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이름'''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О́льг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882년 6월 13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테르고프 궁전
'''사망'''
1960년 11월 24일 (78세)
캐나다 온타리오 토론토
'''배우자'''
올덴부르크의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공작
(1901년 결혼 / 1916년 이혼)
니콜라이 쿨리코브스키
(1916년 결혼 / 1958년 사망)
'''자녀'''
티콘 니콜라예비치
구리 니콜라예비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형제자매'''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르
게오르기
크세니아
미하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3세마리아 표도로브나의 4남 2녀 중 막내딸이자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이다.

2. 생애


어린 시절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올가가 12살 때 사망하여 오빠 니콜라이 2세가 제위에 올랐다.
1901년 19살 나이에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올덴부르크의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공작[2]과 결혼하였으나 남편 올덴부르크 공이 동성애자인지라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결혼 이후로 한 번도 부부관계를 맺은 적도 없고 결혼 초기부터 각방을 썼다. 결국 오빠 니콜라이 2세의 허락을 받고 이혼한 뒤에 1916년 연인인 평민 니콜라이 쿨리코브스키와 결혼해서 장남 티콘 니콜라예비치와 차남 구리 니콜라예비치를 낳았다.
올가는 사교계와 거리를 두었던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부부의 신임을 받은 몇 안 되는 황족으로[3], OTMA이라 불린 조카 황녀 4명과도 관계가 친밀했다고 한다. 라스푸틴을 광적으로 의존하는 손위 올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4]
이후 올가는 러시아 혁명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 황태후와 함께 영국으로 떠났다. 러시아 황실이 몰락한 이후로도 조카들이 살아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각지의 황족 사칭자들에게도 관심이 많아, 아나스타샤 여대공을 사칭한 안나 앤더슨을 만나보기도 했다. 반면 마리아 황태후는 올가와 달리 손주들을 사칭하는 사기꾼을 만나지도 않았고 그런 주장을 믿지도 않았다. 이후 발견된 황제 일가의 시신을 분석한 결과 모두 신원이 확인되었으므로 결국 황태후의 생각이 맞았던 것. 평생 조카들을 그리워했을 올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1960년에 죽을 때까지 캐나다에서 살았다.[5]
[1] 올덴부르크 공작,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2] Duke Peter Alexandrovich of Oldenburg. 올덴부르크 가문에서 러시아로 귀화한 구성원의 후손으로 독일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이었다. 참고로 독일과 러시아의 작위는 귀족 가문의 적자 부계 후손이라면 누구라도 칭할 수 있는, 일종의 성씨와 마찬가지였기에 Peter Alexandrovich, Duke of Oldenburg[1]라고 표기해선 절대 안된다. 해당 표기는 실제로 통치를 하는, 정치적인 실권이 있는 공작을 의미하는 표기법이기 때문.[3] 황제 부부는 점잖고 내성적이며 가정적인 성격이라 일반적인 상류층 인사들과는 달리 사교생활을 즐기지 않았는데, 다른 황족들은 이런 황제 부부의 태도를 자신들을 멀리하고 무시한다고 여기며 불쾌해했다. 또한 황제 부부는 혈우병을 앓는 아들이 다치는 걸 우려하여 아들이 활발하고 거친 또래 황족 소년들과 어울리는 것을 막았는데, 이것도 황족들이 황제 부부를 안 좋게 생각하는 이유가 되었다.[4] 니콜라이 2세 부부의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황후와 자녀들은 모두 라스푸틴에게 세뇌되어 있었다.[5]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가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열린 파티에 엘리자베스 2세와 친척 사이인 올가도 초대받았다. 올가의 이웃 사람들은 올가를 평범한 러시아 출신 이민자로만 알고있다가 그제서야 러시아 황족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워했다는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