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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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 중 하나인 <만약 내가>(If I can). 수필가인 장영희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가 자주 인용했던 작품이다.
19세기에 활동한 미국의 시인. 미국 시 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26명의 서양 문학 정전(Western Canon)’[1] 의 그녀를 포함시켰다.[2]
변호사이자 정치가, 대학 이사였던 에드워드 디킨슨(Edward Dickinson)과 에밀리 노크로스(Emily Norcross)의 사이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 매사추세츠 주 애머스트에서 보냈다.[3]
또한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은둔 생활을 했는데, 1872년 이후로는 의사도 집으로 찾아와 열린 문틈으로 걸어다니는 디킨슨을 보며 진찰을 해야 했을 정도로 과도한 대인 기피 증세를 보였다. 이런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악화된 시력은 물론이고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 종교 문제, 아버지와의 사고방식의 차이, 식구들 간의 경쟁의식, 그리고 주 의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로 인해 끊임없이 드나들던 손님들을 맞이해야만 했던 것 등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 탓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로는 생애에 걸친 몇 번의 정서적 위기를 들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바깥 세상과 점점 담을 쌓게 된 것이다. 특히 디킨슨을 “북극광처럼 빛나는” 존재로 여기던 오티스 로드 판사가 1884년에 사망하자 실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 자신의 건강까지 악화되어 2년 후인 1886년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5년 5개월 5일간의 생애였다.
초등교육 과정을 거친 후 애머스트 아카데미(Amherst Academy)에서 희망 강좌를 선택해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과 문예 창작 훈련을 받았으며, 약 1년간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에서 신학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4] 이 밖의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성서보다 문학 작품에 더 많은 흥미를 가졌던 그는 독서를 통해 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창작에 대한 열의와 영감을 얻었다.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깊이 탐독하는 습성이 있었다. 디킨슨의 삶과 자아 탐색을 세상과 단절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지만, 실제로 접촉하지는 않았어도 서신을 통해 당대 최첨단의 지성을 갖춘 지식인들과 시를 교환하며 부단한 교우 관계를 가졌다. 또한 자선 단체와 어린 시절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시 유명한 작가였던 헬렌 헌트 잭슨(Helen Hunt Jackson)에게 출판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생전에 자신의 시가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종교의 반항아로서 청교도 신앙에 회의를 품었으며, 구원의 희망에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친한 친구를 비롯한 많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일찍부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강한 회의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디킨슨을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기존 종교에 대한 불신과 전통적인 시 형식에 대한 반발로 나아가도록 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에 혁신적인 요소를 불러오며 시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 일찍이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도록 했다.
생전에는 본인의 요구에 의해 익명으로 일곱 편밖에 시를 출간하지 못했지만, 사후 동생 러비니아 디킨슨에 의해 44개의 시 꾸러미가 발견되었다. 1890년, 1891년, 1896년에는 평생에 걸쳐 디킨슨의 문학 상담 역할을 해왔던 비평가 겸 작가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Thomas Wentworth Higginson)과 토드 부인(Mrs. Todd)의 주선에 힘입어 1775편의 시가 3권 연속 출간되었으며, 1894년에는 2권의 서간집이 출간되었다.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던 디킨슨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정받기 시작했고, 1955년 토머스 존슨(Thomas H. Johnson)에 의해 시선집이 출판됨으로써 위대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오빠였던 오스틴 디킨슨의 아내이자 오랜 친구였던 수잔 길버트 디킨슨과는 서로 약 3백편의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 두 사람은 성인이 되고 계속 옆집에 살았다. 이 때문에 에밀리와 수잔이 단순한 친구, 시누이 관계를 넘어 동성 연인이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둘의 관계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상물에서도 즐겨 묘사된다.
2016년 그녀의 생애를 다룬 영화 《조용한 열정》(원제: Quiet Passion)이 제작되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신시아 닉슨이 주인공 디킨슨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도 2017년 11월에 개봉했지만, 의미있는 흥행 기록은 남기지 못했다.
2019년 Apple TV+에 '디킨슨'이라는 TV 시리즈가 공개되었다. 배우 겸 가수 헤일리 스타인펠드가 디킨슨을 연기. 엘라 헌트가 수잔 길버트를 연기. 이 TV 시리즈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녀가 죽음[위즈 칼리파]와 대화했다는것, 아편을 했다는것, 루이자 메이 올컷(작은 아씨들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만났다는 것 등은 허구다.
대표작 중 하나인 <만약 내가>(If I can). 수필가인 장영희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가 자주 인용했던 작품이다.
1. 소개
19세기에 활동한 미국의 시인. 미국 시 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26명의 서양 문학 정전(Western Canon)’[1] 의 그녀를 포함시켰다.[2]
2. 생애
변호사이자 정치가, 대학 이사였던 에드워드 디킨슨(Edward Dickinson)과 에밀리 노크로스(Emily Norcross)의 사이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 매사추세츠 주 애머스트에서 보냈다.[3]
또한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은둔 생활을 했는데, 1872년 이후로는 의사도 집으로 찾아와 열린 문틈으로 걸어다니는 디킨슨을 보며 진찰을 해야 했을 정도로 과도한 대인 기피 증세를 보였다. 이런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악화된 시력은 물론이고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 종교 문제, 아버지와의 사고방식의 차이, 식구들 간의 경쟁의식, 그리고 주 의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로 인해 끊임없이 드나들던 손님들을 맞이해야만 했던 것 등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 탓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로는 생애에 걸친 몇 번의 정서적 위기를 들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바깥 세상과 점점 담을 쌓게 된 것이다. 특히 디킨슨을 “북극광처럼 빛나는” 존재로 여기던 오티스 로드 판사가 1884년에 사망하자 실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 자신의 건강까지 악화되어 2년 후인 1886년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5년 5개월 5일간의 생애였다.
3. 시인으로서의 특징
초등교육 과정을 거친 후 애머스트 아카데미(Amherst Academy)에서 희망 강좌를 선택해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과 문예 창작 훈련을 받았으며, 약 1년간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에서 신학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4] 이 밖의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성서보다 문학 작품에 더 많은 흥미를 가졌던 그는 독서를 통해 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창작에 대한 열의와 영감을 얻었다.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깊이 탐독하는 습성이 있었다. 디킨슨의 삶과 자아 탐색을 세상과 단절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지만, 실제로 접촉하지는 않았어도 서신을 통해 당대 최첨단의 지성을 갖춘 지식인들과 시를 교환하며 부단한 교우 관계를 가졌다. 또한 자선 단체와 어린 시절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시 유명한 작가였던 헬렌 헌트 잭슨(Helen Hunt Jackson)에게 출판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생전에 자신의 시가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종교의 반항아로서 청교도 신앙에 회의를 품었으며, 구원의 희망에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친한 친구를 비롯한 많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일찍부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강한 회의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디킨슨을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기존 종교에 대한 불신과 전통적인 시 형식에 대한 반발로 나아가도록 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에 혁신적인 요소를 불러오며 시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 일찍이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도록 했다.
생전에는 본인의 요구에 의해 익명으로 일곱 편밖에 시를 출간하지 못했지만, 사후 동생 러비니아 디킨슨에 의해 44개의 시 꾸러미가 발견되었다. 1890년, 1891년, 1896년에는 평생에 걸쳐 디킨슨의 문학 상담 역할을 해왔던 비평가 겸 작가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Thomas Wentworth Higginson)과 토드 부인(Mrs. Todd)의 주선에 힘입어 1775편의 시가 3권 연속 출간되었으며, 1894년에는 2권의 서간집이 출간되었다.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던 디킨슨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정받기 시작했고, 1955년 토머스 존슨(Thomas H. Johnson)에 의해 시선집이 출판됨으로써 위대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4. 기타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오빠였던 오스틴 디킨슨의 아내이자 오랜 친구였던 수잔 길버트 디킨슨과는 서로 약 3백편의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 두 사람은 성인이 되고 계속 옆집에 살았다. 이 때문에 에밀리와 수잔이 단순한 친구, 시누이 관계를 넘어 동성 연인이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둘의 관계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상물에서도 즐겨 묘사된다.
2016년 그녀의 생애를 다룬 영화 《조용한 열정》(원제: Quiet Passion)이 제작되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신시아 닉슨이 주인공 디킨슨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도 2017년 11월에 개봉했지만, 의미있는 흥행 기록은 남기지 못했다.
2019년 Apple TV+에 '디킨슨'이라는 TV 시리즈가 공개되었다. 배우 겸 가수 헤일리 스타인펠드가 디킨슨을 연기. 엘라 헌트가 수잔 길버트를 연기. 이 TV 시리즈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녀가 죽음[위즈 칼리파]와 대화했다는것, 아편을 했다는것, 루이자 메이 올컷(작은 아씨들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만났다는 것 등은 허구다.
[1] 서구 최고 작가들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 하는 작가들을 일컫는 용어다.[2] #[3] 그 때문인지 에밀리 디킨슨의 박물관도 애머스트에 위치한다.[4] 당시 미국에 처음 세워진 여성 대상의 고등교육 기관이었고, 오늘날까지도 미국 최고의 여자대학들 가운데 하나다. 때문에 지금도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는 에밀리 디킨슨을 유명 동문으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에밀리 디킨슨에 관한 주요 연구와 전시자료는 고향에 위치한 애머스트 칼리지에서 다수를 소장, 관리하고 있다. 이는 디킨슨의 가문이 애머스트 칼리지와 깊은 관계를 맺어 온것과도 연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