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윈 파월 허블
1. 소개
미국의 천문학자. 천문학에 관심있다면 허블이라는 이름을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여러모로 천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허블 우주 망원경도 천문학에서 워낙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2. 일생
미주리주 마시필드 출생이다. 시카고 대학교 법과 졸업 후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시켜서 변호사로 일하였으나 천문학에 흥미를 느껴, 1914년부터 여키스천문대에서 천체관측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애국심도 투철했는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빠르게 박사과정을 끝내고 참전하여 유럽 원정군에 동참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이 끝난 1919년에는 윌슨산천문대의 연구원이 되었다.
2.1. 윌슨산 천문대에서
허블이 윌슨산 천문대에서 만난 상사가 할로 섀플리였다. 둘은 만나자마자 허블의 건방진 태도에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1] 거기다 둘은 성격도 정반대여서 섀플리는 반전평화주의자였던 반면, 허블은 세계 대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었다. 거기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늘상 군복을 고집하는데다가 파이프를 피우는 탓에 섀플리가 수도 없이 주의를 줬다고 한다. 하지만 단 한번도 듣지는 않았다.
섀플리가 2년만에 하버드로 떠나는 바람에 이 관계는 딱히 오래 가지는 않았다.
거기다 섀플리는 우리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주장했지만, 허블은 이 주장을 철저히 무너뜨릴 근거를 발견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더욱더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물론 이 발견 전부터 이론으로도 으르릉댔다고 한다.
3. 업적
쉽게 말해 인류의 우주관을 10년 사이에 두 번이나 뒤바꾼 인물이다. 우주팽창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가모프가 발표한 빅뱅이론에 많은 뒷받침이 되었다.
3.1. 외부 은하의 발견
당시 천문학계는 외부 은하의 존재 여부를 놓고 대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할로 섀플리는 우주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소위 '''나선 성운'''[2] 이라 불리는 천체들이 우리 은하 내에 있는 천체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에 대항하는 헤버 커티스는 임마누엘 칸트의 '섬 우주 가설'에서 출발한 외부 은하 가설을 주장했다. 이 아이디어는 우주의 전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우리 은하가 우주에 퍼져 있는 수많은 은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양측 주장에는 각각 그럴듯한 근거가 존재했기 때문에 논쟁을 결판내기 위해서는 실제 거리를 측정하면 될 일이었다. 윌슨산 천문대에 근무하던 허블은 M31 안드로메다 성운을 관측하던 도중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측정된 거리는 약 150만 광년. 현대의 측정 결과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우리 은하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안드로메다 성운이 외부 은하라는 것은 확실히 밝혀진 셈이 되었다. 이 발견으로 에드윈 허블은 일약 대스타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천문학의 흐름을 유럽 위주가 아닌 미국 위주로 돌려세운 시작점이 되는 사건.
허블의 발견으로 인해 대논쟁은 결국 커티스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과거 토성까지가 우주라고 생각하던 시대에서 다시 명왕성, 그리고 우리 은하 내의 일부에서 다시 우리 은하 밖의 또다른 우주로 인식이 확장 된 인류 전체의 대사건이다. 이후 허블은 계속해서 관측을 거듭하던 중, 은하들의 형태에 규칙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허블 분류를 고안하게 된다. 다만 처음 허블은 이 분류를 은하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현재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3.2. 우주 팽창을 발견하다
[image]
허블이 발표한 유명한 거리-속도 그래프. 허블-슬라이퍼 도표로도 알려져 있다.
대스타로 떠오른 후 허블은 은하의 분광을 연구하게 된다. 그런데 은하의 스펙트럼에서 거의 대부분의 은하에서 적색편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3] 이를 바탕으로 은하들이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거리 측정을 통해 더 먼 은하일수록 적색편이가 더 심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밝혀내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허블은 허블-르메트르 법칙을 발표하게 된다. 우주는 영원하고, 정지해 있다는 정적 우주론이 지배하던 학계는 이 발견으로 급변했다. 우주상수를 개발했던 아인슈타인은 직접 허블이 일하는 윌슨 산 천문대에 방문하여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후 우주론은 조지 가모프의 빅뱅 우주론과 프레드 호일의 정상우주론의 양강 체제에 돌입했다.
허블이 최초로 예측한 허블 상수 값은 약 200 정도로 우리 우주의 나이는 약 50억 년 정도라고 예상되었다. 이후 계속 허블 상수가 300~500 정도로 측정되면서 우주의 나이는 30억 년 이하로 낮아졌고 지구의 나이보다도 우주의 나이가 적은 모순이 발생했다. 이 시기의 오차는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한 거리 측정 방법을 잘못 이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 컸다. 현재 재계산된 허블 상수는 약 68km/s/Mpc이며 이를 토대로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면 대략 137억 8천만년 정도가 된다. 단지 우주미세구조상수가 137.얼마라는 사실은 우연일지는 모르겠지만..
3.2.1. 진짜 발견자인가?
우주 팽창의 발견자가 허블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이는 현대까지도 천문학사에서 식지 않는 떡밥이기도 하다.
- 베스토 슬라이퍼
같은 관측천문학자였던 베스토 슬라이퍼와의 관계 또한 논란거리이다.
허블은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은하들까지의 실제 거리를 쟀을 뿐 은하들의 적색편이는 슬라이퍼가 관측한 데이터를 사용했다. 즉, 실제로 '은하들이 멀어지는 현상'을 최초로 발견한 학자는 허블이 아니다! 위 그래프에서 허블이 직접 잰 값은 가로축(거리)뿐인 것. 실제로는 업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슬라이퍼의 이름은 21세기가 오기 전까지 수십년의 세월 동안 잊혀졌다.
허블은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은하들까지의 실제 거리를 쟀을 뿐 은하들의 적색편이는 슬라이퍼가 관측한 데이터를 사용했다. 즉, 실제로 '은하들이 멀어지는 현상'을 최초로 발견한 학자는 허블이 아니다! 위 그래프에서 허블이 직접 잰 값은 가로축(거리)뿐인 것. 실제로는 업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슬라이퍼의 이름은 21세기가 오기 전까지 수십년의 세월 동안 잊혀졌다.
- 휴메이슨
허블의 법칙을 발견하는데 그가 기여한 부분은 매우 크다. 그러나 허블의 법칙에서 휴메이슨이 빠진 것은 당시 그가 정식 과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휴메이슨은 14세 이후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허블이 일하게 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슨산 천문대 건설당시부터 장비 배달 일을 했다. 장비를 다루는 데 익숙한 그는 허블의 관측보조 업무를 위해 채용된다. 후에 정식 연구원이 됐고 허블의 업적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그때는 이미 허블의 법칙으로 이름이 굳어진 뒤였다.
휴메이슨은 14세 이후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허블이 일하게 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슨산 천문대 건설당시부터 장비 배달 일을 했다. 장비를 다루는 데 익숙한 그는 허블의 관측보조 업무를 위해 채용된다. 후에 정식 연구원이 됐고 허블의 업적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그때는 이미 허블의 법칙으로 이름이 굳어진 뒤였다.
- 조르주 르메트르
조르주 르메트르가 이미 허블보다 앞서 1927년 우주 팽창에 관한 논문을 프랑스어로 써서 발표까지 했다. 여기서 현재 우리가 허블 법칙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이미 발표하였는데, 당시 세계 천문학의 중심지는 미국이었고, 논문은 프랑스어로 작성된 데다 이미 학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아인슈타인이 “당신의 계산은 맞지만 당신의 물리는 말이 안 된다”고 폄하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허블이 우주팽창의 발견으로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고, 세간은 우주에 대해 시끄러웠다.
르메트르의 논문도 1931년에 영어로 번역됐다. 르메트르는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주 팽창과 관련된 부분을 빠트렸다[4] . 결국 그의 발견은 비교적 덜 알려진 채 허블만이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뒷사정으로 인해 현대에도 몇몇 학자들은 허블 법칙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부르기도 한다.
2018년 10월 26일 국제천문연맹(IAU)는 모든 회원들의 전자 투표 결과 78%의 찬성을 얻어 허블의 법칙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바꿔 부르기로 하였다.
르메트르의 논문도 1931년에 영어로 번역됐다. 르메트르는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주 팽창과 관련된 부분을 빠트렸다[4] . 결국 그의 발견은 비교적 덜 알려진 채 허블만이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뒷사정으로 인해 현대에도 몇몇 학자들은 허블 법칙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부르기도 한다.
2018년 10월 26일 국제천문연맹(IAU)는 모든 회원들의 전자 투표 결과 78%의 찬성을 얻어 허블의 법칙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바꿔 부르기로 하였다.
4. 기타
근현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 중 하나이지만 노벨상은 받지 못했다. 이는 당시 노벨 물리학상 수여 기준이 보수적이어서 천문학적 업적에 대한 고려가 미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허블은 일생 동안 천문학자에게도 노벨상이 수여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펄서를 발견한 마틴 라일과 앤서니 휴이시(1974)를 시작으로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앨런 펜지아스와 우드로 윌슨(1978),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와 알프레드 파울러(1983) 등 천문학자들도 노벨 물리학상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본인의 이름을 딴 망원경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본인이 가려지는 감이 있다. 심지어 허블 망원경을 만든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5. 관련 문서
[1] 그냥 섀플리가 성격이 나빴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둘 다 보자마자 싫어했다는 얘기도 있다.[2] 당시엔 은하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Nebula라고 불렀다. 간혹 나이 드신 분 중엔 아직도 성운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존재할 수도 있다.[3] 사실 30개 전후의 적은 숫자이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무리한 예측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엔 허블이 발견하는 은하가 우주에서 분광이 가능한 전체 은하였기 때문에...[4] 여기에 대해서는 르메트르가 논문 편집자에게 보낸 코멘트가 있는데, 허블 법칙과 관련된 부분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 영어 번역본은 '허블이 이미 인기 스타가 된 뒤인 1931년에 나왔기 때문에 이미 널리 밝혀진 사실을 다시 쓸 필요가 없다'고 본인이 판단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과학적 발견을 하는 데 첫 번째 발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