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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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Wilhelm IV
생몰 1795년 10월 15일 ~ 1861년 1월 2일
재위 1840년 6월 7일 ∼ 1861년 1월 2일
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제6대 국왕.
2. 생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아들로 아버지가 치세말기엔 보수꼴통으로 오랫동안 다스렸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의 기대를 받으며 즉위하였다. 별로 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그는 왕좌위의 로맨티시스트 (낭만주의자)로 불렸다.
풍부한 재능과 높은 교양을 갖추었기 때문에 시민계층이 기대를 모았으나 그는 낭만주의자라기보단 '''그냥 오래 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었다. 루터파 개신교도였지만 종교적으로 관대한 데다가 오래된 건축물을 좋아해서 쾰른 대성당 건축을 후원했고, 가톨릭교도를 총리로 임명할 정도였다. 영국 성공회와 루터교 합동 관구로 예루살렘 교회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1848년 혁명 시기에는 베를린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독일국기[1] 를 두르고 "이제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고까지 말하면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추대받자, 독일 연방의 군주들이 추대한 왕관이라면 받겠지만 감희 너희 아랫것들(?) 한테선 받지 않겠다며 거부하고 혁명도 진압하였다. 실상은 다른게 혁명이 터지자 당시 군대들은 야전훈련이나 받지, 진압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2] 도시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나자 일부 부대는 어버버하고 또다른 일부 부대는 충분히 통제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발포하다가 70여명의 시민이 사망해버렸다. 피를 본 시민들은 과격해졌고 국왕은 그만 베를린 거주지에 포로처럼 잡혀버린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강경 진압'과 '근위 연대가 있는 포츠담으로 도망' 이라는 두 선택지 중에서 강경진압은 성향이 아니고.., 도망치는 것도 치욕감 때문에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우유부단했다. 결국 시위대의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하여 고개를 숙이게 된다.
초기 시민군에게 베를린이 장악되었을 때 유혈사태 이후 강경 진압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보수 반동 세력에 무지하게 까였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시민 의회가 나가리되고 진압하자 이번엔 시민 계층에 욕을 먹었다. 그러나 둘 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성향은 아니었다. [3] 혁명 와중에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 드립을 친 건 왕이 거의 포로나 다름없이 붙잡혀서 혁명을 상징하는 모자를 쓰고 시민군 희생자 추모회에 반강제로 참석할 정도로 지위가 불안했기 때문이었지, 특별히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관심이 있는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 각국에서 반동으로 혁명이 진압당하고 프로이센도 군대가 정비되어 반격을 시도해서 혁명은 이미 거의 나가리 된 상황이긴 했다. 왕관을 실제로 받았다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전쟁을 선포하고 쳐들어 올게 뻔했기 때문에 만약에 원했다고 해도 받을 수도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왕이 자신의 편(?)이라 착각한 것이지, 애초에 자유주의 성향이 아니었다는 것. 애초에 왕세자 시절부터 전통적인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고 교류한 사람들도 보수적 문필가, 정치가, 철학자들이었다. 물론 건축과 조경에 관심이 있어서 조각가 크리스티안 다릴 라우흐와 건축가이며 도시 계획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을 후원하긴 했는데 군대 빼곤 전혀 관심 없던 프로이센 왕실 전통이 아니라서 자유주의자들이 덜컥 착각한 것이지, 정치적 성향은 이전 국왕들과 별다를게 없었다. 물론 정치적 관심사보다 문화 유산에 관심이 많고 성격도 독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건 권력은 위에서 나온다는 왕권신수설을 진지하게 믿었고, 19세기 정치사상이나 프랑스 혁명의 유산에는 단연코 반대했다. 특히나 입헌 운동은 '''혁명의 썩은내가 난다며''' 탄압했고 그 시절 보수반동 군주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유의 이론도 내세웠는데 시대에 따라 정치 발전이 점차 정치에 참여하는 계층이 넓어진다는 그당시 계몽주의 주장에 반대하여 '''신분제도 나름대로 시대를 거치며 발전했다(?)'''는 어용학자들의 특유의 이론을 지지했다.
1848 혁명 이후에는 반동정책을 펴긴 했지만 혁명의 유산중에서도 프로이센의 국익에 도움이 될만한 소독일주의를 계속 받아들였고 제한된 틀이나마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완전 듣보잡 시골 촌구석 융커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벼락 출세 시켜서 프랑크푸르트 독일연방의회 대사로 임명한 것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다. 혁명 이후 반혁명 구도로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건 완전히 막지 못했으나, 혁명으로 시민 계층의 힘이 자란 걸 인정해 주었고 부르주아들의 요구에는 터무니 없이 못 미치지만 기존 신분제 제한의회에서 납세액에 따른 부르주아까지 정계로 편입하고 과세권을 허용한 것은 것은 시대를 잘 읽은 조치였다.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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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1801년 11월 13일 ~ 1873년 12월 14일
1832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는데 금실은 좋았지만, 자식이 전혀 없었고, 자연스레 둘째 동생 빌헬름이 왕세제가 되었다. 1857년부터는 정신병 발작으로 아우(훗날의 빌헬름 1세)가 섭정하였다. 정신이 오락가락 했지만 간혹 멀쩡할때가 있었는데 후대왕들은 절대로 헌법에 대한 맹세를 거절할 것을 주문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지론에 의하면 '''헌법이란 건 왕과 신민들 사이를 가로막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것이고 신이 수여한 통치권을 함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로이센 통치의 핵심인 군대와 관료는 어디까지나 왕에게 충성하는 조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