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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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이 터졌던 국가 중 하나인 프로이센
1848년, 유럽을 뒤흔든 일련의 혁명들. 빈 체제에 반항하는 전유럽적인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프랑스의 2월 혁명과 독일 및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3월 혁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혁명의 배경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나누어 봐야한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빈 체제 수립 이후 30년 가까이 억눌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의 불만이 극에 달해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1848년 당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극소수 계층을 차지하고 있었던 부르주아들의 전유물 격인 정치사상이었기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1] 결국 관건은 대중을 동원하는 여부였는데, 경제적 위기가 이를 해결해주었다. 이 시기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아직 산업화가 본 궤도에 오르기 전이었고 주요 산업이 여전히 농업이었는데 1847년부터 시작된 흉작은 농민들까지 혁명에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혁명의 불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1월에는 시칠리아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의 강압 통치에 항거하는 농민 중심의 민중 봉기가 폭발했고, 2월에는 루이필리프 1세의 7월 왕정에 맞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파리 시민들이 봉기,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프랑스 2월 혁명) 한번 일어나기 시작한 혁명은 걷잡을 수 없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3월에는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혁명이 폭발,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같은 독일 연방의 나라들에서도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헝가리인, 체코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이 잇따라 봉기해 독립을 요구했다. 특히 헝가리에서는 러요시 코슈트가 독립선언과 함께 공화정을 선포하였고 헝가리 독립군은 오스트리아군과 황제에 충성하는 크로아티아[2] 총독 옐라치치의 군대를 무찌르고 헝가리 전역을 장악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군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분열을 호기로 삼아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북부이탈리아 지역인 롬바르디아[3] -베네치아 왕국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 제국은 해체 직전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이곳 이외에도 혁명은 교황령, 토스카나 대공국, 사르데냐 왕국, 영국령 아일랜드에서도 폭발했고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체코인의 주동으로 슬라브민족회의가 소집되어, 체코인과 폴란드인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과 영국 본토를 제외한 주요 유럽 열강에서 혁명 운동이 폭발했던 셈. 러시아와 영국에서 혁명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상이한데, 러시아의 경우 아직 사회구조가 농노해방도 이루어지지 않은 앙시앵 레짐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입헌군주제나 공화정 같은 사상을 추구하는 세력 자체가 극소수의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전무하다시피했다. 영국의 경우는 러시아와 정반대의 경우로 이 시기 단연 산업화의 선두주자였고 이미 대중들의 대부분은 농민이 아니라 노동자였기 때문에 흉년으로 인한 불만이 클래야 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영국은 이 시기 이미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확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의 불만조차도 없었다.[4]
혁명의 결과는 엇갈려 프랑스에서는 공화정이 수립[5] 되었으나 그 외의 지역에서는 혁명이 짓밟혔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1848년 12월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통치능력이 없는 백부인 페르디난트 1세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 혼란 상태에 놓인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듬해 11월, 러시아군이 헝가리에 개입하였다. 오스트리아군 20만과 헝가리군 20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군 20만이 오스트리아 편으로 참전하자 균형추는 한순간에 오스트리아군으로 기울게 되었으며, 헝가리의 독립전쟁은 결국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무참히 진압되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1850년대 소위 '바흐 절대주의(신 절대주의)' 시대로 전환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가장 애를 먹인 헝가리에 대한 보복을 잊지 않았다. 헝가리는 5개의 군관구로 재편되어 군정 치하, 쉽게 말해 '''계엄령'''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헝가리 공화국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처형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헝가리어의 사용과 교육은 금지되었고 독일어 교육과 독일계 이민자의 정착을 통해 헝가리 전역의 독일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20년 뒤 결국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도 더이상 구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타협하게 된다.
여담으로 오스트리아는 이때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불과 5년 뒤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편을 들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 통수 덕분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크게 틀어져 버렸다. 러시아는 이를 잊지 않고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 편을 들어줘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가 축출당하는 데 기여한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가 선택한 타개책이 바로 위에서 나온 헝가리와의 대타협.
독일 연방에서는 1849년 프로이센에서 오스트리아의 혁명이 일시 성공한 틈을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자유주의 헌법을 수용하는 등 여러 제후국에서도 혁명이 성공하는듯 했으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입헌과정에서 소독일주의 대독일주의와 세습황제파 선출황제파 공화제파의 병림픽이 오래 지속되면서 군주제주의자들이 반격하여 혁명이 진압되었다. 이미 혁명이 용도폐기된 시점에 프로이센 국왕에게 황제관을 바쳤지만 '돼지들의 머리에나 어울리는 관'이라는 빈정거림과 함께 거부 당했다.[6]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라데츠키[7] 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참패해 국왕이 퇴위하는 일이 일어났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은 교황령에서 교황 비오 9세를 축출하고 일시적으로 로마 공화국(이탈리아 공화국)이 수립하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교황령 자체는 21년 뒤 찾아온 리소르지멘토에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1848년 혁명은 분명히 초기 단계에서는 성공적이었다. 1789년의 기억을 생생히 지니고 있던 구체제의 군주들이 식겁을 하며 황급히 퇴위하였기 때문. 그렇지만 상술되었듯이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혁명은 실패하고 구체제가 복귀하였으며, 그나마 공화정이 유지된 프랑스 역시 몇년 지나지 않아 다시 제정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혁명이 급속히 실패로 돌아간 가장 큰 원인으로 역사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꼽히는 것은 부르주아와 대중 사이의 분열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주아 출신의 자코뱅과 대중들이 주축이 된 상퀼로트의 연합에서 보이듯이 본디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은 그것이 설령 동상이몽일지언정 정치적으로는 동맹관계였다. 이는 부르주아들의 자유주의 이념을 대신할 대중들 본인의 이데올리기가 부재했던 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몇주전에 발표된 공산당 선언이 상징하듯 1848년이 되면 공산주의를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사상이 꽃을 피기 시작하고, 대중들은 단순히 입헌군주제를 넘어서서 사회주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한 자코뱅/상퀼로트 연립정권의 공포정치를 경험한 바 있었던 부르주아들에게 이러한 대중들의 급진화 경향은 공포 그 자체였고, 결국 부르주아들은 대중들에게서 이탈하면서 결국 혁명은 동력을 잃고 말았던 것. 심지어 대중 안에서도 농민들은 여전히 열렬한 왕당파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성향을 지닌 대중들은 아직 소수였던 도시 노동자에 국한됐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의 상황이다. 7월 왕정이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부터 노동자들이 더이상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삼색기 대신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적기를 국기로 사용할 것을 요구한 것에서 보이듯이, 이미 민중들은 더 이상 단순히 부르주아들의 혁명을 위해 동원되는 객체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의 경우 공화주의 이념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구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들을 강하게 탄압하였고, 이러한 탄압은 수만의 사상자를 불러낸 노동자들의 1848년 6월 봉기[8] 를 야기한다. 다른 곳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전개됐다. 프랑스만큼이나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의식이 왕성했던 곳은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이었는데 여기서는 아예 부르주아지들이 입헌군주제를 포기하고 전제군주제의 부활을 수용하면서까지 대중들을 억압한다.[9]
헝가리에 이탈리아와 같이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던 곳 같은 경우에는 민족주의라는 대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부르주아들과 대중 사이의 연합이 크게 균열이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그 덕에 혁명이 거의 성공할 뻔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혁명이 진압되면서 정신을 추스린 구체제 지배층들에게 결국 무력으로 진압된다.[10]
비록 혁명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혁명의 결과 보수로의 회귀인 '빈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프랑스 혁명으로 고조되었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48년 혁명 이후 20년도 지나기 전에 유럽 전역에서 거부할 수 없는 대세[11] 가 됐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혁명 그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이 추구하였던 목표는 이루어진 셈. 에릭 홉스봄은 그래서 이 혁명을 놓고 '1848년 혁명의 실패로 유럽이 전환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부당하다. 유럽은 분명히 전환하였다. 단지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이 체제에 의해 억눌려 있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다시 개시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참고로 러시아는 혁명이고 뭐고 없고, 심지어 그 이듬해에 오스트리아에서 폭발한 헝가리 독립 운동 탄압을 지원해 '''14만'''[12] 대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흠좀무. 이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신성 동맹을 깨고 뒤통수를 치자 몹시 분개했는데, 러시아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내란 진압을 지원했으니 오스트리아를 우방으로 만들었다는 인식 하에서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이 폭발적인 확산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를 초래했으며, 반대로 민족국가였던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을 향해 달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둘 모두 프로이센의 제관 거부와 탄압,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민족통일의 움직임이 일단 좌절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유럽 열강 중 영국은 혁명의 여파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었지만, 참정권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이 시기 종말을 맞은 뒤 결국 '2개의 국민'을 통합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를 낳았다. 이 때문에 사실상 이 역시 하나의 혁명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랍의 봄과 유사점이 많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마르크스가 주창하는 세계 혁명이 연쇄적으로 발발한 첫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1848년 혁명이 터졌던 국가 중 하나인 프로이센
1. 개요
1848년, 유럽을 뒤흔든 일련의 혁명들. 빈 체제에 반항하는 전유럽적인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프랑스의 2월 혁명과 독일 및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3월 혁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전개
혁명의 배경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나누어 봐야한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빈 체제 수립 이후 30년 가까이 억눌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의 불만이 극에 달해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1848년 당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극소수 계층을 차지하고 있었던 부르주아들의 전유물 격인 정치사상이었기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1] 결국 관건은 대중을 동원하는 여부였는데, 경제적 위기가 이를 해결해주었다. 이 시기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아직 산업화가 본 궤도에 오르기 전이었고 주요 산업이 여전히 농업이었는데 1847년부터 시작된 흉작은 농민들까지 혁명에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혁명의 불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1월에는 시칠리아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의 강압 통치에 항거하는 농민 중심의 민중 봉기가 폭발했고, 2월에는 루이필리프 1세의 7월 왕정에 맞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파리 시민들이 봉기,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프랑스 2월 혁명) 한번 일어나기 시작한 혁명은 걷잡을 수 없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3월에는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혁명이 폭발,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같은 독일 연방의 나라들에서도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헝가리인, 체코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이 잇따라 봉기해 독립을 요구했다. 특히 헝가리에서는 러요시 코슈트가 독립선언과 함께 공화정을 선포하였고 헝가리 독립군은 오스트리아군과 황제에 충성하는 크로아티아[2] 총독 옐라치치의 군대를 무찌르고 헝가리 전역을 장악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군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분열을 호기로 삼아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북부이탈리아 지역인 롬바르디아[3] -베네치아 왕국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 제국은 해체 직전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이곳 이외에도 혁명은 교황령, 토스카나 대공국, 사르데냐 왕국, 영국령 아일랜드에서도 폭발했고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체코인의 주동으로 슬라브민족회의가 소집되어, 체코인과 폴란드인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과 영국 본토를 제외한 주요 유럽 열강에서 혁명 운동이 폭발했던 셈. 러시아와 영국에서 혁명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상이한데, 러시아의 경우 아직 사회구조가 농노해방도 이루어지지 않은 앙시앵 레짐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입헌군주제나 공화정 같은 사상을 추구하는 세력 자체가 극소수의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전무하다시피했다. 영국의 경우는 러시아와 정반대의 경우로 이 시기 단연 산업화의 선두주자였고 이미 대중들의 대부분은 농민이 아니라 노동자였기 때문에 흉년으로 인한 불만이 클래야 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영국은 이 시기 이미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확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의 불만조차도 없었다.[4]
3. 결과
혁명의 결과는 엇갈려 프랑스에서는 공화정이 수립[5] 되었으나 그 외의 지역에서는 혁명이 짓밟혔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1848년 12월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통치능력이 없는 백부인 페르디난트 1세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 혼란 상태에 놓인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듬해 11월, 러시아군이 헝가리에 개입하였다. 오스트리아군 20만과 헝가리군 20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군 20만이 오스트리아 편으로 참전하자 균형추는 한순간에 오스트리아군으로 기울게 되었으며, 헝가리의 독립전쟁은 결국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무참히 진압되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1850년대 소위 '바흐 절대주의(신 절대주의)' 시대로 전환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가장 애를 먹인 헝가리에 대한 보복을 잊지 않았다. 헝가리는 5개의 군관구로 재편되어 군정 치하, 쉽게 말해 '''계엄령'''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헝가리 공화국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처형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헝가리어의 사용과 교육은 금지되었고 독일어 교육과 독일계 이민자의 정착을 통해 헝가리 전역의 독일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20년 뒤 결국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도 더이상 구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타협하게 된다.
여담으로 오스트리아는 이때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불과 5년 뒤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편을 들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 통수 덕분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크게 틀어져 버렸다. 러시아는 이를 잊지 않고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 편을 들어줘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가 축출당하는 데 기여한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가 선택한 타개책이 바로 위에서 나온 헝가리와의 대타협.
독일 연방에서는 1849년 프로이센에서 오스트리아의 혁명이 일시 성공한 틈을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자유주의 헌법을 수용하는 등 여러 제후국에서도 혁명이 성공하는듯 했으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입헌과정에서 소독일주의 대독일주의와 세습황제파 선출황제파 공화제파의 병림픽이 오래 지속되면서 군주제주의자들이 반격하여 혁명이 진압되었다. 이미 혁명이 용도폐기된 시점에 프로이센 국왕에게 황제관을 바쳤지만 '돼지들의 머리에나 어울리는 관'이라는 빈정거림과 함께 거부 당했다.[6]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라데츠키[7] 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참패해 국왕이 퇴위하는 일이 일어났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은 교황령에서 교황 비오 9세를 축출하고 일시적으로 로마 공화국(이탈리아 공화국)이 수립하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교황령 자체는 21년 뒤 찾아온 리소르지멘토에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4. 왜 실패하였는가?
1848년 혁명은 분명히 초기 단계에서는 성공적이었다. 1789년의 기억을 생생히 지니고 있던 구체제의 군주들이 식겁을 하며 황급히 퇴위하였기 때문. 그렇지만 상술되었듯이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혁명은 실패하고 구체제가 복귀하였으며, 그나마 공화정이 유지된 프랑스 역시 몇년 지나지 않아 다시 제정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혁명이 급속히 실패로 돌아간 가장 큰 원인으로 역사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꼽히는 것은 부르주아와 대중 사이의 분열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주아 출신의 자코뱅과 대중들이 주축이 된 상퀼로트의 연합에서 보이듯이 본디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은 그것이 설령 동상이몽일지언정 정치적으로는 동맹관계였다. 이는 부르주아들의 자유주의 이념을 대신할 대중들 본인의 이데올리기가 부재했던 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몇주전에 발표된 공산당 선언이 상징하듯 1848년이 되면 공산주의를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사상이 꽃을 피기 시작하고, 대중들은 단순히 입헌군주제를 넘어서서 사회주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한 자코뱅/상퀼로트 연립정권의 공포정치를 경험한 바 있었던 부르주아들에게 이러한 대중들의 급진화 경향은 공포 그 자체였고, 결국 부르주아들은 대중들에게서 이탈하면서 결국 혁명은 동력을 잃고 말았던 것. 심지어 대중 안에서도 농민들은 여전히 열렬한 왕당파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성향을 지닌 대중들은 아직 소수였던 도시 노동자에 국한됐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의 상황이다. 7월 왕정이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부터 노동자들이 더이상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삼색기 대신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적기를 국기로 사용할 것을 요구한 것에서 보이듯이, 이미 민중들은 더 이상 단순히 부르주아들의 혁명을 위해 동원되는 객체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의 경우 공화주의 이념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구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들을 강하게 탄압하였고, 이러한 탄압은 수만의 사상자를 불러낸 노동자들의 1848년 6월 봉기[8] 를 야기한다. 다른 곳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전개됐다. 프랑스만큼이나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의식이 왕성했던 곳은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이었는데 여기서는 아예 부르주아지들이 입헌군주제를 포기하고 전제군주제의 부활을 수용하면서까지 대중들을 억압한다.[9]
헝가리에 이탈리아와 같이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던 곳 같은 경우에는 민족주의라는 대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부르주아들과 대중 사이의 연합이 크게 균열이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그 덕에 혁명이 거의 성공할 뻔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혁명이 진압되면서 정신을 추스린 구체제 지배층들에게 결국 무력으로 진압된다.[10]
5. 의의
비록 혁명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혁명의 결과 보수로의 회귀인 '빈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프랑스 혁명으로 고조되었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48년 혁명 이후 20년도 지나기 전에 유럽 전역에서 거부할 수 없는 대세[11] 가 됐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혁명 그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이 추구하였던 목표는 이루어진 셈. 에릭 홉스봄은 그래서 이 혁명을 놓고 '1848년 혁명의 실패로 유럽이 전환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부당하다. 유럽은 분명히 전환하였다. 단지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이 체제에 의해 억눌려 있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다시 개시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참고로 러시아는 혁명이고 뭐고 없고, 심지어 그 이듬해에 오스트리아에서 폭발한 헝가리 독립 운동 탄압을 지원해 '''14만'''[12] 대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흠좀무. 이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신성 동맹을 깨고 뒤통수를 치자 몹시 분개했는데, 러시아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내란 진압을 지원했으니 오스트리아를 우방으로 만들었다는 인식 하에서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이 폭발적인 확산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를 초래했으며, 반대로 민족국가였던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을 향해 달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둘 모두 프로이센의 제관 거부와 탄압,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민족통일의 움직임이 일단 좌절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유럽 열강 중 영국은 혁명의 여파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었지만, 참정권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이 시기 종말을 맞은 뒤 결국 '2개의 국민'을 통합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를 낳았다. 이 때문에 사실상 이 역시 하나의 혁명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랍의 봄과 유사점이 많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마르크스가 주창하는 세계 혁명이 연쇄적으로 발발한 첫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1] 대중들이 참여하지 않은 혁명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다 처절히 진압된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도 묘사되는 1832년 6월 봉기가 대표적인 사례.[2]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봉기 당시 봉기에 가담하지 않고 합스부르크에 충성을 맹세하였고 이 공로로 봉기 진압 이후 프란츠 요제프가 크로아티아를 헝가리에서 떼어내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인들과 대타협을 맺고 오스트리아-헝가리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크로아티아가 다시 헝가리의 일부로 귀속되자 크로아티아에서 반발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헝가리 역시 크로아티아와 대타협을 맺고 크로아티아에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3] 밀라노 일대[4] 영국 내에서도 이 시기 차티스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긴 했는데, 별다른 급진주의 경향을 보이지 않고 유야무야됐다. 물론 영국의 높으신 분들은 차티스트 운동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이될까봐 노심초사했다만.[5] 하지만 그 공화정의 대통령은 별명이 '''왕자 대통령'''인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로, 얼마 안가 친위 쿠데타로 제2제정으로 전환한다.[6] 이후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갔고, 상당수가 남북전쟁에서 북부 연방군에 참가한다. 아예 카를 슈르츠(Carl Schurz)의 경우처럼 공화당에 입당, 연방군 장성을 지낸 다음 미국 내무부 장관까지 지내는 경우도 있었고.[7]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탈리아군을 무찌른 공로로 전쟁 영웅이 되었다. 그에게 헌정된 곡이 그 유명한 라데츠키 행진곡[8] 부르주아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6월 '폭동'.[9] 당연한 일이다. 부르주아들의 입장에서는 핏줄을 잘 타고났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는 왕족과 귀족들이 꼴보기 싫었겠지만, 왕정체제는 어쨌든 세금만 납부하면 자신들의 재산권은 보증해 주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권이 될 경우 재산권에 심각한 침해가 이루어질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국유화, 토지개혁 등) 시민들을 탄압한 것이다. 이는 훗날 냉전 시기에 서유럽, 미국에서 유학하며 민주주의를 체감한 후진국 엘리트들이 독재 정권을 옹호했던 이유와 똑같다.[10] 특히나 코슈트가 이끈 헝가리 독립 혁명의 경우 오스트리아의 자력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나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도와주는 바람에 결국 진압된다. [11] 융커가 권력을 독점한 독일 제국조차도 정치 권력을 융커들이 독점하였을 뿐이지 경제/사회적으로 보자면 부르주아가 헤게모니를 쥔다. 비록 명목상이지만 사사건건 총리와 대립한 라이히스탁이 좋은 예.[12] 20만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