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야마다 케이고
1. 개요
일본의 뮤지션. 시부야계를 창시하고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인물로, 헤이세이 시대 일본 음악에서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2. 상세
2.1. 학창 시절
가수 출신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중고일관교인 와코 중고등학교에 다니며 이지메, 절도와 같은 불량한 행동들을 저질렀고, 이에 대한 처분을 받는 와중에 오자와 켄지를 만났다. 이후 세츠 모드 세미나라는 미술학교에 재학하는 중 플리퍼즈 기타를 결성하였다.
2.2. 플리퍼즈 기타 시절
플리퍼즈 기타 항목 참고.
2.3. 코넬리우스 시절
1991년에 일본을 풍미했던 플리퍼즈 기타가 해체되고 난 뒤, 오자와와 오야마다는 각자 솔로 활동을 하게 된다. 오자와가 자신의 명의로 아름다운 가사의 소울팝을 내놓아 '시부야계의 왕자님'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반면, 오야마다는 자신이 하고 싶던 음악 활동을 하기 위해서 '코넬리우스'라는 1인 밴드를 창설하게 된다. 이름은 혹성탈출 시리즈의 침팬지 과학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음악성으로 인해 일본의 벡이라 불리우며 1997년 발표한 3집 'Fantasma'는 좋은 평가를 들으며 미국 진출에도 성공했다. 롤링 스톤 재팬 선정 100대 명반 10위에 꼽힐 정도의 명반.
2008년 6월 내한하려 했으나 취소되었다. 어느 팬에 의하면 코넬리우스 측의 특수 무대 장치 요구를 주최측에서 들어줄 수 없었고, 취소 후 티켓팅을 담당했던 업체에서는 사과의 의미로 센서스 앨범과 티셔츠를 보내준다고 했는데 쓸데없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앨범만 받고 티셔츠는 못받았다고 한다. 결국 2019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을 통해 내한에 성공하였으나 하술하는 논란이 터졌다.
시부야계 레이블인 '트라토리아'를 창설하여 시부야계 뮤지션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그의 연인이었던 카히미 카리가 대표적.
3. 음악 스타일
흔히 일본의 벡이라 불리는 뮤지션이나, 차이를 보인다. 벡이 난잡한 사운드를 정리된 노래로 만든다고 하면, 반대로 오야마다는 정리된 사운드를 난잡한 노래로 만든다고 보면 된다. 이것도 Fantasma ~ Sensuous 앨범까지의 중기 음악에 한정되며, 전기나 후기의 스타일과는 다르지만, 그를 가장 대표하는 스타일이다. 영화나 광고, 리믹스에는 중기 스타일을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전기의 사운드는 플리퍼즈 기타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될 정도지만 좀더 하드한 록 사운드가 첨가되어 있고 샘플링을 본격적으로 가미하기 시작했다. 듣기에는 오히려 더 무난하며 음반의 판매량이나 대중적 지지도도 THE FIRST QUESTION AWARD ~ 69/96 앨범 시절이 더 높다.
후기의 사운드는 MELLOW WAVES에서 시작되는, 보컬을 중시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전작보다 보컬의 비중을 늘렸다고 공표하였다.
그의 음악스타일 변화는 곧 시부야계의 정체성을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플리퍼즈 기타 시절에는 고전적인 서양팝의 이미지여서 '타지마 타카오', '노미야 마키' 등이 그에 해당되었으나, 코넬리우스 시절에는 일렉트로니카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나카타 야스타카, 판타스틱 플라스틱 머신, 토와 테이, 오사와 신이치가 여기에 해당하게 되었다.
4. 논란
4.1. 인성 논란
일본 음악계에서 인성이 좋지 않은 인물로 손꼽힌다. 그의 음악성은 대부분이 인정하지만, 그의 인성에 관해서는 팬조차도 상당히 비판을 할 정도이다.
학창 시절에는 이지메 집단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장애인인 동급생을 괴롭히고, 똥을 먹이는 등, 각종 괴롭히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다고 한다. 또한 쵸후역의 쇼핑 센터에서 약 '''100만엔''' 가량의 절도를 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학교에서 발각되어 결국 전 학생들 앞에서 사과를 하는데 당시 학생회장이 바로 오자와 켄지. 후에 플리퍼즈 기타를 결성하는 둘의 만남은 오야마다의 범죄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야마다에 의하면 오자와도 신주쿠역 동쪽출구 부근의 대형서점인 키노쿠니야에서 서적 절도를 저질렀지만 발각되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활동을 하면서는 형편 없는 매너가 보이기도 했다. 플리퍼즈 기타 시절에도 쇼핑센터가 문 닫는다는 이유로 인터뷰 끊어 먹기, 일본 디스크 대상 립싱크 공연에서 너바나와 같이 대놓고 립싱크 티내기, 일본 디스크 대상 시상식의 전화 연결에서 농담 따먹기를 하는 등, 파천황적인 행동을 벌였다. 이는 솔로 활동에서도 계속되어 공연 환경에 마음에 안 들면 공연을 빵꾸내는 등의 행동을 벌였다.
플리퍼즈 기타는 재결합의 기미가 없는 밴드 중 하나인데, 이는 바른 이미지의 오자와 켄지가 오야마다의 인성을 잘 알고 있어서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많다.
이런 인성에도 사카모토 류이치, 토와 테이, YMO 등 유명 뮤지션과 자주 협업을 가지는 것을 보면 그의 인성을 음악적 능력이 커버한다고 봐야 할 정도이다.
4.2. 펜타포트 욱일기 연상 영상 사용 논란
한국에서는 또다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바로 2019년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내한공연 당시 배경영상에서 욱일기가 연상되는 영상을 사용하였다는 것(관련 기사).
물론 한국의 기자들이나 네티즌이 원형을 중심으로 한 방사선 무늬를 모두 욱일기 문양이라고 갖다붙이는 문화가 있기도 하고, 주최측에서는 이를 60년대 교육영화에서 따온 영상이라고 하였다. 플리퍼즈 기타 시절 1991년 발매된 싱글 'Groove Tube'의 고전풍 뮤직 비디오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오야마다가 자주 쓰는 문양이기도 하다. 해당 사진을 보면 욱일기보다도 소용돌이, 혹은 007 시리즈의 총열이 더 연상될 정도.
문제는 해당 공연은 2019년 8월, 즉 한일무역분쟁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반일감정이 들끓어오르던 때였고, 안그래도 일본 뮤지션이 한국에 왔다는 것에 안 좋은 감정이 있는 데에 기름을 부은 것.
5. 디스코그래피
6. 기타
- 그 자신도 음악계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일본에서 저명한 뮤지션과 협업을 많이 한다. 사카모토 류이치나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하는 것이 대표적. 또한 YMO의 멤버였던 '타카하시 유키히로', 토와 테이, 덴키 그루브 출신의 '스나하라 요시노리' 등과 'METAFIVE'란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 영국 슈게이징 밴드 lush의 '미키 베레니'가 그의 6촌이다.
- 프렌치 팝 가수였던 '카히미 카리'[4] 와 연인이었고 그의 노래를 써주기도 하였으나 헤어졌다. '미네카와 타카코'라는 싱어송라이터와는 결혼도 하였으나 이후 이혼하였다. 미네카와에게서 낳은 아들 '오야마다 마이로'는 현재 모델로 활동 중이다.
- 공각기동대 ARISE의 OST를 작곡하였으며, 사카모토 마아야와 협업하여 싱글을 내기도 하였다.
- 게임보이 어드밴스용 퍼즐게임인 컬러리스의 음악을 맡기도 했다.
- 젊은 시절에는 그의 미성과 함께 미청년 가수로 유명했고, 시세이도의 남성 화장품 브랜드인 uno의 첫 CF모델이 되기도 하였다.(당시 CF) 오자와 켄지는 그에 비해 목소리도 두드러지지 않고 외모도 수수한 편이어서 후에 솔로로 성공하기 전에는 오야마다에게 묻혔다. 현재는 나이가 오십줄을 넘어서 주름살이 많아졌지만 미성은 그대로.
- 그 미소년적 외모 때문에 20대시절 모리나가제과의 초콜릿 광고(영상)에 여장을 하여 출연했는데도 위화감이 없다.
[1] 小山田 圭'''悟'''에서 개명하였다. 발음은 동일.[2] 모드 학원 코쿤 타워로 유명한 모드 학원 소속 전문 미술학교.[3] 1인 프로젝트[4]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네기시 소이치가 좋아하는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