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론테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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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앤, 에밀리, 샬럿. 이 그림은 샬럿의 남동생이자 에밀리와 앤의 오빠였던 브란웰이 1834년에 그린 것이다. 원래는 브란웰 자신도 누이들 속에 그렸지만, 그림이 뒤죽박죽되는 것 같아 후에 지웠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잘 보면 에밀리와 샬롯 사이에 희미한 형체가 하나 보이는데 이게 바로 그 흔적이다.
영국의 세 자매 작가. 그들의 독특한 작품세계, 불우한 일생 때문에 영문학사에서도 주목받는 작가들이다.
성이 독특한데(Brontë), 그 이유는 세 자매의 아버지였던 패트릭 브런티(Patrick Brunty)가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오면서 자신의 아일랜드식 성씨였던 오 프론티(Ó Pronntaigh)라는 성씨를 영어식인 브런티(Brunty)로 바꾸었다가 또다시 프랑스풍의 출신이 모호한 이름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영어 화자들은 어말의 e를 /e/로 발음하지 못하므로 브런티(/ˈbrɒnti/) 정도로 발음한다.
원래 샬럿은 3녀지만 위의 언니들(마리아, 엘리자베스)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녀가 장녀인 것처럼 알려졌다. 제인 에어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녀의 여동생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을 썼다. 앤 브론테도 <아그네스 그레이> 등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언니들만큼 뛰어나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세 자매는 1846년 그녀들의 머릿글자를 딴 필명으로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을 냈다. 당시로서는 여자 작가가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남자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이 시집은 잘 팔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문학계의 호응이 있어서 세 자매는 역시 필명으로 각각 1847년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제인 에어는 보수층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이 소설이 너무 유명해진 덕에 자매의 본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폭풍의 언덕은 당시로서는 제인 에어보다 더 낮은 평가를 받는 호불호가 갈리는 소설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두 소설의 인지도와 평이 역전되었다. 플롯의 구성이나 심리 묘사는 당시에는 거칠다는 평을 받았지만 현대의 시점으로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면모가 보인다.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Patrick Brontë)(1777.3.17 – 1861.6.7)는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Haworth)의 성공회 사제였다. 아버지가 원래 완고하고 엄격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어머니 마리아 브란웰(1783.4.15 – 1821.9.15)이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떴기 때문에 브론테 집안은 굉장히 우울했다고 한다. 게다가 요크셔는 지역 자체가 굉장히 황량한 곳이다. 폭풍의 언덕은 바로 이 요크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데 이들은 이 요크셔에서도 손꼽히는 외딴 곳에서 자랐다. 지금 가도 많이 황량한 곳이다. 그나마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곳곳에 워더링 하이츠 관련 푯말을 세우고 관광업(?)에 신경을 써서 조금은 나아졌지만 1960년대에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여길 가 본 대학교수(워더링 하이츠 첫 번역자)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에도 무척 시골이었고 워낙 황량해서 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워스가 요크셔의 깊은 구석에 위치한 시골이라 찾아가는 것이 힘들기는 하다. 경사가 심한 언덕이 계속되는 지역이라 대중교통이 발달할 수 없었고, 때문에 현재도 대중 교통으로 하워스를 가려면 2~3회 대중 교통을 갈아타야 한다. 그러나 실제 요크셔 북부에 비하면 황량한 환경은 아니다. 오히려 초록 일색의 목초지가 잘 형성된 아름다운 시골이다. 다만, 바람이 매우 강하여 춥고, 외진 시골이라 세상으로부터 더욱 고립된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 황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을 뿐.
84살까지 산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든 가족이 단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후사를 남긴 자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샬럿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죽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고, 그녀 역시 요절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앞세우고 손자, 손녀조차 없었던 아버지 패트릭은 마지막을 홀로 지냈으나 그나마,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결혼한 샬롯 브론테의 남편인 사위 아서 벨 니컬스(1819~1906)[1] 가 패트릭을 돌봤기에 패트릭이 사망할 때 그 곁을 지켜줬다.
브론테 자매가 모두 요절한 이유로는 현대 관점으로 보면 아주 아동 학대가 따로 없는 당시 영국의 어린이 훈육 문화가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당시 영국에서는 매우 금욕적이고 엄격하게 어린이를 키워야 한다고 여겼고, 어린이가 맛있고 양 많은 음식을 먹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브론테 자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제인 에어를 보면 어린이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가 나온다.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허약해진 몸으로 황량한 요크셔 지역에서 쓸쓸하게 살아야 했으니 다들 건강이 좋았을리 없었다는 게 이 해석이다.
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브론테 사제관은 지금은 브론테 박물관이 되어 있다. 지금도 가면 이들 자매들 유품에서 심지어 어릴 적에 벽에 한 낙서와 이들이 어릴 적에 실뜨기하던 것, 남동생 브랜웰이 쓴 일기장까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기에 이들 자매(&남매)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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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매들의 일대기가 1979년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지금은 세계 영화계의 전설이 된 이자벨 아자니와 이자벨 위페르도 이 영화에 출연했다. 둘보다 해외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마리 프랑스 피제도 프랑소와 트뤼포의 앙투안 연작의 히로인 콜레트를 맡았던 전설적인 프랑스 여배우기 때문에 사실상 올스타 라인업이라 할 수 있다.[8] 감독은 앙드레 테시네.
하지만 아자니랑 위페르는 역과 달리 촬영장에서는 소원한 관계여서 촬영이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1979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으나 하필이면 지옥의 묵시록에 가려지고 말았다. 그래도 당시에도 대작이었고 평도 좋았기에 꾸준히 기억되고 있는 영화다.
왜 영국 문인의 삶을 프랑스에서 제작했냐는 의문이 있을건데,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유달리 영미권 문화에 대한 구애가 강한 편이었다. 에드가 앨런 포를 시작으로 여러 영미권 예술 작품들이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재발굴도 활발했다. 이게 영화계에도 이어졌고, 이 영화도 그런 전통에서 비롯된 것.
왼쪽부터 앤, 에밀리, 샬럿. 이 그림은 샬럿의 남동생이자 에밀리와 앤의 오빠였던 브란웰이 1834년에 그린 것이다. 원래는 브란웰 자신도 누이들 속에 그렸지만, 그림이 뒤죽박죽되는 것 같아 후에 지웠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잘 보면 에밀리와 샬롯 사이에 희미한 형체가 하나 보이는데 이게 바로 그 흔적이다.
1. 영국의 작가
영국의 세 자매 작가. 그들의 독특한 작품세계, 불우한 일생 때문에 영문학사에서도 주목받는 작가들이다.
성이 독특한데(Brontë), 그 이유는 세 자매의 아버지였던 패트릭 브런티(Patrick Brunty)가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오면서 자신의 아일랜드식 성씨였던 오 프론티(Ó Pronntaigh)라는 성씨를 영어식인 브런티(Brunty)로 바꾸었다가 또다시 프랑스풍의 출신이 모호한 이름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영어 화자들은 어말의 e를 /e/로 발음하지 못하므로 브런티(/ˈbrɒnti/) 정도로 발음한다.
1.1. 설명
원래 샬럿은 3녀지만 위의 언니들(마리아, 엘리자베스)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녀가 장녀인 것처럼 알려졌다. 제인 에어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녀의 여동생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을 썼다. 앤 브론테도 <아그네스 그레이> 등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언니들만큼 뛰어나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세 자매는 1846년 그녀들의 머릿글자를 딴 필명으로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을 냈다. 당시로서는 여자 작가가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남자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이 시집은 잘 팔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문학계의 호응이 있어서 세 자매는 역시 필명으로 각각 1847년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제인 에어는 보수층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이 소설이 너무 유명해진 덕에 자매의 본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폭풍의 언덕은 당시로서는 제인 에어보다 더 낮은 평가를 받는 호불호가 갈리는 소설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두 소설의 인지도와 평이 역전되었다. 플롯의 구성이나 심리 묘사는 당시에는 거칠다는 평을 받았지만 현대의 시점으로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면모가 보인다.
1.2. 가정 환경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Patrick Brontë)(1777.3.17 – 1861.6.7)는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Haworth)의 성공회 사제였다. 아버지가 원래 완고하고 엄격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어머니 마리아 브란웰(1783.4.15 – 1821.9.15)이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떴기 때문에 브론테 집안은 굉장히 우울했다고 한다. 게다가 요크셔는 지역 자체가 굉장히 황량한 곳이다. 폭풍의 언덕은 바로 이 요크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데 이들은 이 요크셔에서도 손꼽히는 외딴 곳에서 자랐다. 지금 가도 많이 황량한 곳이다. 그나마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곳곳에 워더링 하이츠 관련 푯말을 세우고 관광업(?)에 신경을 써서 조금은 나아졌지만 1960년대에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여길 가 본 대학교수(워더링 하이츠 첫 번역자)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에도 무척 시골이었고 워낙 황량해서 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워스가 요크셔의 깊은 구석에 위치한 시골이라 찾아가는 것이 힘들기는 하다. 경사가 심한 언덕이 계속되는 지역이라 대중교통이 발달할 수 없었고, 때문에 현재도 대중 교통으로 하워스를 가려면 2~3회 대중 교통을 갈아타야 한다. 그러나 실제 요크셔 북부에 비하면 황량한 환경은 아니다. 오히려 초록 일색의 목초지가 잘 형성된 아름다운 시골이다. 다만, 바람이 매우 강하여 춥고, 외진 시골이라 세상으로부터 더욱 고립된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 황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을 뿐.
84살까지 산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든 가족이 단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후사를 남긴 자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샬럿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죽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고, 그녀 역시 요절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앞세우고 손자, 손녀조차 없었던 아버지 패트릭은 마지막을 홀로 지냈으나 그나마,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결혼한 샬롯 브론테의 남편인 사위 아서 벨 니컬스(1819~1906)[1] 가 패트릭을 돌봤기에 패트릭이 사망할 때 그 곁을 지켜줬다.
브론테 자매가 모두 요절한 이유로는 현대 관점으로 보면 아주 아동 학대가 따로 없는 당시 영국의 어린이 훈육 문화가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당시 영국에서는 매우 금욕적이고 엄격하게 어린이를 키워야 한다고 여겼고, 어린이가 맛있고 양 많은 음식을 먹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브론테 자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제인 에어를 보면 어린이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가 나온다.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허약해진 몸으로 황량한 요크셔 지역에서 쓸쓸하게 살아야 했으니 다들 건강이 좋았을리 없었다는 게 이 해석이다.
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브론테 사제관은 지금은 브론테 박물관이 되어 있다. 지금도 가면 이들 자매들 유품에서 심지어 어릴 적에 벽에 한 낙서와 이들이 어릴 적에 실뜨기하던 것, 남동생 브랜웰이 쓴 일기장까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기에 이들 자매(&남매)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 장녀 마리아(Maria)(1814년 04월 23일 ~ 1825년 05월 06일)(11세[2] )
- 차녀 엘리자베스(Elizabeth)(1815년 02월 08일 ~ 1825년 06월 15일)(10세[3] )
- 3녀 샬럿(Charlotte)(1816년 04월 21일 ~ 1855년 03월 31일)(38세[4] )
- 장남 브란웰(Branwell)(1817년 06월 26일 ~ 1848년 09월 24일)(31세[5] )
- 4녀 에밀리(Emily)(1818년 07월 30일 ~ 1848년 12월 19일)(30세[6] )
- 5녀 앤(Anne)(1820년 01월 17일 ~ 1849년 05월 28일)(29세[7] )
2.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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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매들의 일대기가 1979년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지금은 세계 영화계의 전설이 된 이자벨 아자니와 이자벨 위페르도 이 영화에 출연했다. 둘보다 해외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마리 프랑스 피제도 프랑소와 트뤼포의 앙투안 연작의 히로인 콜레트를 맡았던 전설적인 프랑스 여배우기 때문에 사실상 올스타 라인업이라 할 수 있다.[8] 감독은 앙드레 테시네.
하지만 아자니랑 위페르는 역과 달리 촬영장에서는 소원한 관계여서 촬영이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1979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으나 하필이면 지옥의 묵시록에 가려지고 말았다. 그래도 당시에도 대작이었고 평도 좋았기에 꾸준히 기억되고 있는 영화다.
왜 영국 문인의 삶을 프랑스에서 제작했냐는 의문이 있을건데,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유달리 영미권 문화에 대한 구애가 강한 편이었다. 에드가 앨런 포를 시작으로 여러 영미권 예술 작품들이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재발굴도 활발했다. 이게 영화계에도 이어졌고, 이 영화도 그런 전통에서 비롯된 것.
2.1. 출연진
[1] 참고로 패트릭의 교회에 있던 부제였기에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이이다.[2] 사인은 결핵. 마리아나 엘리자베스 역시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문학과 배움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으나, 기숙학교에 잘못 입학하는 바람에 배고픔과 추위, 궁핍 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되었다. 그 학교의 야만성은 제인 에어의 로우드 기숙학교의 배경이 되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3] 언니와 마찬가지 이유로 요절. 만일 이 둘이 살아있었다면 세 누이 못지 않은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겼을지도 모른다.[4]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져서 행복하게 사는 듯했으나, 임신 중 여러 병이 겹쳐서 결혼 1년 만에 사망.[5] 사인은 알코올 의존증과 아편 중독. 가정교사로 일했는데 유부녀와 불륜설이 나와서 쫓겨난 뒤로 술과 아편에 매달려 단명했다.[6] 사인은 결핵. 29세 때 발표한 폭풍의 언덕은 결국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7] 사인은 인플루엔자였던 듯.[8] 다만 이땐 위페르보단 아자니와 피제가 더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