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1. 개요
1872년 6월 6일 ~ 1918년 7월 17일(46세 42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녀이자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황후.
2. 출생
아버지는 헤센 대공국의 루트비히 4세#s-4,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다. 2남 5녀 중 4녀(여섯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달 만에 루터교회 세례를 받았고, 이때 이름이 지어졌다. 풀 네임은 '알릭스 빅토리아 헬레네 루이즈 베아트리스 폰 헤센-바이라인'이였다. ‘알릭스’는 어머니의 이름을, 미들네임은 전부 이모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원래라면 알릭스가 아닌 앨리스로 불러야 했지만 앨리스를 독일어식으로 읽으면 '알리체'가 되었다. 알릭스의 어머니 앨리스는 평소 이 발음이 촌스럽다고 생각하여 싫어했기 때문에[1] , 딸에게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알릭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영국 왕비였던 덴마크의 알렉산드라가 알릭스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알릭키(Alicky)'라고 불렸다.
어머니 앨리스 대공비는 자신이 영국의 공주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앨리스 대공비는 헤센 대공국에 시집와서도 거처를 영국식으로 꾸몄고, 7남매의 육아 및 교육 방식에 있어서도 영국 문화를 많이 따랐다.
3.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다
알릭스가 6살이던 1878년, 디프테리아라는 전염병이 유행했다. 알릭스의 가족들도 병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때 알릭스의 막내 여동생 마리도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고 만다.[2] 어머니 앨리스 대공비는 병에 걸린 자녀들을 직접 돌보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고, 결국 앨리스 대공비마저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알릭스가 6살 때 병사하고 말았다. 본래 알릭스는 '써니'라는 애칭을 받을 정도로 밝고 활달한 아이였으나, 고작 6살에 어머니를 잃은 후로는 침울하고 조용한 소녀가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녀 빅토리아[3] 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맏이로서 남은 동생들(엘리자베트, 이레네, 에른스트, 알릭스)을 돌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헤센 대공국에서 가장 높은 여성은 빅토리아였으므로, 그녀는 아버지를 보필하여 궁정을 이끌어야 했다.
빅토리아는 외할머니인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많이 의지했고, 빅토리아 여왕과 외손녀들은 모녀 사이처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외손녀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리하여 외손녀들은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정서적으로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영국인에 더 가까웠다.
알릭스도 외가와 외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외할머니로부터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아, 딸을 4명이나 낳은 끝에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에게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주기도 했다. 혈우병은 알릭스의 가정뿐 아니라, 러시아 제국 전체를 뒤흔들게 된다.
4. 연애결혼
알릭스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외할머니의 간섭을 받아왔다. 빅토리아 여왕은 알릭스가 사촌 앨버트 빅터 왕세손과 결혼하여 그녀가 영국의 왕비가 되길 내심 기대했지만, 알릭스가 청혼을 거절함에 따라 계획은 무산되었다.
알릭스는 이미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와 사랑에 빠져있었다. 두 사람은 혈연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니콜라이 황태자의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알릭스의 대모였고 영국의 알렉산드라 왕세자비[4] 의 여동생이었다. 또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는 니콜라이의 작은아버지 세르게이 대공의 아내였다.
1884년, 20살이 된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루이제 알릭스가 러시아 제국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시집갔다. 세르게이 대공은 러시아 제국의 차르인 알렉산드르 3세의 남동생이었다. 알릭스는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 즉 형부 세르게이 대공의 조카인 니콜라이 황태자와 처음으로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독일을 싫어했던 알렉산드르 3세는 알릭스를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10년이 지난 1894년 4월, 알릭스의 오빠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대공이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니콜라이 황태자의 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녀 빅토리아 멜리타와 결혼식을 올리자, 온 유럽 왕족들이 독일의 코부르크에 모였다. 이 때 니콜라이 황태자 또한 코부르크로 향했고 도착한 다음 날 알릭스에게 청혼했지만, 종교를 이유로 거절당했다. 하지만 먼저 러시아 황실에 시집간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 대공비의 지속적인 설득으로 알릭스는 결국 청혼을 받아들였고, 니콜라이 황태자는 죽어가는 알렉산드르 3세에게 허락을 받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연애결혼이었다.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가기 위하여 알릭스는 러시아어를 공부했고, 종교도 루터회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고, 특히 종교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으나, 사랑을 위해 알릭스는 이 모든 것을 감내했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라고 바꾸었다.[5]
알릭스가 결혼할 때,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외손녀가 정치가 불안정한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가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불안한 예상은 끝내 들어맞았다.
5. 러시아의 황후
결혼식을 올리기 전인 1894년 11월 1일, 니콜라이 황태자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차기 차르로 지목되었고, 11월 26일에 예정되었던 니콜라이 황태자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결혼식은 연기되지 않았다. 이날은 니콜라이 황태자의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생일이기도 했다. 한편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한 지 채 1달도 되지 않아 결혼식을 치른 탓에, 군중들은 "새 황후가 불운을 가져오는 게 아니냐"며 수군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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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26일,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의 결혼식.
5.1. 고부갈등
당시 문란한 러시아 황실과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내외는 서로에게 충실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그러나 시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에게는 못마땅한 며느리였다. 본래 마리아 황태후가 원했던 며느릿감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프랑스 오를레앙 가문의 공주). 성격 차이도 있었다. 밝고 명랑하고 사교적인 시어머니 마리아 황태후와, 예민한 성격의 며느리 알렉산드라 황후는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았다.
또한 알렉산드라 황후는 미신을 잘 믿고 신비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줄줄이 공주 4명을 낳은 끝에 어렵게 낳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는 모계로부터 혈우병 인자를 물려받아 병약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알렉산드라 황후는 타락한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 심취했다. 이러한 요인들은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를 몹시 실망시켰다.
알렉산드라 황후 또한 시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가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마리아 황태후의 친정, 즉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외가인 덴마크 왕실은 쉴레스비그-홀스타인 전쟁으로 인해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정인 독일을 경멸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도 사실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고부 사이는 항상 냉랭했다.
한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의 언니도 이름이 알렉산드라이다(덴마크의 알렉산드라).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즉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외삼촌인 에드워드 7세의 왕비가 되었다. 즉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에게는 시이모이자 외숙모가 되는 셈이다.
5.2. 어렵게 낳은 아들의 혈우병
결혼 6년 동안 딸 4명을 낳을 정도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금슬이 좋았다. 당시 황족으로서는 드물게, 알렉산드라 황후는 아이들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할 정도로 모정이 각별했다.
그러나 황실에서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고, 아들을 무척 기다렸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남성만이 황위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6] 알렉산드라 황후는 이것을 미처 모르고 시집왔던 듯하다. 아들이 없으면 첫딸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여제가 될 줄 알고 있었다가, 주변으로부터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독촉을 받고는 뒤늦게야 알고 당황하게 된다.
1904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다섯째 아이를 낳았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이다.
알렉세이는 이렇게 엄청나게 귀하고 귀한 아들이었지만, 불행히도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로 인해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다.[7] 이미 알렉산드라 황후의 작은 오빠, 즉 알렉세이 황태자의 작은외삼촌인 프리드리히도 혈우병 환자로 태어나 요절한 바 있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러시아 제국의 용하다는 모든 의사들을 불러 알렉세이 황태자를 치료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당시의 의학으로서는(그리고 현대에도)[8] 혈우병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귀한 아들의 불치병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고, 신경쇠약까지 앓을 정도였다. 때문에 딸들과 신하들은 많은 걱정을 했으며, 그녀의 시집살이는 상당히 괴로웠다. 이중에서 그나마 그녀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남편 니콜라이 2세와 막내 시누이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여대공뿐이었다.[9]
6.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
그러던 중,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친구인 안나 타네예바 비루보바의 소개로, 시베리아의 떠돌이 수도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만나게 된다. 라스푸틴은 황태자의 병을 고치겠다며 접근하여, 황궁을 들락거렸다. 물론 그가 병을 고칠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무슨 요법을 썼는지 묘하게도 황태자를 안정시키기고 평온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 때문에 아들이 몹쓸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자책 때문이었는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었는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신격화하여 그를 광적으로 믿기 시작했다. 황후는 라스푸틴을 신뢰하며 그를 가까이에 두었고, 요승 라스푸틴은 그 배경에 힘입어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라스푸틴이 황후, 공주들, 여러 황족/귀족 여성들과 난잡한 성관계를 맺고 있다는 망측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스푸틴의 남근은 역대급으로, 실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10] 심지어 라스푸틴은 공주들의 가정교사와 시녀들을 강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이 하는 일은 모두 성스러운 것"이라며 오히려 가정교사를 해고했다.
황후가 라스푸틴을 지나치게 싸고 돌자, 일설에는 황후가 라스푸틴과 불륜을 저질렀거나 성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일단 황후 본인은 라스푸틴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증거가 없었다.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조언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실제로는 남편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이자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누이인 동명의 올가 여대공이었다. 당시 니콜라이 2세의 황후와 공주들은 모두 라스푸틴에게 헤롱헤롱대고 있었다고. 위에서 나왔다시피 알렉산드라 황후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 대공비도 "라스푸틴을 멀리하라."며 충고했지만, 황후는 이런 인척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라스푸틴은 공주들과 친분이 있어서 공주들이 잠옷 바람으로 있는 방에 드나들 정도였으며, 공주들도 그를 '남동생의 병을 고쳐준 착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해서 싫어하지 않았다.[11] 아마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그랬듯, 공주들에게도 일종의 상담을 통한 멘탈 케어를 해준 듯하다.[12] 그렇기에 '라스푸틴이 황후와 공주들을 범했다'는 성추문이 끊이지 않았다.[13] 한국에는 왠지 모르겠지만 공주들이 라스푸틴을 싫어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지만[14] 실제론 전혀 아니었다. 공주들은 라스푸틴과 친했고, 총살당하는 그 순간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라스푸틴의 사진을 부적삼아 몸에 지니고 있었다.[15] 이렇게 공주들이 죽는 순간까지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을 정도로 홀려 있었으니, 라스푸틴과의 성추문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할 지경.
7. 러시아 혁명,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올가 여대공과 엘리자베타 대공비뿐만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귀족들 역시 라스푸틴을 반대했다. 그러나 라스푸틴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농민들에게 생계유지조차 어려울 만큼 가혹한 세금을 거둬들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에 항의하는 농민들에게는 총탄을 퍼붓기까지 했다. 라스푸틴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의 백성들은 차츰 독일(헤센 대공국) 출신의 황후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1916년 라스푸틴은 펠릭스 유스포프[16] 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황족&귀족)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러자 알렉산드라 황후는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가 이 암살에 관여하였다고 믿었고, 자매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엘리자베타 대공비의 양아들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17] 역시, 유스포프와 함께 라스푸틴 살해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분노하여 드미트리 대공을 추방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가 차르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황후, 공주들, 황태자도 모두 폐위되어 황궁에서 쫓겨났다. 304년 역사의 로마노프 왕조와 제정 러시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8. 유배 생활과 비참한 죽음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은 볼셰비키들의 감시 하에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생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토볼스크에 보내졌다가,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었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차르 일가는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황후와 공주들에게 음담패설 및 성적인 욕설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어린 공주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1918년 7월 16일 밤,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머물고 있던 차르 일가족은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감시자들은 날이 채 밝기도 전인 17일 새벽에 차르 일가 7명을 모두 깨워 지하실로 데려갔다. 니콜라이 2세는 애써 별 일 아닐 거라며 아내와 아이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곳에서 차르 일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총살이었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차르 일가의 시신은 제대로 장례를 치러 매장되지 못하고, 불태워지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사망 당시 황후는 향년 46세였다.
9.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의 죽음
한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에 시집와 살고 있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다음 날인 7월 18일에 향년 53세의 나이로 살해되었다.
엘리자베타 대공비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 세르게이 대공과의 사이도 그닥 그랬고, (아마도 세르게이 때문에) 자녀도 가질 수 없어서 세르게이 대공의 조카들을 입양했다. 세르게이 대공은 아내와 상의도 없이, 자신의 조카들인 마리아 파블로브나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를 양자로 데려와 길렀다.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아이들을 사랑하긴 했지만, 조카 마리아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남편과 사별한 후,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여 수녀원장이 되었다. 수녀가 된 엘리자베타는 여동생 알렉산드라 황후와 달리,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수도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여동생 일가와 마찬가지로 살해되고 말았다.
10. 죽음 이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제4공주인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죽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살아남은 아나스타시야 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도 많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자신이 아나스타시야 공주라고 주장한 여성도 있었다. 막내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 역시 살아남았다는 가설이 제기되었고, 마찬가지로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주장한 남성도 있었다.
그러나 차르 일가 모두의 시신이 발굴되고, 검사를 통해 그 시신들이 모두 본인임이 밝혀져, 이러한 가설 및 사칭은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2001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남편 니콜라이 2세 및 5남매와 함께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1. 여담
- 3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가 알렉산드라 황후를 상당히 많이 닮았다.
- 큰언니 빅토리아가 자신의 딸이자 알렉산드라에게는 조카되는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의 결혼문제에 대해 상의하려 편지를 보내자,[18] “아마 그 애도 우리처럼 행복할 거예요. 그럼 더 바랄것이 없잖아요.” 라는 답장을 보내며 조카의 결혼을 응원해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 왕실은 자신이 시집간 로마노프 황실처럼 몰락하고, 조카 앨리스는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불행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훗날 앨리스가 낳은 막내아들이 유골로 발견된 본인과 남편, 그리고 자녀들의 신원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데, 이 아들이 현재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인 필립 공이다.
11.1. 품성 논란
비참한 최후와는 별개로, 알렉산드라 황후의 인간적 품성은 별로였다는 평이 많다. 매우 고집스럽고, 도덕적인 면에서도 유연하지 못한 성격이였다고.
알렉산드라 황후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은 것을 빼면 대공국의 공녀로써 아름다운 외모와 고귀한 신분으로 칭송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고, 결혼도 정략결혼이 아닌 연애결혼을 해 남편과 금슬도 좋고 다산까지 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는 등, 그 시대 여성들과 비교하면 평탄하고 안온한 인생을 보냈다. 다른 황족이나 귀족 가문의 딸들도 부유한 환경에서 편하게 자랐을지는 몰라도, 결혼만큼은 본인의 뜻대로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특히나 20세기 말까지 존재했던 귀천상혼의 영향으로 정략결혼이 일상화 된 일국의 공주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자기 원대로 너무나도 잘 풀리는 인생을 살아와서인지 현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자신과 남편이 연애결혼을 했기 때문에 자식들도 연애결혼을 하기를 원했던 건지, 그 살 떨리던 시기에 혼기가 찬 딸들을 하루라도 빨리 해외로 시집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유유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혼기가 찬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이 좀처럼 시집가지 않고 있었던 이유도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이 있는 모국을 정략결혼으로 떠날 이유가 없어서였다. 심지어 장녀 올가에게 들어왔던 혼담 중 하나는 당시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8세와의 혼담으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본인의 외가이기도 한 영국의 왕세자비 자리였다.
결국 알렉산드라 황후의 부족한 정치적 능력은 남편과 자녀들을 파멸로 몰고 갔다. 결정적으로 병약한 아들을 위한답시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중용하는 바람에, 남편이 다스리던 러시아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평민 출신의 사이비 종교인이 황후의 뒷배만 믿고 지나치게 국정에 간섭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물론 황족들까지 반발할 정도였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친언니 엘리자베트 대공비와 시누이 올가 여대공마저 입을 모아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조언했지만, 알렉산드라 황후는 친인척들의 조언조차 일절 듣지 않았다. 결국 이는 러시아 제국을 아예 멸망시켜 버리는 계기가 되고 만다.[19]
마지막 희망이던 영국으로의 망명마저 알렉산드라 황후의 혈통이 독일계인 탓에, 당시 대영제국의 반독감정과 맞물려 조지 5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독일은 적국으로 맞서 싸웠기 때문에, 당시 영국에서 반독 감정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만일 첫째 올가 공주를 진즉 영국으로 시집보내 놓았더라면, 그나마 망명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조지 5세 개인은 도플갱어라 불릴 정도로 완벽하게 동일한 외모를 가진 이종사촌 동생인 니콜라이 2세를[20] 무척 아꼈지만, 대영제국의 대신들이 "우리 국민들이 독일을 무척 싫어하므로, 독일계 인물을 눈곱만큼이라도 도와주어서는 안 됩니다!"라며 막았다. 결국 조지 5세는 이종사촌 동생 일가가 총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21]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처음 러시아로 시집오는 순간부터 ‘독일 출신 황태자비가 제국을 망하게 하는 거 아니냐’는 불길하고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결국 러시아인들이 우려하던 대로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갔다.
12. 가족관계
12.1. 조상
12.2. 자녀
13. 관련 문서
[1] 생전 독일인들이 자신의 이름인 앨리스를 알리체라고 부른다고 불만을 표했었다.[2] 이미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인 1873년에 알릭스의 바로 위의 오빠인 프리드리히도 3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프리드리히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혈우병 때문에 부상으로 인한 출혈이 멈추지 않아 죽고 말았다.[3]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의 외할머니이다(빅토리아의 장녀인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의 막내아들).[4] 알릭스의 외숙모이다.[5] 알릭스는 '예카테리나'를 선택하려고 했지만 니콜라이의 제안으로 '알렉산드라'로 결정했다고 한다.[6] 원래 러시아 제국에서는 여성의 황위 계승이 가능했으나, 마지막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파벨 1세가 법을 개정하여 여성이 황위를 잇는 것을 금지했다.[7] 참고로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자녀들과 손주들을 두었다(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조). 그래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 외에도 많은 후손들이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특히 딸들과 손녀들이 외국 왕실로 시집가면서,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혈우병 유전자가 널리 퍼졌다.[8] 응고 인자를 투여해 증상을 완화할 수는 있으나, 완치는 불가능하다.[9]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누이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여대공은, 니콜라이 2세의 동생들 중 가장 차르 부부와 친밀하게 지냈던 형제이다. 대외관계가 막장이였던 차르 부부와는 몇 안 되게 사이가 좋았던 형제&시누이며, 조카들인 공주들도 잘 돌보았다.[10] 그 크기가 어지간한 사람의 팔뚝에 비견될 정도였다.[11] Massie, Robert K. (1967). Nicholas and Alexandra. New York: Dell Publishing Co. ISBN 0-440-16358-7 pp. 199–200.[12] 4명의 황녀들이 혈우병 환자들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막내딸 아나스타샤 황녀는 발가락 염증과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다. 거기다 니콜라이 2세 부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 결혼 끝에 5남매를 낳아서 차별없이 화목한 가정을 꾸렸지만, 결혼 10년 만에 어렵게 낳은 알렉세이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나고 말았다. 자신 때문에 고명아들에게 혈우병을 물려줬다며 죄책감을 느낀 알렉산드라 황후는 우울증 증상까지 보였고, 이로 인해 황태자뿐만 아니라 황녀들도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었을 것이다.[13] Mager, Hugo. Elizabeth: Grand Duchess of Russia, Carroll and Graf Publishers, Inc., 1998[14] 이런 추측이 도는 이유는, (덕혜옹주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비극적인 삶과 낭만적인 이야기가 맞물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거기다 올가 황녀는 총명한 1황녀로서 알렉세이 황태자를 제치고 황위계승자로 세우자는 이야기까지 있었기 때문에, '올가 황녀는 라스푸틴을 싫어했다'는 추측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15] Robert K. Massie, The Romanovs: The Final Chapter p. 8[16]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아 알렉산드로브나의 딸 이리나의 남편이다.[17] 남편 세르게이 대공의 조카였다.[18] 앨리스는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안드레아스 왕자와 혼인하기를 원했는데, 앨리스의 신분은 귀천상혼한 가문의 방계 공녀로써, 결코 낮은 신분은 아니지만 통치 가문인 왕실에 시집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던 신분이였다. 과거 유럽 왕정은 같은 왕족이나 공족끼리만 혼인했다.[19] 다만 알렉산드라 황후가 기폭제가 될 병크를 어마무시하게 터뜨린 것 뿐이지, 러시아 제국은 강력한 전제정과 반동 정치, 그리고 계속된 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패로 이미 곪을데로 곪아있었다.[20] 조지 5세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친자매 사이로,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는 이종사촌이다. 마리아와 알렉산드라가 서로 쌍둥이처럼 닮아서,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도 도플갱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똑같은 외모로 유명했다.[21]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지 5세는 이모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망명을 신청하자, 재빨리 군함 HMS 말버러 호를 보내 안전하게 영국으로 피신시켰다.[22]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4남이다.[23] 조지 3세의 4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