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 왕국

 

'''하노버 왕국'''
'''Königriek Hannover'''
'''Königreich Hann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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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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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1814년 ~ 1866년
위치
독일 니더작센
수도
하노버
국가원수
[1]
언어
저지 독일어, 독일어
종교
루터파 개신교
종족
작센인
성립 이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2]
멸망 이후
독일 제국
1. 개요
2. 역사
2.1.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2.2. 영국과 동군연합
2.3. 나폴레옹 전쟁 시대와 왕국 승격
2.4. 동군연합 해소
3. 멸망
4. 멸망 이후
5. 역대 국왕
6. 관련문서

언어별 명칭
독일어
Königreich Hannover
저지 독일어
Königriek Hannover
영어
Kingdom of Hanover

1. 개요


중세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19세기 독일 연방 시대까지 독일 북부 니더작센 주에 존재했던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하노버 공국, 하노버 선제후국을 거쳐 하노버 왕국이 되었다.
하노버의 위치는 현재 독일의 니더작센 주이며, 구 하노버 영토의 85%가 니더작센 주를 이루고 있다.
전성기 하노버의 영토는 면적이 40,000제곱 킬로미터 정도로 벨기에보다 크고 현재의 네덜란드, 덴마크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다.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 내의 국가들과 비교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절반 수준이며 웨일스보다 좀 컸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하노버는 독일사에서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영방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은근 슬쩍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잘 나가던 시절 하노버 왕국은 독일 전체에서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등에 이은 네 번째 규모의 대국이었으며, 근대 여러 영방국가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독일사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당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연합에서 하노버의 무게는 작지 않았다. 다만 프로이센 등 대국이 주도하는 연합에 하노버가 참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역사 서술 관점에서 주목을 못 받는 편이다.

2. 역사


하노버는 독일 역사에서 오랜 동안 공국으로 존재했다. 독일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 왕국으로 승격된 후 기간은 상대적으로 매우 짧았다.

2.1.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하노버 왕국 지역은 중세 5대 부족 공국 시절의 작센 공국 영토 중 일부를 계승하고 있다. 12세기 벨프 가문하인리히 사자공작센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을 지배하며 신성 로마 제국 최고의 제후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1180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당했다. 벨프 가문이 다스리던 방대한 영토는 몰수된 후 바이에른 공국은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증여되었고, 작센 공국은 여러 작은 제후국으로 분할되었다.
1235년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벨프 가문의 화해로써 벨프 가문의 사유지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Herzogtum Braunschweig-Lüneburg)으로 승격시켰다. 공국의 이름은 영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후 벨프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훗날의 하노버 왕조도 벨프 가의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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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주황색). 노란색은 사자공 시절 작센공국이고, 일부(주황색)만 돌려받은 영토다 >
이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은 공식적으로는 분할되지 않은 제국 영지로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다른 공국과 마찬가지로 분할 상속으로 인해 여러차례 작은 공작령과 후작령으로 분할되었다가 재통합되길 반복했다. 반복된 분할과 재결합 과정을 거치면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영지 대부분은 나중에 하노버 왕국까지 계승되었지만 일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분리되었다.
1636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수도를 하노버로 옮긴 후, 일반적으로 '''하노버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 명칭은 여전히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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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년 경의 하노버(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영토>
1692년 하노버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선제후가 되면서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불리게 된다. 정식 명칭은 여전히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이었다.

2.2. 영국과 동군연합


1714년,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가 조지 1세로서 영국의 왕이 되어 영국과 동군연합이 되었다. 영국은 조지 1세부터 빅토리아 여왕까지 하노버 왕조라고 불린다.
조지 1세는 영국 왕이 되었지만 50 평생 독일 하노버의 군주 출신이라 대륙에 더 관심이 많아서 독일 내에서 하노버 공국의 세력을 확대하는 데 신경을 썼다. 결혼으로 칼렌베르크 공령을 상속받았으며,[3] 내륙에 머물고 있던 하노버를 북해로 진출시키려는 목적에서 대북방전쟁에 참가하고 승리하여 스웨덴으로부터 브레멘-페르덴을 할양받아 하노버 영토는 북해와 접하게 된다.
조지 2세 역시 독일 출생이었으며, 하노버 왕조의 왕은 조지 3세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출생하기 시작한다[4].

2.3. 나폴레옹 전쟁 시대와 왕국 승격


프랑스 혁명전쟁 와중인 1795년 혁명정부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기겁한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강화를 맺었다. 이 강화에서 프로이센이 라인강 서안 클레베 등의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대신 프랑스는 독일 중부 마인강 이북 지역에 우선권을 보장해주었다. 이를 근거로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합병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유럽에서 처음으로 강화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마음대로 퍼준 것. 이 때문에 프로이센과 영국 사이가 험악해졌으나 1806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나란히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박살난 와중에 우유부단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유럽 국가들의 압력과 자국 신하들의 요청으로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가 패망하면서 틸지트 조약으로 하노버를 뺏기고 말았다. 1807년, 하노버는 프랑스의 위성국 베스트팔렌 왕국과 강제 합병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노버의 장교와 군인들은 임금님이 계시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14,000명의 하노버 군인이 "왕의 독일인 군단(King's German Legion)"이라는 부대로 재편되어 영국군의 지휘 아래 싸웠다. 매우 열심히 싸웠는지 영국군에서 이들은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1813년, 나폴레옹은 패배하고 영국의 조지 3세가 하노버 선제후국을 재탈환했다.[5] 1815년빈 회의에서 하노버 선제후국은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이미 작센뷔르템베르크는 나폴레옹에 줄을 선 대가로 1806년 왕국으로 승격했고 신성 로마 제국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될 때 중세 시절의 구(舊)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영토의 일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약했던 왕의 독일인 군단(King's German Legion)은 재건된 고향 하노버로 귀환했으며 새로 건설된 하노버 왕국의 군대로 복귀했다.

2.4. 동군연합 해소


초기 하노버 왕조의 왕들은 영국보다 고향인 하노버에 관심이 많았으나, 영국 태생의 왕들이 즉위하고 영국의 국력이 크게 신장되면서 점차 하노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된다.
조지 4세는 하노버에서 하노버 왕으로서 즉위식을 따로 가졌지만, 동생 윌리엄 4세(독일어로는 빌헬름 4세)는 하노버를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815년부터 1837년까지 조지 3세의 아들이자 조지 4세와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가 하노버 부왕(副王·viceroy, 총독)으로 부임해서 대리 통치했다.
1833년 영국법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어 자유주의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
1837년, 윌리엄 4세가 사망했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4세보다 먼저 사망한 남동생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1767~1820)의 외동딸 빅토리아가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하노버에서는 살리카법에 따라서 살아 있는 남동생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Ernst August I)[6]가 왕이 되면서, 영국과 하노버 사이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자유주의 헌법을 폐지하여 괴팅겐 7 교수 사건이 발생했으며 독일의 전제군주처럼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애초에 영국은 하노버를 국왕의 사유지로 여겼고 과거 브리튼 섬의 스코틀랜드처럼 파트너나 협력대상으로 보지 않았기에 하노버 왕국이 영국의 영향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방치했다. 조지 3세 시절 윌리엄 대(大) 피트 총리가 대놓고 하노버는 국왕의 이해관계에 있는 땅일 뿐 영국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다며 거의 버리다시피 했을 정도. 당시 빡친 조지 3세가 그를 해임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영국 정계의 지도층은 하노버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었으니 하노버를 영향권에 남겨 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때 하노버가 영국의 대륙 상업 교역지로 영국 국익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19세기에는 이미 옛날 이야기였다. 영국의 국력이 초강대국 수준으로 성장하고 영국 속령은 전세계 면적의 4분의1을 점해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영국의 세계 전략상에서 하노버는 그다지 쓸모 없고 오히려 대륙의 분쟁에 말려들 빌미를 줄 수 있는 거추장스러운 지역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은 프로이센 위주의 소독일주의 통일을 지지하는 편이었기에, 프로이센의 왕세제 빌헬름 왕자의 장자(훗날의 프리드리히 3세)에게 자신의 맏딸을 시집보낼 정도였다.

3. 멸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뒤를 이은 게오르크 5세(Georg Friedrich Alexander Karl Ernst August)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편들었는데, 오스트리아가 패배했다... 1866년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프로이센 왕국의 '하노버 주'가 되었다.
게오르크 5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열강들에게 하노버 왕국의 재건을 호소했지만 실패했다. 독일 국내에서는 하노버 왕국의 부활을 요구하는 보수주의 정치 결사 단체 독일 하노버 당(Deutsch-Hannoversche Partei)이 생겨났다.[7] 게오르크 5세는 프랑스에서 사비를 들여서 하노버 탈환을 노리고 벨펜레기온(Welfenlegion)라는 군사조직을 만들기도 했지만 프랑스마저 보불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게오르크 5세는 파리에서 사망했고 윈저 성의 채플에 묻혔다.
여담으로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탈취한 하노버 왕국의 국고를 바이에른 왕국뇌물로 퍼다주면서 구워 삶았다고.

4. 멸망 이후


게오르크 5세의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Ernst August Wilhelm Adolf Georg Friedrich)는 친척들이 있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하노버의 왕세자이자 영국의 컴벌랜드 공작(Duke of Cumberland)[8]으로 활동했다. 그의 사촌인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빌헬름(Wilhelm, Herzog von Braunschweig)은 자신이 사망하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에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를 상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 정부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하노버 왕가가 정식으로 하노버 왕위 계승권을 포기 하지 않았기에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와 하노버 왕가가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노버 왕가와 호엔촐레른 왕가의 대립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장남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을 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조의문을 보내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에른스트 공작은 조의문에 대한 감사 인사차 마지막 남은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Ernst August Christian Georg)를 베를린으로 보냈다. 아우구스트 3세는 이 때 빌헬름 2세의 외동딸 빅토리아 루이제(Viktoria Luise)와 사랑에 빠져 1913년에 결혼했다. 이에 따라 거의 반세기에 걸친 두 왕가의 갈등이 종식됐다. 결혼식 이후 컴벌랜드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아들을 위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 계승권을 정식으로 포기했다. 같은 날 독일 의회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 즉위하는 것을 승인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영국 컴벌랜드 공작으로서의 상속권을 포기했다. 빌헬름 2세 쪽에서는 영국에서 컴벌랜드 공작으로 유지하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되면서 그런대로 왕가의 체면은 차리는가 했는데…….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일군으로서 복무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영국에서 독일과 결탁한 하노버 왕가에 대한 이미지는 진짜 최악이 돼버렸다.(…) 결국 1917년 작위박탈법이 제정되어 컴벌랜드 공작의 작위도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게 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자유주'의 하위 지방인 '하노버 주'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연합국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신탁 통치를 바게 된다. 이 때 영국은 '하노버 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1946년 영국 군정은 '프로이센 자유주'의 하위에 있던 '하노버 주'를 독립된 주로 승격시켰다. 이어 1946년 11월 영국 군정은 하노버 주와 그 인근에 있는 브라운슈바이크 주, 올덴부르크 주, 샤움부르크리페 주를 합쳐 니더작센 주로 통합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하노버 왕국은 완전히 사라졌지만,[9] 하노버 왕가 때 형성된 인맥 관계가 좀 남아 있었다고. 그 이 인맥 라인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현 니더작센 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5. 역대 국왕



6. 관련문서



[1] 초반에는 영국 왕이 하노버 왕을 겸함[2]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은 신성 로마 제국의 9번째 선제후였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수도는 하노버였는데 이 때문에 하노버 공국이라고도 불렸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노버 공작이 선제후를 겸했기 때문에 '''하노버 선제후국'''이라고도 했다.[3] 원래 하노버 방계 혈족이 칼렌베르크 공령을 통치하고 독신이라 조지 1세에 상속될 예정이었으나 칼렌베르크 공이 프랑스 출신 댄서와 늦바람이 나서 딸을 얻자 하노버 종가에서 반발했고 그 타협책으로 칼렌베르크 공의 딸과 사촌 조지 1세가 결혼했다. 그러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조지 1세와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4] 조지 2세의 장남이자 조지 3세의 아버지인 웨일스 공 프레데릭 역시 하노버에서 태어났다.[5] 다만 이 당시 조지 3세는 정신병 발병으로 훗날 조지 4세인 왕세자가 섭정중이었다.[6] 영어식으로는 어니스트 오거스터스 1세(Ernest Augustus I).[7] 이 당은 나치당이 금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8] 이는 하노버 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영국 왕족으로서 얻은 작위이다. 하노버 왕가의 남자들은 영국 국왕 겸 하노버 선제후 조지 3세의 자손으로, 영국 왕자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9] 1차대전 종전 전에는 프로이센 왕국령 하노버 주, 1차대전 종전 후에는 프로이센 자유국(Freistaat Preußen; Free State of Prussia) 산하의 하노버 주(Provinz Hannover; Province of Hanover)로 대체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