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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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o Ilmari Juutilainen
1914년 2월 21일생이고 1999년 2월 21일에 사망, 정확히 85세 생일날 사망했다.
1. 개요
2. 생애
3. 겨울전쟁에서의 활약상
4. 계속전쟁에서의 활약상
5. 여담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한 핀란드 공군에이스 조종사이다. 공인격추수 '''94기'''[1]를 기록한 에이스다. 독일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항공기를 격추시킨 사람이기도 하다.[2] 게다가 경력도 독특해서 미국제 전투기인 F2A 버팔로부터 시작해서 독일제 Bf109까지 다양한 기종을 몰아본 흔치않은 파일럿이기도 하다.

2. 생애


아버지가 철도 노동자였는데 아버지가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후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기에 1932년, 18살의 나이에 군에 입대하게 된다. 처음 군대에서의 보직은 무전병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전투기 조종사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열심히 노력하여 복무도중 민간 항공 조종사 공부를 하였고 3년만에 조종사 자격을 취득, 조종사 자격을 취득함에 따라 비행사관으로 재임용되어 35년부터 중사 계급을 달고 핀란드 공군으로 복무 했다. 1936년엔 전투 조종사로 지원해 전투기 조종사로 제 24 비행 대대에 배치되었다.
전세계를 휩쓸어버린 2차 세계대전 기간중 소련의 핀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겨울전쟁계속전쟁에서 활약하며 최고 등급의 무공 훈장인 만네르하임 십자장을 서훈 받는등 전쟁 영웅으로 이름 날렸고, 장교 진급을 제안 받았으나 전투 비행 임무에서 제외될 것을 우려하여 장교로의 임관을 거부, 결국 전역 당시 까지 하사관 신분을 유지 했다.[3]
종전후에도 47년까지 군인신분을 유지 했으며 전역후에는 군용으로 쓰이다 민간에 불하된 구닥다리 비행기 한대를 사들여 56년에 은퇴하기 전까지 민간 항공사로 활동하며 계속 비행기에 올랐다.
최후의 비행은 1997년 당시 핀란드 공군 최신예기였던 F/A-18 호넷의 후방석에 탑승해 비행한 것으로, '핀란드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이나 다름 없는 유틸라이넨이 군 기념 행사에 초청되어 이벤트 성으로 행해졌던 것.
은퇴후에는 별다른 활동 없이 조용히 노후를 즐기다 85세 생일인 1999년 2월 21일 투술라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3. 겨울전쟁에서의 활약상


겨울전쟁 발발 당시 24 전투 비행대대에 배속되어 있던 유틸라이넨은 1939년 12월 19일 네덜란드제 전투기인 포커 D.XXI에 탑승해 DB-3 폭격기 1격추. 2기 공동 격추의 전과를 올림으로서 최고의 격추를 기록했다. 이후 겨울전쟁 기간 내내 115회의 출격을 기록하며 총 3기 격추, 공동격추 6기의 전과를 올렸다.

4. 계속전쟁에서의 활약상


겨울전쟁은 종전되었지만 핀란드는 겨울전쟁의 전훈으로,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고, 또 언제 소련이 재침공 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군 전력을 증강하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공군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그나마 우호적이였던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국가로 부터 구형 복엽기나 아직 성능 검증도 이뤄지지 않은 시험기나 다름 없는 전투기도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그중엔 미국제 버팔로 전투기도 포함되어 있었다.[4] 핀란드는 이 전투기들에 브류스터사를 뜻하는 'BW' 라는 코드를 부여하고 뒤에 일련 번호를 붙여 운용했는데, 유틸라이넨의 애기는 BW-364였다고 한다.
버팔로에 탑승한 유틸라이넨은 1941년 7월 22일, 핀란드 지상군을 공습하던 폴리카르포프 I-153 한 대를 격추해 에이스로 인정 받았고, 이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스코어를 쌓아올려 1942년 4월엔 20기의 격추를 기록해 전공을 인정 받아 첫번째 만네르하임 십자장을 서훈하게 된다. 42년 11월까지 버팔로를 타고 무려 34기를 격추하며 총합 36기 격추를 기록했는데, 그중엔 1회의 출격에서 3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한 기록이 세번이나 포함되어 있다.
1943년 2월부터는 제34 비행대대(LeLv 34)로 전속되어 독일이 제공한 신형 전투기 Bf109 G-2형에 탑승했는데, 유틸라이넨을 포함한 비행대 인원이 직접 독일로 가서 교육을 받고 기체 테스트 및 수령을 했다. 이때 남긴 말이 바로 그 유명한 "브류스터가 신사라면 메셔슈미트는 살인기계다.".
유틸라이넨이 주로 탑승했던 기체는 MT-212와 MT-222번이었다고 하며 이 기체들에 탑승해 1944년 5월, 총 격추수 75기를 기록해 두번째 만네르하임 십자장을 서훈받았다.
1944년 5월부턴 조금 더 신형의 G-6형에 탑승했는데, 탑승 기체는 주로 MT-426와 MT-457였다.
1944년 9월까지 Bf109만으로 무려 58기를 격추. 최종 전과 격추 94기, 공동격추 7기로 종전을 맞이 했다.

5. 여담


유틸라이넨 본인이 무척 신중한 성격인데다가 어린 시절부터 사냥개와 함께 설원을 달리며, 엽총 사냥을 자주 했기에 이때 몸에 밴 사냥 습관이 그대로 전투기 조종과 연결되면서 94기라는 격추수를 기록한 원동력이 되었다.
금욕적이고 겸손한 성품의 유틸라이넨은 자신이 격추한 것이 거의 확실한 적기조차도 다른 동료가 자신의 격추임을 주장하고 나서면 기꺼이 전과를 양보하거나 공동 격추로 기록되도록 배려했고 [5], 적기가 전투불능에 빠지면 그들을 그냥 보내줬으며, [6] 이 덕에 적인 소련 공군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이런 점이 돋보이는 일화로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지자 핀란드를 방문한 한 소련 공군 장성은 다른 사람들을 다 제쳐두고 유틸라이넨에게 다가가며 "가장 위대한 파일럿을 만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독일군의 에이스들이 온갖 수난을 다 겪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천지차이의 대우다.
또한 정비병 같은 지상 근무 요원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 그들에 대한 배려를 절대 잊지 않았다. 핀란드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만큼 이런저런 일로 사진을 찍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사진 촬영이 있을 때마다 정비병과 무장사들을 불러 모아 같이 찍었다고. 너무 유난 떠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때의 대답은 "이들이 없다면 난 날아오를 수 조차 없다.". 이런 배려에 정비병들은 그의 기체를 항상 최고의 컨디션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7]
또 하나의 재밌는 기록이라면 그는 단 한 번도 적에게 피탄 당한 적이 없다! 유일한 피탄 기록이 하나 있는데, 이건 아군 대공포의 오인사격(…)을 받은 것. 그나마도 큰 피해를 본 건 아니라 멀쩡히 돌아왔다. [8]
그런데 이런 놀라운 기록 들에고 불구하고 유틸라이넨 본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기록은 바로 '단 한 번도 전투에서 요기(윙맨)를 잃지 않았다.'는 것. 이건 그가 아무리 완벽한 격추 기회를 잡았더라도 요기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보이면 망설임 없이 공격을 포기하거나 요기가 위험에 처한 것이 보이면 스스로가 격추당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돌진해 요기를 구해냈기 때문. 이런 점 때문에 유틸라이넨의 윙맨이 된다는 것은 '생환의 보증 수표'와도 같은 취급을 받아, 그의 윙맨 자리를 두고 동료들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한 가지 일화로, 기지에 침투하는 적 게릴라 때문에 다들 신경이 곤두섰던 어느 날 밤, 초병 한 명이 사우나에 가던 유틸라이넨을 실수로 쏜 적이 있는데, 오인 사격을 한 것을 알고 다들 놀랐지만 유틸라이넨은 웃으면서 "맞을 일이 없어! 난 바위 뒤에 있거든!"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런 인간 같지 않은 기록의 유틸라이넨도 죽다 살아난 경험이 한번 있는데, 공중전 도중 편대에서 홀로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추격해온 소련군의 La-5 전투기 한 대와 맞붙어 선회, 급상승, 급강하, 다시 급상승을 반복하는 격렬한 기동으로 블랙아웃에 걸려 일시적으로 시각을 상실해 버린 것. 천만다행으로 시각이 돌아오기 전까지 격추당하거나 공격받지 않은 유틸라이넨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방금 전까지 사투를 벌이던 적기를 찾았는데, 자신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옆을 나란히 날고 있던 소련군 파일럿과 눈이 딱 마주쳤다. 소련의 La-5 파일럿도 과격한 기동 중 유틸라이넨과 같은 타이밍에 블랙아웃에 걸렸던 것.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서로의 기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던 이 두 명의 조종사는 잠시 동안 서로를 마주 보며 나란히 날다가,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려 버렸고, 유틸라이넨이 먼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소련의 조종사는 날개를 흔들어 유틸라이넨의 인사에 화답하곤 자신의 기체를 살짝 숙여 유틸라이넨 보다 낮은 고도에 위치하도록 움직여 주었다. 이는 공중전에선 자살행위에 가까운 것으로 유틸라이넨은 이 소련 조종사가 적인 자신에게 보여준 행동에 담긴 신뢰와 두둑한 뱃심에 감탄해 그대로 기수를 돌려 기지로 돌아갔다고. [9]핀란드 2위의 에이스 한스 빈트 또한 비슷한 일화가 있다.
형인 아르네 유틸라이넨도 전투종족이다.[10]
스트라이크 위치스의 등장인물 에이라 일마타르 유틸라이넨은 이 사람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리고 그의 증손자가 이걸 알게 되었다.

[1] 비공인 격추수 34기를 더한다면 도합 128기이다.[2] 위 순위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유틸라이넨 위로는 전부 독일인이다. 사실 독일인 슈퍼 에이스들의 격추수들을 보면 확실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걸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파일럿으로 굴릴만한 인재들이 독일에 많이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이 인적자원이 많거나 잘 훈련된 병사들이 교대로 나온것과 다르게,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악화되는 인력난으로 인해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출격한 덕에 가능했던 기록이다. [3] 최종 계급은 Sotilasmestari로 우리나라의 준위에 해당.[4] 사실 핀란드에서는 겨울 전쟁 기간중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도 이례적으로 자국에도 10여기 남짓 밖에 배치 되지 않은 최신형기를 무려 44대나 원조해 주기로 하는 배포를 보였지만, 미국에서 이걸 수송해 오는 동안 겨울전쟁이 끝나버렸다.(...)[5] 이 때문에 실제 격추 수는 기록된 격추수를 훨씬 넘어서는 120기 이상이라는 설이 따라다닌다. 늘 따라붙는 '격추수 과장 논란'에 시달리는 독일의 슈퍼 에이스 들과는 정 반대의 사례.[6] 이 사람과 반대되는 인물로는 영국의 더글러스 베이더가 있다. 이 사람은 "탈출하는 독일 놈도 쏴버려라"라고 외쳤던 사람이다. 실제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다른 나라 조종사라면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격추시켰을 것이다. [7] 이와 비슷한 성향의 인물로는 지구 반대편의 제로센 에이스인 이와모토 테츠조가 있다. 이와모토 역시 항상 정비병을 우대하였고 '적기는 문제없지만 엔진 트러블 앞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무튼 그 결과 이와모토 역시 전쟁 중 단 한 번의 엔진 문제를 겪은 적이 없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유틸라이넨이 비독일계 격추수 1위라면 이와모토는 비독일계 2위의 에이스 파일럿이란 점이며 유틸라이넨과 나름 성향이 여러모로 비슷했다는 점이다.[8] 이 사람과 반대되는 인물로는 엄청난 불운을 몰고 다니던 '''핀란드'''의 에이스 파일럿 닐스 에드바드 카타야이넨이 있다. 하지만 악운은 강해서 말도 안 되는 숱한 사고(…)를 경험해 일생의 반을 병원에서 지냈다. 심지어 인생 중대사라는 결혼식도 입원한 병원에서 치뤘다(...) 그렇지만, 살아남아 78세까지 살았다.[9] 훈훈한 미담인 것 같은데 죽다 살아난 위기 맞다. 블랙아웃 상태에서 그대로 추락할 수도 있었고 소련군 조종사가 블랙아웃에 빠지지 않았거나 유틸라이넨 보다 먼저 회복해 무방비 상태의 유틸라이넨을 발견했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테니까. 거기다 자칫 잘못했으면 두 기체가 충돌하여 둘 다 사망했을 수도 있다.[10] 심지어 이쪽분은 '''그 전설인 시모 해위해의 직속 상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