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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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寧王陵 / Tomb of King Muryeong
1. 개요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왕의 무덤이다.
무령왕릉은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금은 장신구, 석수(돌짐승), 동자상, 청동거울, 도자기, 지석 등이 있다. 무령왕릉에서 있었던 대규모 발굴 덕분에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남조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나라의 상호 간에 문화교류, 각국 문화의 특수한 점과 공통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분이다.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다.'''[2]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면 송산리 고분군 7호분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무령왕릉마저 도굴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예술품이나 국제무역수준은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백제의 장신구들을 비롯해서, 무덤의 주인과 건설 경위가 담긴 묘비석이 발견된 점이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다. 이 석판을 통해 무덤이 무령왕과 왕비의 것이라는 점,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한 후에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백제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서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이 알 수 있었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무령왕릉이 미발굴 고분으로 백제 시대 그대로 발견되었던 덕분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인 신라왕릉과 달리 백제 왕릉은 출입구가 따로 존재하고 돌무지에 깔려있지도 않은 굴식 돌방, 벽돌무덤 양식이었기에 백제가 멸망해 꾸준한 관리가 중단된 이후에는 도굴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무령왕릉처럼 도굴을 피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한국판 투탕카멘급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분에 해방 이후 고고학 최대의 발굴로 기록되었다. 또한 중국 양(梁)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 양식의 건축으로 현재까지 고분 연구에도 대대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는 어수룩한 발굴 때문에 후회가 가득한 발굴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립공주박물관이 기존 ‘무령왕릉실’을 ‘웅진백제실’로 개편하면서 무령왕과 왕비의 실제 목관을 2017년에 46년 만에 최초로 공개했다.#
2. 최고이자 최악의 발굴
1971년, 기존에 발견되었던 송산리 벽돌무덤 6호분의 유입수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은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도굴과 일제강점기의 약탈을 전혀 당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발굴되어서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거기에 보통 피장자의 신원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도록 만들어진 다른 고분과는 달리 이 왕릉은 내부 묘비석에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는 피장자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묘지명(墓誌銘)을 따로 쓰지 않는 삼국시대의 여러 왕릉과 고분들 중에서 묘지명을 사용한 희귀한 케이스인 셈이다.
그러나 정작 국내 학자들이 한 발굴이었음에도 그 과정이 너무 처참했다. 도굴이 한 번도 되지 않은 귀중한 왕릉을 발굴하였지만, 현장 사진을 온전히 찍어두고, 보통은 몇 년은 걸릴 법한 발굴 조사를 '''17시간,''' 즉 '''겨우 하룻밤 만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이는 1910년대 일본 고고학자들이 실시한 조선고적조사보다 못한 수준인데, 조선고적조사도 대충 했다고 많이 까이는 현실인데 그런 일제 학자들마저도 고분당 열흘 이상은 조사했다. 심지어는 잔 유물들을 '''자루에 쓸어 담았다는''' 증언도 있다. 이 정도면 발굴이 아니라 도굴을 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비록 유물은 다 챙겼지만, 유물만큼이나 중요한 유물의 배치를 비롯한 현장 기록이 부실해도 너무 부실했다. 남아있는 자료는 급하게 끝낸 부실한 실측자료와 약간의 사진, 그리고 사진 기자들의 조악한 사진 뿐이다. 무령왕릉의 발굴이 한국 고고학계의 최고이자 또한 최악의 발굴로 꼽히는 이유이다.'''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 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잘라서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처 생각이 안 난 것이다.'''
- 당시 발굴단장 김원룡 회고록 중
당시 발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당시 발굴과정을 후회한다. 무령왕릉 발굴 책임자이자 한국 고고학계의 거물이었던 서울대학교 김원룡 박사는 후일 수기에서 무령왕릉 발굴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수치이자 과오라고 밝힌 바 있다.
2.1.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
일제강점기 국내의 모든 유적 발굴은 대부분 일본인 학자들이 독점해 주도하였으며, 더러 서양인이 하기도 하였다. 한국인들은 단순 일꾼이나 낮은 위치의 역할만 맡았다. 광복과 함께 일본인 고고학자들은 한꺼번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 고고학계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성장해야 했다. 그나마 독립 직후 일본인들이 한국을 떠날 때 한국 역사학자들이 일본인 발굴 전문가 아리미쓰 교이치 한 명을 거의 반 강제로 억류해서 속성 과외를 받았지만 그게 전부였다.[3] 따라서 무령왕릉이 발견된 무렵의 발굴자들은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희대의 발굴을 취재하던 기자들 역시 지금으로 말하면 기레기 소리를 들어도 무방한 안하무인이 많았다. 유물이 발견되자 어떻게든 내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고 온갖 이기적인 행위를 하였는데, 일부는 책임자를 폭행하고 유물을 파손하기까지 하였다. 현장이 이렇듯 전혀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자들은 유물이 도난될 수도 있다고 조급해져 급한 마음에 기록도 없이 유물을 쓸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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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 유물을 나무 상자에 올려놓고 그대로 꺼내는 장면. 당시엔 취재진과 발굴팀, 구경꾼들이 한데 뒤엉켜 불야성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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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부러진 석수의 뒷다리 사진도 졸속발굴의 예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석수의 뒷다리는 발굴 당시부터 부러져 있었다.
게다가 유물 이송과 보존 과정에서도 발굴조사단과 지역 주민과의 마찰이 일어났다. 1970년대 당시 공주박물관의 시설이 미흡해서 서울로 이송하여 보존해야 했는데 공주읍의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는 공주의 유물을 영구히 서울에 가져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몰려와서 단 한 점도 서울로 가져가게 할 수 없다고 농성을 벌였다. 이에 발굴단은 "유물이 삭아 없어지면 당신들이 책임 질 거냐." 하고 응수해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 뒤 새로운 국립공주박물관이 건립되어 유물 대부분은 공주로 다시 돌아왔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왕릉을 훼손했다고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며, 심지어 발굴단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까지 있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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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야발굴 상황. 1500년전 왕릉 발굴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발굴팀과 취재진이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다.
고대 왕릉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유물을 보고 싶어서 발굴을 독촉했다는 이야기와 유명한 금팔찌 사건도 있었다. 당시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은 유물을 보자기에 싸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는데, 박정희가 발굴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다면 별도의 차량을 보내어 타고 오게 했을 것이다. 발굴 이전까지 박정희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심지어 유물을 몇 점 가져와보라고 전화해서 가져온 유물 중 팔찌를 보고 "이거 순금인가?" 하고 '''접었다 폈다''' 했다고 한다.
낭설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현재는 김영배 관장과 김원룡이 박정희에 대한 충성 경쟁과 공명심 때문에 자발적으로 청와대에 유물을 보여주러 갔고, 이 유물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박정희가 팔찌를 '''접었다 폈다''' 했다는 게 정설이다. 김영배 관장과 함께 청와대로 간 김원룡의 수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박정희는 이때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고고학에 무지했고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에 영향을 받아 후일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발굴과정을 촬영해 정권 홍보용 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 일하는 단원들에게는 금일봉을 무려 100만 원[5] 씩이나 지급하는 등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고 고고학자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박정희 본인은 관광업 진흥이나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양 등 다른 쪽에 관심이 더 많았지 고고학 자체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없는데다, 무려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니까 학자들도 어쩔 줄 몰라 유물이 나오면 보존처리는 뒷전이고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바빴고 거기서 술을 따라 마시기도 했다. 이후 신라 궁터에 호텔을 지으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6]끝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잊지 못할 또다른 사건은 왕릉 출토의 금제 장신구들을 들고 장관과 함께 박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몹시 기분 좋은 표정으로 유물들을 들여다보더니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 하면서 두 손으로 쥐고 가운데를 휘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팔찌는 정말 휘어졌다 펴졌다 하는데 아차아차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가슴은 철렁철렁했지만 소년처럼 신기해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요약하자면 무개념 기자들은 밀고 들어오고, 인근 주민들은 고분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주변에 우르르 모여들었다. 발굴 현장은 그야말로 혼돈이었고, 마음이 급해진 발굴단원 한 사람은 곡괭이질을 하다가 자기 발등을 찍어버리는 웃지 못한 일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종합하면,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발굴단도, 기자도, 주민들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성숙한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었고, 결국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미숙한 탓에 역사에 남을 실수를 한 것이다. 발굴 관계자들은 이 졸속발굴을 후회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이때 발굴현장에 몰려든 기자나 현지 주민들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던 경험에서 배운 덕에 현재는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에는 꼭 현장 지휘부의 설치와 '''경비'''가 중시된다. 천마총 발굴 때에는 전체 브리핑 외에는 기자들의 보도를 최대한 통제하고, 발굴단원들이 기자들의 취재에 일부러 응하지 않거나 발굴현장에 철조망을 치는 등 현장을 거의 봉쇄한 상태로 발굴을 진행하였다. 황남대총 발굴을 앞두고 이루어진 '시험 발굴'격이었던 천마총 발굴에서는 '대박'이라고 할 만한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무령왕릉의 실패는 후대 한국 고고학의 반면교사가 된 것이다.
3. 발굴 이후
무령왕릉은 발굴 직후 한동안 폐쇄됐다가 유물을 모두 수습한 뒤 빈 고분은 송산리 고분군 5, 6호와 함께 일반 관광객에게 1976년 2월부터 공개되었다. 당시 무덤 입구를 거쳐 무덤방까지 관람객들이 들어가서 무덤방 입구에 설치된 유리창 너머로 안쪽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문제가, 무령왕릉의 봉분은 이미 허물어져 있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재단장과 공개 과정에서 마치 신라왕릉처럼 봉분을 거대하게 쌓았다. 여기에는 백제 왕릉이 신라 왕릉만큼은 웅장해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경쟁심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7] 아무튼 무덤방 위에 지나치게 거대하게 봉분을 쌓았고 무게중심도 무덤방 중심 부분에서 서북쪽으로 기울어진 곳으로 이상하게 쌓았다보니 봉분 무게 때문에 왕릉 무덤방이 찌그러지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이 때문인지, 후일 1998년 5~12월에 공주시의 의뢰를 받아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의 보수 상태를 점검했는데 이 때 무령왕릉은 내부에 금이 가고 봉분 내부로 물이 스며들고 있다고 진단받아 크게 보수했다.
게다가 1989년에는 무덤방 벽면과 그 앞에 관람객 차단 유리벽에 물기가 맺히고 곰팡이가 피는 현상이 관찰됐다. 이어 1997년에도 왕릉이 기울고 물이 샌다는 보도가 나왔다.
결국 발굴 26년째인 1997년 7월 15일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 5, 6호분의 석실들은 관람목적의 개방이 전면 금지되었다. 당시에는 1년간 한시적 폐쇄였지만 이후 지금까지도 다시 일반 관광객에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을 2003년 만들어 관광객들이 대신 내부 구조를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령왕릉 유물의 출토상태를 두고 도굴이 한 번쯤은 있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있지만,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8]
참고로 앞선 내용처럼 일제강점기 시절의 국내 유적은 일본인들이 전부 발굴과 연구를 독차지했는데, 대부분 조선총독부 박물관 차원에서 담당하였다. 반면에 공주 일대 무덤을 발굴한 가루베 지온은 공주고등학교 교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박물관 측 일본인 조사자들과 유적, 유물의 발굴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박물관 또는 박물관 소속의 일본인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어쨌거나 박물관으로 유물이 옮겨져 전시되었던 반면 가루베 지온은 결정적으로 발굴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려서 문제였다. 이러한 일제의 발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 특유의 낮은 봉분으로 인해 고분임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겠으며, 낮은 봉분은 어떻게 보면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기도 하다.[9]
4. 번외: 무령왕릉의 저주?
투탕카멘의 저주에 묻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령왕릉도 발굴과 관련된 괴담이 있다. 발굴 당일 입구를 파헤치는 순간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렸고, 이후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이 잦은 사고를 당하던 중 김원룡 단장은 빚에 몰려 전 재산을 처분하고 남의 차를 빌려 무령왕릉으로 가다 아이를 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김원룡 단장은 아예 유서를 연구실 책상머리에 붙여두었다는 소문도 있다.또한 고분의 금목걸이를 훔쳤던 연구원이 빚으로 인해 파산하며 저주를 더욱 확실시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당시의 부실 발굴과 겹쳐져 발굴 관련 당사자들에게 마음의 큰 짐이 되었음이 사실이다. 심지어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 편찬한 <한국생활사박물관>4권 백제생활관에서도 이 내용을 책 한쪽에 실어놓았을 정도.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발굴 관련자들은 '''"도굴꾼도 이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자책했다고 한다.
다만, 발굴현장은 무슨 유적의 저주니 가져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사고가 나기 좋은 환경이다. 전면발굴을 한다면 나무를 모두 제거해서 비 오면 토사가 쓸려나가기 딱 좋다. 또한 지하 저장고나 무덤, 또는 구석기유적은 수 m 이상 지하로 파 내려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벽이 쓸려나가지 않도록 하는 안전시설을 설치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파내려간 땅의 층위를 관찰해야 하고, 안전시설을 설치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지하로 내려가고자 사다리를 타기도 하지만, 흙으로 경사로를 만들어 (흙을 퍼내는 데 쓰는) 외발수레를 사용하거나 흙으로 만든 계단을 이용하는데, 이런 것들은 상당히 잘 무너진다.
사실 사다리도 대부분 사진 찍는 데 사용한다. 그것도 A자 사다리 맨 위에 올라서 두 발로 똑바로 서서 찍었다. 레알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이라면 엄청 무섭고, 없는 사람이라도 무섭다. 아래 있는 사람이 제대로 잡아주지 못해서 사다리가 흔들리면 비싼 카메라와 같이 떨어져서 사고가 났다. 심하면 포크레인 삽 등을 타고 높이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현재는 사다리를 쓰거나 포크레인 삽 위에서 찍거나 하지 않는다. 요즘은 붐카메라를 쓰거나, 재정에 여유가 있는 연구기관은 드론으로 촬영한다.
고고학 현장을 다루는 책들은 안전문제의 심각성을 상당히 지적한다. 기본적으로 발굴 인부와 연구자들이 안전모도 착용하지 않는 데다, 안전시설은 더 더욱 없으니.... 사실 고고학 현장에서 사고가 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문화재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대부분 매몰사고인데, 매몰사고는 안전모로는 막을 수가 없다. 건설현장과 달리 문화재 발굴현장에서는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굴착작업이 주인데, 얕게는 10~50 cm, 깊게는 5 m 이상 지하로 파고 들어간다. 따라서 현장에서 사고가 났다면 토벽이 무너지는 붕괴매몰사고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문화재 현장이나 상급기관(문화재청)에서 권장하는 안전장구는 고작 안전모뿐이다.
박정희는 2년 뒤(1973) 천마총 발굴 때 발굴현장을 방문했는데, 도착하기 직전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세워놓은 천막이 갑자기 무너저 인부가 천막 기둥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5. 출토 유물
무덤의 입구에서 무덤방을 바라보는 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왕은 오른쪽 왕비는 왼쪽이었던 것을 알 수 있고 무덤의 입구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나무 관 조각들에서 일본산 금송(金松)과 삼나무 재질이란 것이 밝혀졌다.[11]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며, 일본에서 목재를 수입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왕의 다리를 받치는 족좌와 왕비의 머리를 받치는 목침의 경우 왕의 것은 검은 옻칠과 금으로 장식했고, 왕비의 것은 붉은 단청과 금칠을 했다. 고대 사회에서 옻칠 > 단청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물.
2009년 12월 8일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던 뼛조각 4개가 무려 '''3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위에 설명했듯 발굴현장이 워낙 개판이었던지라 바닥에 있는 유물들을 자루로 봉투에 쓸어담아 가져가다 보니 정말 뒤늦게 발견된 것. 오죽하면 이 뼛조각을 발견한 국립중앙박물관원들이 비난을 받자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을까. 무령왕릉 발굴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가운데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 국보 제154호 무령왕 금제 관식
- 국보 제155호 무령왕비 금제 관식
- 국보 제156호 무령왕 금귀걸이
- 국보 제157호 무령왕비 금귀걸이
- 국보 제158호 무령왕비 금목걸이
- 국보 제159호 무령왕 금제 뒤꽂이
- 국보 제160호 무령왕비 은팔찌
- 국보 제161호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 국보 제163호 무령왕릉 지석
- 국보 제164호 무령왕비 베개
- 국보 제165호 무령왕 발받침
6. 무령왕릉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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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묘지석(위)과 왕비의 묘지석(아래).
무령왕의 묘지석과 무령왕비의 묘지석은 국보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비의 묘지석 뒷편에는 매지권에 대한 내용이 써있다. 무령왕의 묘지석을 보면 왼쪽부터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피장자를 무령왕과 무령왕비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묻힌 지석 덕분이다. 지석이란 사자의 신원이나 묘의 소재 등을 기록하여 함께 묻는 것을 의미한다. 2매가 출토되었는데, 청회색 섬록암에 해서체로 묘지 등을 기록한 장방형의 석판이다. 왕의 것과 왕비의 것으로 구분하는데 크기는 세로 약 35 cm, 가로 약 41 cm, 두께 약 5 cm이다.
지석에 적힌 글은 다음과 같다.( / 표시는 비석에 적힌 것에 따라 나눈 것이므로 해석과 무관하다.)
寧東大將軍百濟斯 / 麻王 年六十二歲 癸 / 卯年五月丙戌朔七 / 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 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 / 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 지석 앞면>
후술하겠지만 방위를 표시한 간지도(干支圖)이다.(=표시는 공백 부분. 즉, 일부러 저렇게 쓴것이다. 마법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쉽다.)未=================亥
丁=================壬
午=================子
丙=================癸
巳=================丑
==戌=============己==
==辰==乙==卯==甲==寅==
<무령왕 지석 뒷면>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 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 還大墓立 / 志如左
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비 지석 앞면>
무령왕 지석은 앞면에 왕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묘 위치의 방위를 나타내는 간지도로 구성되었는데 간지도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교적 색채는 매지권 말미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구절 등 이외에도 몇몇 부분이 있다.[12] 무령왕비 지석은 앞면에 왕비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자리로 정한 땅을 구입했음을 증명하는 매지권이다.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 不從律令
돈 1만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령왕비 지석 뒷면>
왕비가 왕보다 후에 죽었다. 따라서 왕비의 지석이 제작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먼저 왕의 사후 27개월 간 시신을 빈전에 모시는 빈장 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능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고, 후에 왕비를 안치할 때 매지권을 적은 지석을 뒤집어 왕비의 묘지를 새겼을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당대 백제에서는 중국식 삼년상의 풍습이 완전히 정착 되었음을 알수 있다. 비근한 예로 광개토왕릉비에도 24개월간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3년 후에 [13] 장례를 치뤘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에서는 삼년상의 풍습이 널리 자리 잡았음을 알수 있다. [14]
왕비의 묘지에서 빈전으로 '유지'라는 곳이 언급된다. 시신은 사후 즉시 능에 안치되지 않고 일정기간 다른 곳에 두는데 그곳이 빈전이다. 마침 공산성 서쪽에서 빙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된 바, 이 유지=빈전이 정지산의 빙고 유적이라고 추정된다.
6.1. 바깥 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무령왕릉 지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무령왕릉 지석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무령왕릉 지석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대백제이야기): 무령왕릉 지석
- e뮤지엄: 무령왕릉 지석
- e뮤지엄: 무령왕릉 지석
- 두산백과: 지석
- 두산백과: 무령왕릉 매지권
6.2. 국보 제163호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7. 송산리 고분군에서의 조사 기록
8. 매체에서의 등장
한중일 삼국이 나오는 온라인 게임 거상에서 중저렙 사냥터 무령왕릉으로 등장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왕릉의 발굴당시 이야기를 다뤘는데 역시나 자신들의 실책임을 자책하는 고고학자들의 모습을 그렸다.
대항해시대 4에선 조선 한양에서 발견되는 유적인데... 출토품은 '''신라''' 금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