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뮈츠 협약
Olmützer Punktation
1850년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에 체결된 협약. 이 협약을 통해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세운 에어푸르트 연방은 붕괴되고 일시적으로 기능이 정지됐던 독일 연방이 다시 부활한다. 이 협약을 통하여 프로이센은 러시아가 편든 오스트리아에게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유럽이 똑똑히 보았고 그 덕에 이 협약은 '올뮈츠의 굴욕'이라는 (프로이센의 입장에서 붙인) 명칭으로 더 유명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빈 회의 이후 열강으로 인정받고 독일 권역에서 크게 힘을 키운 프로이센이 실력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에게 독일 내 종주권을 놓고 도전하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유럽을 강타한 1848년의 혁명으로 오스트리아 제국 주도하의 독일 연방은 와해된다. 이후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기존 연방 체제를 일소하고, 소독일주의의 독일 통일 구상을 실현하려 하는데,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반동 세력의 반격과 국제사회 고립,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독일 황제 즉위 거부, 혁명 세력은 진압당한다.
다만 이미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부터 열강의 반열에 들어선 프로이센은 이미 독일 연방 체제가 무너지고 다시 이전 상태로 복귀 되는것에 대해선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최소한 개신교 지역인 북독일은 마인선[1] 을 경계로 독일의 복수 주도권을 주장하게 된 것.[2]
이리하여 자신들의 주도하에 에어푸르트 연방을 1850년 3월 창설한다. 하지만 에어푸르트 연방은 출범과 동시에 장애물에 맞닥뜨린다. 자유주의자들은 새로 등장한 에어푸르트 연방을 '권위주의 체제의 상징'으로 여기며 적극적인 반대운동에 나섰고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을 벗어나기 원할거라 생각한 작센 왕국과 하노버 왕국을 비롯한 독일어권에서 힘 좀 쓰는 국가들 역시 프로이센의 예상과 달리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프로이센의 힘을 인정하면서 독일 내 중급 규모 국가인 작센 하노버 등의 영향력도 키워준다는 프로이센의 제안에 초기에는 솔깃하긴 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등의 강력한 반발과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데다가 프로이센에 대한 거부감도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스트리아가 혁명의 혼란을 재빨리 수습한뒤 인근 국가들에게 독일 연방을 재수립할 것을 호소 하기 시작한다.[3]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던 프로이센 역시 완고하게 오스트리아에게 반항을 하면서 두 강대국 간의 긴장감은 고조된다.
같은 해 가을이 되면 헤센 대공국을 놓고[4] 양 측 사이에서 전쟁의 분위기마저 감지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게는 든든한 동맹군이 가득했고[5] 이를 이용해 프로이센에게 헤센에서 손을 뗄 것을 종용한다.[6] 프로이센은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1850년 11월 5일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지금 당장 철군하지 않으면 독일연방의 군대들에게 동원령을 내릴 것'이라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을 하고 여기에 결국 프로이센이 굴복하면서 올뮈츠 협약이 이루어지게 된다. 올뮈츠 협약에 따라 프로이센은 에어푸르트 연방을 포기하고 다시 독일 연방의 일원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했으며, 헤센과 홀슈타인을 비롯한 소규모 공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포기할 것도 명시해야만 했다.
1. 개요
1850년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에 체결된 협약. 이 협약을 통해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세운 에어푸르트 연방은 붕괴되고 일시적으로 기능이 정지됐던 독일 연방이 다시 부활한다. 이 협약을 통하여 프로이센은 러시아가 편든 오스트리아에게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유럽이 똑똑히 보았고 그 덕에 이 협약은 '올뮈츠의 굴욕'이라는 (프로이센의 입장에서 붙인) 명칭으로 더 유명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빈 회의 이후 열강으로 인정받고 독일 권역에서 크게 힘을 키운 프로이센이 실력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에게 독일 내 종주권을 놓고 도전하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2. 과정
유럽을 강타한 1848년의 혁명으로 오스트리아 제국 주도하의 독일 연방은 와해된다. 이후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기존 연방 체제를 일소하고, 소독일주의의 독일 통일 구상을 실현하려 하는데,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반동 세력의 반격과 국제사회 고립,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독일 황제 즉위 거부, 혁명 세력은 진압당한다.
다만 이미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부터 열강의 반열에 들어선 프로이센은 이미 독일 연방 체제가 무너지고 다시 이전 상태로 복귀 되는것에 대해선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최소한 개신교 지역인 북독일은 마인선[1] 을 경계로 독일의 복수 주도권을 주장하게 된 것.[2]
이리하여 자신들의 주도하에 에어푸르트 연방을 1850년 3월 창설한다. 하지만 에어푸르트 연방은 출범과 동시에 장애물에 맞닥뜨린다. 자유주의자들은 새로 등장한 에어푸르트 연방을 '권위주의 체제의 상징'으로 여기며 적극적인 반대운동에 나섰고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을 벗어나기 원할거라 생각한 작센 왕국과 하노버 왕국을 비롯한 독일어권에서 힘 좀 쓰는 국가들 역시 프로이센의 예상과 달리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프로이센의 힘을 인정하면서 독일 내 중급 규모 국가인 작센 하노버 등의 영향력도 키워준다는 프로이센의 제안에 초기에는 솔깃하긴 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등의 강력한 반발과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데다가 프로이센에 대한 거부감도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스트리아가 혁명의 혼란을 재빨리 수습한뒤 인근 국가들에게 독일 연방을 재수립할 것을 호소 하기 시작한다.[3]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던 프로이센 역시 완고하게 오스트리아에게 반항을 하면서 두 강대국 간의 긴장감은 고조된다.
같은 해 가을이 되면 헤센 대공국을 놓고[4] 양 측 사이에서 전쟁의 분위기마저 감지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게는 든든한 동맹군이 가득했고[5] 이를 이용해 프로이센에게 헤센에서 손을 뗄 것을 종용한다.[6] 프로이센은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1850년 11월 5일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지금 당장 철군하지 않으면 독일연방의 군대들에게 동원령을 내릴 것'이라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을 하고 여기에 결국 프로이센이 굴복하면서 올뮈츠 협약이 이루어지게 된다. 올뮈츠 협약에 따라 프로이센은 에어푸르트 연방을 포기하고 다시 독일 연방의 일원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했으며, 헤센과 홀슈타인을 비롯한 소규모 공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포기할 것도 명시해야만 했다.
[1] 라인강의 지류 마인강 이북 선[2] 마인선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795년 프랑스와의 바젤 평화 조약으로, 반혁명 국가 중에 프로이센이 최초로 혁명정부와 강화를 맺자 라인강 이서 지역을 프랑스에 넘겨주는 대신, 프로이센은 마인강 이북 지역의 종주권을 인정받고 영국과 동군 연합인 하노버의 점유까지 얻는다. 이후 빈 회의에서 기존 마인선을 근거로 프로이센에서 작센 합병을 주장한 과거가 있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영유권 같은 민감한 주장은 수십년 길게는 수백년 전 깔아놓은 떡밥을 이용한다.[3] 독일 문화권 내에서 상당한 강국이기는 했지만 프로이센과는 체급 자체가 비교가 안됐던 작센과 하노버 왕국의 적극적인 반대 역시 오스트리아가 뒤에서 공작을 벌인 결과였다.[4] 헤센 대공국의 수상 한스 하센플루크가 에어푸르트 연방과 프로이센 왕국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자 프로이센이 군사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자 하센플루크가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왕국에게 SOS를 치면서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군대가 헤센에 진주하게 된다.[5] 러시아,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등등[6] 이 때의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비스마르크는 보오전쟁 당시 러시아를 (프로이센에게 우호적인) 중립국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고, 오스트리아에게 제대로 복수극을 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