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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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왕국의 현임 국왕. '''현재 전 세계 생존한 군주들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이자 가장 나이가 많은(1926년생) 군주다.''' 또한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국왕이며, 여왕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있다.[3] '''만 25세'''이던 1952년 2월 6일부터 '''72년째''' 재위 중.[4]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그 밖의 국가와 영토의 여왕, 영연방의 원수,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2]
왕호
일반적으론 '영국 여왕'이라고 부르지만 1952년 즉위한 이래 영국, 호주, 캐나다, 자메이카 등 16개 영연방 왕국들의 군주직을 겸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 재위 중인 16개국이 아닌 다른 16개국의 여왕이'''었'''다.[5]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는 역사상 왕의 칭호를 가장 많이 가졌던 군주다. 여왕이 과거 재위했던 국가와 현재 재위 중인 국가는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 '헌법 개정'은 따로 국민 투표도 없었고 군사 쿠데타도 없이 이뤄진 것만 한정한 것이다.[6]
그리하여 엘리자베스 2세는 2020년 현재 '''3개 이상의 국가의 수장'''[7] 인 유일한 사람이다. 또한 '''현직 국가 원수 가운데 유일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자.''' 또한 현재 기준으로 가장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거느리는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이 여왕이 거느리는 면적이 18,800,000km2정도로 러시아보다 더 넓고, 인구는 1억 3500만 명으로 일본보다 많다.
2. 칭호
- 요크의 엘리자베스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Elizabeth of York (1926년 4월 21일 ~ 1936년 12월 11일)
- 엘리자베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Elizabeth (1936년 12월 11일 ~ 1947년 11월 20일)[10]
- 에든버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Elizabeth, Duchess of Edinburgh (1947년 11월 20일 ~ 1952년 2월 6일)[11]
- 여왕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1952년 2월 6일 ~ 현재)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Queen, Defender of the Faith(라틴어: Elizabeth II, Dei Gratia Magnae Britanniae, Hiberniae et terrarum transmarinarum quae in ditione sunt Britannica Regina, Fidei Defensor)
그리고 다른 여러 칭호들을 한데 다 통합해서 부르는 비공식 칭호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건 다음과 같다. 다만 정식 칭호는 아님에 주의.
'하나님의 은총으로 대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애든버러 공작부인, 메리오네스 백작부인, 그리니치 남작부인,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노르망디 공작, 가장 영예로운 가터 훈장의 군주, 가장 영예로운 바스 훈장의 군주, 최고(古)이며 가장 고귀한 시슬 훈장의 군주, 가장 저명한 성 패트릭 훈장의 군주, 가장 기품있는 성 마이클 훈장과 성 조지 훈장의 군주, 가장 훌륭한 대영제국 훈장의 군주, 무공 훈장의 군주, 제국 공로 훈장의 군주, 최고위 인도성 훈장의 군주, 가장 저명한 인도 제국 훈장의 군주, 영국령 인도 훈장의 군주, 인도 공로 훈장의 군주, 버마 훈장의 군주, 빅토리아&알버트 왕실 훈장의 군주, 에드워드 8세 왕가 훈장의 군주, 공로 훈장의 군주, 명예 훈위 훈장의 군주, 왕립 빅토리아 훈장의 군주, 가장 유서깊은 예루살렘의 성 조지 병원 훈장의 군주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Queen, Defender of the Faith, Duchess of Edinburgh, Countess of Merioneth, Baroness Greenwich, Duke of Lancaster, Lord of Mann, Duke of Normandy,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Imperial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Burm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Edward VII, Sovereign of the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Sovereign of the Most Venerable Order of the Hospital of St John of Jerusalem)'
그런데 공식 칭호는 1953년 대관식을 맞으면서 그녀가 여왕으로 있는 나라마다 각각 칭호를 제정하게 되었는데 영국의 경우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12] 과 그 밖의 국가와 영토[13] 의 여왕, 영연방의 원수[14] ,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칭호 및 현재 쓰지 않는 과거의 칭호들은 영어 위키백과에 있는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1953년 이후 엘리자베스 2세가 국가원수로 있는 국가들은 각각 별도의 칭호를 제정해서 사용하고 있으나 영국의 칭호와 형태가 대동소이하다.
이는 영국에서의 칭호며, 현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국가원수로 있는 나라(영연방 왕국)들은 저마다 칭호를 따로 정하게 되었다. 다른 영연방 왕국에서 사용하는 칭호도 대동소이하다.[15][16]
그리고 즉위 이후에 영연방 국가들이 새로 사용할 훈장을 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사단장으로서의 칭호가 덧붙여졌다.
'캐나다 기사단장, 오스트레일리아 기사단장, 뉴질랜드 기사단장, 바베이도스 기사단장, 파푸아뉴기니 밸러 기사단장, 캐나다 무공 기사단장, 캐나다 경찰 메리트 기사단장, 뉴질랜드 여왕 공로 기사단장, 뉴질랜드 메리트 기사단장, 바베이도스 성 앤드루 기사단장, 파푸아뉴기니 로거후 기사단장, 파푸아뉴기니 멜라네시아의 별 기사단장(Sovereign of the Order of Canada, Sovereign of the Order of Australia, Sovereign of the Order of New Zealand, Sovereign of the Order of Barbados, Sovereign of the Order of Valour, Sovereign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Merit of the Police Forces, Sovereign of the Queen's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New Zealand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St. Andrew, Sovereign of the Order of Logohu, Sovereign of the Order of the Star of Melanesia)'
영국 왕립 해군의 사령장관, 노르망디 공작[18] , 랭커스터 공작,[19] 맨 섬의 영주[20] 이고 영국 성공회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한때 피지의 '''대추장'''(Paramount Chief)이었던 적도 있는데, 이는 피지 문서의 대영관계 절을 볼 것.
더불어 영연방의 수장(Head of the Commonwealth)라는 명예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부왕인 조지 6세 재위 기간 중에 영연방에 영국 왕이 국가원수가 아닌 나라도 회원이 될 수 있게 바뀌었고, 그래서 '왕'과 별개로 '영연방의 수장'이라는 직함을 추가했는데, 이후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 직위도 이어 받았다.[21]
영국 언론에서는 그의 이름을 직접 칭하는 일이 드물고, Her majesty나 Queen 등으로만 칭한다. 서양에서는 이게 왕에 대한 경칭이기도 하다.
2.1. '엘리자베스 2세' 명칭 사용 논란
즉위 초 엘리자베스 2세의 명칭 사용에 '''스코틀랜드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인 이유는 엘리자베스 1세가 있었기 때문인데 엘리자베스 1세 시기는 아직 연합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이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입장에선 당연히 엘리자베스 2세지만 스코틀랜드 입장에선 그냥 엘리자베스였다.
나라에 따라 관행이 다르긴 한데, 영국(스코틀랜드 포함)을 포함한 대부분의 경우 '1세'는 나중에 '2세'가 생길 때만 ~세를 표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만약 엘리자베스 2세가 스코틀랜드에서의 이름을 따로 쓸 경우 엘리자베스 1세라고 적기보다는 그냥 엘리자베스라고 적게 된다. 마찬가지로 빅토리아 여왕도 그냥 빅토리아라고 하지 빅토리아 1세라고 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빅토리아 2세란 여왕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동일 군주가 여러 칭호를 사용하면서 넘버링을 여러 개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모두 합칭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1세'라는 표기를 쓸 수 있다. 이 경우 엘리자베스 2세 겸 1세(Elizabeth II and I; Elizabeth the Second and the First) 또는 엘리자베스 1세 겸 2세(Elizabeth I and II; Elizabeth the First and the Second) 식으로 되는 것. 21세기의 실제 사례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들 수 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별개의 국가인데 국왕만 같았던(동군연합) 시기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넘버링을 구분했었다.[22] 그런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한 나라가 되고서부터는 계속 잉글랜드의 넘버링만 사용되었다. 윌리엄 4세,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8세,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는 잉글랜드 넘버링에 근거하면 맞는데 스코틀랜드 넘버링에 근거하면 안 맞는다. 그러니 격분한 것.
영국 정부와 왕실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잉글랜드나 그 이외 지역과 다른 문장(royal coat of arms)과 다른 모토(royal motto)를 사용하고, 왕관을 그릴 때도 잉글랜드의 성 에드워드 왕관 대신 스코틀랜드 왕관을 그리며, 왕세자의 대표 칭호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 대신 로스시 공작(Duke of Rothesay)을 사용한다. 비록 잉글랜드의 상징들이 대표로 쓰이더라도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는 스코틀랜드만의 상징들을 쓰게 하여 스코틀랜드만의 오랜 전통을 유지해 온 것이다. 하지만 왕의 이름에 붙는 넘버링의 경우 스코틀랜드만의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잉글랜드의 넘버링으로 강제 통일당하니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로서는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2세라는 이름에 격분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은 공공연히 엘리자베스 2세를 부정하며 무려 1707년 연합왕국 결성 당시의 연합법까지 들먹이며 법원에 소송까지 냈으나 법원은 "'''국왕 명칭 결정은 국왕 특권'''"으로 소송을 기각하여 법적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스코틀랜드에서의 반발은 계속되어, 공보물이나 공공시설물에 표기된 엘리자베스 2세 표기에서 '2세' 부분을 훼손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23]
한편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당시의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24] 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넘버링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어느 쪽을 채택할 것인지 타협책을 제시했다. 향후의 국왕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 각각의 기준으로 '''~~세''' 부분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 둘 중 숫자가 높은 쪽을 선택하게끔 한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2세뿐만 아니라 그 동안 그냥 잉글랜드의 넘버링을 따르고 스코틀랜드의 것은 무시했던 윌리엄 4세,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8세의 넘버링까지 합리화되었다. 윌리엄 4세,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8세 역시 잉글랜드 쪽의 숫자가 크기 때문.[25] 나머지 역대 영국 국왕들은 잉글랜드를 기준으로 하든 스코틀랜드로 기준으로 하든 넘버링이 우연히 일치하거나[26] 양국 간에 동군연합이 성립(1603년)되기 이전에 양국에서 따로 모시던 군주들이므로 문제되지 않는다.[27]
타협책도 나온 데다가 무한정 이 문제만 붙잡고 있을 순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스코틀랜드인들의 반발은 일단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수시로 엘리자베스를 스코틀랜드에서만 그냥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곤 한다. 더불어서 여왕을 부르는 폐하에 해당하는 용어가 현재는 Your Majesty(2인칭)과 Her(남자 국왕일 때는 His) Majesty(3인칭)라고 하고 있는데, 이건 헨리 8세 때 확립된 잉글랜드의 관습이고[28] 스코틀랜드는 줄곧 Your/His/Her Grace라고 했으므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이 관습대로 Your/Her Grace라고 불려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있다.[29] 물론 왕실은 계속 그 요구에 대해 계속 답을 하지 않고 기존 관례(즉 헨리 8세 이후 잉글랜드에서 쓰기 시작한 관례)를 쓰고 있다.
2014년에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가 가결됐으면 다시 이 이야기가 거론되었을 것이다. 투표에서 Yes(스코틀랜드 독립)가 다수로 결정되면 엘리자베스 2세를 여왕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으로서 독립할 예정이었다(즉 영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는 형태로). 정말 독립하게 됐으면 엘리자베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별도의 칭호를 쓰게 될 테니까 스코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독립이 부결돼서 그 문제는 따로 논의될 새가 없었고 앞으로도 이게 거론되긴 힘들 듯하다.
향후 영국이 군주제를 죽 유지하고,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남거나 독립된 군주국이 된 상태에서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왕자가 즉위할 경우 다시 이 넘버링 시비가 붙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윌리엄 왕세손은 윌리엄 5세[30] 로 즉위할 텐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윌리엄 4세가 돼야 한다고 태클이 들어올 가능성이 충분하다.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딸려 있는 땅이 된 지 오래라 왕의 칭호에서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대신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잉글랜드 왕세자의 칭호로 쓰임). 잉글랜드 왕은 아일랜드 왕의 칭호도 같이 쓰긴 했는데, 아일랜드만의 넘버링이 따로 없었고 그냥 잉글랜드의 넘버링을 그대로 따랐다. 스코틀랜드는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잉글랜드와 동군연합을 하게 됐으므로 넘버링을 따로 썼지만, 아일랜드는 잉글랜드가 국외에 따로 지배하고 있는 영토 에 가까웠기 때문에 잉글랜드 넘버링을 그대로 쓴 것이다. 한때 영국과 동군연합이었던 하노버는 그 지역이 과거에 지배 가문이 이리저리 자주 바뀌었던 탓에 넘버링을 따지기가 힘들어 그냥 영국의 넘버링을 똑같이 썼다. 그리고 오늘날 영국에서 독립해서 영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는 나라들(예를 들면 캐나다)은 영국에서 쓰는 넘버링을 그대로 쓴다. 결국 영국 왕의 넘버링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불일치만이 문제가 되고 다른 데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
3.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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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21일 현지시각 오전 2시 40분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와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장녀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는 메이페어였으며, 제왕절개로 태어났다고 한다. 5월 29일 버킹엄 궁전에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고, '릴리벳' 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곤 하였다. 퍼스트 네임인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으로부터, 미들네임인 알렉산드라와 메리는 각각 증조할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31] 와 할머니 테크의 메리의 이름으로부터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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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의 엘리자베스 공주
1930년 여동생 마거릿 로즈 공주가 태어났다. 당시 여느 왕족이 그러하였듯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920년대에 들어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자주 병문안을 왔던 엘리자베스 공주를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4. 추정상속인
조지 5세가 재위할 때 엘리자베스는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 아버지 앨버트 왕자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 서열 3위였으나, 왕세자의 나이가 아직 젊고 나중에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1936년 조지 5세가 사망하여 에드워드 왕세자가 즉위하였으나 그해 말 월리스 심프슨에 의해 동생 앨버트 왕자에게 양위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엘리자베스는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추정상속인이라 왕세녀에 해당하는 Princess of Wales 작위를 받은 적이 없지만[32] 실질적인 차기 왕위 계승자였다. 만약 조지 6세가 아들을 낳았더라면 계승서열이 밀려 여왕이 되지 못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33]
5. 결혼
엘리자베스는 1934년과 1937년에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필립 왕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8촌인 친척이기도 했다. 1939년 13살이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립 왕자에게 사랑에 빠져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47년 7월 9일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녀의 약혼은 몇몇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단 필립 왕자는 [34] 지지해 줄 재정적인 기반도 없었고, 누나들은 나치 당원과 결혼하였기 때문이었다.[35] 실제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필립과의 결혼을 반대하였고, 특히 필립이 독일 혈통인 걸 항상 의심했으며 그를 독일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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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거행된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의 결혼식
결혼 전 필립 왕자는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왕자 작위를 포기하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 을 사용하였으며, '에든버러 공작' 작위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47년 1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독 감정이 심했던 상황이었던지라 필립 공의 누나들은 전원 참석할 수 없었다.[36]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의 결혼식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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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년 만에 1948년 11월 14일 첫자식이자 장남 찰스 필립 아서 조지를 낳았다. 2년 뒤인 1950년에는 둘째이자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를 낳았다.
6. 여왕으로서의 삶
입헌군주제가 이미 확립되어 근대 정치가 다 잡힌 상태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정치 권력은 전무함에 가깝다. 게다가 본인도 이 점을 생각해서 정치에 관해서는 발언 한마디 안하는 성향이 있어 현대 왕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심지어 1965년에 거행된 윈스턴 처칠의 국장 이외에는 40년 가까이 영국 총리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다가 2013년에 거행된 마가렛 대처의 장례식에 간만에 참석하기도 할 정도. 그래서 그런지 영국 국민들의 평가가 매우 높은 편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공개적인 정치 불화가 없는 선에서는 국정에도 일부 관여하고 있어, 실은 영국을 움직이는 흑막이 아닐까 싶은 모습도 보여주곤 한다. 예를 들면 내각 불신임으로 인해 총리가 사퇴했을 때 국왕의 특권으로 총리를 2번 임명한 경력이 있고,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막판에 탈퇴파들이 뒤집기에 성공하도록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37] 이처럼 정치에 일부 개입하는가 하면, 전쟁 등의 민감한 사안의 경우 여왕의 승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여왕이 이를 거부한 적은 한번도 없긴 했지만,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마가렛 대처의 포클랜드 전쟁 개전선언인 아르헨티나 선전포고 결의안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는 "불만족스럽다"고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불만 의사를 표현한 적이 있다. "부적절하다"고 했으면 거부권 행사인데, 당시 영국 여론이 전쟁 여론으로 기울어졌던 상황이라 포클랜드 전쟁을 막지는 않는 선에서 불만 의사를 표시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표면과 달리,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영국은 전세계 역사상 통치 전략이 가장 교묘하게 뛰어난 국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조항이 아닌, 영국인들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 '''영국인들은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신분제를 인정하고,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무를 이행한다면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자격이 있기에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주의인 것이다.''' 이런 개념 탓과 2차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낸 핏줄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전히 영국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과 별개로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영국 총리들의 중요한 정치적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여왕을 알현하여 보고서를 올리는 것인데, 이 역시도 에피소드가 많다. 첫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시가를 피우면서 대담하는가 하면, 마가렛 대처가 왔을 때는 대처가 자신을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15분쯤 기다리게 했다. 포클랜드 전쟁 때 마가렛 대처의 전쟁 준비안을 승인한 뒤에 "내 아들이 이번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다. 그녀(대처 총리)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 야사 같은 이야기지만 대처의 신자유주의정책 등 정책 전반이 내키지가 않아 아침마다 '''"오늘은 그녀가 얼마나 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는가?"'''라고 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도 미운정이라고, 2013년 4월 17일 엄수된 대처의 장례식에 처칠 이후 처음으로 왕실자격으로 참석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처음으로 여왕을 알현했을 때 '''"총리직을 맡게 된 걸 축하하오. 과인은 12명의 영국 총리를 만났소만"'''이라고 말해 캐머런을 쑥스럽게 만들었다고.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앞둔 시기에 영국군 여군 부대인 ATS[38] 에 중위(subaltern)로 입대해 대위(junior commander)[39] 로 진급하였다. 임무는 보급차량 운행이었다. 이 때문에 여왕이 2차대전 때 일개 운전병으로 참전한 것으로 와전되기도 한다.[40] 이후 얼마 뒤에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활동한건 약 3주 정도였지만 2017년 현재 '''생존한 국가원수들 가운데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인물로 엘리자베스 2세가 유일하다.''' 이 때문에 2009년에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65주년 기념식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초대하지 않아 여왕이 격노하고 국민적인 분노가 일어나는 등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노르망디에서 죽어나간 건 미군과 영국군이었다. 당시 국가원수 중 유일한 참전용사이자 영국군의 총사령관인 엘리자베스 2세를 초대하지 않는 행위는 그야말로 큰 결례. 비난 받는 가운데에도 사르코지는 정신 못 차리고 '''"여왕이 오는 건 환영하지만, 노르망디 기념식은 전통적으로 미국-프랑스 간의 행사다"'''라는 발언을 해서 더욱 어그로를 끌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재해서 어쩌어찌 넘어가긴 했지만, 여왕은 자신이 가는 대신 장남 찰스 왕세자를 보냈다. 일단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집권기인 2014년의 D-Day 70주년 기념식에서는 참석했다. 2019년 75주년 기념식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고령인 점을 감안해, 영국-프랑스 간 합의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나눠서 시행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프랑스 쪽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영국쪽 행사에만 참석했다. 영국쪽 행사 프랑스 쪽 행사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해외에 나간 상태에서 왕이 되어버린 국왕'''. 1952년 2월 6일 아버지 조지 6세가 암투병 도중 사망했을 때 자신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케냐를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자고 일어나니 여왕이 된''' 케이스. 엘리자베스 2세가 묵었던 트리탑 호텔[41] 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다. 여기에는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작이 여기서 묵는 동안 왕위를 계승했다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도 걸렸다. 주변에 야생동물이 많아서 전설적 사냥꾼이자 자연보호운동가 짐 코벳 영국군 대령이 밤새 잠도 안자고 경호를 서준 것도 유명한 일화.
이후 1992년에 발생한 윈저성 대화재의 복구사업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것이라 추산되어 국민들의 반발이 있자 스스로 왕실이 가진 면세 특권을 포기했다. 때문에 그 이후로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계속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다.[43]
그러나 2017년 11월 여왕이 본인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랭커스터 공국'''을 통해서 일부 '''자산을 조세피난처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파라다이스 페이퍼스 폭로로 밝혀지자, 그녀의 대인배라는 이미지에 타격이 가고 말았다. 랭커스터 공국은 두 피난처 모두 영국의 해외 영토며 투자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맏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나라 안팎에서 여왕을 비난하는 여론이 종종 나왔고,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후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하게 대응하자 급기야는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소리까지 터져나오기에 이르렀다.[44] 지금은 잠잠한 상황이지만 이때의 불씨가 아직도 잠복 중이라서, 영국의 공화주의자들도 여왕이 타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1999년 영연방 왕국의 일원이자 영연방 주요 회원국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왕을 '호주의 군주'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헌법을 바꿔 공화정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운동 끝에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는 54.87% vs 45.13%로, 과반수의 호주 국민들이 왕정 존속을 선택해 호주의 군주직을 유지하게 됐다. 당시 공화정 전환 운동의 지도자였던 맬컴 턴불은 이후 공화정 전환 운동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여러 정치활동을 거쳐 2015년 결국 호주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됐다. 호주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에 총리 당선 이후 계속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압박에도 공화정 전환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여왕이 만약 가까운 시일 안에 타계할 경우 맬컴 턴불 총리가 호주 왕정 유지에 불안 요소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많다. (하지만 2018년에 턴불은 퇴임했고, 후임 총리 모리슨은 본인이 근왕파임을 밝혀 일단은 식은 떡밥.로그인 필요) 또한 호주의 공화정 국민 투표의 여파가 캐나다,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 다른 영연방 왕국들로 퍼졌다. 해당 국가들의 여론 조사 등을 봤을 때 여왕 사후 왕위 계승의 향방에 따라 영연방 왕국들의 군주제 폐지 여부가 결정될 확률이 높다.[45]
이와는 별도로 2010년대 들어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400년간 이어온 연합왕국의 왕관이 자기 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를 시행하기로 합의하면서 여왕의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2014년 투표를 앞두고 영국 정가에서는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게 "앞으로 잘해줄 테니까 제발 남아줘요"하며 읍소하고 있으며 여러 정치인들은 여왕에게 "폐하 한마디라도 해주세요!"라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립 문제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며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46]
더 선의 주장에 따르면 브렉시트 투표 직전 식사 자리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대한 회의적인 뉘앙스의 발언이 있었다고 하며, 탈퇴파에서 이를 막판 캠페인에 활용하기도 했다. 여왕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국이 유럽의 일부여야만 하는 이유 3가지를 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왕이 브렉시트를 두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이다. 이에 언론 규제 단체인 IPSO는 더 선의 기사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misleading)고 발표했지만, 더 선은 두 명의 소식통을 통해서 여왕이 당시 부총리였던 닉 클레그한테 말했다고 주장했다.### 닉 클레그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고브가 더 선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한 소식통 중 한 명이라고 지적했으나, 마이클 고브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닉 클레그는 여왕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일개 부총리한테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 논평을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더 선의 주장을 보증해주기를 사실상 거절했다.
영연방 수장을 찰스 왕세자에게 물려줬으면 하는 발언을 하였다.#
2018년 12월 29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비밀리에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기 위해서 로비를 진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버킹엄 수석 비서는 내각에 보내는 편지에 여왕은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고 싶지만,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면 왕실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갈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고 적었다. 지금까지 다른 왕족들이면 몰라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이 편지의 폭로로 여왕도 사사로운 이유로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2019년 1월 25일,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례적으로 중립적이지만 정치와 관련하여 의원들에게 합의점을 찾기를 촉구했다. 브렉시트가 노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모두 모여서 합의점을 찾읍시다"라고 의원들에게 부탁했다.# 일각에서는 총리인 테레사 메이가 아니라 의원들에게 직접 말한 것은 여왕이 총리와 내각을 더 이상 신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9년 2월 2일, 브렉시트가 노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영국 정부는 여왕과 왕족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계획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 내각 관계자는 "이 계획은 냉전 시기부터 있던 것으로 노딜 브렉시트로 시민들의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대비하기 위해서 다시 고려 중이다"라고 대답했다. 영국의 재계와 경제 전문가들은 노딜로 갑자기 관세가 생기면 식약품을 수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었다. 이에 하드 브렉시트 지지자인 제이콥 리스-모그는 내각이 노딜 브렉시트에 불필요하게 긴장한다며 영국 왕실은 2차 세계대전에도 런던에 남아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던 중 독일 슈피겔이 1988년 11월 이임 인사를 하러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난 뤼디거 베히마어 주영 독일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의 요약에서 “영국의 미래는 유럽에 달렸다”고 했다는 내용의 외교전문이 공개됐다.#
일본의 아키히토가 물러나고 나루히토가 즉위하면서 영국 내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의 양위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물론 여왕 본인이나 왕실 및 정치권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아직 없다.
2019년 8월 11일 영국 일간 타임즈에서 여왕이 브렉시트 문제로 혼돈을 겪고 있는 영국의 정치 현실과 관련해 현 집권 세력에 대해 "inability to govern(제대로 통치를 못 한다, 통치 능력이 없다)"며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기사1 기사2
2019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별장인 발모랄 성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성을 방문한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장난을 쳤다는 기사가 나왔다. 여왕을 몰라본 관광객들이 이곳에 사시냐고 질문하자 엘리자베스는 인근에 집이 있다고 대답하고, 여왕을 만나본 적이 있냐는 관광객들의 질문에 대해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 옆에 있던 수행원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여왕을 만나 본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끝까지 여왕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짓말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관광객들을 속인 것. (서울신문 기사)
2020년 1월에 해리 왕자의 독립과 관련해서 왕실 고위직 회의를 가졌으며, 독립을 승인하였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영국에서도 확진자 4만여 명, 사망자 4천여 명이 넘어가고 보건장관, 보건차관이 감염되고 보리스 존슨 총리마저 감염되어 자가격리를 하던 중 입원하게 되면서 리더십에 큰 공백이 생기자 여왕이 직접 나섰다. 4월 5일, 각종 매체를 통해 발표한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여왕은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일선 의료진들을 칭찬하고 국민들을 격려했다.#
2020년 6월 25일에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서 다른 참전국 국가원수들과 함께 추념 메시지를 보냈다. 다만 영상으로 직접 출연한 다른 국가원수들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2세는 출연하지 않고 사이먼 스미스 주한영국대사가 메시지를 대독했다. 메시지 전문
2020년 10월 15일. 7개월 만에 윌리엄 왕세손과 함께 외출하였는데, 노마스크라서 논란이 나왔다.# 하지만 다시 코로나19가 퍼지자 원저성으로 들어갔다. #
7. 장수만세
7.1. 영국 역사상 최장수 & 최장재위 군주
현재 '''98세'''이며, 재위기간은 72년째로, 영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가장 재위기간이 긴 군주다.[47] 감이 안 온다면,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기간 동안 영국 총리가 14명이 교체됐고 미국 대통령 15명이 거쳐갔으며 프랑스 대통령은 제5공화국으로 개헌하고도 8명이 교체됐다. 또 영국을 제외한 타 군주국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 군주가 바뀌었다.''' 더 와닿게 예를 들자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루이 암스트롱이 LP 판에 재즈를 녹음하던 시절부터 5G 시대가 도래한 지금까지''' 장수하고 계신다.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부터 즉위해서 12명의 대통령이 거쳐간 현재까지도 재위하고 있다.''' 대관식 때 축하 사절로 갔던 사람이 '''신익희'''이고, '''순종의 어진을 직접 그렸던 어진화사'''가[48] 여왕의 즉위 선물로 전달할 초상화를 그렸다.#
2015년 9월 9일 오후 5시 30분이 경과함에 따라 고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63년 216일 16시간 30분을 경신 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날을 기념하는 특별한 행사 없이 에든버러 인근에서 열린 열차 노선 개통식에 참석한 후 왕세손 부부와 저녁 만찬을 가졌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여왕이 지난 63년간 끊임없이 변화하는 버팀목이 되어줬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현재 생존한 군주들 중에서는 2016년 10월 13일 태국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이 재위 70년 126일로 사망하고 , 2015년 1월 23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향년 90세(1924년생)로 사망함에 따라 '''2016년 이후 기준으로 생존한 군주 가운데 최고령이자 오래 재위한 군주'''가 되었다.[49]
2017년 2월 6일 재위 65주년 사파이어 주빌리를 맞았다. 서구 군주 가운데서는 기존의 최장수한 빌헬름 1세의 만 90세를 넘겨 최장수 군주가 되었으며,[50][51] 프란츠 요제프 1세(만 68년 재위)를 제끼고 2020년 1월 27일부로 근대 이래 가장 오래 재위한 서구의 (대국) 군주이기도 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루이 14세뿐. 만약 5년만 더 살아서 재위 72년을 경신한다면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루이 14세의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다. 여왕의 모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가 101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여왕이 96세가 되는 2022년에는 재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주빌리가 거행될 예정인데 2021년 현재 여왕의 건강 상태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금연, 저녁 식사시 탄수화물 자제, 하루 식사를 4끼로 나눠 소식하는 것 등을 장수의 요인으로 꼽았다.
근대 이래 80살을 넘긴 60년 이상 재위한 5명의 (대국) 군주 가운데 1명인데, 나머지 넷은 거론된 빅토리아, 푸미폰, 프란츠 요제프, 그리고 쇼와 덴노[52] 가 그들이다. 근대의 범위를 넓히면 청나라 고종 건륭제도 들어가게 된다. 2014년부로 만 88세에 다다르면서 쇼와보다 장수하게 되었고, 재위기간도 넘겼다.
이 때문에 2002년에는 즉위 50주년을 기념하는 금 희년(골든 주빌리) 행사[53] 가 있었고, 2012년에는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희년(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거행되었다. 2013년에는 초상화가 들어간 즉위 6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니라 마가렛 대처를 닮았다는 구설에 올랐다.
한때 즉위 60주년 되는 해인 2012년에 찰스 왕세자에게 양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여왕 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전임 국왕이 사망해야 후임자에게 왕위가 승계되는 영국 왕실의 전통도 있거니와, 여왕의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남동생 조지 6세에게 양위한 것이 국왕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행위라고 비판받는 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기 때문. 아흔을 넘었는데도 매우 건강한 데다 모후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는 '''101세'''까지 장수했기에 찰스 왕세자의 즉위가 한참 멀어보인다. 2016년 90세 생일을 맞았을 때 왕실 전기작가 휴고 비커스는 "같은 90살이었을 때의 엘리자베스 왕대비보다 더 건강해 보인다. 왕위 승계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고 밝혔다.
2007년에는 똑같이 장수중인 남편 필립 공과의 결혼 6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는데, 영국 군주정 역사에서 가장 긴 결혼 생활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11년 6월 10일에는 필립 공의 90세 생일이 있었다. 결혼 50주년과 60주년 때와는 달리, 2017년에 맞은 결혼 70주년은 가족과 친구만 참석하는 조촐한 축하 행사만 거행되었다.
이렇듯 장수하다 보니 여왕 즉위 후 거쳐간 역대 영국 총리가 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 흄, 해럴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 제임스 캘러헌, 마가렛 대처, 존 메이저,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까지 14명에 달하며 특히 토니 블레어는 '''1953년생'''이라서 여왕 재위기간 중 태어나 총리가 된 첫 사례. 1966년생 캐머런과 1964년생 존슨은 말할 것도 없다. 메이 역시 1956년생으로 재위기간 중에 태어났다.
또한 재위 중 만난 미국 대통령 역시 무려 '''13명'''#[54]
2012년 6월 4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여왕이 퇴위한다거나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를 건너뛰어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이 즉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한편 여왕이 2013년 11월에 열리는 영연방 정상회의에 불참하고 찰스와 카밀라 부부를 대신 보내기로 해 왕위 승계를 위한 수순 밟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55] 1971년의 첫 회의를 제외하면 여왕이 영연방 정상회의에 불참한 적이 없었던 것도 이러한 주장을 나오게 하는 데 한 몫 했다.
2013년 7월에는 캐서린 왕세손비가 출산 예정일을 넘겼는데도 출산 소식이 없자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으니 내가 휴가 떠날 23일 전에만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7월 22일, 세손비가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조지 왕자를 순산함에 따라 3대 뒤에 왕이 될 증손자까지 보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기록은 빅토리아 여왕 재위 중인 1894년에 에드워드 8세가 태어난 이후 119년만의 일이다. 2015년 5월 2일에는 캐서린 세손비가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를 순산함에 따라 외동딸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 이후 65년 만의 블러드 프린세스도 보게 되었다.
여담으로 고구려의 장수왕도 하도 오래 즉위한지라 (79년) 태자가 그보다 먼저 죽었다. 따라서 장수왕의 후계자인 문자명왕은 그의 손자였다. 2010년대에 들어와 바티칸, 네덜란드, 카타르, 벨기에, 스페인, 일본 등 세계 각지의 군주국에서 국왕이 후계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났기에 엘리자베스 2세도 동일한 수순을 밟을지가 관심사지만 아직까지는 양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 92세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열었다. 런던의 런던스 앨버트홀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스팅과 톰 존스, 카일리 미노그,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 섀기 등 음악가들과 연극, 영화 스타들이 참여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콘서트가 끝난 뒤 아들 찰스 왕세자와 함께 무대에 섰다.
2020년에는 아랍 군주들 중 최장 재위 군주였던 오만의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와 최고령 군주였던 쿠웨이트의 사바흐 알아흐마드 알자비르 알사바흐가 차례로 세상을 뜨면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짬을 견줄 만한 군주도 거의 사라졌다.
7.2. 재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2012년 2월 6일부로 재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을 맞았는데 이는 고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된 1897년 이후 115년만의 경사.관련기사 여왕은 영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공화주의자들의 반발을 고려해 가급적 기념행사의 규모를 축소해서 낭비를 줄이려고 하지만, 영국 정부에서는 2012 런던 올림픽 개최와 맞물려 관광객을 대거 유치할 수 있는 호기로 보고 각종 행사를 준비했다.
2월 3일, 100만 그루 나무 심기 캠페인에 참석해 첫 번째 나무를 심는 것으로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시작했다. 2월 6일은 60주년 당일이지만 부왕 조지 6세의 기일이기 때문에 행사가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노퍽 주의 소도시 킹스린과 샌드링엄 및 인근 학교를 방문한 여왕은 어린이와 시민들을 만나 축하를 받았으며, 즉위 60주년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데 다시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런던 하이드 파크와 에든버러, 고스포트에서는 축포를 쏘았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여왕의 통치에 존경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월 8일,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여왕을 찍은 사진 1백 점이 4월 22일까지 전시된다. 2월 15일, 여왕과 필립 공이 참석한 가운데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의 공관인 램버스 궁전에서 다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한 즉위 60주년 기념 리셉션이 열렸다.
3월 10일,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6월 본행사를 앞두고 주빌리투어 일정을 시작했다. 이 여행은 오는 7월까지 와이트 섬, 버밍엄, 머서티드빌, 에든버러 등을 거칠 예정이라 알려졌다. 남편과 손자며느리 캐서린 왕세손비를 대동한 여왕이 제일 먼저 방문한 도시는 레스린으로, 이를 기념해 도시의 광장을 주빌리 스퀘어로 개칭하고 여왕이 참관한 가운데 명판 제막식을 가졌다. 여왕 일행은 드몽포르 대학에서 학생들이 연 패션쇼를 관람한 후 레스터 성당에서 열린 감사성찬례에도 참석했다. 3월 20일, 의회를 방문해 재위기간 동안의 감회를 밝히는 연설을 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영국적인 덕목으로 복원력, 창의력, 관용성 등을 예찬한 여왕은 영국군의 희생과 용기, 영연방 내 우호관계 증진 등을 강조했다. 이날 영국 의회는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의원들의 사비를 모아 1,500 조각의 유리로 왕실 문장을 나타낸 스테인드글라스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공개했다. 한편 왕세자와 콘월 공작부인이 주빌리투어의 일환으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을 순방하기 위해 이날 출국했다. 3월 23일, 영국/역사상 즉위 60주년을 맞은 국왕은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뿐이며 영국 국회의사당 서쪽에 빅토리아 타워가 있는 만큼 그동안 영국을 위해 헌신한 엘리자베스 2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빅 벤을 '''엘리자베스 타워'''로 개명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3월 24일, 주빌리 투어로 맨체스터를 찾은 여왕 부부가 한 서민 커플의 결혼식에 깜짝 참석해 부부와 하객 모두를 놀라게 했다. 평소 왕실의 열렬한 팬이었던 존 캐닝이 버킹엄 궁전에 청첩장을 보냈지만 당연히 거절되었는데, 마침 그의 결혼식 날 주빌리투어 공식 일정으로 맨체스터를 방문한 여왕 부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는 결혼식장을 찾은 것. ##
4월 16일,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3일간 방문했다. 4월 19일,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의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어린이 20만명이 그린 자화상이 여왕의 초상화와 함께 버킹엄 궁전 정면에 3일간 영사된다. 4월 26일, 3남 에드워드 왕자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여기서 에드워드 왕자는 고조부 에드워드 7세가 152년 전 왕세자 시절에 방미해 2그루의 나무를 기념식수했던 필라델피아 지라드 칼리지(Girard College)를 찾았다.
5월 2일, 차남 앤드루 왕자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인도를 이틀간 방문했다.
5월 10일, 17개국에서 온 550필의 말과 1,200명의 무용수들이 참가한 윈저호스쇼가 왕실의 성원하에 13일까지 개최되었다. 여왕 부부가 참석한 폐막식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수잔 보일과 호주의 유명 연예인 롤프 해리스[56] 공연이 있었다. 5월 14일, 마담 투소 박물관이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해 새로 제작한 여왕과 필립 공의 밀랍 인형을 공개했다. 5월 17일, 1952년 즉위한 이래 현재까지의 여왕을 주제로 한 60점의 회화 작품이 선보이는 'The Queen: Art & Image'전이 영국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10월 21일까지 열리는데, 김동유 교수가 아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되었으며 다이애나비의 사진 1,106개로 여왕의 얼굴을 완성한 사진을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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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세계 각지의 군주국 왕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 점심 만찬이 윈저성에서 열렸고, 저녁에는 찰스 왕세자가 주최하는 만찬이 버킹엄 궁전에서 열렸다. 사진에 등장하는 왕족들은 다음과 같다.(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볼드체는 당시 촬영 시점 기준으로 현직 국가원수.
- 앞줄 : 전 일본 천황 아키히토, 전 네덜란드 여왕 베아트릭스,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57] , 전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 전 루마니아 국왕 미하이 1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전 불가리아 국왕 시메온 2세, 브루나이 술탄 하사날 볼키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스와질란드 국왕 음스와티 3세, 리히텐슈타인 대공 한스-아담 2세
- 가운데줄 : 모나코 대공 알베르 2세,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 레소토 국왕 레트시에 3세, 전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 전 카타르 에미르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 바레인 국왕 하마드 빈 이사 알할리파, 전 말레이시아 아공 압둘 할림
- 뒷줄 : 쿠웨이트 에미르의 사촌 나세르 모하메드 알자베르 알사바, 아부다비 왕세제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전 유고슬라비아 왕세자 알렉산다르, 통가 국왕 투포우 6세, 당시 태국 왕세자이던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국왕, 모로코 공주 랄라 메리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조카 모하메드 빈 나와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다이아몬드 주빌리의 본격적인 행사는 임시공휴일인 6월 2일부터 6월 5일까지 나흘간 열린다.(관련기사) 이 기간 동안 들어가는 행사 비용은 세금을 포함해 1,200만 파운드(약 216억 원)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영연방 15개국에서는 2,012개의 기념등을 밝히는 행사를 개최한다.
임시공휴일의 첫날인 6월 2일, 영국 최고 권위의 경마대회 '엡섬 더비(Epsom Derby)'가 개최되어 여왕과 왕실 가족이 관전했다. 엡섬 더비의 개막을 통해 나흘간의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대회에는 경마팬인 여왕의 경주마도 출전했다.
6월 3일, 왕실이 국민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빅 런치가 열려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의 분위기를 돋구었으며 찰스 왕세자 부부도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를 방문해 시민들과 함께 축하했다. 이번 거리 파티를 위해 영국 주요 도시에서 9,500건의 거리 폐쇄 신청이 허가되었다. 또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포함한 331명의 의원들이 영국 국회의사당의 빅 벤을 '엘리자베스 타워'로 개명하는 캠페인에 서명했는데,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해 의사당 건너편 광장의 타워를 '빅토리아 타워'로 개명한 전례를 따랐다고. 템스강에서는 여왕 부부와 왕실 가족이 첼시 부두에서 로열 바지선 스피릿 오브 차트웰 호에 승선한 가운데 대규모 수상 퍼레이드가 열렸다. ## 스피릿 오브 차트웰 호는 해군 함정과 영연방 53개국에서 온 선박 및 9백여 척의 민간 선박 등 도합 1천여 척의 호위선을 거느리고 템스강 서쪽 배터씨 브리지에서 출발해 동쪽 타워 브리지까지 11km 구간을 90분간 항행했으며, 비가 오는 날씨에도 150만명의 군중이 강변과 다리에 운집해 350년 만에 최대 규모로 수상 퍼레이드가 거행되었는데, 왕실 가족이 외부에 장시간 노출되기 때문에 경호선 190척과 경찰 5,500명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한편 영국의 소도시 글로스터에서 중세부터 이어진 관례에 따라 자기 고장의 전통음식인 칠성장어 파이를 2002년 골든 주빌리(즉위 50주년) 때와 마찬가지로 여왕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글로스터산 칠성장어가 급감하면서 미국와 캐나다의 오대호에서 수입한 칠성장어로 파이를 만들어 논란이 벌어졌다.
6월 4일, 여왕의 부군인 필립 공이 전날 있었던 수상 퍼레이드 참석 후유증으로 급성 방광염 증세를 보여 런던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 비가 오는 날씨에 2시간 가까이 선 채로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이며, 당국은 이로 인해 다이아몬드 주빌리 콘서트를 비롯해 5일에 열리는 세인트 폴 대성당 기념 감사성찬례와 거리행진에 필립 공은 불참하지만, 여왕은 공식 일정을 그대로 소화할 예정이라 밝혔다. 버킹엄 궁전 앞에서 로비 윌리엄스, 윌아이엠, 제시 제이, JLS, 게리 발로우, 셰릴 콜, 클리프 리처드, 랑랑, 알피 보, 줄스 홀랜드, 루비 터너, 그레이스 존스, 에드 시런, 애니 레녹스, 르네 플레밍, 톰 존스, 셜리 배시, 카일리 미노그, 엘튼 존, 스티비 원더, 매드니스, 폴 매카트니 등이 공연한 대규모 야외 콘서트가 성황리에 열렸다. 한편 영국 전역과 영연방 국가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4,180개의 횃불을 밝히는 행사가 열렸다. 횃불 점화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40주년과 60주년 때의 행사를 재연한 것으로 오후 10시에 첫 점화가 시작되어 버킹엄 궁전 앞에서 열린 다이아몬드 주빌리 콘서트에 참석한 여왕이 마지막 횃불을 점화히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6월 5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2천의 인사가 함께 한 기념 감사성찬례를 마친 여왕과 왕실 가족은 근위대와 기마대, 군악대의 호위를 받으며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버킹엄 궁전까지 마차로 행진했으며, 트라팔가 광장부터 궁전 앞의 더 몰(The Mall)까지 모인 군중은 약 150만으로 추산되었다. 이밖에도 길드홀에서의 리셉션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의 점심 만찬이 있었다. 나흘간 이어진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는 여왕이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축제 기간 동안 아낌없는 환호와 축하를 보내준 군중들에 대한 답례를 하고 영국 공군기가 궁전 상공에서 공중 분열식을 펼치는 것으로 대단원을 막을 내렸다.관련기사 이 날 여왕은 영국과 영연방 국가에 방영된 대국민 연설에서 '나를 겸허하게 만든 경험'이었다며 국민에게 감사를 표했다. 여왕이 대국민 연설을 한 것은 1997년 다이애나비의 교통사고 사망 이후 15년만이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 '미영 양국은 오랜 기간 특별한 관계 속에서 역경도 있었지만 항상 동맹을 유지했으며, 여왕은 이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라고 축하했다.관련기사
6월 26일,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이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북아일랜드를 이틀 동안 방문했다.
9월 11일, 윌리엄 왕세손과 캐서린 왕세손비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솔로몬 제도, 오스트레일리아 등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국가를 10일간 방문했다.
11월 4일,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파푸아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의 영연방 국가를 13일간 방문했다.
7.3. 재위 70주년, 플래티넘 주빌리
2022년 2월 6일 달성 예정. 엘리자베스 2세가 당해 년도 생일까지 생존한다면 만 96세다. 2022년 6월 2∼5일에 개최할 것이라고 영국 정부가 밝혔다. 해당 기간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된다.#
일각에서는 재위 70주년이자 남편 필립 공이 은퇴한 나이인 96세가 되는 2022년에 찰스 왕세자에게 양위는 아니더라도 공식적으로 섭정을 맡기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나온다.
8. 가족관계
엘리자베스 2세/가족관계 참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윗세대로는 조부모인 조지 5세와 테크의 메리, 부모인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있다. 여담으로 할아버지 조지 5세가 재위할 적에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아버지 조지 6세가 재위할 적에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유일한 형제로는 여동생 마거릿 로즈가 있었으나 2002년에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오점이 있다면 그 놈의 자식들인데(…),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영국 왕실 스캔들이 여왕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나올 정도로 자식농사는 다 말아먹은 것 같다. 그래도 에드워드나 윌리엄처럼 아들이나 손자가 간간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기사가 나오는 걸 보면 아주 희망이 없는 건 아닐지도. 에드워드는 네 자녀들 중 유일하게 이혼하지 않고 20년 넘게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인 필립 공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손자녀, 증손자녀는 엘리자베스 2세/가족관계 문서 참조 바람.
더불어 북아일랜드에서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1972년 1월 31일 일요일 비무장 민간인 학살사건 당시 가해자인 영국 군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사건도 오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숙부[64] 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원수였던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 (1900 ~ 1979 , )이 IRA의 보복 폭탄 테러로 끔살[65] 당하는 일도 겪어야 했다.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은 영국 해군 대위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66] , 장남 찰스 왕세자도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1971~1976년까지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심지어 문제아 취급받는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도 해군 헬기 조종사로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했다. 다만, 셋째 아들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는 대학 졸업 후 영국 해병대에 입대했으나 12개월 훈련 기간 중 3분의 1만 하고는 그만두고 나와 논란이 있었다.[67] 찰스 왕세자의 장남인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은 군 통수권자가 되기 위해 육·해·공군을 순회한 후 공군 구조헬기 조종사로 복무했다.[68] 남동생 해리 왕자도 근위대 '''블루스 앤드 로열스''' 기병연대 소속으로 아프간에 파병되어 일선에서 전투소대장 임무를 완수하고 헬기 조종사 양성 코스를 수료했다. 국방부에서는 "해리 왕자 때문에 다른 전우들이 위험해진다"면서[69] 반강제로 귀국시켰지만, 그후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AH-64 조종사로 군복무 중이다. 2012년 9월 14일(현지시간)에는 탈레반이 해리 왕자를 죽이기 위해 그가 있는 기지에 공격을 가했으나 무사했다.
이렇듯 왕실 구성원 중 남성 전원이 군복무를 완료했거나 수행 중이다. 다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일반병으로 복무하지는 않고 전원 장교로 복무했다.[70]
엘리자베스 2세까지는 영국 왕족의 성씨가 윈저(Windsor)이고[71] 윈저 가(House of Windsor)의 일원이다. 하지만 그녀와 남편 필립 공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둘의 성을 합쳐 마운트배튼윈저(Mountbatten-Windsor)를 성(surname)으로 쓰게 되는데,[72] 왕가의 이름(family name)은 성과 구분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윈저 가(House of Windsor)에 속하는 것으로 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엘리자베스 2세가 태어나기 전인 1917년에 이미 영국 왕실의 명칭을 영구히 '윈저 왕조'로 고정하기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 왕조의 명칭을 남편인 필립의 성인 '마운트배튼 왕조'로 바꿔야 하는지, 아니면 기존의 '윈저 왕조'란 명칭을 계속 쓸 것인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숙부인 루이 마운트배튼도 이를 잘 몰라서 언론의 질문에 대해 '혹시 마운트배튼 왕조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추측만 했을 뿐이었다. 이는 당시 생존해 있던 엘리자베스의 할머니인 메리 대왕대비가 "이미 이전에 영구히 윈저 왕조라고 명칭을 정한다고 결정되었으며, 이는 이후 여왕이 즉위해도 왕조의 이름이 여왕의 남편의 이름으로 바꾸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답을 내려주며 해결되었다.
보통 surname=family name=성씨이지만, surname과 family name을 구분한 특이 케이스에 속한다. 영국 왕실의 공식 설명.]대부분의 왕실 일원이 성을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마운트배튼윈저(Mountbatten-Windsor) 성을 사용한 최초의 자손은 루이즈 앨리스 엘리자베스 메리이다. 아버지 에드워드 왕자가 백작이기 때문에 '전하 (Her Royal Highness)' 경칭을 사용하지 않고, 성을 표기한다.
왕위 계승 서열은 윈저 왕조 참조.
여담으로 모계로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지만, 요약하자면 스페인의 알폰소 6세의 첩 혹은 부인인 세비야의 자이다 공주[73] 가 거슬러 올라가면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라는 것. 그리고 스페인 왕족들과 영국 왕족들의 결혼으로 그 피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자이다 공주가 출산 중 사망했다라는 주장도 있어 확실하진 않다.관련 기사,가계도
9. 여담
지금이야 나이가 나이다보니 인자한 모습의 구부정한 할머니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굉장한 미모를 자랑했다. 장년기에도 그 미모는 어디가지 않아서 귀부인의 전형같은 우아한 모습을 유지하였다.
일국의 여왕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꽤나 자주 영국의 부자 스타들의 재력 측정기이자 영원한 기준이 되곤 한다. 예를 들어 폴 매카트니는 전재산이 여왕보다 많다던지[74] J. K. 롤링의 재력이 세계 555위로 여왕보다 높다는 식으로 자주 이름이 거론된다. 엘리자베스 2세의 보유 재산은 2015년 기준, 약 '''4억 2,500만 달러'''(약 5,063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의 얼굴마담(?)으로 해외를 종종 국빈 방문하는데, 대한민국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1999년 4월 19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방한했다.[75] 당시 여왕은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서양에서는 발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데, 좌식생활을 하는 한옥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기 때문. 신발을 벗자마자 외신 기자들이 미친 듯이 플래시를 터뜨린 반면 한국 기자들은 '뭥미? 쟤들 왜 그럼?' 하고 어리둥절해했다고. 문화의 차이. 마침 방문 날짜에 73회 생일인 4월 21일이 끼어 있어서 간 김에 한식 전통 생일상도 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3박4일 일정으로 사용할 의전 차량으로 대우 체어맨(쌍용 체어맨)[76] 을 선택했다고 한다. 남편인 필립 공은 현대 다이너스티 리무진을 탔다.[77]
하지만 환영만 받는 건 아니라서,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연방 국가를 방문하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인도를 방문했을 때는 일부 인도인들이 야유하며 식민지 시절 자행된 학살과 약탈에 대한 사죄를 촉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영어로 '영국의 위대한 암캐 여왕'이라 적힌 걸개를 들고 가는 곳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기도 했다. 인도 정부는 이들을 물론 처벌하지 않았고, 영국 언론은 "인도가 변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1970~80년대만 해도 여왕이 인도를 방문하면 인도는 식민지 시절 그대로 꿈쩍도 못 했고, 인도도 국력이 강해지면서 식민지배의 앙금을 풀게 된 것이다.
공화주의자들에게는 영국 왕실 전체가 기생충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영국에서도 왕정 폐지에 대한 여론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일례로 가디언 지에서는 윌리엄 왕세손의 결혼식 기사를 인터넷에 올리고는 "For republican"이란 단추를 만들어 이 기사가 눈에 안보이도록 하는 편집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다시 여는 것은 "근왕파" 단추. 하지만 동시에 결혼식날 파업을 한다고 "저런 반역도당" 같은 반응이 나오는 나라가 영국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왕실을 유지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비용 문제 때문에 저런 비아냥을 듣는데, 여왕이 빈민 구제기금을 왕실 열병합 발전설비 보수비로 사용하려다 정부가 반발 여론을 의식해 거부한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2012년에는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여왕에게 6,000만 파운드(약 1,050억 원)짜리 새 왕실 요트를 헌정하자는 제안이 나와 논란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 제안을 한 사람은 마이클 고브 '''교육장관'''인데, 유럽 재정위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학교 예산까지 긴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비난이 심했다. 이후 2016년 브렉시트가 확정되자 다시 왕실 요트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영연방 국가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대역을 이용해 다니엘 크레이그와 2012 런던 올림픽 개회식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주최국 국가원수가 개회선언을 하는 관례에 따라, 1976 몬트리올 올림픽.[78] 2012 런던 올림픽의 개회선언을 했다. 또 1956 멜버른 올림픽은 여왕을 대신해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이 개회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영국이 아닌 영연방 국가에서 개최되는 올림픽 즉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2000 시드니 올림픽,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여왕이 아니라 총독이 개회선언을 했다. 이들 영연방 국가들이 같은 군주를 모시지만, 엄연한 독립국으로서의 면모가 강화되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3년 4월 8일, 前 영국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의 사망에 큰 슬픔을 드러내며 유족에게 조의를 표했고, 대처의 장례식을 국장보다 한 단계 낮은 군장 규모로 치를 것을 명했다.[79]
인터넷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인 1976년 3월 26일에는 이메일을 최초로 보낸 군주로 기록됐으며, 2014년 10월 24일에는 트위터에 생애 첫 트윗을 올렸다.
2015년 6월 3일, BBC 기자의 실수로 여왕이 사망했다는 글이 트위터 계정에 올라왔다가 삭제되는 해프닝이 있었다.[80] 여왕이 고령이다보니 "영국 사회가 여왕의 승하를 준비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2016년 12월, 독감에 걸린 여왕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감사성찬례와 신년 감사성찬례에 불참해 건강 이상설이 제기되었으나 2017년 1월 8일 2주만에 왕실 가족과 함께 감사성찬례에 참례해 우려를 불식시켰다.
2020년 11월 16일, 이번에는 프랑스의 공영 라디오 방송이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번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뿐만이 아니라 해외 각국의 유명 인사들도 사망 명단에 대거 포함되어 있었으며, 사망 원인은 무려 코로나19(...)로 내보내졌다고. 해당 방송사는 허겁지겁 기사를 내리고 사과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7월 18일, 1933년 어린 엘리자베스 2세가 나치식 경례를 하는 영상이 발굴되어 화제가 되었다. 물론 나치식 경례가 금기 중의 금기이지만, 그때는 나치즘이 악의 축 낙인이 찍히고 하켄크로이츠가 악의 상징이 되기 전이다[83] .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2세는 '''겨우 7살'''이었고, 엘리자베스 2세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다. 다만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의 친나치 행보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영상에서 엘리자베스 2세에게 경례를 시키는 사람이 에드워드 8세이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11일, 여왕의 생일 공식 기념 행사에서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나온 왕실 가족이 시민들의 축하를 받을 때, 손자 왕세손이 증손자 조지와 놀아주면서 앉아 있자, 손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일어나라"고 핀잔을 주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화제가 되었다.(#)
- 2016년 3월 9일자 더 선이 '여왕이 브렉시트를 지지한다'고 1면에 기사를 냈는데, 버킹엄 궁전 측에서 "엘리자베스 2세는 지난 63년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며 해당 기사를 독립언론윤리위에 제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여왕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국이 유럽의 일부여야만 하는 이유 3가지를 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왕이 브렉시트를 두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이다. 이에 언론 규제 단체인 IPSO는 "<더 선>의 기사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misleading)"고 발표했지만, <더 선>은 "2명의 소식통을 통해서 여왕이 당시 부총리였던 닉 클레그한테 말했다"고 주장했다.### 닉 클레그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고브가 <더 선>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한 소식통 중 한 명이라고 지적했으나, 마이클 고브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닉 클레그는 여왕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일개 부총리한테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 논평을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더 선의 주장을 보증해주기를 사실상 거절했다.
- 영국의 대표 보수 언론 중 하나인 <데일리 메일>은 "엘리자베스 2세는 영연방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브렉시트를 지지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데일리 메일의 왕실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여왕 사후 왕위 계승 1위 후보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는 오래 왕위에 있지 못할 것이고, 이후 2위 후보인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가 왕좌에 앉을 것이 분명하며, 윌리엄은 EU 체제 내에서 자랐기 때문에 영연방 왕국을 유지하는데 그의 할머니 만큼 열성적이지 못하다."라는 소문이 있다고 주장했다. 데일리 메일은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와 영연방 복귀 없이는 자신의 사후 영연방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 2015년 6월 24일 독일을 정식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의 연설에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과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참석한 회담에서 여왕은 "유럽의 분열은 우리 모두에게 위험하다."라고 경고했으며, "우리 영국은 유럽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핵심층"이라며 영국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매우 가까운 외교 관계를 유지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 2017년 6월 21일 국왕의 칙유 발표를 위해서 웨스트민스터 궁전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의 모자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유는 모자가 유럽 연합기와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으로, 엘리자베스 2세가 간접적으로 유럽 연합을 지지한다는 뜻을 비추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 몇 년 간 본 행사에 흰색 드레스를 고수해 왔기에 이러한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 2019년 5월 19일, 기밀이 해제된 독일 외교부 문서에 따르면, 여왕은 유럽연합의 전신 EEC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영국의 미래는 유럽에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영국의 대표 보수 언론 중 하나인 <데일리 메일>은 "엘리자베스 2세는 영연방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브렉시트를 지지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데일리 메일의 왕실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여왕 사후 왕위 계승 1위 후보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는 오래 왕위에 있지 못할 것이고, 이후 2위 후보인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가 왕좌에 앉을 것이 분명하며, 윌리엄은 EU 체제 내에서 자랐기 때문에 영연방 왕국을 유지하는데 그의 할머니 만큼 열성적이지 못하다."라는 소문이 있다고 주장했다. 데일리 메일은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와 영연방 복귀 없이는 자신의 사후 영연방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 파운드와 영국 속령에서 사용하는 지폐의 모델이다. 또한 호주 달러와 캐나다 달러, 뉴질랜드 달러 지폐와 동전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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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 가보면 종류별로 다 있다. 심지어는 '''어린 시절 사진이 지폐 모델이 된 것'''도 있다.
견과류를 매우 좋아한다. 2013년 12월 13일경 영국 언론지 now의 불법 도청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린 적이 있었다. 이 때 법정에 증거자료로 제출된 이메일 내용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왕실직원들이 여왕을 위해 준비한 땅콩, 아몬드, 캐슈넛 등의 견과류를 항상 궁전 복도에 놓아두는데, 순찰 중인 경찰들이 너무 많이 집어먹어서 여왕이 화가 났다고. 여왕은 그릇에 줄을 그어서 표시한 후 "내 땅콩에 그 끈적거리는 손 치우라"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2019년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한때 거주하던 빌라가 고급 부동산 중개업체에 매물로 등장했다. 몰타에 있는 이 빌라 매매가는 600만유로(약 80억 4,000만원)로 책정됐다. 해당 빌라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결혼 초기 필립공이 몰타에서 해군 장교로 근무하던 1949년부터 1951년까지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여왕도 예방적 차원에서 예정보다 1주일 앞당겨 런던을 떠나 윈저 성으로 옮겼다. #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지만, 딱 한번 영국 수상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1978년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수상인 제임스 캘러헌과 외무장관이었던 데이비드 오언은 차우셰스쿠를 '''좋은 공산주의자'''라 얘기하며 엘리자베스 2세에게 버킹엄 궁전으로 초대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여왕도 이를 승인하였다.
문제는 차우셰스쿠가 영국 방문 직전 방문한 프랑스에서 터졌는데, 차우셰스쿠와 그 일행이 도청장치가 있는지 확인한답시고 영빈관의 전깃줄과 전화선을 까 뒤집는 것도 모자라 각종 '''공예품을 절도했던 것.''' 당연히 어처구니가 없었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이 미리 엘리자베스 2세에게 이를 귀뜸해 주었고, 여왕은 궁전의 관리인들에게 미리 주의를 주어 루마니아 사절단의 도벽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는 이것 이외에도 "도청장치를 두려워한다"는 명목으로 아침 일찍 궁전 잔디밭에서 회의를 한다던가, 여왕과 악수한 직후 바로 '''면전에서 손을 소독하는 등'''의 결례를 저질렀다. 일단 앞에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차우셰스쿠가 귀국하자마자 폭발한 여왕은 켈러헌 수상과 오언 외무장관을 호출한 뒤 '''"어떻게 초대해도 저 따위 인간을 초대할 생각을 할 수 있었냐?!"''' 매우 강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는 현재까지 엘리자베스 2세가 보인 전례없는 분노 표출이자 수상과 장관 문책이었는데, 즉위 직후부터 가급적이면 총리와 내각의 정책에 대해 언급을 사양하며 정치적 행보를 최소화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이처럼 총리에게 화낸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고 한다.
영국 여권 문서에도 나와있는 내용이지만,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여권이 없다. 이는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모든 여권은 국왕의 이름으로 발행되는데, 군주인 국왕이 여권을 소지하는 것은 엄연히 신하인 외교부 장관에게 여행 가도 되냐고 허락받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라고. 이건 일본도 똑같아서 덴노도 여권이 필요없다. 영국처럼 군주가 신하인 외무대신에게 허락을 받는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뜻. 일본 여권 문서 참조. 물론 영국이나 일본이나 국왕 이외의 왕족은 여권이 필요하다. [84]
애완견은 원래는 코기를 키우다가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개 입양을 안하고 있다. 도기(dorgi)종 애완견인 '벌컨(Vulcan)이 세상에 떠나면서 이제는 '캔디'라는 이름을 가진 도기종 애완견 한 마리만 남게 됐다.#
과거 자신의 사유 재산을 대중에 공개하지 않으려고 관련 법안의 초안을 수정하기 위해 대정부 로비를 벌여 이에 성공했다.# 찰스 왕세자와 같이 1천건이 넘는 법안을 의회보다 먼저 받아보고 '검열'한 것으로 밝혀졌다.#
10. 대중매체 속 묘사
10.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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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온 미디어 매체 중 엘리자베스 2세를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 있다면 바로 2007년의 '''더 퀸'''(The Queen). 영국 출신의 여배우 헬렌 미렌이 여왕 역을 맡아 토니 블레어의 취임부터 며느리인 다이애나비의 장례식까지의 여왕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여왕의 노동당과 다이애나에 대한 반감이 포인트로 블레어의 설득으로 결국엔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다이애나에게 보내는 추도사를 읽었다. 이 영화로 배우 헬렌 미렌은 2007년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 된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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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카 2에선 롤스로이스 팬텀(Phantom) 4세대 모델로 등장.[86] 성우는 영국 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Vanessa Redgrave)이다. 월드 그랑프리 영국 레이스에 참관하는데 시한폭탄이 장착된 메이터가 바로 앞에 난입하는데도 상황을 지켜보자며 여유를 부리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건이 해결된 이후 메이터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 검 대신에 느릿느릿 뽑히는 안테나를 사용하는 모습이 웃음포인트.[87]
영화 2012에서는 애완견 2마리를 데리고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과 함께 방주에 허겁지겁 탑승하는 모습이 나왔다.
킹스 스피치에도 아역 배우가 연기하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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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미니언즈에서도 나온다. 영화의 배경이 1968년도라 젊은 시절 모습으로. 자신의 왕관을 뺏으려는 스튜어트를 고상한 영국 영어를 구사하며 구타한다.
영화 킹스맨에선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발렌타인의 계획에 영국 왕실과 함께 전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영화 유스의 막바지에 필립 공과 함께 등장하여 심플송을 듣는다.
애니메이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설리만이라는 캐릭터와 닮았다.
최근 개봉한 에니메이션 영화 프린스 코기에도 나온다.
2015년 영국에서 제작한 <로열 나이트 아웃(A Royal Night Out)>에서는 10대 시절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45년 5월유럽 전승기념일 당시 두 공주는 허락을 받아서 궁궐 밖으로 외출을 하였는데 이 때 마거릿 공주는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한 병사와 어울리다가 나이트 클럽, 술집 등에 가보게 되고 이를 엘리자베스가 뒤쫒아 찾는 모험을 다룬 코미디 영화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을 각색한 내용으로, 실제로 두 공주는 전승기념일 때 길거리로 외출한 적이 있었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엄한(?) 일들은 없었고 보호자들과 함께 통금 시간에 무사히 귀가했다고.
10.2.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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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여왕은 영국 드라마 닥터후의 올드 시즌을 재미있게 시청했다고 하며, 지금은 닥터후 뉴 시즌을 본다고 한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닥터후에 등장한 적도 있다. 제작자들은 실제로 여왕을 등장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하나 결국에는 불발.
여기서는 닥터후 뉴 시즌을 기준으로 정리했다.
뉴 시즌 2 에피소드 8 "바보 상자(The Idiot's Lantern)"에서는 여왕의 대관식이 텔레비전을 통해 영국 전역으로 생중계되는 것을 이용해 인간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하려한 외계인이 나오는데, 이 때 등장한 여왕의 영상은 1953년 6월 2일에 거행된 실제 대관식을 촬영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스페셜 "크리스마스 침공(The Christmas Invasion)"에서는 영국에서 발사한 외계탐사선 귀네비어호에 실어보낸 A형 혈액을 이용해 시코락스가 지구의 A형 보유자들을 혈액 컨트롤할 때 여왕을 포함한 왕실 가족들도 버킹엄 궁전 지붕 위에서 뛰어내릴 뻔 했다.
크리스마스 스페셜 "저주받은 자의 항해(Voyage Of The Damned)"에서는 크리스마스마다 외계인이 런던을 습격하는 사태로 인해 공포에 질린 런던 시민들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다들 교외로 피난갔지만 여왕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버킹엄 궁전에 그대로 머무른다. 별일 없이 지나가나 싶었다가 하늘에서 우주선 타이타닉 호가 버킹엄 궁전으로 돌진하자 닥터가 건 비상전화를 받고 "보안코드 771(긴급사태)이니까 당장 나오라"는 연락에 황급히 바깥으로 나오지만 충돌 직전에 우주선이 궁전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갔다. 여왕은 우주선을 향해 손을 흔들며 "고마워요, 닥터. 메리 크리스마스"라 인사했다.
부활절 스페셜 "죽음의 행성(Planet of the Dead)"에서는 타디스가 버킹엄 궁전 정원에서 발견되지만 자기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며 닥터에게 옮겨다주었다.
뉴 시즌 5 에피소드 3 "지하의 야수(The Beast Below)"에서는 51세기의 영국 여왕 리즈 10세가 닥터와 선대 왕들과의 인연을 나열하며 "리즈 2세와 다과를 함께 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또하나, 토치우드 연구소는 영국 국왕의 직속 기관인만큼, 엘리자베스 2세는 '''토치우드의 수장'''이시다. 작중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 설정이지만, 캐너리 워프 전투 이후 페허가 된 토치우드 1의 폐쇄를 명령한 것도 이분이시다.
또한 BBC가 쓴 글 중 하나인 '영국의 유명한 후비안'에 따르면, 9대 닥터가 최애 닥터이신 듯 하다.
BBC 드라마 셜록 시즌 2 에피소드 1에서는 어느 왕족 아가씨의 방탕한 사생활을 뒷수습하려고 셜록과 존을 버킹엄 궁전으로 불러들여 대리인을 통해 사건을 의뢰했다. 사실 이 에피소드 어디에서도 여왕의 이름이나 모습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뒤통수에 대고 셜록이 바이올린으로 '''God save the Queen'''을 연주했기 때문에(…).
10.2.1. 더 크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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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날 드라마인 더 크라운에서는 아예 본격적으로 다룬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항목 참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본 드라마를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롭게 보았지만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었다고도 의견을 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10.3.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사우스 파크에서도 잠시 등장했는데, 해당 에피소드에서 함대를 동원해서미국을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다가 주인공들의 저지로 인해 실패한다.[88] 미국 침공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권총을 입에 넣고 격발해서 자살하는데(...),충격적인장면이라 영국 방영 당시에는 삭제되었다.
성전사 단바인에서 자코바 아온에 의해 모든 오러머신이 지상으로 추방되었을때 나국의 여왕 시라 라파나가 엘리자베스 2세와 회견을 하는 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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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등장인물들이 죄다 정상이 아닌 헬싱에서 나온다. 최후의 대대 때문에 열린 작전회의 때 아카드가 여왕 앞에서 예를 표하는데 이때 대사를 보면 여왕이 어릴 적에 아카드와 만났던 모양.[89] OVA 판에만 나오며 성우는 후지타 토시코/최하나. 밀레니엄의 선전포고를 듣고는 인테그라와 아카드에게 밀레니엄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최후의 대대가 런던을 침공했을 때 왕실 및 소수의 고위층들이 캐나다로 피난 갔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 끔찍한 학살극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대체역사물 게임 울펜슈타인 2: 더 프리덤 크로니클즈의 2번째 에피소드 사일런트 데스 요원의 일기에서는 주인공 제시카 발리언트(aka 사일런트 데스 요원)의 남편이 여왕폐하의 가장 훌륭한 자산인 OSA 스파이라고 언급했는데 굳이 여왕 폐하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정황상 1945년 6월에 벌어진 2차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우세를 점한 이후 런던 공습으로 아버지 조지 6세가 사망해 19세에 여왕에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포켓몬스터소드·실드에 등장하는 체육관 관장 포플러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강철의 왈츠의 헌터스 부단장인 디아 윈저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10.4. 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2차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에 패배하면서 윈스턴 처칠 등과 함께 캐나다로 건너가 망명 정부를 구상하고 자기가 대영제국의 여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친나치 성향의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들어먹히지 않는 상황이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서는 식인 거인들이 자국의 아이들을 잡아먹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는 창문에 앉은 소피를 마주해 놀란다. 선꼬거와 소피를 예우해주고 군인들을 출동시켜 식인 거인들을 생포한다.
세계대전Z에서는 좀비사태로 영국이 붕괴되고 생존자들이 '''중세시대'''의 성[90] 을 개조하여 공성전을 하여 굳세게 싸우는 와중에 직접 석유와 천연가스가 보급되는 '''윈저 성에 남아''' 생존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뷰를 한 생존자가 여왕을 언급하는 태도를 보면 여왕은 윈저성이 함락되면서 대피를 거부하고 정신적 기둥이 되기 위해 스스로 성과 함께 끝까지 대항하다가 결국 '''사망'''한 듯하다.
11. 갤러리
[1] 고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록인 64년을 깨버렸다.[2] 영국에서의 칭호이며, 영국 외에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군림하는 15개국에서는 각각 별도의 칭호가 정해져 있다. 이들 칭호는 영국과 대동소이한 형태로 제정돼 있다.[3] 종전엔 63년 216일 동안 재위한 빅토리아 여왕이 이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2015년 9월 9일부로 이 타이틀이 엘리자베스 2세에게 넘어갔다. 참고로 고구려 장수왕의 재위기간은 79년 2개월. 또 고구려 태조왕은 무려 94년이다. 단 태조왕은 동시기 중국 기록에선 또 다르게 쓰여 있어서 기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조선에서는 52년간 재위한 영조가 있다.[4] 40대에 즉위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비하면 정말 젊은 나이에 즉위했다.[5] 이 16개국은 영국에서 독립할 땐 영국과 군주를 공유하는 왕국이었다가 이후 국민 투표·헌법 개정이나 쿠데타 등에 의해 공화국으로 바뀐 경우이다.[6]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헌법 개정 시 최종적으로 국민투표를 거치게 돼 있으나, 헌법 개정 절차는 나라마다 다 다르며 단순히 의회의 의결로 변경할 수 있는 나라도 많다. 영국처럼 아예 헌법을 일반 법률이나 관습법과 분리하지 않는(불문헌법) 나라도 있고.[7] 2개 국가의 수장인 사람으로는 프랑스 대통령이자 안도라의 공동 대공인 에마뉘엘 마크롱이 있다.[8] 영국 여왕으로서 쓰는 문장이다. 단, 전통에 따라 스코틀랜드에서는 위와 디자인이 다른 문장을 사용한다. 또 영국 이외에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있는 나라(영연방 왕국)에서 쓰는 문장은 나라마다 다르다. 영연방 왕국의 서로 다른 국장들이 곧 엘리자베스 2세의 국장이므로 이들을 참고하면 된다.[9] 여왕으로 있는 모든 나라에서 사용 가능한 '여왕'으로서 쓰는 깃발이다. 영연방의 '원수'(Head of the Commonwealth)이긴 하지만 영연방 원수 자격으로 쓰는 깃발은 따로 정하고 있지 않다. 엘리자베스 2세가 사용하는 다른 깃발들은 영문 위키백과의 해당 항목 참고.[10] 아버지의 즉위로 인해 자동적으로 작위가 바뀌었다.[11] 결혼으로 인해 작위가 바뀌었다.[12] 1927년 이래 '연합왕국(the United Kingdom)'이 칭호에서 빠진 지 26여 년 만에 정식 국호가 칭호에 돌아왔다. 1927년까지는 "of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Queen"(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그리고 바다들 너머의 브리튼 자치령들의 국왕/여왕)이 왕의 칭호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섬의 대부분이 아일랜드 자유국(1930년대에 스스로 이름을 그냥 아일랜드로 고침)으로 분리되었고, 북아일랜드만 영국 본국에 남음으로써 칭호 쓰기가 골치 아파졌다. 그래서 그냥 1927년 영국의 국호를 현재처럼 고치면서 칭호 일부분을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Queen"(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그리고 바다들 너머의 브리튼 자치령의 국왕/여왕)이라고 고치게 돼서 United Kingdom이 왕의 칭호에서 빠졌다. 어차피 Ireland에는 영국 본국의 일부인 북아일랜드와 별도의 자치령이 된 아일랜드 자유국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조지 6세 재위 기간 중인 1949년 아일랜드(아일랜드 섬 전체 말고 구 아일랜드 자유국의 후신)가 공화국이 돼서 영국 왕과 완전히 무관해졌지만 왕의 칭호에는 반영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때에 맞춰 나라마다 칭호를 따로 정하기로 하면서 영국에서는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라는 국호가 들어가 되었다. United Kingdom이 왕의 칭호에 다시 포함되었지만 예전과 달리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가 뒤에 따라옴에 주의할 것.[13] 자치령(Dominion)이란 표현이 이때부터 칭호에서 빠졌으나, 아직 남아있던 자치령들에 대해서 왕의 지위가 상실된 것은 아니다. (1956년 공화국 성립 전의 파키스탄 자치령 등)[14] 영연방 원수라는 지위 자체는 선왕 조지 6세 때 신설됐지만 국왕의 공식 칭호에 추가된 것은 이때부터다.[15] 캐나다의 경우엔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를 생략하고 '연합 왕국'과 '그 밖의 국가' 사이에 '캐나다'가 들어가는 반면,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예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을 빼고 '오스트레일리아'가 들어가는 등 나라마다 미묘하게 다르다.[16] 엘리자베스 2세의 역대 칭호들은 영문 위키백과의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17] 서양의 작위는 동양과는 달라서 Duchess=여공작=공작부인으로 번역된다.[18] 비공식적인 칭호다. 채널 제도에서 관례적으로만 부르고 법적으로는 규정돼 있지 않다. 영국 왕실은 1259년 헨리 3세가 파리 조약에서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왕이어도 남성형인 Duke로 쓴다. 만약 여성형인 Duchess를 쓸 경우 여성 공작이 아니라 남성 공작의 부인으로 오해받기 쉬운 데다가[17] , 원래 노르망디 공작은 살리카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꼼수로(...) 여자가 계승해도 남자인 척을 하는 게 관례화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67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갔을 때, 프랑스인들이 "여공 만세! (Vive la Duchesse!)"를 외치자 엘리자베스 2세가 "글쎄요, 나는 노르망디 공작(Duke)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19] 비공식적인 칭호이다. 장미전쟁을 랭커스터 왕가의 방계인 튜더 왕가가 전쟁을 매듭지었기 때문에 이후로 랭커스터 공작은 왕의 비공식 칭호가 되었다. 그리고 여왕일 때도 남성형인 Duke를 쓴다. 여성형인 Duchess를 쓸 경우 여성 공작이 아니라 남성 공작의 부인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20] 맨 섬처럼 왕실령인 채널 제도에서 쓰는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칭호는 비공식적인 칭호지만, 이 맨 섬 영주(Lord of Mann)은 공식 칭호이다. 참고로 Lord의 여성형은 Lady이지만, Lady라고 하면 영주보다는 영주의 부인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어서 그냥 남성형 Lord of Mann을 쓴다. 그런데 예전 빅토리아 여왕 때는 그냥 Lady of Mann을 썼다. 반드시 성별 무관하게 Lord로 고정시키라는 규정은 없고, 그냥 그때그때 다른 모양이다.[21] 왕위와 달리 영연방 수장직은 세습직이라고 규정된 바가 없다. 영연방의 수장이라는 직위가 생겼을 당시에는 영국이 그래도 강대국이고 영연방이 영국 왕과 영국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조직이라는 성격이 강했지만, 지금은 회원국들 사이에 평등한 조직으로 변모했다. 단적인 예로 영연방은 원래 정식 명칭이 '''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였지만 지금은 Commonwealth of Nations로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영국 왕실이 영연방 내 다른 회원국들에 대해 뭔가 우월적 지위를 주장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차기 영국 국왕이 자동으로 영연방의 수장이 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해진 상태다. 영국 왕실은 영연방 원수직도 세습직으로 명문화하길 바라고 있지만 그게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애를 태우고 있었고, 이후 줄리 길라드 전 호주 총리 등 영연방 주요국 수장들에게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된 후 이 칭호를 승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로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단 2018년에 찰스 왕세자가 즉위할 때 영연방 수장 지위를 물려받는 것으로 영연방 내에서 합의를 이뤘다.[22] 찰스 1세처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넘버링이 우연히 일치한 국왕들은 여기에 따로 안 쓰고 다른 경우만 적으면 다음과 같다. =는 동일인인데 나라에 따라 넘버링만 다르게 표현된다는 뜻이다. 잉글랜드 제임스 1세 =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잉글랜드 제임스 2세 = 스코틀랜드 제임스 7세, 잉글랜드 윌리엄 3세 = 스코틀랜드 윌리엄 2세. 참고로 명예 혁명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왕이 된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공화국(당시엔 지금과 달리 왕국이 아니었음)의 지배자이고 동시에 오라녜(오렌지) 공작이라는 명목상의 칭호를 썼는데, 네덜란드에서도 윌리엄(네덜란드어로 빌럼) 3세였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넘버링이 우연히 일치했기 때문이지 일부러 한쪽이 다른 한쪽에 맞춘 것은 아니다.[23] 엘리자베스 2세를 상징하는 로열 사이퍼(royal cipher: 왕의 이름을 딴 모노그램)는 왕관 그림 밑에 EIIR라는 문자가 붙는 형태다(왕관은 스코틀랜드 이외 지역에서는 성 에드워드 왕관,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왕관 그림을 사용함). EIIR은 라틴어 Elizabeth II Regina를 줄인 것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영어로는 Queen Elizabeth II)이라는 뜻이다. 이 모노그램은 각종 공문서나 공공 시설에 사용되는데, 스코틀랜드 버전(스코틀랜드 왕관 밑에 EIIR이 적혀 있는 버전)의 로열 사이퍼가 부착돼 있는 걸 보고 격분한 일부 스코틀랜드인들이 강제로 II(=2세) 부분을 떼어버린 것.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우체통 등 공공 시설물이나 각종 공문서에 스코틀랜드 왕관만 사용하고 EIIR은 아예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24]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었으나 그 다음에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여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 후 조지 6세가 사망하면서 처칠은 조지 6세의 마지막 총리, 엘리자베스 2세의 첫 총리로 기록되었다.[25] 윌리엄 4세는 스코틀랜드식으로 따지면 윌리엄 3세가 돼야 한다. 그리고 에드워드 7세와 8세는 애매한데,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중에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아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1314~1356, 실제로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기간은 1332~1336)한 에드워드 베일리얼(Edward Balliol)을 정식 국왕으로 인정할지 말지에 따라 달라진다. 오랫동안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으므로(그래서 이름 뿐만 아니라 성까지 붙여 부르고 있다. 유럽에서 군주는 성을 쓰지 않고 이름과 ~세만 적으니까) 그를 무시한다면 에드워드 7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에드워드 1세(살아 있던 동안은 그냥 '에드워드'), 에드워드 8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에드워드 2세로 불리는 게 맞다. 하지만 윌리엄 4세,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8세는 스코틀랜드의 넘버링을 따른 별도의 왕명을 쓰지 않았다. 지금 엘리자베스 2세처럼...[26] '찰스'와 '앤'이라는 이름의 왕은 동군연합 성립(1603) 후에 처음 왕의 이름으로 사용됐기(찰스 1세, 찰스 2세, 앤) 때문에 양국의 넘버링이 일치한다. '조지'와 '빅토리아'라는 이름의 왕은 양국이 합병(1707)된 이후에 처음 등장했는데(조지 1세~조지 6세, 빅토리아) 양국이 합병된 이후에는 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같은 칭호를 따로 안 썼기 때문에 넘버링 문제가 아예 생겨날 수가 없다. 그리고 '메리'의 경우 동군연합 성립 이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에 각각 1명씩 있었기 때문에(블러디 메리, 메리 스튜어트) 동군연합 이후에 등장한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양국에서 모두 메리 2세라 역시 넘버링이 동일하다.[27] 예를 들어 동군연합 이전의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윌리엄 1세와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1세는 다른 사람, 다른 시기, 다른 나라의 통치자였으므로 넘버링 일치·불일치를 따질 필요 자체가 없다.[28] 헨리 8세 때 마련한 규칙은 호칭을 Majesty = 왕과 왕후, Highness = 왕자, 공주 등 왕족, Grace = 왕족이 아닌 고위 귀족용으로 고정시킨 것이다. 이 규칙을 마련하기 전에는 Majesty, Highness, Grace가 구분 없이 혼용됐다고 한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독립국이던 시절 국왕에게 죽 Grace라고 불렀다.[29] 이쪽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스코틀랜드에서 그냥 엘리자베스라고 부르는 것보다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다른 왕족, 고위 귀족에게 적용되는 호칭 체계와 충돌한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에서는 따로 왕족, 귀족들 호칭도 다른 방식으로 변경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영국 해군 함선들의 접두어인 HMS(His/Her Majesty's Ship)까지 바꾸거나 이중으로 적용하는 뻘짓까지...[30] 즉위 후에도 윌리엄을 대표 이름으로 쓸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왕족이 왕으로 즉위할 때, 기존에 대표로 쓰던 이름 대신 자신의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아마 '윌리엄'은 별로 문제가 되는 이름이 아니므로 즉위 후에도 그대로 쓸 것으로 생각된다.[31] 엘리자베스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사망했다.[32] 역사상 Princess of Wales는 왕세자비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조지 6세가 고민하였다고 한다.[33] 현재는 왕위 계승의 법칙이 바뀌어, 남동생이 태어나더라도 먼저 태어난 공주의 계승서열이 밀리는 일은 없어졌다. 바뀐 법의 혜택을 제일 먼저 받게 된 공주는 엘리자베스 2세의 증손녀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다.[34] 당시 그리스 왕국은 필립 왕자의 사촌형인 파블로스 1세가 재위중이었다. 다만 독일군이 쳐들어와서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고 한창 그리스 내전중이었던 터라 혼란 그 자체였다.[35] 당장 더 크라운 시즌 1 1화만 봐도 윈스턴 처칠이 '''"신랑쪽 가족들이 왜 다 안 왔는지 알아? 전부 나치하고 결혼했거든. 골수 나치하고!"'''라고 말한다.[36] 필립 공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도 1944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직계 가족 중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은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 외할머니 밀퍼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가 전부였다.[37]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국 브렉시트 직전에 한 발언이 막판에 탈퇴파들에게 "여왕 폐하께서도 탈퇴를 지지하신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자세한 것은 아래에 계속 나온다.[38]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 2차대전 당시 영국 육군 여군부대.[39] 당시 영국군 계급과 약간 차이가 있다.[40] 이 여왕 때문에 왕족 여성들도 여군으로 가야하는 규칙이 생겼다고 한다. 샬럿 공주도 영국군 여군으로 입대하기를 권유 받았을 정도라고. [41] Treetop Hotel, 실제로 나무 위에 객실을 만든 호텔이다[42] 굉장히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양쪽 등자에 모두 발을 얹고 안정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남성들과는 달리, 귀족 여성들은 저렇게 앉아야 고상해 보인다는 이유로 저렇게 앉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3] 왕권신수설이 횡행하던 시대나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던 무렵과 이것을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즉, '같은 국민이지만 직업이 왕인 것'이라고 직접 인정한 것이다. 물론 영국에 신분제가 있고 그에 따라 의회도 상원과 하원이 갈리며 수상도 귀족이지만, 그 이외에는 사법적인 특권같이 불평등한 요소는 딱히 없기 때문에 불만 없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이다. 전통이 오래되긴 했어도 봉건적이라고 매도하기는 어렵다. 기억하자, 이 나라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왕의 목을 겨누었던 나라다. 게다가 프랑스 대혁명보다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물론 "귀족 같은 것 없이 국가수반도 일반 대중에서 선출되는 민주공화국에 비교하면 구시대적"이라는 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44] 그런데 다이애나 스펜서에 대한 냉담한 반응은 여왕 본인의 의사보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요구를 따른 거라는 말이 있다.[45] 영연방 각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가 왕이 될 경우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영연방 왕국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46] 이 투표는 2014년 9월 19일 부결되어 대브리튼 연합 왕국에서 탈퇴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자세한 내용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 참고.[47] 2020년 기준 생존한 윈저 왕조(영국 왕실) 구성원 중 남편을 제외하면 가장 최고령자이기도 하다.[48] 이당 김은호인데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49] 2020년 기준 엘리자베스 여왕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군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1935년생, 89세), 재위 기간이 긴 군주는 브루나이의 하사날 볼키아 술탄(1967년~, 57년째)이다.[50] 북구까지 포함하면 스웨덴의 구스타프 5세가 92세로 최장수했었으며 지금은 엘리자베스 2세가 넘었다.[51] 퇴임한 군주 가운데서 최장수한 이는 앙리 대공의 아버지이자 룩셈부르크 전 대공인 장이다. 필립 공과 동갑으로 98세까지 살고 2019년에 죽었다.[52] 쇼와 덴노는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1926년에 즉위했다. 부황 다이쇼 덴노가 50도 못 넘기고 일찍 붕어하여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덴노가 되었다.[53] 여담으로 당해 년도에 여왕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1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54] 린든 B. 존슨이 빠진다. 이는 존슨이 5년의 임기 동안 여왕을 만날 적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왕 역시 임신 등의 이유로 해외 순방을 이 시기에 하지 않았다. 괜히 윈스턴 처칠 장례 때 존슨이 욕을 쳐먹은 게 아니다. 자세한 건 처칠 항목 참조.[55] 정작 영국 대중들은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 대신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이 왕위 승계 했다면 하는 이들도 있다.[56] 소름끼치게도 공연 몇 달 후 지미 새빌이 발단이 된 연예계의 아동성범죄자 색출 프로젝트 유트리 작전에서 자기 딸 친구를 성폭행한 혐의로 유죄가 입증되어 징역을 살게 된다. 현재는 Sad satan에 미야자키 츠토무나 지미 새빌 같은 인간들과 함께 나올 정도로 아동성애자의 아이콘이 된 상태이다.[57] 181cm. 여성임에도 이 세계 각국의 왕족들 중에서조차 수위권으로 키가 크다.[58]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이다.[59] 조지 3세의 손녀이다.[60]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왕자,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61] 피터 필립스, 자라 틴달[62] 요크의 공녀 베아트리스, 요크의 공녀 유제니[63] 레이디 루이즈 윈저, 세번 자작 제임스[64] 정확히 말하면 7촌 당숙이다.[65] 타던 보트에서 시한폭탄이 터져 가족, 선원 등과 함께 죽었다. 게다가 바다에서 터져 물고기들이 시신의 살점을 뜯어먹은 바람에 시체는 극히 일부만 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 발생 며칠 뒤 IRA는 북아일랜드 주둔 영국군 기지에 공격을 가하여 영국군 18명이 사망하면서 대대적인 내전 분위기가 된다.[66] 그리스와 덴마크의 글뤽스부르크 왕실 출신으로, 여왕과의 결혼을 위해 계승권을 포기했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부분의 영국 언론 및 사람들이 에드워드 왕자의 미래는 에드워드만의 일이라면서 그의 이 같은 결정에 공감해주었다.[68] 그래서 결혼식 때 어떤 군복을 예복으로 입느냐가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69] 테러리스트의 목표가 되므로[70] 영국의 경우는 아직도 왕족은 장교로만 복무가 가능하다. 물론, 훈련은 그대로 다 받는다. 영국은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존재하는 국가이므로, 왕족이나 귀족이 장교부터 부임하는 것은 '귀족 이상이 신병으로 오면 분위기가 이상하겠다' 같은 공화정스러운 감상 때문이 아니라 엄연한 신분질서 때문이다.[71] 맨 위에서 주석으로 설명했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왕족은 성씨를 따로 표기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꼭 써야 할 경우엔 Windsor를 쓴다.[72] 단, "전하 (His/Her Royal Highness)" 경칭을 쓰는 영국 왕실 일원은 성을 쓰지 않기 때문에, 성을 써야할 일이 있으면 영지 이름을 사용한다. 일례로 여왕의 손자인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는 군 복무 시 성을 웨일스(Wales)라고 바꿔서 웨일스 대위(Captain Wales)라고 불린다. 아버지 찰스 왕세자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Charles, Prince of Wales)라 아들들이 이름 뒤에 of Wales를 붙였고, 군 복무 시에는 아예 영지 이름인 Wales를 성으로 대신 사용했던 것이다.[73] 술탄인 이븐 아바드의 딸로 알 모라비드한테 세비야가 함락되자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한테 도망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사벨이라 개명한 뒤 결혼했다.[74] 2012년 기준, 전 세계 음악계 부자 3위.[75] 아들인 찰스 왕세자도 7년 전인 1992년에 노태우 대통령의 공식 초청으로 방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방한은 찰스 왕세자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한 해외 순방은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이 문서 참조.[76] 당시는 쌍용이 대우의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3분할 그릴을 단 대우 체어맨이다. 당시 대우의 워딩 연구소가 영국에 있었던 것도 영향이 없진 않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때는 에쿠스가 데뷔하기 4일 전이어서 그 정도 길이를 가진 차가 체어맨 밖에 없긴 했다. 그렇다고 그 나흘을 당긴다고 곧바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77] 당시 현대자동차에서 가장 큰 차는 다이너스티였다. 에쿠스는 여왕이 방문한 뒤 4일 뒤(...)에 시판된다.[78] 이때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개회선언을 했다(몬트리올은 퀘벡 주 최대 도시로 프랑스어권이라 이들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다).[79] 모친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 첫째 며느리 다이애나 비와 동일한 수준.[80] 왜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사망 기사를 쓰나 싶겠지만, 언론계에선 신속한 뉴스를 위해 일어날 확률이 높은 기사를 속보를 위해 미리 써놓는 경우가 많다. (속칭 "가라" 기사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엄청난 거물급의 재판결과는 보통 양쪽 다 써놓으며, 유명인이 투병 중에도 미리 준비해놓는 것. 해당 인물의 정확한 사인이나 판결, 날짜 등은 비워놓고 뒤에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미리 써놓는 것이다.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슈퍼맨이 중상을 입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나자 데일리 플래닛의 페리 화이트 편집장은 "슈퍼맨 죽다"와 "슈퍼맨 살아나다"란 헤드라인이 각각 1면에 실린 신문 판본 두개를 뽑아놓고 대기를 하는데, 현실적인 장면이다. 물론 실제론 신문 전체를 다 뽑진 않고 1면만 프린트해서 보겠지만. 그러다보니 이런 기사를 실수로 송고해 엄청난 오보를 내는 경우가 드물게 생긴다.[81] 이 차량은 엘리자베스 2세를 위해 특별제작한 차량이다. 타고 내릴 때 무릎과 허리를 굽히지 않게끔 맞춤제작되었다. 그러므로 일반 벤틀리보다 차체가 훨씬 높은 편인데, 거의 성인 키 정도 된다.[82] 여담으로 이 컬러로 칠해져서 한정판으로 판매된 벤틀리 플라잉스퍼도 있다.[83] 1939년 초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첼시 서포터들이 유태인들이 주축인 토트넘 핫스퍼를 야유할 때 로마식 경례를 하거나 스바스티카 깃발을 흔들 정도였다! 하켄크로이츠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미국이나 유럽 각지에서도 이 문장은 그저 행운의 상징으로써 1930년대까지 학교 심벌은 물론이거니와 미 육군 제45 보병사단의 부대마크, 심지어 소련도 스바스티카 낫과 망치 훈장같이 지금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조합의 훈장을 1922년까지 썼다. 핀란드 공군은 나치와 관계없는 전통 문장이라며 아예 아직도 스바스티카를 쓰고 있다[84] 반면 대통령 중심제 국가들에서는 대통령도 여권이 필요하다. 공화정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국민의 선출을 받기 때문으로, 가령 한국 같으면 국민이라는 고용주가 재계약 불가의 5년 단기 계약직으로 계약시킨 것이며 신분제 국가가 아니므로 외교부 장관도 신하가 아니라 그냥 직장 부하직원이기 때문에 대통령도 외교부 장관의 직인이 찍힌 여권이 필요하다.[85] 헬렌 미렌은 이후 액션 영화 <레드>에 은퇴한 영국 스파이로 출연했는데 거기서 자신이 영국 여왕이라고 생각하는 정신병 환자 흉내를 내기도 했다.[86] 이전 문서에는 1세대로 기재됐으나, 4세대가 맞다. 픽사 위키에서도 팬텀 IV를 모티브로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모델이 된 팬텀 IV는 영국, 중동 등의 왕족 고객을 위해 18대만 제작된 차로, 그 중에서도 1호차는 1950년 7월 6일에 엘리자베스 당시 공주의 의전 차량으로 납품됐다. 그런데 극중 라디에이터 그릴은 롤스로이스보다는 벤틀리의 것에 더 가깝다. [87] 이건 고증오류다. 외국인한테는 기사작위를 수여하지 않는다. [88] 그런데 웃긴 것은 영국 함대의 무장이나 옷차림이 죄다 독립전쟁 당시의 것이라는 것(...). 게다가 타고 있는 배도 구식 범선이다. 반면에 미국 공군은 영국 해군과는 달리 제트기까지 끌고 나와 영국군을 상대했다.[89] 아카드의 얼굴을 만지면서 '''"당신은 50년 전 모습 그대로인데, 난 말괄량이 소녀에서 주름투성이인 할머니가 되어버렸어요."''' 라고 말했다. 이에 아카드는 '''"당신은 지금도 그때나 똑같은 말괄량이 소녀야, 오히려 지금이야 말로 진정 아름다운 여왕의 모습이지."''' 라고 위로의 말로 얘기한다. 늙어감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는 아카드이니만큼 여왕의 이러한 모습 또한 긍정적으로 보는 것일지도.[90] 관광객들을 위한 전시실에 걸려 있던 '''진품 중세무기'''들을 활용했다고한다.[91] 이때의 엘리자베스는 왕위계승권 3위로 일개 왕자의 장녀에 불과했으나, 큰아버지이자 당시 왕세자 에드워드 8세가 40대인데도 자식은커녕 결혼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이라서 사촌이나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으면 미래의 여왕이 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할아버지 조지 5세가 승하한 이후 즉위한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으로 재위 1년도 채우지 않고 아버지 조지 6세에게 양위하면서 왕위계승서열 1위의 공주로 신분이 격상된다.[92] 당시 처칠은 1945년 총선의 패배로 잠시 총리직에서 물러났을 때였다. 이후 1951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다시 총리에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