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갱요

 

1. 개요
2.1. 소개
2.2. 작중행적
2.3. 가족 관계
2.4. 여담


1. 개요


1679년 ~ 1726년 1월 13일. 옹정제 시대의 장군. 옹정제가 옹친왕일 때 자신의 이복 누이를 측복진으로 보냈고 옹정제가 즉위하자 귀비인 여동생과 자신의 화려한 군공 덕으로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하지만 연갱요의 권세를 경계한 옹정제가 트집을 잡아 직위를 박탈하고 자살을 명하였고 옹정 4년에 죽었다. 죽고나서 가산이 몰수당했다.

2. 후궁견환전등장인물



'''后宮甄環传 등장인물'''
'''이름'''
'''연갱요 (年羹堯)'''
'''배우'''
손녕
'''민족'''
한족
'''거주지'''
북경
'''가족관계'''
<rowbgcolor#FFFFFF>아버지: 연하령
여동생: 화비
자녀: 연빈, 연부, 연흥
매제: 옹정제

2.1. 소개


손녕 役. 연하령의 아들이자 화비의 이복 오빠로, 막강한 군권을 가지고 있는 천섬 총독이다. 청해에 장군부를 두고 있으며 도성에 들어오면 문무백관이 모두 읍소할 정도. '''그리고 화비가 평하기를 자기보다 더한 성질머리의 소유자.'''
아이러니하게도 화비의 가장 큰 아군이자 가장 큰 짐이다. 아군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황제의 즉위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변방의 수많은 반란과 전쟁에서 승리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화비가 계속 실수를 저지르고 황제의 분노를 직격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연갱요라는 정치적 변수를 황제가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견환 왈 "연갱요가 있는 한 폐하도 연세란을 죽이지 못해, 군권이 황권보다 강하니까..."라고 말이다.
반대로 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화비가 임신을 하지 못한 것이 바로 연갱요 때문이다. 황제는 화비에게서 아들이 생긴다면 연갱요가 외척이 되어 제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화비는 결국 총애의 절정, 즉 자식을 낳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거기다 머리가 나쁜 건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자리를 망각한 채 황제 앞에서 굉장히 오만하게 군다. 그 화비마저도 당황할 정도.

2.2. 작중행적


1화의 맨 처음에서부터 옹정제 즉위 2등공신으로 봉해지며 등장한다. 연갱요는 공이 대단했고, 태후도 실력이 괜찮다며 인증을 했다. 실제로 마격 칸이 견환(당시에는 법명 막수)과 윤례에게 "연갱요가 있을 때에는 그나마 우리를 상대할 수 있었겠지."라 말하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실적도 꽤나 괜찮았다.
그러나 권력이 막강해질수록 오만방자함도 비례하게 되었다. 분명히 1화에서는 소배성 앞에서 겸손하게 "분부가 있으시오 공공?" 이랬던 사람이 이제는 황제 앞에서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당당하게 저지르고[1], 윤례 앞에서 일어서지 않거나 견환(당시 완귀인)에게 시비를 거는 등, 황족과 비빈들도 대놓고 우습게 본다. 민가를 헐어내어 왕부보다 더 큰 저택을 짓고, 매관매직에 황실의 의원을 마음대로 부르는 권력 남용까지 행사하는 등 방자함이 극에 달하지만, 그가 세운 공이 엄청난 데다 쥐고 있는 군권도 막강하여 황제도 차분히 기회만 노린다.
그러던 중에 연갱요는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10왕야 돈친왕 윤아와 결탁했다.이런 점을 보면 군사적인 능력은 어떻든 간에 정치적 능력과 처세술과 같은 다른 점은 무능해 보인다. 굉장히 단순무식한 화비조차[2] 돈친왕과 결탁하는 것은 연갱요에게 해가 되면 됐지 득이 되지는 않을 것을 아는데 말이다. 돈친왕이 그에게 군사를 요청한 전서구윤례에게 발각되고, 이어서 편지에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문자를 저녁부터 아침까지'''라고 오기한 것이 결정타였다.[3]

그렇게 연갱요가 몰락하면서 서서히 권력의 수족이 잘리고 직위를 강등당하다가, 결국 황제의 명으로 아들들은 참수형에 처해지고 연갱요 자신은 자살하는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화비 또한 견환을 테러하려다가 냉궁으로 유폐되었고, 자신이 유산하고 이후 자식을 가지지 못한 원인이 바로 황제였다는 사실을 견환에게 들으면서 자살하게 되었다.

2.3. 가족 관계


극중에서는 연갱요의 아들들 중 세 명이 언급된다. 장남의 이름은 연빈으로, 작중시점에서 이미 작호를 가진 걸로 보아 꽤 공을 세운 듯하다. 차남의 이름은 연부로, 화비의 말에 따르면 연갱요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고 탁자산 반란을 평정한 후 고모인 화비와 아버지인 연갱요의 요청으로 작호를 받게 된다.
연갱요가 애를 잘 가르쳤다고 황제가 칭찬하는 걸로 보아 아버지처럼 군사적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연갱요가 한참 교만을 떨 때 연부 역시 형 연빈과 함께 염전을 크게 벌여 폭리를 취해 눈밖에 났다. 그 외 연흥이라는 아들도 있는데, 연갱요가 일등공 작위를 빼앗기고 태보 직을 박탈당할 때 연부와 함께 파면당했다고 나온다.
훌륭한 시스콘으로, 화비를 매우 아끼는 듯하다. 1화부터 소배성에게 화비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첫 선을 보인다. 견환이 화비를 갈궈서 화비가 소심해졌다고 생각하자 "세란을 건드리는 것들은 그게 누구든 간에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고 협박으로까지 들릴 수 있는 돌직구를 견환 앞에서 날린다.
그리고 화비에게 추천받은 인사들은 자기가 한 번 쳐낸 적이 있어도 (물론 돈의 유혹도 있었겠지만) 받아줄 정도이다. 황제도 화비의 화려하고 값비싼 장신구를 보고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그야 연갱요가 뭐든 해주겠지" 라고 한 바 있다. 화비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궁 밖에서 의사를 부르겠다는 것도 연갱요의 배려이고, 실제로 연갱요를 진료한 의사가 화비에게 간다. 일찍이 화비가 얼굴에 굴리다 그대로 여답응에게 선물했던 안티에이징용 옥 역시 연갱요의 선물. 화비가 심미장을 견환이 방문했다고 생각해 낚인 일, 그리고 견환을 유산시킨 일로 벌을 받자 오빠로서 마땅히 자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화비 문제를 상소에 언급하며 어떻게든 해 주려고 했던 연갱요이다.

2.4. 여담


환관을 경멸하여 서북에서 자금성으로 잠시 돌아왔을 때, 황제와 화비와 같이 식사를 하다가 소배성에게 시중을 들게 한 적이 있었다. 소배성이 비록 환관이긴 하나 도태감이자 황제의 심복으로 감히 신하가 턱짓으로 부릴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는데도...
그밖에도 차를 올려도 외면하고, 의자를 갖다줘도 거들떠보지 않는 등 엄청나게 무시했다.
후궁견환전 드라마에서는 연갱요가 먼저 죽고 화비가 뒤따라 자결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원래 역사에서는 정반대로, 화비의 실제 모델인 돈숙황귀비 연씨가 1725년 12월 27일에 죽었고, 고작 약 2주 후인 1726년 1월 13일에 연갱요가 자결하게 된다.

[1] 황제와의 식사 당시 태감의 시중을 받지 않고 자기가 음식을 집어 먹었다. 그정도야 오랫동안 군을 통솔하며 변방에 나가있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동생이 당황하며 경고를 줬을 때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는 소배성에게 시중을 들라며 거만하게 명령했다. 황제는 그 오만방자함에 빡쳐 다른 태감이 덜어준 제비집 요리를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내팽겨친다.[2] 화비는 꽤 무식한 편으로 황제가 화비에게 "책은 잘 읽지 않는데 대답은 빠르구나."라고 애정을 담아서 깐 적이 있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궁중 내의 온갖 암투를 저질렀으니 총체적인 지능은 결코 떨어지는 편이 아니다.[3] 이는 무슨 말이냐면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말은 나랏일을 한다는 표현이 되겠지만 저녁부터 아침까지라는 말은 '''밤일을 한다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때문에 동생이 황제에게 오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며 '''이마가 찢어져서 피범벅이 될 정도로 머리를 찧으면서 절하는 소동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