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태영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함태영
咸台永 | Ham Tae-young
'''
<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출생'''
1873년 10월 22일
함경도 무산군 무산읍#
'''사망'''
1964년 10월 24일 (91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1가 396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묘역'''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3묘역-116
'''재임기간'''
제3대 부통령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강릉 함씨
'''부모'''
아버지 함우택, 어머니 원주 변씨
'''배우자'''
밀양 손씨(사별)[1]
진주 최씨(사별)[2]
고숙원(삼혼)[3]
'''자녀'''
함병철(1889 ~ 1947)
함병승(1896 ~ 1956)
함병창(1907 ~ ?)
함병욱(1911 ~ 1930)
함병조(1913 ~ 1966)
함병호(1923 ~ 1940)
함병돈(1925 ~ 1986)
함요한(요절)
함병소(1928년생)
함병춘(1932 ~ 1983)
'''학력'''
법관양성소 (졸업)
평양신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종교'''
개신교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체'''
약 167cm[4]
'''자'''
자경(子卿)
'''호'''
송암(松岩)

1. 개요
2. 일생
3. 가족 관계
4.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으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제2대 심계원(현 감사원)장과 제3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후 국민장이 거행되었으며, 1962년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묘소는 2004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애국지사 제3묘역-116)으로 이장되었다.

2. 일생


[image]
19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 당시 함태영.
e영상역사관 정부기록사진집 제3대 민의원 선거(5).
1873년 함경북도 무산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과 가문의 300여년간의 세거지는 전라북도 김제라 그를 김제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출처 이후 부친이 50대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을 시작하면서 그도 고향인 김제에서 한양으로 상경하였다. 1895년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듬해 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20대에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김홍륙의 고종 순종 독살 미수 사건에서 김홍륙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서 그를 무죄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민씨척족으로 부터 김홍륙을 역모로 다스리라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고종의 외압으로 인해서 다른 판사로 교체되었다.
1898년 10월 고종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함태영은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하였는데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으니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이후로도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직, 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법복을 벗어던지고 사인으로 돌아갔다. 1912년 4월 1일 일제는 그를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복직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이에 불응하여 휴직하고 같은 해 7월 21일자로 퇴직하여 일제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저항했다.#
이후, 개신교에 귀의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개신교 세력을 이끌고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3.1 운동의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신대학교 총장과 이사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제2대 심계원(현 감사원)장을 지냈다. 1952년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만기 재임하였다. 4명의 부통령들 중 유일하게 임기를 온전히 채운 부통령이다.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권유한 이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처음에는 고령을 이유로 고사했지만 계속되는 부탁에 결국 수락하고 출마한 것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1964년 별세하였다.

3. 가족 관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직한 함병춘대통령비서실장이 그의 막내아들이다. 함인섭 전 농림부장관이 맏손자이다.


4. 여담


  • 제국 개창도 전인 조선에서 벼슬길에 올라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부통령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굉장히 젊은 나이에 소년등과하여 91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 손녀가 되는 이화여자대학교 함정혜 교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이화여대에서의 특혜 논란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정유라에게 학사경고, 제적을 공지했다가 압력으로 지도교수 자리에서 밀려난 상태다. 함씨 가문이 연세대이화여대, 현대그룹까지 연결되어 있는 상황임에도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정유라 참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