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폴란드 관계
1. 개요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의 관계.
2. 역사적 관계
2.1. 현대 이전
오스트리아는 독일,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시킨 나라라서 폴란드와 사이가 좋지 않다. 다만 오스트리아 치하의 폴란드인들은 독일 및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탄압을 덜 받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부터가 폴란드와 같은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이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고 빈체제가 들어서면서 폴란드의 분할이 공고화되었는데 개신교가 주류인 프로이센이나 정교회가 주류인 러시아에 비해서 오스트리아 치하의 폴란드인들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치하의 폴란드인들은 적어도 가톨릭 신앙만큼은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다만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1] 이 프로이센이나 러시아령 폴란드보다는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인들 간에 아예 갈등이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46년의 갈리치아 학살 사건이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과 근대국가 수립의 열망이 고조되어감에 따라 혁명이 터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도 특히 폴란드인 귀족과 식자층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해졌고, 1846년에는 갈리치아 지방의 중심도시인 크라쿠프에서 반합스부르크 봉기가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 갈리치아 지방은 연이은 흉작과 기아로 고통을 받았고 소작농과 폴란드 귀족 간에 분위기가 몹시 험악한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지역에서 폴란드 소작농들은 상류층이 일으킨 민족주의 봉기를 외면해버리고 오히려 봉기를 일으킨 귀족, 지주, 지식인 등을 오스트리아 정부에 넘겨버리거나 포상금을 받고 학살하기도 했다. 타르나우 인근에서만 2천명에 가까운 폴란드 봉기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
2.2. 현대
원수지간이었지만 종교개혁 및 프로이센의 성장에 따른 혼란의 와중에도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지켜냈다는 자부심만큼은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모두 매우 강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양국 가톨릭계는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내 폴란드계 주민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조상이 오스트리아령 폴란드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본토로 이주해온 경우다. 반대로 구 오스트리아령 폴란드 지역이었던 폴란드의 크라쿠프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이주해온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의 후손들이 소수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오스트리아인 정체성이 없는 일반적인 독일계 폴란드인들(특히 프로이센 왕국 국민의 후손들)과는 따로노는 경향이 강하다.
2.2.1. 반독감정 공유
폴란드와 오스트리아가 아무리 서로 사이가 안 좋아도 반독감정에 있어서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일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국가들로 폴란드와 오스트리아가 대표적일 정도다.
3. 관련 문서
- 오스트리아/외교
- 폴란드/외교
- 유럽연합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오스트리아/역사
- 폴란드/역사
- 커피 클럽[2]
- 오스트리아/경제
- 폴란드/경제
- 오스트리아/문화
- 폴란드/문화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