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clearfix]
1. 개요
[image]
[image]
위 움짤은 러시아의 황족들과 루마니아의 황족들이 같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가운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바로 타티아나.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4녀 1남 중 둘째(차녀). 러시아 혁명 때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의 4녀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였고, 그녀의 많은 자녀들[1] 이 유럽 여러 나라 왕족들과 결혼하면서 혈우병 유전자가 널리 퍼졌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작은오빠, 즉 타티아나의 작은외삼촌인 프리드리히도 혈우병을 앓다가 어린 나이에 죽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딸만 4명을 낳은 끝에 어렵게 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를 낳았다. 불행히도 이 아이 역시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고, 이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설치는 배경이 되었다.
참고로 그녀의 이름은 예브게니 오네긴의 등장인물 타티아나에서 따온 것이다. 오네긴의 타티아나 또한 올가라는 언니가 있었는데, 둘은 사이좋은 자매였다. 니콜라이 2세는 첫째딸 올가와 동생이 우애깊은 사이가 되길 바래 둘째의 이름을 타티아나라고 지었다.
2. OTMAA이라 불린 5남매
언니 올가와 2살 터울이 나는 바로 아래 여동생으로, 올가와 함께 방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었다. 타티아나의 아래로는 여동생 마리아와 아나스타시야, 남동생 알렉세이가 태어났다.
타티아나는 언니 올가와 제일 친했지만, 다른 두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과도 사이가 좋았다.
가족들 사이에서 황녀들을 부르는 애칭이 있었는데 타티아나는 타샤, 타냐, 타누쉬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서로가 일기 등에서 머리글자인 'OTMA'(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로 표현할 정도로 자매들끼리 친했지만, 5남매 모두 우애가 좋아서 막내 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와 함께 OTMA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혼란스러운 러시아 제국과 달리, 황제 일가가 자식들을 사랑했기에 가정은 화목했다. 5남매 모두 서로 사이가 좋아, 구김살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3. 미모의 여대공
타티아나는 키가 166cm로서 당시의 여자로서는 키가 큰 편에 속했으며[3][4] 어머니를 닮은 적갈색 머리와 회색 눈동자의 미인이었다. 그 시대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차르(러시아의 황제)의 4명의 딸들 중 가장 아름답고 조각 같다"고 알려져 있었다.
위의 평가에 걸맞게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녀이자 당시 제정 러시아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황실에서 무도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남자 귀족들은 서로 타티아나의 댄스 파트너가 되어 보려고 줄을 섰으며, 유럽의 내로라하는 왕국에서 많은 혼담이 들어왔다고 한다.
점잖고 다정한 성격이지만 자기 주장이 확실한 올가와는 정반대로, 타티아나는 매우 순종적이었고 동생을 보필하는 라스푸틴을 믿었다.[5]
타티아나는 차분하고 집중력이 강했지만, 성격이 매우 수동적인 데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서 일기에 오자가 많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사무능력이 뛰어나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의 비서로 일했다고 하며, 덕분에 자매들에겐 '총재'란 별명으로도 불렸다. 네 자매 중 어머니와 가장 친했고 연금 생활 땐 예카테린부르크로 먼저 보내진 알렉산드라 황후가 타티아나에게 알렉세이 돌보기를 맡긴 적도 있었다.
4. 언니처럼 혼담을 내치다
타티아나는 온 나라에서 혼담이 들어왔는데, 제정 러시아의 여대공이라는 지위와 조각같은 아름다운 미모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타티아나 여대공은 언니 올가처럼 가족의 곁을 떠나기 싫어서 끝내 모든 혼담을 내쳤다.
당시 20세기초 사회는 황녀들이나 공주들이 유럽 각국의 황실과 황실 사이를 오가며 정략결혼으로 양국 간에 협상 도구로 시집가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되었으니 타티아나의 행동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과거 루이 15세의 세 딸들도 저런 식으로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남았는데, 이 역시 특이한 사례이다. 사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자신들처럼 자녀들이 연애결혼을 하길 바라서, 정략결혼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은 아니었는지 타티아나 여대공은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왕이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운 알렉산다르 1세와 혼담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혼담이 중단된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서로 편지를 교환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의 관계는 상당히 진척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말고도 에드워드 8세, 즉 현재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숙부와도 혼담이 있었다. 타티아나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가 에드워드 8세의 아버지 조지 5세와 이종사촌이어서 자주 만나기도 하였고, 두 사람의 나이대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드워드 8세의 할머니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도 가끔 제정 러시아의 여대공이 에드워드의 적합한 신부감이 될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8세는 자신과 나이대가 맞는 러시아의 황녀들 중에서(올가, 타티아나) 타티아나가 더 좋다고 했는데, 타티아나가 알렉세이 황태자를 돌보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타티아나가 니콜라이 2세의 딸들 중에서 가장 예뻐서 그랬다고도 한다.[6]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타티아나는 총살당해 생을 마감했고,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다르 1세는 그녀의 죽음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알렉산다르 1세는 루마니아의 공주 마리야와 결혼했다. 여담으로 알렉산다르 1세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불가리아인에게 살해당했다(...)
5. 러시아 혁명,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다. 황제 일가는 볼셰비키 감시 하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황녀들의 침실의 문을 못 잠그게 하였으며, 심지어 욕실까지 따라왔다. 황녀들은 길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경멸과 비난과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자신들을 감시하는 군인들이 농담이랍시고 성희롱을 해대 황녀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타티아나 여대공이 충격을 받아 울면서 뛰쳐나가자, 여동생 마리아 여대공이 그 군인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다만 군인들과는 서로 가족에 대한 얘기도 하거나 영국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에 대한 기대 같은 얘기를 하는 등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성적인 농담도, 군인이 일부러 한 게 아니라 실수로 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튼 그나마도, 그들을 감시하는 책임자가 바뀐 이후로는 군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도 금지되었다.
참고로 왜 영국이 거론되었냐면, 알렉산드라 황후는 본래 독일 공녀 출신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앨리스 모드 메리의 딸이었다. 즉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가가 영국이다. 독일 공녀 알릭스는 앨리스 모드 메리가 자식들을 영국풍으로 키웠고, 앨리스 사후 빅토리아 여왕과 자주 교류를 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인물이었다.[7] 그 때문에 황후의 외가인 영국으로 가서 잘 살 수 있으리라 여긴 것 같지만 영국의 조지 5세가 미적거리다 볼셰비키가 들어서고 황족들이란 황족들을 다 잡아죽이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조지 5세는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되었을 당시에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동생 안드레아스의 처 앨리스[8] 가 영국에 구조 요청을 하자 재빠르게 데려왔고, 그리스 왕자 안드레아스와 바텐부르크의 공녀 앨리스의 아들이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이다.
6. 비참한 죽음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로 이송되었고, 새벽에 유대인 출신의 유로프스키가 황제 일가를 깨워서 2열로 세우고, 지하실로 인도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사진을 찍는 거라며 가족들을 안심시켰으나 유로프스키의 손에는 총이 있었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총으로 쏘아 죽였다. 황제 일가는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들의 시신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사람 손길이 가지 않는 곳에 무참히 버려졌다.
타티아나는 가장 친했던 언니 올가의 앞에서 죽었다. 당시 타티아나는 만 21세였다.
다음날에는 타티아나의 이모인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살해되었다.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둘째 언니로, 알렉산드라 황후보다 10년 먼저 러시아 제국에 시집와서 살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세르게이 대공[9] 과 엘리자베타의 결혼식에서였다.
세르게이 대공이 죽은 후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였고, 수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한편 여동생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생존설이 돌았고, 남동생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 생존설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7. 가족관계
8. 관련 문서
[1]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자손들을 두었다. 자세한 것은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조.[2] 여담이지만 황녀들 중에서는 둘째인 타티아나 황녀가 제일 미인이라,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타티아나 황녀가 무도회에 참석하면, 그녀와 꼭 춤을 추고자 하는 남자 귀족들이 줄을 섰다고.[3] 오늘날로 따지면 180cm가 약간 안 되는 정도의 큰 키로 실제로 아버지와 키가 비슷했다.[4] 다만 키가 166cm임이 밝혀진 것은 사후 유골을 감식하면서 밝혀진 사실이었다. 아마 1~2cm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5] 다만 큰언니 올가도 자기 주장이 확실한 성격과는 별개로 어머니와 다른 자매들처럼 라스푸틴에게 헤롱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라스푸틴을 멀리 하라고 조언한 올가 여대공은 동명이인이자 황녀들의 고모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이다.[6] 만약 타티아나가 에드워드와 결혼했다면 엘리자베스 2세는 지금 여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하면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 6세가 즉위했고, 조지 6세가 승하하면서 그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즉위했기 때문.[7]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자손들이 온 유럽의 왕족들이었고 증손자들을 볼 정도로 오래 살았던 몸인 데다 외국의 왕족이었던 자기 후손이 도움을 요청하면 영국 왕실에서 지내게 해주는 걸 허락하기도 했다.[8] 바텐부르크 공자 루이와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의 딸로 바텐부르크의 공녀다. 앨리스의 어머니인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언니라서 앨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앨리스 모드 메리의 외손녀가 된다.[9] 니콜라이 2세의 작은아버지[10]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