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승려)
信眉
15세기에 활동한 조선의 승려.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조선 초기의 승려. 본관은 영동(永同). 속명은 김수성(金守省). 유학자 김수온(金守溫)의 형이다. 정확한 생년을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세종 28년(1446)부터 기록이 나온다. 또한 성종 22년(1491)에 신미가 이미 세상을 떴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동생 김수온의 생몰년(1410~1481)을 감안하면 대략 1400년대(태종 재위기)에 출생하여 1480년대(성종 재위기)쯤에 사망한 듯하다. 90대에 세상을 떠난 효령대군이나 황희만큼은 아니더라도 70대 후반까지 산 것은 확실하니 당시로서는 꽤 장수한 셈이다.
언어학에 능통했다고 하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신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세종대왕의 눈에도 들었다. 그 덕택에 말년의 세종대왕에게 총애를 받으며 한글 보급 업무를 맡았고, 문종과 세조도 신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그 결과로 조선 초기 수많은 한글서적들이 신미의 손을 거쳐갔는데, 현존하는 주요 저서로는 능엄경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불설수생경, 사법어언해, 석보상절, 선종영가집언해, 원각경언해, 법화경언해,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창원 금룡사 입능가경 등이 있다.
다만 위 책 대부분을 신미 혼자 저술하진 않았다. 수양대군이 주도적으로 책을 저술했고 효령대군, 신미, 학조 등은 교정 또는 주해작업 정도를 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저평가될 일은 아니기에, 초기 한글 보급에 큰 도움을 준 승려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종이 말년에 유언을 남겨 문종이 즉위년(1452) 7월 6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내렸다. 신하들은 아무리 선왕(세종)의 뜻이라 하나 중에게 이런 칭호를 내림을 부당하다고 문종에게 상소했다. 특히 사대부들은 특히 우국이세(祐國利世)란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박팽년이 같은달 15일에 올린 상소에서# '우국이세(祐國利世)는 설령 조정의 장상(將相)이나 대신에게 주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논의를 해야 마땅한데, 이런 대단한 호칭을 늙은 중에게 주다니 당치도 않다.'고 주장한 데서도 조정의 여론을 알 수 있다. 우국이세(祐國利世)가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데, 유교국가에서 줄 수 있는 칭호로선 극찬이다. 다른 칭호는 모두 '불교적으로 대단하다.'는 뜻인데, 우국이세는 심지어 '유교적으로도 대단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더욱 조정의 대신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듯하다.
문종은 그해 8월 신미의 칭호에서 '우국이세'를 삭제하되 다른 글자를 덧붙여서 '대조계(大曹溪)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總攝) 밀전정법(密傳正法) 승양조도(承揚祖道) 체용일여(體用一如) 비지쌍운(悲智雙運) 도생이물(度生利物)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종사(惠覺宗師)'라고 하였다. 문종 나름대로 조정의 여론과 타협한 것이다.
제자 관리를 잘 못했는지, 학열에게 토지경작을 맡겼다가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통에 대간에게 까인 기록도 있다.
2019년 위서(僞書)인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바탕으로 한 한국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배우는 박해일. 영화 내용대로라면 신미가 한글을 다 창제했고 세종은 도장만 찍은 격. 신미가 한글 보급에 큰 기여를 하긴 했지만, 한글 창제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은 확증되지 않은 가설이라 논란이 되었다. 관련 기사 세종대왕, 신미 논란 모든 관련기록 정리글
다만, 한글을 세종대왕이 오로지 혼자서 만들었다는 세종대왕 친제설에 대한 의문은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나랏일만으로도 바빴을 세종대왕이 문자까지 혼자서 다 만들 수 있느냐.'는 것으로, 나름 합리적인 의문이긴 하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주도했으되 곁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 친제협찬설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동아시아 문자를 연구한 원로 국어학자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가 후반부에 자음 11자를 만드는 데 참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기사 하지만 정광 교수도 '''"한글 창제라는 민족사의 드라마에서 감독과 주연은 세종대왕이고, 신미(信眉) 스님은 훌륭한 조연일 뿐이다."'''라며 세종대왕이 주도했다는 기존학설을 기본적으론 부정하지 않는다.[1]
그런 점에서 영화 나랏말싸미가 전문가가 제기한 친제협찬설을 충실히 반영했다 보기도 어렵다. 친제협찬설은 '''알고 보니 조연이 신 스틸러다'''였다고 조연의 역할을 집중 조명한 것이라면, <나랏말싸미>는 조연배우를 주연배우로 소개해 사실 관계를 뒤틀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랏말싸미> 때문에, 굳이 한글을 만든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훌륭했던 위인인 신미를 애꿎은 감독이 욕 먹게 했다.[2]
또한 한글 창제에 관해 소수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본 뜻도 오해를 받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한글 창제자는 신미'라고 주장한다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논란은 영화 나랏말싸미 단체 관람을 주도한 불교계가 부추긴 부분이 크다. 당장 신미대사로 검색을 해 보면, 이 영화를 옹호하면서 신미대사를 띄우는 기사들은 모두 불교 언론에서 나왔다.
불교계는 학술적 견해를 근거로 한 비판도 기독교계의 음모, 나랏말싸미가 흥행하지 못한 것도 기독교계의 수작이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판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세종대왕 친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관객도, 영화의 설정이 억지스럽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한신대학교[3] 강진갑 외래교수는 기사를 통해, 세종대왕 친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친제협찬설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실제 세종대왕 치세에는 임금과 신하가 협력하여 국력을 융성하게 만들었는데, 영화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대립을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해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비판했다.
15세기에 활동한 조선의 승려.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1. 개요
조선 초기의 승려. 본관은 영동(永同). 속명은 김수성(金守省). 유학자 김수온(金守溫)의 형이다. 정확한 생년을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세종 28년(1446)부터 기록이 나온다. 또한 성종 22년(1491)에 신미가 이미 세상을 떴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동생 김수온의 생몰년(1410~1481)을 감안하면 대략 1400년대(태종 재위기)에 출생하여 1480년대(성종 재위기)쯤에 사망한 듯하다. 90대에 세상을 떠난 효령대군이나 황희만큼은 아니더라도 70대 후반까지 산 것은 확실하니 당시로서는 꽤 장수한 셈이다.
언어학에 능통했다고 하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신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세종대왕의 눈에도 들었다. 그 덕택에 말년의 세종대왕에게 총애를 받으며 한글 보급 업무를 맡았고, 문종과 세조도 신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그 결과로 조선 초기 수많은 한글서적들이 신미의 손을 거쳐갔는데, 현존하는 주요 저서로는 능엄경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불설수생경, 사법어언해, 석보상절, 선종영가집언해, 원각경언해, 법화경언해,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창원 금룡사 입능가경 등이 있다.
다만 위 책 대부분을 신미 혼자 저술하진 않았다. 수양대군이 주도적으로 책을 저술했고 효령대군, 신미, 학조 등은 교정 또는 주해작업 정도를 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저평가될 일은 아니기에, 초기 한글 보급에 큰 도움을 준 승려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종이 말년에 유언을 남겨 문종이 즉위년(1452) 7월 6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내렸다. 신하들은 아무리 선왕(세종)의 뜻이라 하나 중에게 이런 칭호를 내림을 부당하다고 문종에게 상소했다. 특히 사대부들은 특히 우국이세(祐國利世)란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박팽년이 같은달 15일에 올린 상소에서# '우국이세(祐國利世)는 설령 조정의 장상(將相)이나 대신에게 주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논의를 해야 마땅한데, 이런 대단한 호칭을 늙은 중에게 주다니 당치도 않다.'고 주장한 데서도 조정의 여론을 알 수 있다. 우국이세(祐國利世)가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데, 유교국가에서 줄 수 있는 칭호로선 극찬이다. 다른 칭호는 모두 '불교적으로 대단하다.'는 뜻인데, 우국이세는 심지어 '유교적으로도 대단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더욱 조정의 대신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듯하다.
문종은 그해 8월 신미의 칭호에서 '우국이세'를 삭제하되 다른 글자를 덧붙여서 '대조계(大曹溪)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總攝) 밀전정법(密傳正法) 승양조도(承揚祖道) 체용일여(體用一如) 비지쌍운(悲智雙運) 도생이물(度生利物)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종사(惠覺宗師)'라고 하였다. 문종 나름대로 조정의 여론과 타협한 것이다.
제자 관리를 잘 못했는지, 학열에게 토지경작을 맡겼다가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통에 대간에게 까인 기록도 있다.
2. 영화 나랏말싸미로 불거진 한글창제 논란
2019년 위서(僞書)인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바탕으로 한 한국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배우는 박해일. 영화 내용대로라면 신미가 한글을 다 창제했고 세종은 도장만 찍은 격. 신미가 한글 보급에 큰 기여를 하긴 했지만, 한글 창제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은 확증되지 않은 가설이라 논란이 되었다. 관련 기사 세종대왕, 신미 논란 모든 관련기록 정리글
다만, 한글을 세종대왕이 오로지 혼자서 만들었다는 세종대왕 친제설에 대한 의문은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나랏일만으로도 바빴을 세종대왕이 문자까지 혼자서 다 만들 수 있느냐.'는 것으로, 나름 합리적인 의문이긴 하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주도했으되 곁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 친제협찬설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동아시아 문자를 연구한 원로 국어학자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가 후반부에 자음 11자를 만드는 데 참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기사 하지만 정광 교수도 '''"한글 창제라는 민족사의 드라마에서 감독과 주연은 세종대왕이고, 신미(信眉) 스님은 훌륭한 조연일 뿐이다."'''라며 세종대왕이 주도했다는 기존학설을 기본적으론 부정하지 않는다.[1]
그런 점에서 영화 나랏말싸미가 전문가가 제기한 친제협찬설을 충실히 반영했다 보기도 어렵다. 친제협찬설은 '''알고 보니 조연이 신 스틸러다'''였다고 조연의 역할을 집중 조명한 것이라면, <나랏말싸미>는 조연배우를 주연배우로 소개해 사실 관계를 뒤틀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랏말싸미> 때문에, 굳이 한글을 만든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훌륭했던 위인인 신미를 애꿎은 감독이 욕 먹게 했다.[2]
또한 한글 창제에 관해 소수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본 뜻도 오해를 받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한글 창제자는 신미'라고 주장한다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2.1. 불교계의 문제점
이 같은 논란은 영화 나랏말싸미 단체 관람을 주도한 불교계가 부추긴 부분이 크다. 당장 신미대사로 검색을 해 보면, 이 영화를 옹호하면서 신미대사를 띄우는 기사들은 모두 불교 언론에서 나왔다.
불교계는 학술적 견해를 근거로 한 비판도 기독교계의 음모, 나랏말싸미가 흥행하지 못한 것도 기독교계의 수작이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판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세종대왕 친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관객도, 영화의 설정이 억지스럽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한신대학교[3] 강진갑 외래교수는 기사를 통해, 세종대왕 친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친제협찬설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실제 세종대왕 치세에는 임금과 신하가 협력하여 국력을 융성하게 만들었는데, 영화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대립을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해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비판했다.
따라서 이를 무조건 기독교계의 음모라느니, 주장을 하는 사람이 기독교 재단 소속 교수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원천봉쇄의 오류일 뿐이다.또 이 영화는 세종과 신하의 관계를 대립을 넘어 서로 무시하는 것으로 설정하였고, 이를 영화 갈등 구조의 중심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세종 시대는 한글 창제를 제외하고 왕과 신하가 협력하여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국력을 가장 융성하게 만든 시대이다.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언어학자와 종교학자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 거쳤다고 하였으나 세종시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당시 시대상과 맞지 않는 장면이 계속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점들이 관객들의 영화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가 관객에게 정반대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감독의 상상력과 연출의 한계로 초래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갑 교수
[1] 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신미의 이름을 들은 때가 1446년, 만난 때가 1450년'이라고 밝힌 내용과 배치되기 때문에 근거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2]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언급하듯이, 아무리 좋은 글자라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으면 그냥 말짱 꽝이다. 나중에 후대의 조선 백성들이 대부분은 언문(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면, 한글 보급에 큰 기여를 한 것이 큰 공인데 나랏말싸미 탓에 안 먹어도 되는 욕을 먹고 있다.[3] 한신대학교는 기독교(개신교) 재단 대학으로서는 드물게 타 종교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