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

 


'''예후'''(Jehu, 재위기간: BC 841년경~BC 814년경)
'''예후 왕조의 막을 연 왕'''
성경의 등장인물로 성경 이외의 기록에도 나오는 엄연한 실존인물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은 성경 기록의 사실성과는 유무로 다들 실존인물이었다.
예후는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로, 군 사령관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9대 왕 여호람(요람)이었는데, 그는 아합의 아들이었다. 구약성경 열왕기에 따르면, 아합은 여호와가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숭배를 전국에 퍼뜨린 악한 왕이었다. 그래서 선지자 엘리사는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1] 아합 왕가를 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후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예언자는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말씀을 전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야훼의 백성을 다스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다. 내가 이세벨의 손에 죽은 예언자들뿐 아니라 나의 모든 종들의 원수를 갚으리라. 그러니 너는 네가 섬기던 아합의 가문을 쳐부수어라. 내가 아합 가문에 속한 사내 녀석들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씨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리라. 그리하면 아합의 온 가문이 망하리라. 나는 아합의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이나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가문처럼 만들리라. 이세벨의 시체는 묻어주는 사람이 없어, 이즈르엘에 있는 제 땅에 버려져 개들이 뜯어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젊은이는 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열왕기하 9:6~9:10(공동번역성서)

예후는 그 명령에 따라 휘하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여호람 왕을 활로 쏘아 죽인다.[2] 그 후 아합 왕조의 사위가 되어 악을 행한 남유다 왕 아하시야를 처단한다. 그리고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죽이러 찾아갔다. 이세벨은 예후가 자기를 죽이러 찾아오는데 꽃단장을 하는 대범함을 보였고, 예후를 보자, 저주를 퍼붓는다.

예후가 문에 들어서자 소리쳤다. "상전을 죽인 역적 지므리[3]

놈아, 그래 일이 잘 되었느냐?"[4]

열왕기하 9:31(공동번역성서)

예후는 자신이 포섭한 내시들을 시켜 그녀를 창문밖으로 던지게 하였고, 떨어져 죽은 시신의 위로 마차를 몰고 지나가 확인사살을 했다. 그래도 이전 왕족이었으니, 시신이라도 장례를 치러주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장례치르기 위해 수습한 시신은 머리와 손, 발 외에는 모조리 곤죽이 되어 육편으로 갈려나간지 오래였다(...) 그후, 아합 왕가의 왕족들을 숙청한 뒤,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는 철저한 혁명을 전개한다.[5][6] 열왕기에 따르면, 예후는 그의 자손이 북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낼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예후는 바알 신앙 대신에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 1세가 퍼뜨린 금송아지 숭배를 다시 회복하였고(북이스라엘에는 야훼가 바로 금송아지라는 왜곡된 야훼 신앙이 이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결국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이스라엘 영토가 아람에 의한 침공을 받는다. 예후는 죽은 후 북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에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여호아하즈가 11대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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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마누아사리두 3세 앞에 무릎꿇고 조공을 바치는 예후
성경 외의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아시리아 비석 중 하나인 ‘블랙 오벨리스크’에서 아시리아 왕 살마누아사리두(살마네셰르) 3세 앞에 엎드려 을 조공으로 바치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런데 자기 손으로 오므리 왕가를 다 죽인 예후가 이 비문에서는 ‘오므리의 자손 예후’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황상 정통성 문제를 없애기 위해[7] 예후가 속였을 가능성이 높다.
[1] 당시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운다는 의미였다. 당장 이스라엘 왕국의 사울과 다윗이 이런 방식으로 왕권을 인정받았다.[2]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죄로 엘리야에게서 신이 저주를 내릴 것이라 예언 받았는데, 이 때 자신이 한일이 아니라 아내 이세벨이 벌인 짓이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왕조의 멸망은 한대(代)가 늦춰질 것이라 예언한다. 그 예언대로 아들이었던 여호람 대(代)에 이르러 그의 왕조는 멸망하고 만다.[3] 공동번역성서 이외의 판본에서는 시므리.[4] 이게 뭔 얘기냐면 시므리 문서에서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바아사 왕조를 멸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지만 왕이 된지 불과 7일만에 오므리에게 찬탈당하고 죽었다. 즉 이 말은 "너도 찬탈했다가 1주일만에 죽은 시므리꼴 날꺼다." 라고 말한 것. 물론 예후 왕조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모든 왕조를 통틀어 최장수에 4대를 이어간 오므리 왕조보다 조금 더 많은 5대를 이어갔으니 완벽하게 빗나갔다.[5] 그 방법이 꽤나 무시무시한 것이 바알 숭배자들에게 바알을 모시는 제사를 크게 지낼 것이니 숭배자와 선지자, 성직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신전에 모이라, 안 오는 자는 죽인다고 공고를 냈고 바알 숭배자들은 예후가 자신들을 잘 대접할 거라 여겼는지 좋아라 바알 신전에 모였다고 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예후의 부하들이 정문을 틀어막고 병사들이 들이닥쳐 바알 숭배자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이후 신전 장식 등을 모두 부숴버리고 공중 변소로 바꿨다고 한다. 사실상 바알 신앙을 뿌리채 뽑아버린 셈이다.[6] 다만 바알 신앙은 이미 전대인 여호람 대부터 쇠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호람은 아버지인 아합이 세운 바알의 기념 기둥을 치웠고 때문에 아합과 이세벨에 비해서는 그리 큰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아무래도 금송아지 숭배는 비록 우상숭배기는 해도 어쨌거나 야훼를 대상으로 한 신앙이고 또 여로보암 1세 때부터 해온 일이니 거부감이 적었겠지만 바알은 아예 이방인 신이라 거부감이 많았을듯 실제로도 아합때도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 신앙과 맞짱 뜬 일화에서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군중들을 동원해 바알의 사제들을 죽였는데 이것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을지도[7] 비슷한 예로 조선에서도 중종반정 후 명나라에 "연산군이 병들어 스스로 동생에게 양위하고 시골에 은거했다."라고 명나라를 속였던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