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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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반인 1941년 6월 25일부터 1944년 9월 19일까지 계속된 핀란드와 소련의 전쟁. 보다 포멀한 명칭은 제2차 소련-핀란드/핀란드-소련 전쟁이다. 연속전쟁이라고도 한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제1차 소련-핀란드/핀란드-소련 전쟁의 후속 전쟁이다.
구 소련 및 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독소전쟁)의 일부로 본다.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고, 소련에게 영토의 11% 정도를 빼앗겼다. 그러나 소련은 전쟁 후에도 계속 핀란드를 압박했고, 이에 핀란드는 소련이 언제 침공을 재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미국 등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핀란드를 외면했다. 따라서 핀란드가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나치 독일 밖에 없었다.
독일은 독일대로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의 저력을 지켜본 후 급속도로 핀란드와 친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고, 소련에게 핀란드를 건드리면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핀란드가 고대하던 안전 보장을 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는 독일이 차후 소련을 공격할 것임을 알게 되었고, 양국은 계속되는 협상 끝에 동맹에 합의, 전쟁 개시를 앞두고 핀란드군은 급격하게 재무장하였다. 노르웨이에 있던 독일 산악군단 소속의 2개 산악사단도 핀란드 페차모로 들어왔다.[1]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3일 뒤인 6월 25일 아침, 소련을 폭격한 독일군 비행기에게 연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기들이 핀란드 내 18개 도시를 폭격하면서 핀란드군도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다른 주장으론 핀란드 주둔 독일 산악사단이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시에 소련을 침공하면서 시작됐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듯 겨울전쟁의 후속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계속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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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의 전황.
핀란드는 전력의 열세로 전쟁기간 동안 목표였던 무르만스크 함락에는 실패했다. 무장친위대 산악사단이 1941년 11월 말 무르만스크 교외 30km까지 진격했지만, 아직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던 미국이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말라고 핀란드에게 요청하여 친위대의 진격을 보조해줄 핀란드군이 멈춤으로써[2] 이 부대의 진격도 멈췄다.[3] 사실 이 지역은 12월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지라 전쟁 중에도 동계기간 동안에는 대대급 이상의 대규모 부대기동이 힘들었다. 동계기간 동안 활동하는 육군 부대는 극소수의 정찰병들 뿐. 그리고 무르만스크는 미국의 렌드리스 전쟁물자가 소련으로 들어오는 항구였다. 만일 독일군(혹은 핀란드군)이 무르만스크를 점령하면 군수물자 수송이 대단히 힘들어지기 때문에 미국이 핀란드에게 진격 중지 요청을 한 것이다. 어차피 핀란드는 빼앗긴 자국 영토의 회복이 목적이지 굳이 미국과 적대할 이유가 없으니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
이후, 핀란드는 1941년부터 1944년까지 7개 사단 병력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참여해 독일 북부집단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지만, 주로 동카렐리야 전선 부근만 지키고 있었고, 여러번 독일의 요청에 따라 독일군과 레닌그라드의 라도가 호수 보급로 및 소련 피난민 대피로인 '생명의 길' 폭격 작전을 비롯해 소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만네르헤임은 영토 수복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공세에 참여하지 않았다.
핀란드군은 나치 독일과 함께 무르만스크와 레닌그라드를 지키던 소련군과의 전투를 치렀고, 영국과의 공중전을 치르기도 했으며, 위와 같은 영미 연합군의 외교적인 압박을 받았다. 공식적으론 핀란드가 독일군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므로 미국, 영국 등의 연합군도 핀란드와 교전할 의무가 있었고 실제로 영국은 핀란드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핀란드군 장병들이 "이제 영국 신사 양반들과 싸워야 하니 군복도 제일 깨끗한 것으로 입어야 하나?"라고 이죽거렸다는 야사가 있다. 유일한 교전사례로 1941년 7월 30일 영국 전투기들이 키르케네스와 페차모에 공습을 가한 적이 있는데 이 공습은 16기의 전투기를 잃고 성과없이 끝났다.
핀란드는 계속전쟁 기간동안 이전에 빼앗긴 동 카렐리야 지역을 되찾고 1944년까지 유지했다. 하지만 소련이 미국의 쇼미더머니에 힘입은 지원과 자체적인 역량을 발휘해 전세를 뒤집고, 1944년 6월 바그라티온 작전과 병행해 진행된 소련군의 일제공세에 그 동안 유지되던 방어선이 뚫리면서 핀란드는 동 카렐리야[4] 를 다시 내주게 된다. 현 핀란드 동쪽의 국경선이 인위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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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의 전황.
이미 독일도 싹 밀려버린데다 자신들도 체급 차이로 인해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진 핀란드는 필사적으로 외교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독일의 도움으로 전쟁에 나섰지만 공식적으로 독일과 동맹 관계는 아니었고 다만 1944년 6월에 독일의 요구로 방위조약을 체결했는데, 리스토 뤼티 당시 핀란드 대통령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의 이름으로 체결되어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핀란드 의회와 뤼티 대통령, 만네르헤임은 합의를 통해 뤼티를 퇴임시키고, 만네르헤임이 대통령직에 올라 "방위조약은 뤼티 대통령 개인의 이름으로 체결된 것이다"라는 이유로 독일과의 방위조약을 파기하고 소련과 평화 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냈다.
핀란드는 그 대가로 핀란드 영토에 남은 독일 파견군이 노르웨이로 후퇴하며 분탕질을 치는 통에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라플란드 전쟁을 치러야 했다.[5] 어쨌든 독일 편에 붙었다가 패배했으므로 핀란드는 소련에 6억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6] 을 지불했으며, 포르칼라 임차, 동 카렐리야와 페차모 일대의 완전 할양 등 추가적인 영토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소련은 평화 협정 이전까지 핀란드에게 무조건 항복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핀란드 소비에트 정권을 세울 계획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소련은 핀란드전의 교훈을 기억하고 있었고 나치 독일을 완전히 밀어붙이는데 주력군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핀란드에 지나치게 발이 묶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이렇게 좋지 않게 끝났지만, 핀란드는 만네르헤임이 외교력을 발휘해, 추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정치인들만 처벌되는 선에서 전후처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 한스 빈트 등 유명한 핀란드 에이스 전투조종사들은 사실 겨울전쟁이 아니라 이 계속전쟁에서 격추수를 쌓았다.
핀란드는 1942년 11월 8명의 유대인 난민을 발트의 에스토니아로 추방했다. 이들은 곧바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1명만이 살아남았다. 현재 헬싱키에는 이 때 희생된 8명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42년 7월 말 하인리히 힘러가 핀란드를 방문했는데, 당시 핀란드 총리 유카 랑겔과 힘러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요구를 전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재무장관 배이뇌 탄네르와 사회장관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은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유대인들을 독일에 팔아넘기는 것에 강경하게 반대해서,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길 경우 내각에서 사퇴하겠다고 통첩하는 한편 랑겔과 힘러의 밀실야합을 사민당 당보들을 통해 폭로했다. 하지만 이에 호응한 것은 좌파 언론들 뿐이었고 우파 언론들은 침묵했다.
결국 내무장관 토이보 호렐리(국민연합당)와 비밀경찰 발포[7] 총수 아르노 안토니가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고 자기들이 총대를 메고 결정하여 "형사범죄 혐의"가 있던 유대인 8명을 시범타 삼아 에스토니아로 추방시켰다. 당시 반공우파 정당이었던 국민연합당과 발포에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8] 탄네르와 파게르홀름은 빡쳐서 길길이 날뛰었고, 리스토 뤼티 대통령이 간신히 달래서 내각 사퇴는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사회민주당은 스웨덴의 페르 알빈 한손 총리(스웨덴 사회민주당)에게 부탁해 150여명의 유대인 난민들을 스웨덴을 통해 미국으로 탈출시켰다.
이 외에 핀란드와의 전투 중에 전쟁포로로 붙잡힌 유대계 소련인들이 포로수용소를 찾아온 게슈타포에게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렇게 넘어간 이들의 수는 39-74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 중 이름은 알려진 사람이 없다.
또한 겨울전쟁 이전에 핀란드 영토였던 서카렐리야 뿐 아니라 원래 러시아 땅이었던 동카렐리야를 완충지역 확보 목적으로 침공해 점령하고 군정청을 설치했는데, 핀란드의 동카렐리야 군정청은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러시아계 주민들을 수용했다.
- 핀란드어: Jatkosota
- 영어: Continuation War
- 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финская война (1941—1944), Советско-финский фронт, Война-продолжение
- 독일어: Fortsetzungskrieg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반인 1941년 6월 25일부터 1944년 9월 19일까지 계속된 핀란드와 소련의 전쟁. 보다 포멀한 명칭은 제2차 소련-핀란드/핀란드-소련 전쟁이다. 연속전쟁이라고도 한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제1차 소련-핀란드/핀란드-소련 전쟁의 후속 전쟁이다.
구 소련 및 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독소전쟁)의 일부로 본다.
2. 배경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고, 소련에게 영토의 11% 정도를 빼앗겼다. 그러나 소련은 전쟁 후에도 계속 핀란드를 압박했고, 이에 핀란드는 소련이 언제 침공을 재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미국 등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핀란드를 외면했다. 따라서 핀란드가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나치 독일 밖에 없었다.
독일은 독일대로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의 저력을 지켜본 후 급속도로 핀란드와 친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고, 소련에게 핀란드를 건드리면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핀란드가 고대하던 안전 보장을 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는 독일이 차후 소련을 공격할 것임을 알게 되었고, 양국은 계속되는 협상 끝에 동맹에 합의, 전쟁 개시를 앞두고 핀란드군은 급격하게 재무장하였다. 노르웨이에 있던 독일 산악군단 소속의 2개 산악사단도 핀란드 페차모로 들어왔다.[1]
3. 전개
3.1. 핀란드의 독소전쟁 참전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3일 뒤인 6월 25일 아침, 소련을 폭격한 독일군 비행기에게 연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기들이 핀란드 내 18개 도시를 폭격하면서 핀란드군도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다른 주장으론 핀란드 주둔 독일 산악사단이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시에 소련을 침공하면서 시작됐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듯 겨울전쟁의 후속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계속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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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의 전황.
3.2. 교착
핀란드는 전력의 열세로 전쟁기간 동안 목표였던 무르만스크 함락에는 실패했다. 무장친위대 산악사단이 1941년 11월 말 무르만스크 교외 30km까지 진격했지만, 아직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던 미국이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말라고 핀란드에게 요청하여 친위대의 진격을 보조해줄 핀란드군이 멈춤으로써[2] 이 부대의 진격도 멈췄다.[3] 사실 이 지역은 12월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지라 전쟁 중에도 동계기간 동안에는 대대급 이상의 대규모 부대기동이 힘들었다. 동계기간 동안 활동하는 육군 부대는 극소수의 정찰병들 뿐. 그리고 무르만스크는 미국의 렌드리스 전쟁물자가 소련으로 들어오는 항구였다. 만일 독일군(혹은 핀란드군)이 무르만스크를 점령하면 군수물자 수송이 대단히 힘들어지기 때문에 미국이 핀란드에게 진격 중지 요청을 한 것이다. 어차피 핀란드는 빼앗긴 자국 영토의 회복이 목적이지 굳이 미국과 적대할 이유가 없으니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
이후, 핀란드는 1941년부터 1944년까지 7개 사단 병력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참여해 독일 북부집단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지만, 주로 동카렐리야 전선 부근만 지키고 있었고, 여러번 독일의 요청에 따라 독일군과 레닌그라드의 라도가 호수 보급로 및 소련 피난민 대피로인 '생명의 길' 폭격 작전을 비롯해 소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만네르헤임은 영토 수복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공세에 참여하지 않았다.
핀란드군은 나치 독일과 함께 무르만스크와 레닌그라드를 지키던 소련군과의 전투를 치렀고, 영국과의 공중전을 치르기도 했으며, 위와 같은 영미 연합군의 외교적인 압박을 받았다. 공식적으론 핀란드가 독일군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므로 미국, 영국 등의 연합군도 핀란드와 교전할 의무가 있었고 실제로 영국은 핀란드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핀란드군 장병들이 "이제 영국 신사 양반들과 싸워야 하니 군복도 제일 깨끗한 것으로 입어야 하나?"라고 이죽거렸다는 야사가 있다. 유일한 교전사례로 1941년 7월 30일 영국 전투기들이 키르케네스와 페차모에 공습을 가한 적이 있는데 이 공습은 16기의 전투기를 잃고 성과없이 끝났다.
핀란드는 계속전쟁 기간동안 이전에 빼앗긴 동 카렐리야 지역을 되찾고 1944년까지 유지했다. 하지만 소련이 미국의 쇼미더머니에 힘입은 지원과 자체적인 역량을 발휘해 전세를 뒤집고, 1944년 6월 바그라티온 작전과 병행해 진행된 소련군의 일제공세에 그 동안 유지되던 방어선이 뚫리면서 핀란드는 동 카렐리야[4] 를 다시 내주게 된다. 현 핀란드 동쪽의 국경선이 인위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3.3. 독일의 패망과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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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의 전황.
이미 독일도 싹 밀려버린데다 자신들도 체급 차이로 인해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진 핀란드는 필사적으로 외교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독일의 도움으로 전쟁에 나섰지만 공식적으로 독일과 동맹 관계는 아니었고 다만 1944년 6월에 독일의 요구로 방위조약을 체결했는데, 리스토 뤼티 당시 핀란드 대통령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의 이름으로 체결되어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핀란드 의회와 뤼티 대통령, 만네르헤임은 합의를 통해 뤼티를 퇴임시키고, 만네르헤임이 대통령직에 올라 "방위조약은 뤼티 대통령 개인의 이름으로 체결된 것이다"라는 이유로 독일과의 방위조약을 파기하고 소련과 평화 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냈다.
핀란드는 그 대가로 핀란드 영토에 남은 독일 파견군이 노르웨이로 후퇴하며 분탕질을 치는 통에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라플란드 전쟁을 치러야 했다.[5] 어쨌든 독일 편에 붙었다가 패배했으므로 핀란드는 소련에 6억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6] 을 지불했으며, 포르칼라 임차, 동 카렐리야와 페차모 일대의 완전 할양 등 추가적인 영토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소련은 평화 협정 이전까지 핀란드에게 무조건 항복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핀란드 소비에트 정권을 세울 계획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소련은 핀란드전의 교훈을 기억하고 있었고 나치 독일을 완전히 밀어붙이는데 주력군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핀란드에 지나치게 발이 묶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이렇게 좋지 않게 끝났지만, 핀란드는 만네르헤임이 외교력을 발휘해, 추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정치인들만 처벌되는 선에서 전후처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 한스 빈트 등 유명한 핀란드 에이스 전투조종사들은 사실 겨울전쟁이 아니라 이 계속전쟁에서 격추수를 쌓았다.
4. 핀란드의 유대 및 러시아인 탄압
핀란드는 1942년 11월 8명의 유대인 난민을 발트의 에스토니아로 추방했다. 이들은 곧바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1명만이 살아남았다. 현재 헬싱키에는 이 때 희생된 8명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42년 7월 말 하인리히 힘러가 핀란드를 방문했는데, 당시 핀란드 총리 유카 랑겔과 힘러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요구를 전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재무장관 배이뇌 탄네르와 사회장관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은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유대인들을 독일에 팔아넘기는 것에 강경하게 반대해서,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길 경우 내각에서 사퇴하겠다고 통첩하는 한편 랑겔과 힘러의 밀실야합을 사민당 당보들을 통해 폭로했다. 하지만 이에 호응한 것은 좌파 언론들 뿐이었고 우파 언론들은 침묵했다.
결국 내무장관 토이보 호렐리(국민연합당)와 비밀경찰 발포[7] 총수 아르노 안토니가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고 자기들이 총대를 메고 결정하여 "형사범죄 혐의"가 있던 유대인 8명을 시범타 삼아 에스토니아로 추방시켰다. 당시 반공우파 정당이었던 국민연합당과 발포에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8] 탄네르와 파게르홀름은 빡쳐서 길길이 날뛰었고, 리스토 뤼티 대통령이 간신히 달래서 내각 사퇴는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사회민주당은 스웨덴의 페르 알빈 한손 총리(스웨덴 사회민주당)에게 부탁해 150여명의 유대인 난민들을 스웨덴을 통해 미국으로 탈출시켰다.
이 외에 핀란드와의 전투 중에 전쟁포로로 붙잡힌 유대계 소련인들이 포로수용소를 찾아온 게슈타포에게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렇게 넘어간 이들의 수는 39-74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 중 이름은 알려진 사람이 없다.
또한 겨울전쟁 이전에 핀란드 영토였던 서카렐리야 뿐 아니라 원래 러시아 땅이었던 동카렐리야를 완충지역 확보 목적으로 침공해 점령하고 군정청을 설치했는데, 핀란드의 동카렐리야 군정청은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러시아계 주민들을 수용했다.
[1] 이와 연관되어서 무장SS 부대인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에 핀란드계 장병들이 입대하기도 했다. 이 핀란드계 장병들은 이후 핀란드 전선이 불리해지자 본국으로 복귀해서 핀란드군에 계속 복무했다.[2] 무르만스크 공략은 노르웨이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 2개 산악사단이 주축인 동시에 무장친위대 노르트와 핀란드군 2개 사단이 조공이었으며,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소련군이 적극적인 방어로 독일군에게 15%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안긴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모스크바 공방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미흡한 혹한기 대비에 따른 기동력 저하와 영국 및 소련 함대의 해상 봉쇄로 인한 보급난 등이 무르만스크 함락 실패의 근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3] 앞의 이유도 있지만 사실 핀란드에서 무르만스크까지 가는 길은 거의 대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다. 지도에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만 그게 동물들이 서로 쫓고 쫓기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이라 진격하기에도 매우 부담되었다.[4] 지금의 카렐리야 공화국 일대.[5] 핀란드의 배신에 분노한 독일군은 후퇴하면서 핀란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라플란드의 중심도시 로바니에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전후 먹고살 길이 없어진 로바니에미 시민들이 이곳을 산타마을로 포장해서 관광지로 삼게 된다.[6] 소련에 대한 배상 중에는 전쟁 중 파괴된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관저의 복구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소련군이 부순 것이다(...). 소련 공군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를 폭격할 때 오폭을 맞고 파괴된 것. 하지만 이걸 핀란드가 복구도 해줘야 했다.[7] Valtiollinen poliisi(국가경찰)이란 명칭의 줄임말. 현대 핀란드의 정보기관인 보안경찰국(수포)의 전신이기도 하다.[8] 소련과의 강화협상 이후 핀란드가 친소 국가가 되면서 발포는 나치 협조자, 사회민주당 같은 반소 좌파, 군부 인사들을 숙청하고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 시기의 발포를 소위 "red Valpo"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