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표도로브나
1. 소개
1847년 11월 26일 - 1928년 10월 13일 (80세)
러시아 제국의 차르인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이자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이며,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후이다. 남편과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낳았고 이 중 5명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조피 프레데리카 다우마'였다.
생존설이 꾸준히 돌며 유명해진 아나스타샤 공주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2. 어린 시절
이후 덴마크의 왕이 되는 크리스티안 9세와 부인인 헤센-카셀의 루이제 사이에 태어난 6명의 자녀 중 넷째이자 차녀이다. 애칭은 미니[1] .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9세는 덴마크의 왕인 프레데리크 7세가 1852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양손자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왕실에서 산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검소한 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언니인 알렉산드라와는 방을 함께 사용해서 이 자매는 이후 평생 가까운 사이가 된다. 다우마는 피아노, 하프, 바느질, 소묘, 독일어, 스웨덴어, 프랑스어, 역사등을 배우며 성장했다.
평소 자녀들의 결혼에 매우 신경을 쓰던 어머니 루이제의 노력으로 그녀와 형제들은 대단한 혼사를 치르게 된다. 언니인 알렉산드라는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2] 와 결혼하여 영국의 왕비가 되었고, 다우마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 큰 오빠는 덴마크의 왕인 프레데리크 8세, 남동생은 그리스 왕국의 왕인 게오르기오스 1세가 된다.
3. 결혼 전
다우마는 1864년, 러시아 제국의 차르(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장남이자 황태자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약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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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의 절대적인 애정을 받는 아들로, 아버지는 그 외에 다른 아들은 다 고만고만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다우마와 니콜라이는 서로 애정을 느꼈는데, 니콜라이가 약혼 다음해 발병한 수막염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이때 니콜라이는 자신의 동생인 알렉산드르 3세에게 "다우마를 부탁한다"고 유언하며 사망한다. 문제는 알렉산드르는 그때 이미 사랑하는 여성이 있었다는 것. 어머니의 시녀 중 한 명을 사랑했지만, "당장 가서 다우마와 약혼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다우마와 약혼했다. 남편 알렉산드르 3세는 그 동안의 차르들이 정부를 들였던 것과 다르게, 아내에게만 충실하고 아내를 아끼는 사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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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약혼자의 남동생이자 남편이 된, 알렉산드르 3세와의 약혼사진
4. 결혼 생활
1866년 결혼식을 올리고, 다우마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며, '마리아 표도로브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받게 된다. 1881년 시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테러로 사망하자, 남편이 황제가 되고, 그녀는 황후가 된다. 황후가 된 뒤에는 경호 문제로 겨울 궁전에 들어가지는 않고, 교외의 가치나 궁전과 황태자비 시절부터 머물던 아니치코프 궁전에서 지냈다. 결혼한 이후에도 친정집 식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남편과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낳으며 애정 어린 생활을 했던 부부는, 남편이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며 헤어지게 된다. 남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타고난 밝은 성격으로 곧 회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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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이들. 이때의 남편은 탈모가 심해져 머리가 훌렁 벗겨지고 덩치가 더 커졌는데, 아이를 여럿 낳은 그녀는 여전히 작은 체구에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5. 자녀들
1. 니콜라이 2세 1868년 - 1918년
: 헤센 대공국의 공녀인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와 결혼하여 1남 4녀의 자녀를 낳음.
2.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69년 - 1870년
: 어려서 사망
3.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71년 - 18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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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핵으로 사망
4. 크세니아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1875년 -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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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사촌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결혼. 러시아 혁명중에는 1919년에 어머니와 여동생 올가 여대공과 같이 영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어머니와 여동생과는 달리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정착한다.
5.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78년 - 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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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소바의 나탈리아와 결혼. 형인 니콜라이 2세가 혁명으로 퇴위한 이후, 잠시 차르가 되지만 왕정이 폐지된후 볼셰비키의 비밀경찰에 의해 처형당함.[6]
6.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1882년 -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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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덴부르크 공작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와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이혼 후 평민인 니콜라이 쿨리코브스키와 2번째 결혼을 해서 두 아들인 장남 티콘 니콜라예비치와 차남 구리 니콜라예비치를 낳았다. 오빠인 니콜라이 2세 부부 가족과 가장 친밀했던 형제로,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러시아 혁명 중 영국으로 망명한 뒤 조카들이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 조카들의 사칭자들을 여럿 만나보았다. 어머니 마리아 황태후가 사망한 뒤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며 캐나다에서 죽을 때까지 정착하였다.
6. 황태후 시절
6.1. 고부갈등
장남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고,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황태후가 되었다. 며느리인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와 사이는 원활하지 않았지만, 러시아 황실은 황후보다 황태후의 권한이 더 막강했다. 활발하고 밝은 그녀와 다르게, 며느리는 차분하고 침울한 분위기의 여성으로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부부 금슬은 좋아서, 4녀 1남을 낳았다. 순서대로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샤, 알렉세이이다. 알렉산드라 황후가 넷째 아나스타샤까지는 줄줄이 딸만 낳아, 알렉세이 황태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는 러시아 황실에서도 중대한 문제였고,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도 마음고생을 했다.
그러나 이들 중 막내로 태어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는 매우 귀한 아들이었고 마리아에게도 매우 귀한 손자였지만, 불행히도 이 아이는 혈우병 환자였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것이었다. 차르 내외는 제위를 이을 아들의 병 때문에 큰 근심에 빠졌고[7] , 그러다가 황태자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나선 타락한 떠돌이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홀리게 된다.
6.2. 러시아 혁명
이미 제정 러시아는 내부적인 문제와 농노제의 폐해로 인해 붕괴될 상황이었는데, 1917년 결국 러시아 혁명이 터지게 된다. 장남 니콜라이 2세 일가는 퇴위당한 뒤 총살당했고 4남인 미하일도 처형되었다.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장남 일가와 4남의 처형 소식을 접하고는, 충격과 공황 상태에 빠져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러시아 땅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주변의 설득으로, 언니 알렉산드라 영국 왕대비와 그녀의 아들 조지 5세가 보내준 군함 HMS 말버러 호를 타고 1919년 러시아를 떠나 영국에 갔다.
영국에 머무르게 된 마리아는, 평생 죽을 때까지 아들의 죽음을 믿지 않으려 했다. 영국에 갔을 때, 죽은 아들과 똑 닮은 조카인 조지 5세를 보자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했다고 한다.[8] 이러한 그녀의 믿음을 이용해서 니콜라이 2세의 사칭자들이 자주 나타났지만, 손녀 아나스타샤 여대공을 사칭한 안나 앤더슨이 나타났을 때도, 절대로 만나 주지 않았다. 막내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가 애나 앤더슨을 믿는 듯 하자 크게 호통칠 정도였다.
이후 친정 덴마크에 정착한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1928년 덴마크에서 사망했다.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죽으면서 "유해를 러시아에 보내 남편 알렉산드르 3세의 곁에 묻어 달라." 라고 하였으나, 이 유언은 사후 78년 뒤인 2006년에야 이루어졌다.
7. 여담
공교롭게도 남편을 비롯하여 아들들까지 집안 남자들은 모두 단명한 반면, 집안 여자들은 본인 두 딸 모두 모두 80세가 넘을 때까지 장수했다.
[1] 사진을 보면 정말 작은 체구에 미니미니하신 아름다운 모습이다[2] 며느리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에게는 외삼촌이 된다.[3]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4]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5]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다.[6] 니콜라이 2세가 당시 혼란스럽던 러시아 상황에 제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미하일 본인은 '''"형님 폐하처럼 백성들에게 욕 들어먹을 짓을 할 수 없소."'''라고 딱잘라서 거절했다. 당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에서도 차르를 내려놓기를 권고했고, 본인도 거절하였다. 특히 러시아 국민들은 왕정을 더이상 원하지 않는터라 미하일도 니콜라이 2세와 다를게 없다며 거부했다.[7] 다른 나라 같았으면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계승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공주의 제위 계승이 불가능했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이것을 모르고 시집왔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독촉받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8] 이종 사촌지간인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는 도플갱어라고 해도 믿을만큼 똑같은 외모로 유명했는데, 두 사람의 어머니들인 마리아와 알렉산드라부터가 자매간에 서로 쌍둥이처럼 닮아서 그 아들들도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조지 5세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례객들이 역시 하례객으로 참석한 니콜라이 2세를 신랑으로 착각하고 번갈아가며 축하 인사를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