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도갑사 해탈문
[image]
1. 개요
靈巖 道岬寺 解脫門. 조선 세조 3년(1457)에 왕명으로 건립을 시작하여 성종 4년(1457)에 낙성한 조선 초기의 산문(山門).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에 있는 도갑사[1] 에 있으며, 현재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영암 도갑사는 신라 헌강왕 6년(880)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후 수백여 년을 이어오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 정책으로 폐사지가 되어가던 중, 1457년 세조의 명으로 신미대사와 수미대사가 국가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로 중창하여 절을 다시 크게 일으켰다.
이때 작은 절이었던 도갑사에 966칸에 달하는 건물들이 들어섰다. 또한 상동암(上東庵), 하동암(下東庵), 남암(南庵), 서부도암(西浮屠庵), 동부도암(東浮屠庵), 미륵암(彌勒庵), 비전암(碑殿庵), 봉선암(鳳仙庵), 대적암(大寂癌), 상견암(上見庵), 중견암(中見庵), 하견암(下見庵) 등 암자 12곳을 새로 만들어, 도갑사는 이를 거느리는 대형사찰로 변모하였다. 이때 도갑사 입구에 산문인 해탈문 또한 지어졌다.
세조 3년(1457)에 중건을 시작한 해탈문은 기록에 따르면 성종 4년(1457)에 완공되었다.
3. 의의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함께 우리나라 산문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공포가 구조적으로는 고출목 같으나 형태는 출목으로 보이고, 또 대들보나 마루보 위에서 마루도리나 대들보를 지탱하는 포대공의 양식이 기둥머리에 있는 공포와 전혀 달라 마치 다포집 양식의 공포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다포집 양식 연구에 있어 1차적인 자료로 꼽힌다.
또한 중건이 있었던 세조시기에 있었던 숭불의식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으며, 정유재란과 6.25 전쟁, 1977년 화재 등 절의 건물들이 손상을 입고 절 전체가 소실될 위험이 있을 때마다 홀로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여 건축 연대만으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는 문화재이다.
4. 기타
2016년 2월부터 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 사이트를 통해 3차원 3D 영상으로 해탈문을 볼 수 있다.관련 뉴스 2012년부터 추진해온 국가사업으로 축적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한 뉴스에 따르면 아직 화재 보험 등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관련 뉴스 목조건물인 데다 1400년대부터 지금까지 큰 보수나 변화가 없는 오래된 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한 데도 대책이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5.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영암 도갑사 해탈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영암 도갑사 해탈문
- 향토문화전자대전 : 영암 도갑사 해탈문
- 미술백과 : 도갑사 해탈문
-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 도갑사 해탈문
- 두산백과 : 도갑사 해탈문
6. 국보 제50호
도갑사는 월출산에 있는 절로,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며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고 전한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수미·신미 두 스님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지었고,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절의 입구에 서 있다.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고,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으로,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