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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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4녀 1남 중 맏딸로 태어났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부부가 결혼하고나서 얻은 첫 자식이였기에 그녀의 탄생은 아들 딸 막론하고 두 사람에게 큰 기쁨이었고, 특히 아버지 니콜라이 2세는 그녀를 무척이나 애지중지했다.
그녀가 태어날 때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니콜라이는 종종 올가를 같은 해에 태어난 조카 이리나[1] 와 비교 하였다.'''내가 영원히 기억될 날이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정각 9시에 들렸고, 우리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하느님이 보내주신 이 아이의 이름을 올가라고 지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의 4녀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였고, 그녀의 많은 자녀들[2] 이 유럽 여러 나라 왕족들과 결혼하면서 혈우병 유전자가 널리 퍼졌다.'''1896년 3월 21일, 미사를 드린 후에 딸들을 성찬식에 데리고 갔다. 우리 아이(올가)는 조용히 하였으나 이리나는 약간 울었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작은오빠 프리드리히도 혈우병으로 인해 일찍 죽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라 황후는 러시아 황실로 시집와서 딸만 4명을 낳은 끝에 어렵게 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를 낳았는데, 불행히도 이 아이도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러시아 황실에서 설치는 배경이 되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딸들은 혈우병을 가졌는지 아닌지 알려지지 않았다. 평생 결혼하지 않은 탓에 혈우병 보인자인지는 이제와서는 알 수가 없다.[3]
2. OTMAA이라 불린 5남매
갓 태어난 올가의 당시 친구는, 동갑이었던 먼 친척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와 마리아 파블로브나 등이 있었으나, 올가의 진정한 친구는 2년 뒤에 태어난 바로 아래 여동생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이었다. 두 자매는 항상 같이 방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가족들 사이에서 황녀들을 부르는 애칭이 있었는데 올가는 올랴, 올리쉬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올가와 타티아나는 서로 가장 친했지만, 서로가 일기 등에서 머리글자인 'OTMA'(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로 표현할 정도로 자매들끼리 서로 친했고, 5남매 모두 우애가 좋아서 막내 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와 함께 OTMA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혼란스러운 러시아 제국과 달리, 황제 부부가 자식들을 전부 몹시 사랑하며 키웠기에 가정은 화목했다.
3. 총명한 첫째 황녀
점잖고 다정한 성격으로, 아버지 니콜라이 2세와 닮은 꼴이었다고 한다. 올가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녀는 러시아 황녀로서 손색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품위가 있었고, 춤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자선 단체에 돈을 기부하거나 선행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개인적으로 예카테리나 2세를 좋아하였는데, 한 번은 남동생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가 자신의 하인을 큰소리로 꾸짖자, 올가는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알렉세이 황태자가 6살인 무렵, 보이 스카우트 행진을 보러갔는데, 알렉세이는 "나도 보이 스카우트 행진에 참여하고 싶다"고 떼를 쓰며 주변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때 올가가 점잖게 만류하자, 알렉세이는 9살이나 위인 큰 누나의 뺨(!)을 힘껏 올려쳤다. 이 상황에 모두는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었지만, 올가는 알렉세이의 혈우병이 가진 고통과 공포를, 또 남동생이 아직 어려서 정신적으로 미숙함을 알고있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렉세이 황태자를 향해 웃어주며 일을 넘겼다 한다.예카테리나 2세는 하인을 꾸짖을 때도 작은 소리로 했어요. 그대도 그렇게 해요.
이렇게 어른스럽고 점잖은 러시아 황실의 1황녀이자 맏딸인 올가였기에,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나 러시아 제국 대신들 사이에서는 그녀를 황위 계승자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황실은 여성 황족에게는 황위계승권이 없었다. 이 소리가 나왔던 이유는 혈우병 때문에 황태자 알렉세이가 병약해 일찍 죽을 가능성이 있어서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도 이 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여제 시대로 불리며 여제들이 여럿 나타나던 시절도 있었으니 상황에 따라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5]
올가는 문무에 모두 출중하다고 할수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통솔력이 뛰어났으며 승마를 즐겨, 17살 어린 소녀의 몸으로 기마대장(騎馬隊長)을 맡은 적도 있었고,
거기다 4자매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고독한 문학소녀 타입이었던 그녀는 복잡한 러시아어의 문법도 설명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엔 간호사로서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병원 업무를 보기도 했다.
4.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 제정 러시아의 몰락
올가가 성년이 되어 갈 무렵,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는 병약한 알렉세이 황태자를 보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그런 상황에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구인 안나가 시베리아 수도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데리고 왔다. 이 때 올가가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라스푸틴을 물리치라고 충고했다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 그 말을 한 인물은 황제의 여동생이자 올가 니콜라예브나의 고모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이었다. 이 때 황녀들은 자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라스푸틴에게 홀딱 빠져 있었고, 훗날 총살될 때까지 라스푸틴의 사진이 들어 있는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는 볼셰비키에 의해 확인되었다.[6]
올가가 라스푸틴을 경계했다는 루머가 도는 이유는 덕혜옹주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비극적인 삶과 낭만적인 이야기가 맞물려서, 거기다 올가 황녀는 총명한 1황녀로서 알렉세이 황태자를 제치고 황위를 계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고모랑 이름이 같아서 사람들이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총명한 성격 때문인지 당시 러시아의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것은 맞는 것으로 추정되며, 주치의 보트킨의 아들이 쓴 회고록에 따르면 국민들이 자신의 부모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종종 걱정스러운 기색도 보였다고 한다.
외에 이와 관계없이 사춘기~성년기에 접어들며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황후와 갈등이 있었는데, 알렉산드라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편지에 올가 때문에 화가 난다는 내용이 자주 적혀 있었다. 올가 또한 할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며, 식사 시간에 알렉세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며 혼이 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둘의 갈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봐선 진짜 사이가 나빴다기보단 그냥 반항기에 접어든 나이라 그랬다고 봐야 할 듯.
5. 혼담을 내치다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 가족들과 함께 루마니아에 방문하였는데, 이때 올가와 루마니아의 왕세자였던 카롤[7] 과의 혼담이 오갔다. 그러나 카를 황태자는 유명한 바람둥이로 풍기문란했기에, 올가는 카를 왕세자와의 결혼을 싫어했다.
그렇게 올가는 루마니아의 카를 왕세자의 혼담을 내쳤다.
카를 왕세자 뿐만 아니라 영국의 에드워드 왕세자와도 혼담이 오고갔는데, 서로 나이대도 맞는 데다가[8] 아버지 니콜라이 2세가 국왕 조지 5세와 사촌지간,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도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라 어릴때부터 영국 왕실과 인연이 있었고,[9] 러시아 제국의 첫째 황녀라는 신분이였던 올가는 영국 왕세자비로 더없이 제격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가는 에드워드 왕세자와의 혼담도 내쳤다. 어찌보면 알렉산드라 황후가 그랬던것 처럼 장래의 영국 왕비 자리를 거절한 것이기도 한데, 이때 혼담을 내치지 않았더라면 에드워드 8세가 훗날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0] 즉 현재의 엘리자베스 2세 왕정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 더군다나 러시아 혁명 사건때 큰며느리의 친정이니 조지 5세가 차르 일가의 망명을 도와주는것을 망설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성년이었던 올가와 타티아나는 혼담이 오갔으나, 두 자매 모두 혼담을 내쳤다. 후에 일어날 비극을 생각한다면 빨리 결혼해서 외국에 나가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올가가 결혼을 거절했던 이유는 알렉세이가 병 때문에 오래 살기 힘들 것 같아 올가의 계승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단명할 것이 분명한 알렉세이를 염두에 두어 파벨 1세 시대에 도입된 살리카 법을 폐지하고 여성에게도 계승권을 주는 방안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엔 로마노프 가문에 차고 넘치는 남성 황족 중 한명[11] 과 올가가 결혼하여 제위를 잇게 할 계획이었다.
또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자신들처럼 자녀들이 연애결혼을 하길 바래서, 정략결혼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6. 러시아 혁명,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다. 황제 일가는 볼셰비키 감시 하에서 연금생활을 시작하였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황녀들의 침실의 문을 못 잠그게 하였으며, 심지어 욕실까지 따라왔다. 황녀들은 길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경멸과 비난과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자신들을 감시하는 군인들의 성적인 농담으로 인해, 황녀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런 농담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타티아나 여대공이 충격을 받아 울면서 뛰쳐나가자, 여동생 마리야 여대공이 그 군인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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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는 연금 생활 동안 어머니를 위해 시를 지어주기도 했지만 마지막 몇 달 간은 아주 우울해했고 체중도 많이 줄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선 산책 시간 외에는 대부분 알렉세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7. 비참한 죽음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로 이송되었고, 새벽에 유대인 출신의 유로프스키가 황제 일가를 깨워서 2열로 세우고, 지하실로 인도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사진을 찍는 거라며 가족들을 안심시켰으나 유로프스키의 손에는 총이 있었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총으로 쏘아 죽였다. 황제 일가는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들의 주검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사람 손길이 가지 않는 곳에서 황산으로 훼손된 채로 아무렇게나 묻혔다. 그 때 그녀의 나이 불과 22세였다.
처형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유로프스키의 통보를 들은 직후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와 함께 성호를 그으려 했다고 한다.
한편 다음 날에는, 이모 엘리자베트 대공비도 몇몇 황족들과 함께 갱도에 갇힌 채 수류탄으로 살해당했다. 엘리자베트 대공비는 남편 세르게이 대공과 사별한 후 수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고 봉사하며 살았음에도, 황족이란 이유로 살해당한 것이다. 결혼 기간 내내 술만 마시고 자신을 질투하며 괴롭히는 남편을 폭탄 테러로 처참하게 잃었는데[12] 본인 역시 폭탄 테러로 숨진 셈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라 할 수 있다.
8. 가족관계
9. 여담
올가의 이름은 러시아어로 '신성한'(Holy)이다. 가족들 사이에서 황녀들을 부르는 애칭이 있었는데, 가족들은 그녀를 올리쉬카(Olishka, Olyshka), 올랴(Olya)라고 불렀다.
니콜라이 2세는 올가와 타티아나, 두 딸이 푸쉬킨의 저서, '예브기니 오네긴'의 올가와 타티아나 자매처럼 되길 원해서 이름을 똑같이 지었다고 한다.
10. 관련 문서
[1] 1895~1970, 알렉산드르 3세의 외손녀로, 여동생 크세니아 공주의 장녀이다. 훗날 라스푸틴 암살을 주도한 귀족 펠릭스 유수포프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2]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자손이 많다. 자세한 것은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조.[3] 혈우병증상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혈우병 환자는 대부분 남성이며, 여성 환자는 드물다. 자세한 건 혈우병 항목 참조.[4] 여담이지만 황녀들 중에서는 둘째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황녀가 제일 미인이라,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타티아나 황녀가 무도회에 참석하면, 그녀와 꼭 춤을 추고자 하는 남자 귀족들이 줄을 섰다고.[5] 실제로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영국 문화에 익숙하고 러시아 문화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성별에 상관없이 장녀인 올가가 황위를 물려받을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실 주변인물들이 아들만이 황위를 물려받는다고,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말해주자 그때서야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영국은 왕자가 없으면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는 시스템으로 현재는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바뀌었다.[6] Robert K. Massie, The Romanovs: The Final Chapter p. 8[7] 페르디난드 1세와 에든버러의 마리의 장남으로, 서로 모계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다. 카롤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넷째) 앨프리드 왕자의 딸 마리의 장남, 올가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셋째) 앨리스 공주의 막내 딸 알렉산드라의 장녀. 즉, 촌수로는 외가로 6촌이 된다. 참고로, 엘프리드 왕자의 부인인 마리야가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이므로, 올가 공주 입장에서 카롤 2세는 부계로도 친척이 된다.[8] 에드워드 왕세자가 1894년, 올가 공주가 1895년 생으로 올가 쪽이 1살 연하였다.[9] 아기였던 시절 부모님과 함께 영국을 방문해 외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과 만난적도 있었다.[10] 러시아 제국 황녀를 두고 미국 평민과 바람나는 국왕은 없을테니..[11] 1917년 기준 제위계승권을 가진 남성 황족이 29명이었고 그 중 반 이상이 미혼이었다.[12]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기록에 따르면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신이 찢겨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대공비는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와 통곡했다고 한다. 남들 눈에는 불성실한 남편이었을지언정 대공비는 한결같이 남편을 사랑했다고 하니, 충격이 컸던 듯하다.[13]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