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

 




남송 4대 권신
진회
한탁주
사미원
가사도
인물화.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남송의 권신
秦檜 | 진회
'''

[image]
악비의 묘, 악왕묘에 있는 진회 부부.[1]
'''시호'''
충헌(忠獻) → 유추(謬醜) → 유한(謬狠)
'''이름'''
진회(秦檜)
''''''
회지(會之)
'''생몰'''
1090년 ~ 1155년
'''주군'''
송휘종
송흠종
송고종
'''국적'''
북송(北宋) → 남송(南宋)
1. 개요
2. 생애
3. 자손
4. 평가
4.1. 비판론
4.2. 옹호론
4.3. 조선에서의 평가
4.4. 현대 중국에서의 평가
5. 대중문화 속의 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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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莫須有"'''(막수유)

아마 있을지도 모르오.[2]


1. 개요


秦檜. 1090년 ~ 1155년. 송의 재상이자 중국에서 간신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당시 주전파의 대표론자였던 악비와 정반대인 주화파의 대표론자였다.[3] 악비를 모함하고 죽였다 하여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놈이 되었지만, 알고보면 외교가와 행정 관료로 어쨌든 남송을 살리고 조정을 안정시킨 공도 있어 현대 들어선 약간의 재평가도 받고 있다. 후술 항목 참조.

2. 생애


1090년 가난한 현령집에서 태어난 흙수저인 진회는 1115년 과거에 합격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1127년 북송과 같이 요를 격파한 금이 북송이 약속한 세폐를 바치지 않자 대군을 이끌고 개봉을 포위한 후 약속한 세폐와 북송의 북방 영토 3진을 위약금으로 요구하였다. 당연히 송휘종과 조정은 주전론을 선택하려고하자 진회는 휘종과 흠종, 그리고 조정에 다음 같은 장계를 올린다.

진회: "금나라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3진으로 만족하지 않고 3진을 받으면 다음에는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저들에게 약속한 세폐와 영토 3진 중 1진을 주어 시간을 벌고 그 시간 안에 우리의 방위를 굳건히 한 다음, 백관들과 논의하여 금나라와의 관계를 정하시고 그 전까진 폐하는 금의 사신을 직접 대면하지 말고 전각 밖에서 신하를 통해 접견하소서." 하였다.[4]

그러나 이미 주전론을 선택한 북송은 진회의 장계를 기각하고 전쟁을 선택하였고 송의 시간 끌기를 눈치 챈 금은 바로 송을 공격한다. 문제는 송휘종과 흠종, 주전파 신료들이 결정한 전쟁이란 것이 징병하고 재물을 풀어 병사를 사기 진작하는 방법이 아니라, '''곽경이라는 사이비 도사에게 재물 천금을 주고 어린 아이 7777명을 육갑신병이라는 신병으로 변신시켜 금군을 물리친다는 황당한 방법'''이었다는 것. 곽경이 엉터리 제사를 지내는 동안 송조정과 황실은 술을 마시며 방비를 게을리 하였다. 그러나 곽경은 금군이 개봉부 근처까지 진군하여 그 모습을 보이자 재물을 갖고 도주하였고 뒤늦게 이를 안 송은 혼란에 빠진다.
결국 개봉부가 금군에 함락되고 송황제마저 포로로 잡히는 정강의 변이 터지자, 진회 역시 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1130년 탈출해 이후 남송고종을 섬겼다. 처음엔 진회를 금의 첩자로 본 남송 조정에 의심도 받았으나, 진회가 주화론을 주장하며 악비 같은 군벌을 견제하자, 정통성이 부족하던 고종은 진회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해 귀부한 것으로 보고 총애하여 돌아온 다음 해 진회를 재상으로 임명한다. 1142년, 결국 진회는 금과의 화평교섭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문제는 그러고 죽을 때까지 공포정치(...)를 펼쳤다는 것인데, 특히 앞선 "막수유"에서 보듯 주전파의 대표자 악비를 싫어해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사실상 사법살인한 셈.
진회는 19년간이나 재상 자리에 있었고 죽은 뒤엔 성대한 장례식도 치뤘다. 그래도 그를 노리는 사람은 있었던지, 한번은 시전이라는 사람이 입궐하는 진회를 암살하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빗맞았고, 진회는 놀란 말에서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부턴 경비병 50여 명과 같이 다녔다고 한다. 진회 사후 그의 일가 권력은 고종의 양자 송효종이 강력하게 권력승계를 막으면서 사라졌으며, 훗날 발견된 그의 묘를 보면 도굴 흔적이 있는 듯 하다.
한편, 진회가 어떻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는지는 논란이 좀 있는 편이다. 전통적으로는 진회가 실권을 휘두른 권신이라는 관점이 주류였고, 송고종은 기껏해야 간신에게 농락당한 암군이라는 이미지였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 진회는 송고종이 권력 유지를 위해 내세운 총알받이에 꼭두각시였고, 악비 모함 사건 등의 진정한 흑막은 송고종이다."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진회도 분명 능동적으로 권력을 노렸고 송고종도 후술되어있듯 진회를 경계해 '신에 칼이 들어있는 우려'[5]를 겪었다는 등 반론이 있으나, 이에 대해 송고종이 진회가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악비 뿐만 아니라 악비의 양자 악운과 그 주변 사람들까지 강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이를 실행하는 기록이 있는 등 재반론 증거도 있다.

3. 자손


진회는 아내 왕씨 사이에서는 자손이 없어 조카 진희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인과응보라면 인과응보인 셈이다. 진희는 양아버지의 강력한 힘과 뇌물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진희의 아들이자 진회의 양손자가 진훈인데 진회는 이 수양손자를 꽤나 총애하였는지, 시험출제 관리를 포섭하여 진훈을 장원으로 조작시켰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차석으로 밀린 사람이 방옹(放翁: 방자한 늙은이란 뜻)이란 호로 많은 명시를 남긴 시인 '육유'였다.
진회는 육유를 싫어하여 그를 차석으로 내리고도 모자라 육유가 얼마 되지 않은 수도에서의 관료 생활을 하는 내내 그를 괴롭혔으며, 나중에는 아예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이때문에 육유는 관료생활 대부분을 한직으로서 지방을 떠돌아야 했고 은퇴 뒤에는 야인으로 초야에 묻혀 살아야 했다. 다만 불행 중 다행으로 육유는 그만큼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고, 무려 1만 수에 달하는 시를 지어 중국사 최고의 다작왕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 중국의 누구도 진회의 자손이라 자칭하는 자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은 끊어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엉뚱하게도 1988년 홍콩에 거주하는 언론인 프랭크 칭(Frank Ching)이 진회와 관련이 있다고 자칭하였다. 정확히는, 족보상으로는 진회의 자손이 아니지만 자기의 조상을 옹정제가 진회의 자손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
사실 진회가 방계 후손이 없는 이유는 송고종이 죽은후 진희를 미워하고 악비를 사랑하던 송효종이 진회 후손들의 관직길을 틀어막는 걸 시작으로 아예 진회의 죄를 그 가족에게 물어서 일가를 전부 몰살시켰기 때문. 이렇게 후손들은 효종의 손에 거의 목숨을 잃고 이후 악비가 악왕으로 추대되면서 악비를 사랑하는 황제나 남송 백성들에게 맞아 죽을 확률이 컸기 때문에 일부러 숨어산 것도 있다.

4. 평가


짐은 오늘부터 신발 속에 칼을 감추지 않아도 되겠구나!

ㅡ 진회가 죽은 날 고종이 내뱉은 말[6]


4.1. 비판론


진회는 한족 기준에선 오랑캐과 대항해 싸운 유능한 장수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이후에도 공포정치를 펼쳐 반대파를 숙청해 큰 비판을 받았다. 항목 맨 위의 사진처럼 악왕묘 앞에 진회가 부인 왕씨와 함께 무릎을 꿇은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아직도 악비를 참배하는 사람들은 진회의 동상에 침을 뱉는다고 한다. 지금은 침을 뱉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아직도 그렇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의 지식인이었던 왕부지는 진회를 가사도 이상으로 위험한 최악의 간신으로 평가했고, 청 건륭제 때 진회의 후손이었던 진대사(자는 간천)는 과거에 급제하고 금의환향하다가 악비 무덤 앞의 먼 조상 진회 부부상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송 왕조 이후로 "회"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악비의 무덤 앞에서 "진"이라는 성 때문에 참담해 하는구나!

이 때문에 아직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진회를 도운 묵기설(万俟卨, 흔히 만사설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여기서 万俟는 만사가 아닌 墨棋(mo qi)와 같은 발음으로 묵기라 읽는다)이라는 간신[7] 역시 그의 고향에서 그의 존재를 부끄럽게 여겨 묵기라는 성씨를 모두 개성(改姓)해버렸고, 묵기라는 성씨는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인들 사이엔 진회를 미워하는 감정이 드러나는 몇몇 속담까지 있는데, "진회도 친구 셋은 있다.", "칼을 천 번 맞을지언정 진회와 사귀지 않는다." 같은 것이 그것이다. 또한 진회 부부를 본따 만든 음식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유조 문서를 참조. 이름에서부터 속담에다, 사람이 매일 먹는 음식으로까지 이렇게 까는 것을 보면 진회에 대해 얼마나 악명이 높은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오늘날 악비의 명성을 만든게 아이러니하게도 '''진회 자신'''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악비가 무리한 북벌을 감행하려했다 비쳐졌다 한들, 옛 수도 개봉을 비롯한 북쪽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명분론 역시 남송에서 팽배했던 것은 사실인데 '''진회는 이들을 진심으로 설득하는 대신 그냥 힘으로 찍어누르기 바빴다'''. 오죽하면 진회를 두둔해 함께 욕을 먹는 송고종조차도 진회의 '남인귀남, 북인귀북(남쪽 사람은 남쪽으로 돌아가고 북쪽 사람은 북쪽으로 돌아간다)'이라는 현상유지 주장엔 "그렇다면 짐은 북인인데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을 정도였다. 당시 종택 같은 사람은 끝까지 북쪽 땅 사수를 외치며 '강을 건너라!'를 유언으로 남겼을 마당이니, 그 밑에 있던 악비, 한세충 같은 이들이 그런 기조를 내세우는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물론 조정 입장에선 이렇게 병권을 잡고 있는 명장들이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웠을 수 있다 치지만, 그렇다고 조국에 헌신한 장수들의 군권을 하루아침에 빼앗고, 군권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좌천이나 파직 심지어 귀양도 아닌 별 다른 명분도 없이 '''죽여버린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장 한세충악비가 죽을 이유를 대라고 외쳤을 때 진회가 한 말은 고작 '''막수유(아마 있을지도 모른다)'''였다. 한세충은 송고종이 반란군에게 위협당할 때 그걸 홀홀단신으로 진압한 사람이자 그가 지키는 지역은 감히 금군도 얼씬 못했다고 전해지는 명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보기에도 진회는 '''천하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쳤고, 이것이 오늘날 진회의 악명을 키운 꼴이 되고야 만 것이다.
이러다보니 학계와 달리 일반 대중들의 진회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예전과 비슷하며 악왕묘는 그대로이다.

4.2. 옹호론


진회가 큰 잘못들을 저질렀으나 그렇다고 그를 무조건 폄하할 필요는 없다. 당시의 송은 경제력에 비해 군사력은 영 부실했는데, 이를 고려하지 않고 대책없는 주전론을 내세워[8] 에게 발리느니 차라리 돈을 내주며 화평을 유지하는게 단기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었다. 장기적인 군사력 강화를 생각한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게다가 진회 본인이 포로 출신이었으니 멸망 크리+비참한 생활로 이어질 수 있는 주전론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인식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진회가 본인 목숨에 그리 연연한 것도 아니어서, 금 태종이 북송 영토에 송의 재상인 장방창을 황제로 삼고 "초(楚)"라는 괴뢰국을 세우려고 하자 이를 목숨 걸고 반대하여 분노한 금태종에게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진회: 장방창은 개봉이 함락당하는 순간까지 술만 마신 위인인데 그런 자를 어찌 황제로 모십니까? 또한 중원의 황성은 송의 조씨 뿐입니다.

금태종: 당장 저자의 목을 잘라 효수하라.

금의 중신: 지금 폐하가 저자를 죽이면 폐하는 송의 충신을 죽인 폭군이 될 것이고, 송 백성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저자가 노리는 것이 그것이니 저자를 본국으로 압송하시옵소서.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당시 상황은 금나라송나라 황성(皇姓)인 조씨 대신 다른 성씨로 허수아비 한족 왕조를 세우려고 하는 것을 포로로 잡혀있던 진회가 금나라 황제의 면상 앞에서 크게 따져서 저지한 것으로, 포로로 잡혀있던 황족이나 송의 신하들은 장방창의 초황제 등극에 지지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유일하게 진회만이 '''"황성은 오직 송의 조씨뿐입니다."''' 라고 지지 서명을 거절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진회도 목숨을 건 것이었고, 금태종이 노해 진회를 죽이려고 하였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금태종의 면상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 보면 진회도 보통 배짱은 아니었던 셈.
금나라는 이런 모습을 좋게 보아 오히려 진회를 살려주고 포로로 끌고 간다. 포로가 된 진회는 금의 세력가와 교류하면서[9] 금나라가 송나라에 비해 문화적, 경제적으론 많이 부족하나 군사력만은 송나라를 능가하니 지금 송의 허약한 군사력으로는 금과 전면전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진회는 주화론을 더욱 강하게 주장하였고 악비한세충이 주장한 금과의 전면전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니 간신이나 그냥 공포 정치를 펼친 포악한 정치가였다고 하면 모를까 매국노라 보긴 좀 애매하다는 것. 적어도 송을 들어다가 금에 바쳐서 부귀를 누리지는 않았으니까.
매국노라는 말 자체가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는 뜻인데 나라를 팔아먹었다기엔 이미 그 전에 송은 반이 아작나있었고, 남은 반은 그래도 건사했다. 애초에 국토 절반을 잃어버린 것은 취미 생활로 국가를 파탄낸 송 휘종의 잘못이지 진회의 잘못이 아니다. 또한 진회의 공포정치도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정강의 변과 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10] 남송이 일단은 안정되는데 어느정도 도움을 줬다는 것이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참고로 이런 진회에게도 나름 인간미(?)가 느껴지는 일화가 있는데, 진회가 죽기 얼마 전 한 가난한 선비가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받지 못하자 진회의 필체를 모방하여 벼슬을 얻고자 하였다. 하지만 진회와 친분이 있던 한 관리가 이를 눈치채고 그 선비를 감옥에 가두고 진회에게 보고하니 진회가 그 선비를 풀어주고 고위급 벼슬을 내리면서 한 말이 "모두가 나의 권력을 두려워하는데 너는 대담하게 나의 필체를 흉내내니 보통 배짱이 아니다. 너의 배짱이 마음에 드는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4.3. 조선에서의 평가


중국에서도 까이는 판국이니 중화권 영향을 많이 받은 조선에서도 당연히 까였다. 다만 진회가 본격적으로 욕을 먹기 시작한 것은 조선 성종 때부터로, 조선초는 오히려 진회보단 남송을 멸망시킨 가사도를 더 악명 높은 간신배로 꼽았다.
하여튼 성종 때 동국통감에선 "그 충의(忠義)로운 속마음은 곧바로 빙상(氷霜)·일월(日月)과 더불어 광채를 다툴 만합니다. 아! 주운이 배척했던 자는 장우(張禹)였고, 호전(胡銓)이 논박했던 자는 진회(秦檜)였는데, 지금 신돈은 나라에 두 임금 행세를 하면서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마음대로 부렸으니, 그 기세의 대단함이 어찌 장우·진회의 정도에만 그쳤겠습니까?"라면서 신돈을 까는데 진회가 쓰였다.
성종실록에도 거론이 되었는데 내용에 보면 '''노기와 진회의 간계가 마침내 나라를 그르치는데 이르렀는데도, 당시의 인주가 이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하고 이를 갈게 합니다'''.라고 했다.
이순신도 난중일기에서 '유몽인(어우야담의 저자)'을 진회로 빗대어 비판한 부분이 있다. 당시 유몽인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이순신 관할인 전라도의 지방관들을 평가하고 수군의 징발 문제를 비판하였는데 이순신은 이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중일기에 이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전략)'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눈앞의 임시 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말만 듣고서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무목(악비)에 대한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갑오년(1594년) 일기 2월 16일 내용

그 외에도 유성룡도 북인세력의 탄핵을 받아 실각할 때, 진회와 같다는 오명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유성룡은 진회와 다르게 누구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노력했던 충신이자 명재상이었다.
또한 최명길도 주화를 주장하다가 김상헌 등 척화파에 의해서 진회와 같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진회가 간신짓을 하거나 포악한 정치를 펼치면서 악비를 모함한 것과 다르게 최명길은 누구보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으며 또한 조선을 진심으로 위한 충신이었고 또한 청렴하고 선정을 펼친 명재상이었다. 또한 최명길은 진회와 다르게 척화파인 김상헌의 생각도 옳다고 했다.

4.4. 현대 중국에서의 평가


중화민족 개념을 추구해 소수민족과 한족이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현대 중국 정부에서 2003년에 악비를 격하하고 진회를 민족 화합의 영웅으로 띄우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중국 안에서조차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서, 결국 당국에서 주장을 철회했다.
출처출처2

5. 대중문화 속의 진회


레진코믹스웹툰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 악역으로 등장하고 악비, 한세충과는 동문으로 앞선 둘과는 반대로 메이의 조부와 숙조부에게 의술을 배웠다고 하며, 어머니가 임신중독증으로 사망하면서 그 두 사람의 스승에게 거두어졌다.
그 두 명의 스승에게 총애를 받던 애제자였지만 성격이 포악해서 파문당했기에 악비와 한세충이 그 때는 진회를 몰랐다고 하며, 3년 만에 모든 의학서를 통달한 수재였지만 생명의 비밀을 알기 위해 사제들의 몸을 해부하는 등 각종 위험한 연구를 하면서 파문되었다. 메이의 조부는 그를 죽이려 했지만 진회를 거두어들인 메이의 숙조부가 차마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침을 통해 혈을 파괴해 의학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수로 끝냈으며, 스승이 가지고 있던 소문의 침이 생명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금황구침에 눈독들이게 되었다.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면서 북벌을 주장하는 악비와 대립하는데, 궁궐에서 퇴청하자 악비와 신경전을 벌여 금을 자극하지 말라면서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라면서 금황구침의 힘을 이용해서 악비의 목을 졸랐다.
다음날에 악비를 9족과 함께 처형하도록 만들고 죽은 사람을 3일간 살릴 수 있는 구황지침 9개를 모두 손에 넣기 위해 각종 악행을 벌이는데, 스승 중 한 사람인 메이의 조부, 스승의 아들이자 사형인 장원경 등을 찾아가 자신에게 협력하도록 했다가 거절당하자 구침지희[11]를 하도록 한 후에 성공하지 못하자 살해했다.
메이, 메이린을 자신의 아래에 거둔 후에 메이린에게 구황지침을 찔러 구황지침에서 나오는 병기를 사용하도록 이용하면서 구황지침을 주고 자신의 허락없이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메이, 메이린 등이 자신의 허락없이 구황지침을 사용한 것을 알고 부하들을 시켜 메이의 아버지 시체를 태우게 했다.
송고종도 시체로 만들어놓고 구황지침을 통해 일부러 살려놓아 실질적으로 송나라를 장악했으며, 구황지침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병기로 만들어놓는 등 실험을 행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막판에 악비,한세충,진회의 사조이자 주인공 엔란에게 패하여 참수된다.
중국 드라마 정충악비에도 등장하는데, 정강의 변으로 오국성에 끌려가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뜻을 버리지 않으며 총명한 재주로 금나라 황족을 구워삶고 동시에 끌려온 송황족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면서 금과 송 양쪽에 호감을 사는 모습을 보이는 등 유능하면서도 간사한 면을 보인다. 마침내 송에 귀국하는데 그 와중에도 송황태후의 친필서신을 챙겨 황제의 신임을 얻고 주화론을 펼치며 권력을 장악하는 모습은 시청자를 소름 끼치게 한다. 마침내 최대의 정적 악비를 제거하지만 "너도 폐하의 장기말"이라는 악비의 조롱에 악몽에 시달리는 삶을 사는 것으로 끝난다. 의외로 정처 왕씨와 금술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 여자도 욕심은 많아서 진회 못지않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금나라 압송 과정에서도 삶의 의지를 포기한 진회를 다독이고 썩은 밥을 먹으면서 진회의 삶의 의지와 야망을 다시 불태우는 독한 여자로 나온다.
사조영웅전에선 우리가 60년 일찍 태어났으면 지금쯤 진회의 살을 술안주로 썼을거라는 곽소천과 양철심에게 구처기가 진짜 원흉은 송고종이라고 하는걸로 언급된다.
[1] 오른쪽이 진회로, 왼쪽이 진회의 부인 왕씨이다. 참고로 아내도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냐 하면, 진회마저도 악비 죽이기를 주저하자, 왕씨가 그냥 묻지마 처형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전해지기 때문. 덕분에 남편과 동급으로 취급받아 저런 꼴이다. 관광객들이 하도 침을 많이 뱉어서 왼쪽 위에 제발 침 좀 뱉지 말라는 안내판이 있다.[2] 진회를 대표하는 명언으로 악비가 반역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장군 한세충에게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 기가 막힌 한세충은 '''"고작 그 세 글자로 천하가 납득하겠소이까?!"'''라고 격하게 항변했지만 악비의 처형을 막을 수는 없었다.[3] 다만 그렇다고 주화파 자체가 잘못됐다는건 아니다. 진회야 다른 과오도 있으니 그렇다치더라도, 청의 침입 당시 대표적 주화파였던 조선의 최명길 같은 경우 역적으로 몰리기 딱 좋은 컨셉이었음에도 오히려 지금까지 고평가받는 인물이다.[4] 물론 진회도 원칙적으론 주전파였으나, 이 내용을 보면 일단 금나라를 달래고 방비를 굳건히 한 다음에 싸우자는 것으로 보인다.[5] '신에 칼이 들어있는 것처럼 불안하다', 혹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신에 칼을 숨겨야 했다'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6] 진회를 기용한 그조차 진회의 권세가 부담스러웠다는 것을 시사한다. 진회가 죽은지 두달 후, 그의 인척들은 숙청되었다.[7] 후에 일을 잘못해 쫒겨나 유배생활을 했다가 진회 사후 재상으로 돌아왔다.[8] 정강의 변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도 송의 약한 군사력을 생각하지 않고 금나라와 전쟁을 벌인 탓이 컸다. 사실 진회도 알고보면 주전론파였으나 어디까지나 시간을 번 다음 철저한 준비를 하고 싸우자는 뜻이었지 정강의 변처럼 사기꾼에게 속아서 멍청하게 싸우다가 털리자는 뜻은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악비와 한세충을 포함한 몇 군데를 제외하고 송은 금과의 전선에서 밀리는 형편이었다.[9] 금나라에 끌려간 송의 황족이나 포로들이 비인격적 대우를 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당시 한족 지식인들의 프로파간다가 섞인 과장된 얘기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대우를 떠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순간에 몰락한 것은 맞지만. 자세한건 정강의 변 참조.[10] 정강의 변 이전에도 송나라는 전국적으로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이 갑자기 중앙정권인 송 황실이 무너졌다고 해서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서 금나라와 싸울 이유는 더 없었고 말이다. 당연히 정강의 변 이후 남송 영토 안에도 많은 반란 세력이 잠재하고 있었다.[11] 9개의 침을 동물에게 몸이나 내장 등을 피해서 찔러넣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