비에게서, 전수특기와 이상위명은 관우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