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1. 개요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주로 활동한 예언자이다. 예언만이 아니라 기적들 또한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녹과 더불어 성경에 등장하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사람''' 중 하나이다. 그의 이름은 '야훼는 하느님이시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과 정교회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에서 기념하는 엘리야의 축일은 7월 20일이다.
2. 성경에 기록된 행적
'티스베 사람 엘리야'라고도 하는 엘리야의 행적은 열왕기 첫째 · 둘째에 잘 기록되어 있다.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 앞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가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건대,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몇 해 동안 이슬 한 방울도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요르단강 동편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지냈다. 전승이나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 동안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물어다주는 고기와 빵을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연명했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페니키아의 시돈으로 가서 나뭇가지를 줍던 한 과부를 만나게 된다.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음식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 과부는 자신의 집에는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마지막 기름과 밀가루 한줌으로 빵을 만든 뒤 그것을 먹고 자기 아들과 죽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엘리야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부탁대로 자신에게 먼저 음식을 대접한 과부에게 축복을 내려, 비가 다시 내릴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끊이지 않는 기적을 행하였다. 또 과부의 아이가 병으로 죽었을 때 하느님께 기도를 올려 아이를 다시 살아나게 한다. 이는 성경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구절로, 엘리야가 행한 이 기적들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페니키아인 과부에게 행해졌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아이가 엘리사라고도 한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후 엘리야는 아합 왕을 찾아가 그의 아내 이세벨이 데려온 바알과 아스타르테를 섬기는 사제 총 850명과 대결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 문서 참조. 대결 규칙은 제단을 쌓고 황소를 제물로 하되, 불은 붙이지 말고 자신이 믿는 신의 힘으로 불을 붙이는 쪽이 이긴다는 것이었다. 또 대결 장소로는 갈멜산(가르멜산)[2] 을 지정하고 북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곳으로 모아달라고 했다.
엘리야의 양보로 바알을 섬기는 사제들이 먼저 자기들 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황소를 잡아놓고 "바알신이시여" 하며 절뚝거리는 춤을 추면서 제단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면서까지 신을 외쳐 부른다.[3] 이렇게까지 한 것은 "바알은 신이니까, 더 크게 불러보아라.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지도 모르지. 외출 중인지 아니면 여행 중인지 혹은 잠이 드셨는지도 모르니 어서 깨워보게."[4] 라고 엘리야가 디스를 한 탓이었다. 대놓고 바보 취급한 셈.
아무런 응답은 없었고 엘리야의 차례가 돌아오자, 엘리야는 히브리 자손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로 제단을 쌓아 그 주위에 약 15리터 용량의 도랑을 파고 제단에 물을 부어 도랑이 차도록 붓는다. 이제 제물과 제단, 장작까지 흠뻑 적셔서 정상적인 수단으로는 전혀 불을 붙일 수 없도록 만든 후 엘리야가 하느님께 빌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흠뻑 젖은 황소를 불태운 것은 물론 제단의 돌과 도랑에 흐르는 물까지 태워서 없애버린다.[5] 이에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의 지시에 따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제들을 모조리 기손 시냇가로 끌고 가서 다 죽인다.[6]
현재 갈멜 산에는 이 일을 기념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거사를 끝낸 엘리야는 바닷가 근처로 가서 해변에 있는 언덕으로 시종을 7번을 왔다갔다 하게 했는데, 6번째까지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보고 일색이다가 7번째로 갔다온 시종이 "바다 건너편에 손만한 작은 구름 하나가 보인다"고 보고하자 엘리야는 그 시종을 아합에게 보내 폭우로 길이 막히기 전에 귀환길을 서두르라고 전하게 했으며, 과연 아합이 궁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고, 아합 왕이 수도 이스르엘로 돌아갈 때는 엘리야가 아합이 타고 있는 전차를 앞질러서 먼저 이스르엘에 도착하는 기상을 보여준다. [7]
아합이 그 아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을 얘기하자, 머리꼭지가 돈 이세벨은 사람을 보내 엘리야에게 "내일 네가 오늘 네가 죽인 그 선지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살해통첩에 놀란 엘리야는 남왕국의 브엘세바[8] 까지 몸을 피하고 이제 주님께 복종하는 자는 나 밖에 안남았다며 하느님에게 죽여달라고 기도한다.[9] 이때 하느님은 천사를 보내 빵과 물을 주어 먹이고, 아직 바알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를 7천명이나 남겨두었다고 위로하며 보살펴 주었다.
먹고 마시고 위로받고 해서 충분히 기력을 회복한 엘리야는 광야에서 하느님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다마스쿠스에 가서 하자엘을 새로운 시리아(아람)의 왕으로 세울 것과,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새로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울 것, 그리고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쿠데타 예언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계승한 후에 이루어지는데,[10][11] 쿠데타 세력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서 넣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는 열왕기하 2장에 있다. 엘리야는 "주님이 강을 건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신다 넌 이제 니 길을 가라"고 엘리사를 보내려 하지만 엘리사는 끝까지 따라가겠다며 3번 연거푸 엘리야를 따라온다. 그 후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밑에서 쉰다. 링크 이윽고 요르단에 이르자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요르단강을 치자 강물이 갈라져 건너갈 수 있었는데, 원하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엘리사가 자신의 능력의 2배를 받고 싶다고 말하자 "어려운 걸 원하는구나. 하지만 내가 사라지는걸 끝까지 켜보면 이루어질거고 아니면 안될거다"라고 말한 뒤에 승천한다. 엘리사는 스승이 떠난 슬픔에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외치고 엘리야가 남긴 옷으로 같은 기적을 행해, 강을 가르고 다시 돌아옴으로서 예언자 엘리야를 계승했음을 입증해보였다.
3. 엘리야는 어떤 모습으로 승천했는가?
엘리야는 불병거(chariot of fire, 불의 전차)를 '''타고''' 승천했다고 하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모든 일을 마친 후 엘리야는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그들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길을 가는데, 난데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다.'''
위 성경 원문에서 나오듯 ''불병거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떼어 놓는 역할만 했다.''
불병거를 부정하는 대부분의 사람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했다고 알고 있는 것은 개신교 찬송가(舊) 234장 <나의 사랑하는 책>의 가사에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라는 가사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바람 타고'로 수정되었다.
문제는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했다는 인식이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언급은 외국에서 나온 서적에도 존재하며, 이를 묘사한 고전 미술작품들도 무수히 많다.
또한 유명한 미국 흑인영가인 Swing Low Sweet Chariot이란 곡을 보아도 이런 인식을 확인할수 있다. 이 노래는 1862년 흑인 왈리스 윌리스(Wallis Willis) 에 지어져 포크시대에 수많은 유명한 가수들이 자신의 색깔로 불렀다.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했다는 인식 자체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리스도교 전반에 있었던 듯하다.
일례로,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한 밤 중 그리스도를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잡아와 그분을 심문할 때, 수제사장들 중 하나가 "그럼, 그대는 누구시오? 엘리야요? 엘리야는 병거타고 하늘로 승천했소!"라며 비아냥 거리는 장면이 있다.
따라서 잘못된 찬송가 가사 때문에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했다는 인식이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다소 박약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했다고 기록한 것은 사실이므로 불병거 이야기가 틀린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있으나, 그와 같은 인식 자체는 한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 것이다. 애초에 성경 본문 자체가, '탑승'이라는 병거의 기본 용도에 이끌린 나머지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병거 타고 올라갔다고 생각하기에 좋게끔 쓰여 있다.
웃기게도 불의 전차를 타고 승천했다는 인식 떄문에, 슬라브족 사이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는 엘리야를 슬라브 신화의 하늘과 천둥의 신 페룬(Perun)과 동일시했다. 슬라브 신화에서 하늘의 신은 불과 연관된 경우가 많기 때문.
4. 엘리야 승천, 그 이후
구약성경 맨 끝인 말라기서 3장 23절(공동번역성서 기준)에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되어 있는데,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마태오 복음서나 요한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 또는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본다. 특히 마태오 복음서 11장 13~14절에는 '''예수가''' "그런데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난다.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이다." 하고 말했다. 주류 해석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 즉 예언자의 대명사처럼 쓰였다는 것으로 넘어간다. 예수 불자론 및 원시 기독교에도 불교적 엣센스의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는 이것이 환생을 말한다고는 하는데... 별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자 몇몇 사람들이 "저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착각했다.
마르코 복음서[12] 와 루카 복음서[13] 에서, 예수가 기도를 위해 산에 올라갔을 때 모세와 함께 깜짝 출연하였다.[14] 예수는 기도하는 동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였고, 베드로와 몇몇 제자가 그 모습을 목격하고 그들이 환상에 의한 출현이 아닌 실제로 나타난 것으로 착각하였기에 그들이 묵을 천막을 치겠다며 말 할 정도로 몹시 놀랐다.
[1] 성서상의 표기이다. 보통은 예언자 일리야 페스비탸닌(Пророк Илия Фесвитянин)으로 언급된다. 인명으로 쓰이는 경우에는 주로 Илья(Ilʹjá)로 표기한다.[2] 가르멜 수도회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3] 바알 신앙에서 사제들이 바알에게 크게 기도드리는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는 우가릿 신화에서 엘이 바알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에 큰 상처를 내었기 때문이다. 바알이 오리엔트 쪽 신이다보니 인신공양이나 피를 쏟는 등의 고어한 방식으로 경배하고 기도드리는 방법이 존재한다.[4] 열왕기상 18장 27절(공동번역성서).[5] 가톨릭 제2경전 마카베오기 하권에는 느헤미야가 이 기적을 재현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는 나중에 우물에서 길어온 물이 나프타였다고 말한다. [6] 이 성경의 일화로 만든 CCM중 하나가 바로 2006년 천관웅 목사 2집 수록곡 <불을 내려주소서>이다. 비장한 본문 내용과는 달리 경쾌한 느낌의 곡.[7] 전차보다도 빨리 달린 것이 아니라, 전차 앞에서 왕을 호위해서 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8] 이스르엘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도 엄청난데, 브엘세바는 예루살렘에서 한참 남쪽에 있다. 유다의 남쪽 경계지역.[9]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 공동번역성서[10] 하사엘은 벤하닷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엘리사에게 찾아가서 왕이 될 것이란 예언을 듣고 벤하닷에게 돌아간 후 젖은 베개로 그를 질식사시켰다.[11] 예후는 아합의 아들인 요람(여호람)왕을 화살로 쏘아 죽인 뒤 시체를 나봇의 포도밭에 던지고 아하시야를 부상입혀 죽인 다음 이스르엘로 가 이세벨의 시종에게 명하여 이세벨을 창가로 집어던져 죽였다. 다른 버전으로 창가에서 이세벨이 고개를 내밀고 주인을 죽인 지므리가 제 명대로 살았느냐(=네가 지므리와 다른 게 뭐냐?)며 저주를 퍼붓자 "궁전 안에 나의 편은 없는가!"라고 외치자 시종들이 호응하여 이세벨을 밀어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후자가 개신교 성경의 버전. 이세벨이 땅에 추락사 하면서 피가 터져나와 온 사방에 튀었다고 한다. 어느 버전이든 이후 이세벨의 시체를 마차로 짓밟고 남은 건 개가 먹게 하였다고 한다.[12] 막9:2-3[13] 누17:10-19[14] <가톨릭 성가> 7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