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

 




'''선각국사 | 先覺國師
도선 | 道詵'''

시호
신라 효공왕
요공선사(了空禪師)
고려 현종
대선사(大禪師)
고려 숙종
왕사(王師)
고려 인종
'''선각국사(先覺國師)'''
법명
도선(道詵)
성씨
김씨(金氏)

옥룡자(玉龍子) / 옥룡(玉龍)

연기(烟起)
생몰연도
827[1] ~ 898.03.10
1. 개요
2. 생애
3. 저서
4. 유해 발굴
5. 창작물
6. 같이 보기


1. 개요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고려부터 유행한 풍수지리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는 연기(烟起)이며 자는 옥룡자(玉龍子) 및 옥룡(玉龍)이다.
원효, 자장, 의상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 있는 여러 오래된 들의 최초 창건자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다.[2]

2. 생애


출가 전 속성은 김씨로 827년에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나 선각국사비에는 태종 무열왕의 서자 가문이라는 추측이 있다고 전한다. 어머니는 강씨. 841년(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846년에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태안사 혜철(惠徹) 화상 밑에서 수학했으며 큰 명성을 얻어 신승(神僧)이라고 불렸다.
864년(38세)부터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는데 언제나 제자 수백 명이 모여들어 그의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어찌나 명성이 높았는지 당시 신라의 임금헌강왕이 도선의 명성을 듣고 궁궐로 초빙하여 직접 법문을 들었을 정도였다.
도선대사는 승려로서보다는 한국의 음양풍수설(풍수지리)의 원조이자 대가, <도선비기>로 대표되는 예언가로 유명하다.[3] 도선대사가 예언가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가장 중요한 계기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했다는 이야기이다. <고려사> 고려세계에서는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의 내용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했는데 바로 연경궁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당시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왔다.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 하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인[4]

이 알려주자 세조가 급히 좇아가 만나보고는 마치 진작부터 안 듯 친밀해졌다. 그리고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조사하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은 임방(壬方, 북쪽)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그리고는 봉인한 봉투를 만들고 그 겉봉에다가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 그때가 당나라 희종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가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송악(현재의 개성특별시)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풍수지리에 대한 부분이 매우 유명하고 도선대사라는 사람이 전설적인 고승이다보니 도선대사의 풍수지리에 관한 이야기들과 도선대사에 대한 야사들도 많이 남아있다.
898년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이후 고려에서 현종이 가장 높은 고려 선종 법계인 '대선사', 숙종이 임금의 불교 스승인 '왕사', 인종이 최종적으로 '선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의종이 선각국사비를 세워 그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3. 저서


도선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책은 옥룡기, 도선비기, 삼각산 명당기 등이 있고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 등에 인용되어 나타나는 일부 구절들이 남아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예중 하나가 고려사 신돈 열전에서 도선비기에 "승려도, 속인도 아닌 자가 나라를 망친다."라고 적힌 구절을 가지고 공민왕 당시 정세운 등이 "이 구절은 지금의 신돈을 가르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이다. 또 조선시대 후기 사람 홍만종의 저서 순오지에 조선왕조건국에 관련된 도선의 예언이 실려 있다.

도선은 송악(개성)의 산천을 두루 돌아본 후에 이렇게 말했다.

"이곳이 앞으로 800년은 이 나라의 운수를 지탱할 곳이니 축하할 만한 일이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남쪽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한양삼각산(북한산)이 우뚝하게 넘어다 보였는데, 도선은 이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저 삼각산은 봉우리가 진방(辰方)에 있어 마치 도둑놈의 깃발처럼 되었으니 400년이 지나면 이 나라의 큰 운수는 장차 저 산 밑으로 옮겨갈 것이로다."라고 말하고는 돌개(石犬) 75마리를 만들어 진방을 향해 세워서 마치 도둑놈을 지키는 형세를 만들었다고 한다.

도선이 지었다는 예언서 <도선비기>에는 당연히 조선왕조 건국 이후의 사실들도 예언이 되었고, 당연히 조선왕조는 이를 껄끄럽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라.'고 명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 외에도 실록에는 성종 즉위년(1469) 12월 9일자 기사에 성종은 도선이 썼다고 하는 도선비기를 전국에서 압수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도 있다.


4. 유해 발굴


1996년에 순천대학교 발굴팀이 옥룡사지를 발굴하던 하던 중, 도선국사의 부도탑 자리 밑을 파보니 석관이 있었고, 석관 뚜껑을 열어보니 오랜 세월 물에 잠긴 채로 인골이 나왔다. 유해가 물에 잠긴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제대로 연대측정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이든 남자의 유골이고 도선국사의 부도탑 아래에서 나왔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도선의 유해라고 추정했다.[5] 광양시는 도선의 유해와 부도탑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웠다.

5. 창작물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왕십리에 얽힌 야사를 다룬 23화에 등장한다. 야사대로 소를 끌고 가는 촌부로 나타나 지명을 묻는 무학대사에게 대궐터를 알려주고 사라진다. 뒤늦게 그 노인이 도선의 현신임을 알아차린 무학대사는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절을 올린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작품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 조연으로 등장. 이대로가 열연했다.[6] 극초반부에 궁예와 더불어 가장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준 인물로 수제자로 경보 스님을 두고 있으며 이 경보 스님도 후에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뒤 후백제의 왕사(王師)로 활약한다[7]. 수십년 뒤 미래의 일들을 손바닥처럼 내다보는 능력을 가졌으며, 서라벌에서 열린 법회 자리에서 맑은 하늘에 먹구름과 광풍과 번개를 일으키기도 했다.[8] 후에는 제자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건네주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실제보다 부풀려진 소문이 돌아 왕건이 난처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정작 문제의 예언서를 쓴 장본인은 자기이면서, 경보를 비롯하여 도선비기의 내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무지몽매한 것들이라며 면박을 준다. 그리고 18화쯤 아직 청소년이던 왕건을 세달사로 불러와서는 드디어 도선비기를 왕건에게 주는데, 문제는 이 책은 아무나 볼 수가 없다는 것. 도선 말로는 칼을 도적에게 주면 사람을 해치는 만큼, 아무에게나 도선비기의 내용을 알려준다면 세상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는 말 그대로 아무 내용도 없는 공책으로만 보인다. 때문에 왕건은 책을 보기 위해 수많은 수련을 거듭하였고, 19화에 이르어서야 드디어 진짜 내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는 금성을 공략할 때 언급되는데, 유력한 세력가였던 오다련을 회유하기 위해서는 그와 인연이 있던 옥룡사의 승려를 회유해야 했고. 마침 그도 도선의 제자였기에 도선이 쓴 책을 가져간 것. 이후 왕건은 궁예에게 금성 공략 작전을 설명하면서 도선비기를 활용했음을 언급했고, 은부와 종간은 이를 수습하여 그 내용을 확인하기를 바랐지만 궁예는 좋지 않은 일이라 하여 왕건에게 책을 태워 버리라고 명했다.
도선대사가 작중에서 행한 스포일러 목록(시간대순).
  • 송악에 집을 짓는 왕륭 앞을 지나갈 때 기장을 심을 자리에 삼을 심었다(명당자리에 집을 잘못 짓고 있다)며 혼잣말.
  • 도선비기 저술. 그 중에서도 "계림은 황엽(누런 잎)이요 송악은 청송(푸른 솔)이라"라는 구절이 계속해서 회자된다[9].
  • (궁예에게) "한쪽 눈으로 세상을 살다보니 천지가 반쪽으로 보이는 모양이로구나. 뜻은 이루겠으되 복이 박하니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최승우에게) "그대는 아마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일세", "한 가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머무는 곳엔 주인의 의자가 없다는 것이야."
  • (범교에게) "궁예의 역할은 삼한의 참 주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 (왕건을 찾아가는 강비를 보며 혼잣말) "그대들은 인연이 아닌 즉, 아름다운 꽃이 피눈물에 젖겠구나."
그런데 왕건에 대한 예언들은, 그 예언들이 나왔다는 말 자체가 예언들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을 줬다는 특징이 있다. 가령 종간은 자신의 관상뿐만이 아니라, 저 예언 때문에 끊임없이 왕건을 견제하고 죽이고자 했는데, 이는 결국 태봉국의 멸망으로 간접적으로 이어진다.

6. 같이 보기


[1] 500년 뒤에 무학대사가 태어났다.[2] 다만 다른 전설적인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해당 사찰들의 역사와 가치를 과장하기 위한 허구이다. 만약 사찰 경내에 신라식 3층 석탑이나 당간지주가 있거나 삼국유사 등 당대 기록에 가까운 사서에 기록이 있다면 기나긴 역사성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 해도 도선이나 원효 등이 그 많은 사찰을 일일이 창건하기에는 그렇게 전해지는 사찰이 전국에 지나치게 많기도 하다.[3] 전설에 따르면 지리산에서 수도하던 시절에 이인(異人)을 만나 풍수지리를 배웠다고도 하고 당나라에 유학하여 풍수지리를 배웠다고도 하지만 도선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했다는 전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이인을 만났다는 것은 증명할 방법이 없다. 당시 풍수지리 이론은 당나라에서 성했는데 스승 혜철 화상이 당나라에 유학했기 때문에 혜철 화상에게서 풍수지리도 배우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다.[4] 위숙왕후 한씨. 선각국사비엔 왕후가 아닌 청의를 입은 자가 알렸다고 한다.[5] 부도탑 밑에서 승려의 유골이 나왔다고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승려가 죽었다 해서 반드시 화장을 하지는 않았다. 화장은 나무가 충분히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돈이 많이 드는 장례법이다. 그래서 승려의 시신을 땅에 묻고 그 위에 탑을 세워 묘비를 대신한 경우도 흔했다.[6] 그리고 이대로는 이후 야인시대에서는 극우 테러리스트 단체 백의사 단장 염동진을 맡게 되며, 합성물에서는 이를 배우개그로 엮기도 한다. 가령 전생에는 머리가 없는 대신 두 눈이 멀쩡했으나 환생할 때 풍성한 머리와 두 눈을 바꿨다는 식으로.[7] 여담으로, 이 경보라는 승려도 실존 인물이다. 다만 작중에서는 스스로 알아서(?) 귀국한 것과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견훤의 도움을 받아 귀국했는데, 당시 중국에서 유학하던 승려들이 대부분 왕건의 지원을 받아서 돌아온 반면 경보만은 견훤과 연이 있었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실제로도 작중에서처럼 후백제의 왕사가 된 것이 바로 그 때문.[8] 태조 왕건 스트리밍을 KBS Drama Classic 채널에서 해줄 때 채팅창에서는 대사다르, 사이오닉 폭풍 드립을 쳤다.[9] 여담으로 도선이 아니라 최치원이 했다고 전해지지만, 최치원이 정계를 은퇴할 시점에 왕건은 궁예의 부하였을 뿐이며 그가 왕건을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도 없기에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