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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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인 브론웰이 그린 브론테 자매 그림에서 에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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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쯤에 브론웰이 그렸던 그림. 에밀리 브론테 그림으로 알려졌으나 동생인 앤을 그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 그림 2점이 에밀리를 그린 유이한 그림들이다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ë (1818.07.30-1848.12.19)
1. 개요
2. 성격
3. 작품
4. 죽음
5. 관련 문서


1. 개요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 등을 쓴 앤 브론테와 자매지간이다.
자매들 중 키가 가장 컸으며 눈 색은 어두운 청색이었다. 막내 앤과는 쌍둥이처럼 늘 붙어다녔으며 뛰어나진 않지만 음악에도 소질을 보였다. 주로 연주하는 악기는 피아노였다.
어렸을 적부터 남들 몰래 글을 쓰고 있었다가 집안 정리를 하던 언니 샬럿이 우연히 에밀리가 쓴 글들을 보고 작가 데뷔를 하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에밀리는 남이 쓴 글을 왜 멋대로 보냐며 격하게 화를 내며 거절했다. 그 광경을 본 동생 앤이 자신도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자매들이 같이 작가 데뷔를 준비한다.

2. 성격


그녀에 대하여 기록은 본인이 남긴 기록은 두 통의 편지와 앤과 같이 쓴 일기장. 오빠 브란웰 브론테가 남긴 일기장에 가끔 쓰여진 그녀 이야기밖에 남아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기록은 그녀의 언니인 샬럿 브론테와 앤 브론테,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의 스승이자 샬럿 브론테가 오랫동안 연모했던 콘스탄틴 에제, 샬럿 브론테의 친구들과 그녀의 마을 주민의 증언, 그리고 샬럿 브론테의 사후, 브론테 자매들의 전기를 쓴 동시대 작가 엘리자베스 게스킬[1]의 기록이 전부여서 그녀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언니 샬럿 브론테와 샬럿 브론테가 연모했고 평생 잊지 못했던 스승 콘스탄틴 에제와, 샬럿의 친구들이 남긴 기록들과 에밀리 브론테 본인과 동생인 앤의 기록들을 보면 그녀의 성격은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침없고 야성적이며 자기 주장과 자존심이 강했고[2] 또 다른 자매들에 비해 공상과 사색이 많았고, 그녀의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샬럿은 에밀리를 회상하며 "말수도 없고 속도 모르겠다며 어디에서도 내 동생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고, 또 한편으로 에밀리가 고향인 요크셔의 황량한 황야와 거센 바람을 너무나 사랑해 에밀리 사후, 그녀가 개정해서 출판한 폭풍의 언덕의 머릿말에서 "이 책의 지은이는 황야에서 태어나 황야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녀에게 고향 황야의 언덕은, 하나의 광경이라 하기에는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그곳에 사는 들새나 그곳에서 자라나는 히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곳에서 살아가고 그로 인해 생명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후에 영국의 전설적인 여성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평소 황야를 예찬한 아버지와 또 그녀가 매우 존경했던 에밀리 브론테의 영향을 받아 자신도 황야를 동경해 에밀리 브론테의 고향인 요크셔 주의 하워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샬럿은 또 에밀리가 자유를 매우 중시한 면에 대해서는 "에밀리는 황야를 사랑했다. 그토록 어두운 저 황야에도, 그녀가 보기에는 장미보다 더 빛나는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녀는 납빛 산허리의 오목한 부분을 낙원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스산함과 쓸쓸함 속에서 수없는 마음의 기쁨을 발견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했던 것은 자유였다. 자유야말로 에밀리의 콧속을 지나 흐르는 숨결이었고 그녀는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유를 중시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집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그만큼 목숨을 걸고 올바르게 사는 것을 매우 중시하는 면모도 분명히 있었다. 즉, 그 누구 못지않게 자유를 갈망했지만, 그만큼 목숨을 걸고서라도 올바르게 사는 것 역시 매우 중시했다는 것. 그래서 유부남이었던 에제를 사랑해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로, 그리고 편지로 계속 전하며 애태웠던 샬럿 브론테(하지만 에제는 그녀의 고백을 단호히 뿌리쳤다고 한다.)에 비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에밀리 브론테에 대해 "그녀는 정신적 순결을 간직했고, 그녀보다 엄격하고, 그녀보다 용감하고, 그녀보다 올곧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라고까지 말했다.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모두를 가르쳤던 콘스탄틴 에제는 에밀리 브론테에 대해 "남자로, 그것도 위대한 항해사로 태어났어야 했다."라고 말했고, 또 그는 샬럿 브론테보다 에밀리 브론테를 더 높이 평가해 "에밀리 브론테의 논리성과 논쟁 능력은 남자에 견주어도 뛰어나고, 여자에게는 참으로 드문 것이나 그녀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그녀의 재능이 손상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키우는 동물들을 법도에 맞게 다루면서도[3][4] 가족처럼 매우 아꼈고, 또 어느 날 한 떠돌이 개에게 물을 주려다 팔을 물려 상처를 입었고, 이후 혹시나 광견병에 걸린 개가 아니었을까 싶어 불에 달군 후라이팬을 상처에 대어 지지면서도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견뎠다고 한다.[5] 때로는 권총 사격을 해서, 소령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샬럿은 에밀리 브론테를 커다란 황소에 비유하기도 했다.[6] 샬럿이 지은 소설인 셜리는 바로 에밀리 브론테를 모델로 지은 소설이다. 샬럿의 사후 자신의 전기를 쓴 엘리자베스 게스킬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셜리는 "에밀리가 만일 건강하고 부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를 가정하고 만든 소설이라 한다.
이렇게 강하고 올곧은 에밀리 브론테에 관해 폭풍의 언덕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 중 하나라고 극찬한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에밀리 브론테에 대해 "그녀는 정신적 순결을 간직했고, 그녀보다 엄격하고, 그녀보다 용감하고, 그녀보다 올곧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에밀리 브론테가 꼭 이렇게 한편으로는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은 면모와 또 한편으로는 강하고 야성적이고, 지적인 면모 외에 의외로 활달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샬럿의 지인인 엘렌 너시가 브론테 집안을 처음 방문했을 때 집안에서는 매우 다가가기 어려운 에밀리가 들판에서는 다른 사람처럼 즐거워하고, 어린 아이처럼 물 속 올챙이와 장난을 치는 모습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해 폭풍의 언덕에서의 캐서린 언쇼의 모습이 있어, 그녀가 폭풍의 언덕을 쓰면서 캐서린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그 누구 못지않게 자유를 중시한 면모도 상당히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폭풍의 언덕의 모티브가 된 자신의 고향 하워스를 무척 사랑하여서 그곳을 떠난 석 달 간 향수병 때문에 몸이 야위기도 했다. 아무튼 평생 모태솔로로 살았고, 또 결정적으로 폭풍의 언덕의 내용과 문체가 너무나 거칠다 보니 폭풍의 언덕을 여자가 썼을 리 없다는 얼빠진 주장이 진지하게 나왔지만 이는 곧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3. 작품


그녀의 이름으로 출간된 유일한 작품으로는 폭풍의 언덕이 있다. 그밖에 1844년에 언니인 샬럿 브론테, 동생인 앤 브론테와 함께 공동 시집인 커러[7], 엘리스[8], 액턴[9] 벨의 시집을 냈지만 출간 당시에는 겨우 '''2권'''이 팔릴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에밀리 브론테는 30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하여, 29세 때 발표한 소설 폭풍의 언덕은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지금은 세계 문학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찬사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지독하게 욕을 먹고 심지어 그녀가 쓴 소설이 아니라는 의심도 받았는데, 오빠인 브론웰 브론테(1817~1848)가 썼다느니, 여자가 쓴 소설이 아니라는 의심도 받았다. 하지만 에밀리는 샬럿이 말했던 것처럼 겉으로는 얌전했을지언정 속으로는 강하고 대담한 면모를 지녔었다. 그 내면을 그대로 작품에 옮겼더니 그토록 야성적이면서도 복잡한 작품이 탄생했고 시대를 너무 앞서 간 나머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훗날, 같은 영국의 전설적인 작가들인 서머셋 몸, 버지니아 울프 등이 폭풍의 언덕을 극찬하였고 현재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인 명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리어왕, 모비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10], 세계 10대 소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 중 하나로 선정되고 Observer 선정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으로 선정되었고, 또 서머셋 몸은 자신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들 중에서 폭풍의 언덕을 1위로 꼽기까지 했다.
참고로 한 한국 출판사의 여성 간부는 자신의 지인들에게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중 어느 작품을 더 좋아하는지에 대해 물었을때 겉으로는 현실적이지만 자의식이 강하고 남몰래 속이 꼬인 타입의 사람들은 제인에어를 더 좋아했고, 겉으로는 거칠고 불안정하지만 속은 중심이 확실히 잡힌 타입의 사람들은 폭풍의 언덕을 더 좋아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11]
폭풍의 언덕을 쓰기 전 자매들과 시집 '커러, 엘리스, 액턴 벨[12]의 시집'을 출판했는데 에밀리의 시가 가장 시인으로서 재능이 돋보인다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중에 죄수,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노라, 상상력에 기대어, 추억, 늙은 금욕주의자 등이 유명한데, 이중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노라는 19세기 대표 여류 시인인 미국의 에밀리 디킨슨의 애송시였고, 에밀리 디킨슨의 사망 시 그녀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장에서 낭송된 시가 되었다. 이 시집들에서 그녀는 위에서 이야기한 '자유로우면서도 올바르게 사는 것'을 매우 동경했고, 또 죽음에 대한 남다른 의식 혹은, 동경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죽음


이런 가운데 병[13]에 시달리던 그녀는 오빠 브론웰과 같은 연도에 죽었다. 1848년 9월 24일 결핵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던 오빠 브론웰이 죽은 후 삶의 의욕을 잃어 오빠의 장례식 때 걸린 감기가 급속도로 악화돼 이후 결핵이 되어 죽음에 이른다. 이후 자신의 흔적을 대부분 없애고 천천히 죽어갔다. 이 과정에서 일기라든지 공책에 적어둔 많은 글들이 불태워 사라져서 영원히 에밀리 브론테 연구에 어려움이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평생 써오던 글들을 거의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그녀에 대하여 연구하려고 해도 자료가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14]
언니인 샬럿이 남긴 글에선 에밀리도 브론웰처럼 11월 들어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나도 머지 않았어……."라고 이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대놓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다. 이후 날이 갈수록 에밀리는 죽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가는 거의 3달 동안 계속되는 기침, 호흡곤란, 가슴의 통증에도 괴로움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치료도 전혀 받지 않고, 묵묵히 평소의 일과를 소화하려고 했다. 의사를 불러오겠다는 언니의 말에 "싫어요! 싫어!"라고 단번에 거절하기 일쑤였다. 사실, 당시에 치료 받으려고 해도 불치병이나 다름 없었던 결핵이라 의사를 불러와야 별수 없었다. 이미 오빠가 결핵으로 죽어가던 걸 생생하게 보면서도 의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요양이나 하라든지 그런 걸 권하는 게 대부분이었기에 치료받을 방법이 없음을 그녀도 알고 죽을 날을 받아들인 거였다.
1848년 12월 19일 아침, 언니 샬럿은 죽어가는 에밀리의 상태를 글로 남겼는데 창백한 얼굴로 곧 죽을 얼굴이라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고 안타까워하는 글이었다. 그날 아침, 에밀리 브론테는 언제나처럼 7시에 일어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단장을 하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늘 하는 바느질감을 손에 들려고 했었고, 그날 아침 샬럿은 눈 덮인 황야로 나가 에밀리가 너무나 좋아하는 히스의 작은 가지를 찾아 헤메고 있었다. 말라버린 가지를 겨우 발견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증상이 극도로 악화된 에밀리는 눈이 벌써 희미해져 히스 가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오후가 되자 샬럿에게 처음으로 "언니…… 의사 선생님을 불러도 좋아요."라고 말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15] 그렇게 1848년 12월 19일 오후 2시쯤 거실 소파 위에서 그렇게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여러모로 아쉬움을 많이 남긴 채로.
에밀리 브론테의 장례식에는 늙은 아버지 패트릭과 샬럿, 앤의 두 명의 자매 외에 에밀리가 평소에 귀여워했던 개 키퍼가 함께 했다. 키퍼는 에밀리의 죽음을 안 듯 교회 안에서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고, 장례식이 끝나 목사관으로 돌아간 키퍼는 에밀리의 방 앞에 웅크리고 앉아 몇 날 며칠 동안 슬프게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브론테 가문의 비극은 끝나지 않아 에밀리가 죽은 지 여섯 달도 안 돼 막내 앤 브론테도 만 29세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샬럿이 1855년까지 살았던 것이 남매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 장수한 사례였다. 자신의 아내가 38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이후 40년 동안 홀로 살던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는 84세까지 살면서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 6남매가 모두 요절하는 비극을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으니, 결코 달가울 수 없었던 지극히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장수였다.

5. 관련 문서



[1] 이 작가의 작품으로 국내에 번역된 것은 <크랜포드>, <남과 북> 이 있다.[2] 여기에 대해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에밀리가 기르던 개 키퍼가 마을의 다른 힘센 개와 맞붙었다. 에밀리 집의 하인이 이걸 알고 집에 있던 에밀리에게 이야기를 하자, 에밀리가 즉시 부엌에서 후추를 들고 나왔다. 개들이 서로 목을 물어뜯고 있었고, 사람들은 겁이 나서 개들의 싸움을 말리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에밀리는 한쪽 팔로 키퍼의 목을 붙잡고는, 다른 팔로 개들의 콧구멍에 후추를 뿌렸다. 그녀는 남자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는 가운데" 키퍼를 끌고 집으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Winifred Gerin, <<Emily Bronte>>(London: Oxford University Prees, 1971) 147p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연구가인 데버러 러츠가 지은 브론테 자매 평전 한국 번역본 책의 145P~146P, 365P에 나옴.[3] 여기에 대해서도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애밀리 브론테가 기르던 동물들 중 각별히 아꼈던 개였던 키퍼의 경우 브론테 집안에 오기 이전에 자신의 잘못에 벌을 주려는 사람의 목을 물려고 한 전력이 있었고, 또 힘이 세 브론테 자매들의 이모와 브론테 집안의 가정부는 키퍼를 무서워했고, 키퍼는 자신의 예전 성질대로 제멋대로 행동했고, 이러다가 개가 집에서 쫓겨날 것을 우려한 에밀리는 키퍼를 끌고 구석으로 가서 주먹으로 개의 눈가를 계속 갈겨 개의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두들겨 패서 제압한 후 개를 부엌에 데려가 상처를 치료해 주었고, 이후 키퍼는 에밀리에게만 절대 충성했다고 한다.[4] 이 이야기는 에밀리 브론테의 일기 원본들 중 이 이야기가 적힌 부분은 분실이 되어 전해지지 않고 복사본에만 실려 있는 상태고, 또 샬럿 브론테와 평소에 매우 절친했던 사이였으며 또 샬럿 브론테의 사후 브론테 전기를 쓴 동료 여류 문인인 엘리자베스 게스킬에게 직접 이야기를 해줬다고 하지만, 일부 브론테 연구자들은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출처는 Clement Shorter, <<Charlotte Bronte and Her Circle>> (Westport, CT: Greenwood, 1970)와 <<Life of Charlotte Bronte>> (New York: Penguin, 1997)의 200~201P. 우리나라에서는 뮤진트리사에서 출판된 미국의 빅토리아 시대 연구가인 데버러 러츠가 지은 브론테 자매 평전 한국 번역본의 135P, 363P에 나옴.[5] 이 이야기는 샬럿 브론테가 자신의 절친한 지인이자 자신의 사후 자신의 전기를 쓴 엘리자베스 게스킬에게 한 이야기이다. 출처: <<Life>> 200P, 우리나라에서는 데버러 러츠가 지은 브론테 자매 평전 한국 번역본 책의 146P, 365P. 에밀리 브론테는 마음 약한 사람들이 놀랄까 봐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이 사건을 털어놓았다고 하고, 이 이야기는 에밀리 브론테를 언급할 때 자주 거론되는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6] 물론 에밀리 브론테는 이 비유에 매우 화를 내었다고 한다.[7] 샬럿의 예명[8] 에밀리의 예명[9] 앤의 예명[10] 일각에서는 폭풍의 언덕이 영문학 3대 비극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11] 한겨레21 칼럼 소설 읽어주는 여자 2007년 6월 14일 제664호 은밀한 변태 소설 제인 에어[12] 순서대로 샬럿, 에밀리, 앤의 머릿글자에서 따온 예명이었다. 여자가 문학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 풍습에 따라 남자 이름으로 예명을 지은 것. 후에 언니 샬럿 브론테가 커러 벨이란 작가명으로 낸 책 제인 에어가 크게 성공하자 그때서야 이 자매의 본명이 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13] 폐에 염증이 생겼고 나중에 결핵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14] 비슷한 경우가 프란츠 카프카. 정신병적인 증세로 작품까지 거리에서 찢어서 휘날리며 미치도록 웃었고 어릴적에 쓰고 간직했던 글들에서 일기장까지 스스로 찢고 불태워버려 카프카 연구에 어려움을 남기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도 죽기 전에 자신이 쓰던 많은 미발표 원고들을 모조리 불태우게 하여 영원히 볼 수 없게 했지만 이쪽은 적어도 어릴적 기록이나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어서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15] 혹은 자신의 사망 확인 절차를 위해 그랬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