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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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였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으며 정치인이며 언론인. 황해도 재령군 출생으로 호는 설산(雪山). 본관은 결성(結城).#
2. 생애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의 빈농가에서 장붕도(張鵬道)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둘째 형인 장덕준(張德俊) 역시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으며 훈춘 사건을 취재하다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1] 동생 장덕진(張德震)도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 정부 행동대원으로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 카지노를 털다 순사하였다.
서당을 다니다 1901년 연의 학교에 입학하며 신학문을 접했다. 1907년 14살에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더욱 기울었다. 생계를 위해 몇 년간 일본 영사관 역할을 하던 진남포이사청에서 급사로 일했다. 1911년 판임관 시험[2] 에 합격했으나, 임용을 포기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한다. 이 때 송진우, 김성수를 만났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 김규식과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일본에 가서 2.8 독립 선언에 관여하여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에 기여했다. 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여운형이 일본 당국의 도쿄행 요구에 수락하는 조건으로 장덕수를 통역으로 데리고 가겠다 하여 감금에서 해제, 일본을 다녀가기도 했다. 전일본 대학생 웅변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장덕수의 일본어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여운형이 "설산 형"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때 장덕수와 여운형은 가깝게 지냈다.
1920년 4월에 동아일보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부사장 겸 초대 주간을 맡았다.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울청년회, 상해파 고려 공산당 등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이 제공한 공작금을 장덕수가 빼돌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테러 위협에 시달리게 되고, 이로 인해 해외 상주 특파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1923년 4월 미국으로 떠나, 이후 13년 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오리건 주립대학교를 거쳐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부인 박은혜를 만나 결혼한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 발기인으로 그 설립에 참여하고 주필로 활동했다. 1934년 4월부터 9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주미 제5행서(뉴욕) 재무 위원을 잠깐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36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부사장으로 복귀하였으나, 귀국하자마자 8월 25일 터진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부사장직을 사임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기도 했다. 1938년 동아일보 취체역(대표 자리)으로 다시 복귀했으나, 그 해 9월 장덕수가 한때 활동했던 '동지회' 활동으로 '흥업 구락부 사건'[3] 에 연루돼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이와 동시에 "조선 민족 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보성 전문 학교에 제출하고 사직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장덕수는 '합법적인 공간'하에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흥업 구락부 사건 이후 사상 보국 연맹, 국민 총력 조선 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어용 단체에 참여해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 없이 많은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해버렸다. 이러한 흑역사로 인해 뒷날 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에 수록되었고,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에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결성하는데 커다란 활동을 했다. 1945년 9월부터 1947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한국민주당 외무 부장과 정치 부장을 지냈고, 1945년 11월에는 미군정청 조선 교육 심사 위원회 사범 교육 분과 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취체역(이사)을 맡았다.
3. 암살
1947년 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현실화되면서 미군정과 김구의 갈등이 심화됐다. 이승만 역시 미군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4] 미군정은 대신 장덕수와 한민당을 한국 정책의 파트너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장덕수와 이승만, 김구의 관계가 크게 틀어졌다. 공공연하게 암살설이 돌 정도였다. 여기에 이전부터 한민당과 앙숙이던 남조선로동당도 장덕수, 김성수, 김준연, 조병옥 등 한민당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된 일이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찮아지자 수도 경찰청장이자 한민당 당원이던 장택상은 장덕수에게 경호원 배치를 제안했으나, 장덕수는 사양한다.
12월 2일 장덕수가 한민당 간부들과 제헌 국회 공천 문제를 의논하고 있을 때 각각 경찰 제복과 검정 외투를 입은 두 청년이 찾아온다. 동대문 경찰서에서 왔다며 의심을 무마한 이들은 M1 카빈으로 장덕수를 두 차례 저격한다. 장덕수는 백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절명한다.
박광옥, 배희범 등 범인과 그 일당이 이틀 만에 체포됐다. 이들은 속한 대한 학생 총연맹은 김구가 총재로 있는 단체였다. 이로 인해 김구, 조소앙, 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세력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됐고, 그 중 일제강점기 때부터 김구의 측근으로 맹활약한 김석황은 체포됐다. 이전부터 합당 무산, 친일 문제, 미소 공동 위원회 참여 문제를 두고 한민당과 한독당은 갈등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의심은 짙어졌다. 특히 한민당-한독당 합당 반대파 중 최고 거물이었던 장덕수와 합당을 밀어붙이던 김구의 갈등은 잘 알려져 있었다. 결국 김구 역시 재판에 소환되는 등,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한국 독립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사실 이 때 김구 역시 공판에서 김석황이 "김구의 지시로 살해했다"고 증언하고 손정수, 조상항, 신일준의 증언도 일치하는 바람에 법적 위기에 놓였지만, 그런 사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빠져나갔다.
1948년 박광옥과 배희범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김석황 등 한국독립당 간부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된다. 박광옥과 배희범의 사형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집행된다. 이 때 김석황 역시 함께 사형되어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가 아닌가하는 음모론도 있다. 미소공위 참여를 통해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장덕수와 달리 이승만은 미소 공위 없이 조기 선거를 통해 자신이 집권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장덕수가 암살된 시점에서 두 사람 역시 긴장 관계에 있었다.
본래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했던 이승만과 김구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1947년 한때 김구가 이승만 등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동했다가 다시 완강한 단독정부 반대론으로 돌아서고, 방북하여 김일성과의 회담에 나섰던 것도 장덕수 피살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한 일이 결정적이었다.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 1973년작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배우 방수일이 연기했다.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한인수가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김성원이 연기했으며, 1994년 2월 20일자 <다큐멘터리 극장>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1] 한국 최초의 순직 언론인이다.[2] 지금의 7급 공무원,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하급 관료를 뽑는 시험이었다.[3] 수양 동우회 사건과 거의 같은 사건이다.[4]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이승만을 정계에서 제거하려 했을 정도였고 이에 격분한 이승만도 존 하지에 공공연히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