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회의
Congress of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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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 참석자들을 묘사한 기록화. 가운데에 앉아 있는 인물이 의장을 맡은 오스트리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들이 유럽 지도를 재구성하기 위해 열린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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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을 엘바 섬에 유배 보낸 뒤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와 유럽의 세력 재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로 오스트리아 제국 수상 겸 외상인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도했다. 회의를 주도한 유럽의 다섯 열강들은 각각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왕국이다.
이 회의에 참가한 나라들을 보면 나폴레옹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던 나라도 일부 참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폴레옹과 충돌한 적이 없던 오스만 제국도 마브로제니 파샤를 파견해서 빈 회의에 참가했고, 비록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사람이었지만 스웨덴의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도 로웬히엠 백작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심지어는 유럽의 전쟁과는 아무 관련도 없던 이로쿼이 연맹도 미국과의 무력 충돌을 이유로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다.
빈 회의 목표는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 상태로 되돌리자'''가 핵심이었다. 그래서 첫째 목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일어난 자유주의적 개혁을 청산하는 분명한 반동주의가 빈 회의의 분위기였다. 둘째는 유럽의 초강대국 프랑스가 몰락하고 나서 전리품 분배와 이로인한 유럽내 세력균형의 분배가 핵심이다.
이에 따른 빈 회의의 목적은 메테르니히가 제시한 다섯 개 원칙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정통주의로의 복귀였다. 나폴레옹에 의해 끌어내려진 기존의 유럽 군주들을 왕좌에 다시 앉혀놓고 혁명으로 오염된 체제를 다시 세우는 것이며, 혁명이 전의 체제로 복귀하며 국경선과 세력권을 조정하여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것. 그러나 명분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고, 소국의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당했고 나폴레옹에 빌붙어서 영토를 확장한 나라들은 대부분 기득권을 인정받았고 프랑스를 제외하면 약탈 문화재까지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프랑스도 포함이었지만 백일천하 때문에 프랑스만 반환해야 했다.
실제 회의는 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진척이 무척 더뎌 계획대로라면 4주 동안만 진행되었을 회의가 8달 동안이나 지속되게 된다. 이는 빈 회의 이전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의 회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4개국(영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보니 이럴 바엔 빈에서 제대로 판을 벌이자고 해서 메테르니히가 친히 조정 역할을 자임했고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벌어진 것이다.
살펴보면 대부분의 이해관계 문제가 결국은 영토 문제였다. 프랑스를 어느 정도 축소할지는 4개국이 파리에서 어느정도 합의를 해 놓았으나 그에 따른 전리품 분배를 가지고 너 죽고 나 살자며 개판이 벌어졌다. 프랑스 국경은 메테르니히가 관대하게 1792~1797년 사이의 국경으로 복구하고자 했고,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너무 관대하다며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메테르니히의 제안에서 타협하고 1792년 1월 1일 국경으로 정해졌다.
메테르니히는 회의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불리하게 진행되면, 회의를 중단하고 파티를 거행했기에 "저 회의는 진행되는게 아니라 춤추고 있는 중이다"라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각국의 군주들이 손잡고 춤춰대는 풍자화가 당대에 나왔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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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 기간의 실제 무도회를 기록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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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질질 끄는 회의를 춤으로 묘사한 풍자화
십수년간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난 오스트리아 제국에선 회의 비용으로 하루 5만 굴덴[1] 씩 펑펑 써대고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40일 연속 파티를 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눈치없이 나폴레옹을 너무 오래 편들어서 약간 왕따 취급을 받던 덴마크 왕[2] 도 연신 화끈하게 놀아댄걸로 소문이 났었다.
이렇게 탱자탱자 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실무진들이 발바닥에 땀나게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의 높으신 분들이 제 주장만 내세워 전혀 진척이 없었다.
더디던 회의를 한방에 해결한 것은 바로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었다.''' 나폴레옹의 탈출과 황제 복위 소식에 경악한 회의 참가국들은 위기감에 타협하여 1815년 6월 9일 빈 의정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열흘 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이 회의의 마지막 날 부기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여담으로 자허토르테 초콜릿 케이크가 여기서 등장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낮다. 요리사인 자허 본인부터가 빈 회의 후인 1816년 태생이기 때문이다(...) 다만 메테르니히의 "외교 사절들을 만족할 만한 디저트를 만들어와라"는 엄명에 의해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자허토르테는 1832년 세상에 선을 보였다. 해당 항목 참조.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의 주변부에서의 소요에도 불구하고, 빈 체제는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성 동맹을 중심으로 '''유럽 협조 체계 개념'''(The Concert of Europe)에 바탕하여 40여 년간 유지되었다. 이후 정치적으로는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과 메테르니히의 실각, 외교적으로는 1854년 시작된 크림 전쟁을 기점으로 붕괴되었다.
다시 평화가 복원된 것은 1840~60년대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보오전쟁, 보불전쟁을 거친 1871년이었고, 이것은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린다. 이렇게 다시 40년간 평화가 지속되다가 빈 회의부터 정확히 100년만인 1914년 모든 열강의 대 전쟁인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면서, 빈 체제가 고안한 오랜 평화는 마지막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보수주의의 등장이란 점에서도 빈 체제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의외로 프랑스는 패전국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큰 손해는 보지 않은 편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명분 때문에 프랑스 자체가 쪼개지지도 않았다.[3] 당시 유럽에서, 혁명 이전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와 혁명 이후 보나파르트 황가의 프랑스는 각각 다르게 이해되었던 듯. 무엇보다 프랑스를 패전국이라고 아주 개발살을 내버리면 세력의 균형은커녕 다른 국가들이 제 2의 프랑스가 되어 또다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거나, 프랑스에 지나치게 가혹한 강화조약을 할 경우엔 프랑스인들이 정부를 인정하지 않을테고 그러자면 외국군대를 계속 주둔시켜야 했고, 주둔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전쟁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폴란드-작센 분할 문제로 갈등을 심화하는 동안 당시 프랑스의 외교관이었던 샤를 모리스 탈레랑이 이 갈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이득을 보았다. 정확히는 메테르니히가 주도했고 탈레랑이 여기에 제대로 결탁한 것이었다. 메테르니히는 영국의 캐슬레이와 짜고 탈레랑을 승전 4국(러·오·영·보(프로이센))의 비밀회담을 방청할 수 있게 하면서 군사 동맹까지 맺어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팽창을 위협하였다.
메테르니히는 스스로 나서서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고 정통주의와 복고주의 드립을 친 덕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협상력을 떨어뜨려 영토적 국익은 많이 챙기지 못했다. 앞서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노리는 바르샤바 대공국(폴란드)와 작센 병합 문제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테르니히가 대단히 경계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론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이 밀착해서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운신폭이 좁아졌고 장기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은 작센 대신 라인란트 지방을 발판으로 경제력이 일취월장해서 독일 관세 동맹을 구성하는등 독일내 영향력이 후진적 농업국인 오스트리아 제국보다 강해지며 통일 주도하는 발판을 조공으로 바친 셈이 되었다. 프랑스가 빈회의에 참석한건 부르봉 왕가 복귀의 영향이 있고 당시 국제정세에서 프랑스를 아예 배제할 수 없어서였다.[4]
단순히 메테르니히가 대단해서이거나 탈레랑이 먼치킨이라서가 아니다. 프로이센 왕국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무능해서 이용당했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프로이센 왕국의 대표자는 물론 국왕이었으나 실제 실무는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수상이 일임했기 때문에 호구 잡힐일은 없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장님들만 있는것도 아니었고 실무진도 있었기 때문에 한두 사람의 무능으로 결과가 바뀌고 뒤집힐 일은 아니었다. 4개 승전국 중 영국과 러시아 제국의 발언력과 대립이 컸고[5][6] 프로이센 왕국은 러시아 제국에 붙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심판보는 척 하면서 영국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백일천하가 겹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가장 큰 목표였던 세력균형과 유럽 평화를 위해서 각국이 양보를 하면서 협상이 타결 되었다.
이 국면에서 메테르니히의 여러 활약상은 헨리 키신저가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에서 대가다운 필치로 정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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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대공국은 Grand Duchy of Warsaw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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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유럽
이는 빈 회의 만의 독자적인 결과가 아니라 이전 프랑스와 나폴레옹 전쟁 때의 합의된 국경선도 참조했다. 나폴레옹에 빌붙어서 영토를 확장한 중소규모의 영방들의 기득권도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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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 참석자들을 묘사한 기록화. 가운데에 앉아 있는 인물이 의장을 맡은 오스트리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1. 개요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들이 유럽 지도를 재구성하기 위해 열린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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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을 엘바 섬에 유배 보낸 뒤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와 유럽의 세력 재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로 오스트리아 제국 수상 겸 외상인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도했다. 회의를 주도한 유럽의 다섯 열강들은 각각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왕국이다.
이 회의에 참가한 나라들을 보면 나폴레옹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던 나라도 일부 참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폴레옹과 충돌한 적이 없던 오스만 제국도 마브로제니 파샤를 파견해서 빈 회의에 참가했고, 비록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사람이었지만 스웨덴의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도 로웬히엠 백작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심지어는 유럽의 전쟁과는 아무 관련도 없던 이로쿼이 연맹도 미국과의 무력 충돌을 이유로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다.
2. 내용
빈 회의 목표는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 상태로 되돌리자'''가 핵심이었다. 그래서 첫째 목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일어난 자유주의적 개혁을 청산하는 분명한 반동주의가 빈 회의의 분위기였다. 둘째는 유럽의 초강대국 프랑스가 몰락하고 나서 전리품 분배와 이로인한 유럽내 세력균형의 분배가 핵심이다.
이에 따른 빈 회의의 목적은 메테르니히가 제시한 다섯 개 원칙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정통주의로의 복귀였다. 나폴레옹에 의해 끌어내려진 기존의 유럽 군주들을 왕좌에 다시 앉혀놓고 혁명으로 오염된 체제를 다시 세우는 것이며, 혁명이 전의 체제로 복귀하며 국경선과 세력권을 조정하여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것. 그러나 명분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고, 소국의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당했고 나폴레옹에 빌붙어서 영토를 확장한 나라들은 대부분 기득권을 인정받았고 프랑스를 제외하면 약탈 문화재까지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프랑스도 포함이었지만 백일천하 때문에 프랑스만 반환해야 했다.
실제 회의는 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진척이 무척 더뎌 계획대로라면 4주 동안만 진행되었을 회의가 8달 동안이나 지속되게 된다. 이는 빈 회의 이전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의 회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4개국(영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보니 이럴 바엔 빈에서 제대로 판을 벌이자고 해서 메테르니히가 친히 조정 역할을 자임했고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벌어진 것이다.
살펴보면 대부분의 이해관계 문제가 결국은 영토 문제였다. 프랑스를 어느 정도 축소할지는 4개국이 파리에서 어느정도 합의를 해 놓았으나 그에 따른 전리품 분배를 가지고 너 죽고 나 살자며 개판이 벌어졌다. 프랑스 국경은 메테르니히가 관대하게 1792~1797년 사이의 국경으로 복구하고자 했고,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너무 관대하다며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메테르니히의 제안에서 타협하고 1792년 1월 1일 국경으로 정해졌다.
메테르니히는 회의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불리하게 진행되면, 회의를 중단하고 파티를 거행했기에 "저 회의는 진행되는게 아니라 춤추고 있는 중이다"라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각국의 군주들이 손잡고 춤춰대는 풍자화가 당대에 나왔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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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 기간의 실제 무도회를 기록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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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질질 끄는 회의를 춤으로 묘사한 풍자화
십수년간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난 오스트리아 제국에선 회의 비용으로 하루 5만 굴덴[1] 씩 펑펑 써대고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40일 연속 파티를 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눈치없이 나폴레옹을 너무 오래 편들어서 약간 왕따 취급을 받던 덴마크 왕[2] 도 연신 화끈하게 놀아댄걸로 소문이 났었다.
이렇게 탱자탱자 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실무진들이 발바닥에 땀나게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의 높으신 분들이 제 주장만 내세워 전혀 진척이 없었다.
더디던 회의를 한방에 해결한 것은 바로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었다.''' 나폴레옹의 탈출과 황제 복위 소식에 경악한 회의 참가국들은 위기감에 타협하여 1815년 6월 9일 빈 의정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열흘 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이 회의의 마지막 날 부기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여담으로 자허토르테 초콜릿 케이크가 여기서 등장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낮다. 요리사인 자허 본인부터가 빈 회의 후인 1816년 태생이기 때문이다(...) 다만 메테르니히의 "외교 사절들을 만족할 만한 디저트를 만들어와라"는 엄명에 의해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자허토르테는 1832년 세상에 선을 보였다. 해당 항목 참조.
3. 회의 결과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의 주변부에서의 소요에도 불구하고, 빈 체제는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성 동맹을 중심으로 '''유럽 협조 체계 개념'''(The Concert of Europe)에 바탕하여 40여 년간 유지되었다. 이후 정치적으로는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과 메테르니히의 실각, 외교적으로는 1854년 시작된 크림 전쟁을 기점으로 붕괴되었다.
다시 평화가 복원된 것은 1840~60년대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보오전쟁, 보불전쟁을 거친 1871년이었고, 이것은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린다. 이렇게 다시 40년간 평화가 지속되다가 빈 회의부터 정확히 100년만인 1914년 모든 열강의 대 전쟁인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면서, 빈 체제가 고안한 오랜 평화는 마지막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보수주의의 등장이란 점에서도 빈 체제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의외로 프랑스는 패전국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큰 손해는 보지 않은 편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명분 때문에 프랑스 자체가 쪼개지지도 않았다.[3] 당시 유럽에서, 혁명 이전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와 혁명 이후 보나파르트 황가의 프랑스는 각각 다르게 이해되었던 듯. 무엇보다 프랑스를 패전국이라고 아주 개발살을 내버리면 세력의 균형은커녕 다른 국가들이 제 2의 프랑스가 되어 또다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거나, 프랑스에 지나치게 가혹한 강화조약을 할 경우엔 프랑스인들이 정부를 인정하지 않을테고 그러자면 외국군대를 계속 주둔시켜야 했고, 주둔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전쟁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폴란드-작센 분할 문제로 갈등을 심화하는 동안 당시 프랑스의 외교관이었던 샤를 모리스 탈레랑이 이 갈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이득을 보았다. 정확히는 메테르니히가 주도했고 탈레랑이 여기에 제대로 결탁한 것이었다. 메테르니히는 영국의 캐슬레이와 짜고 탈레랑을 승전 4국(러·오·영·보(프로이센))의 비밀회담을 방청할 수 있게 하면서 군사 동맹까지 맺어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팽창을 위협하였다.
메테르니히는 스스로 나서서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고 정통주의와 복고주의 드립을 친 덕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협상력을 떨어뜨려 영토적 국익은 많이 챙기지 못했다. 앞서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노리는 바르샤바 대공국(폴란드)와 작센 병합 문제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테르니히가 대단히 경계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론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이 밀착해서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운신폭이 좁아졌고 장기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은 작센 대신 라인란트 지방을 발판으로 경제력이 일취월장해서 독일 관세 동맹을 구성하는등 독일내 영향력이 후진적 농업국인 오스트리아 제국보다 강해지며 통일 주도하는 발판을 조공으로 바친 셈이 되었다. 프랑스가 빈회의에 참석한건 부르봉 왕가 복귀의 영향이 있고 당시 국제정세에서 프랑스를 아예 배제할 수 없어서였다.[4]
단순히 메테르니히가 대단해서이거나 탈레랑이 먼치킨이라서가 아니다. 프로이센 왕국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무능해서 이용당했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프로이센 왕국의 대표자는 물론 국왕이었으나 실제 실무는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수상이 일임했기 때문에 호구 잡힐일은 없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장님들만 있는것도 아니었고 실무진도 있었기 때문에 한두 사람의 무능으로 결과가 바뀌고 뒤집힐 일은 아니었다. 4개 승전국 중 영국과 러시아 제국의 발언력과 대립이 컸고[5][6] 프로이센 왕국은 러시아 제국에 붙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심판보는 척 하면서 영국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백일천하가 겹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가장 큰 목표였던 세력균형과 유럽 평화를 위해서 각국이 양보를 하면서 협상이 타결 되었다.
이 국면에서 메테르니히의 여러 활약상은 헨리 키신저가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에서 대가다운 필치로 정리해놓았다.
4. 회의에 따른 각국의 손익과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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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대공국은 Grand Duchy of Warsaw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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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유럽
이는 빈 회의 만의 독자적인 결과가 아니라 이전 프랑스와 나폴레옹 전쟁 때의 합의된 국경선도 참조했다. 나폴레옹에 빌붙어서 영토를 확장한 중소규모의 영방들의 기득권도 인정되었다.
1790년 이전 국경으로 돌아갔다. 원래는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4개 승전국들이 합의한 대로 1792년 1월 1일의 국경선이었으나 백일천하 후에 조금 더 가혹해져서 자를란트 등을 프로이센 왕국, 사보이는 사르데냐 왕국에, 그리고 스위스, 네덜란드 등에 추가로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훗날 이탈리아의 통일과정에서 얻은 니스와 사보이 지방을 제외하고 현재의 국경과 거의 비슷하다. 루이 18세의 복위를 통한 부르봉 왕조로의 왕정복고, 영국이 점령한 대다수의 식민지를 반환(재획득)받음과 동시에 세네갈을 얻었고, 입헌군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전범국으로 찍혀서 영토내 주요 요새를 외국 군대에 점령당해야 했으며 3~5년간 외국 군대 50만 명의 체류비와 7억 프랑의 전쟁 보상금을 지급하고 각국이 프랑스를 감시하기로 한다. 영토 면에선 관대했지만 외교적으로는 꽤나 가혹한 조치였다.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고나서도 전범으로 찍혀 유럽서 꽤나 눈치를 봐야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범국으로 찍혀서 영토내 주요 요새를 외국 군대에 점령당해야 했으며 3~5년간 외국 군대 50만 명의 체류비와 7억 프랑의 전쟁 보상금을 지급하고 각국이 프랑스를 감시하기로 한다. 영토 면에선 관대했지만 외교적으로는 꽤나 가혹한 조치였다.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고나서도 전범으로 찍혀 유럽서 꽤나 눈치를 봐야할 정도였다.
프랑스로부터 몰타 섬, 네덜란드로부터 실론 섬(스리랑카)과 케이프 식민지(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를 획득했다. 독일 연방 소속의 하노버 선제후국은 격상하고 영토를 늘려서 하노버 왕국도 다시 복귀하여 영국 왕실과 동군연합을 이룬다. 영국 하노버 왕가의 방계 집안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텐 가문은 완전히 분가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분리되었다.[7]
부유하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있던 벨기에는 네덜란드에 넘겼다. 월경지라 관리하기 곤란했던 독일 연방(신성 로마 제국) 역내의 포어데어오스트리아(본토와 연결 되지 않은 고립영토) 역시 독일 연방의 구성국들에게 싹 다 넘기고 제3차 폴란드 분할 때 얻은 신갈리치아는 러시아에게 넘겼다. 대신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얻으면서 이탈리아에서 실리를 챙겼다. 이탈리아 중북부의 토스카나와 모데나 등 합스부르크의 방계 집안이 북이탈리아 지역에 다시 복귀하여 위성국이 되었으므로 사실상 사르데냐 왕국을 제외한 북이탈리아 전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권이 되었다.
러시아 황제가 대공을 겸하는 핀란드 대공국을 승인받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베사라비아를 얻었으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신동프로이센과 신갈리치아를 넘겨받았다. 즉 핀란드, 폴란드와 몰도바 동부를 획득했다. 핀란드는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친영파였던 스웨덴을 응징하기 위해 꼬셔서 일으킨 1809년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얻은 것이므로 실제로 큰 이득을 본 것은 없다. 오스만 제국령도 나폴레옹 전쟁 때 틈틈이 털어서 자력으로 획득한 것이고 폴란드는 폴란드 분할후 러시아 영역이 가장 컸으니.... 프로이센 왕국에 바르샤바 등을 양보받았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 편을 들게 된다.
바르샤바를 포함한 신동프로이센과 포젠의 일부를 러시아에게, 동프리슬란트는 하노버 왕국에, 남독일의 바이로이트와 안스바흐는 바이에른 왕국에 양도하는 등 일부 지역을 포기하였으나, 작센 왕국의 북부,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포젠 지방을 얻었다.
원래는 포젠까지 러시아에게 양보하고 그 댓가로 작센의 완전한 합병을 요구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을 비롯한 타국의 견제로 작센의 60% 정도만 합병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과 전쟁 직전(?)까지 갔다.[8] 프로이센 왕국의 입장에서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은 프랑스 제1제국치하 라인 동맹이라는 체제로 너무 오래 있어서 혁명으로 오염된 지역이었던 데다가[9] 본토와 지리적으로도 분리되어서 별로 탐탁지 않았고, 거기다 특히 라인란트는 종교적으로 가톨릭이 주류인 지역이라 개신교가 중심이었던 프로이센 입장에서 좋다고는 얘기할 수 없었지만, 유럽 내에서 프랑스를 견제할 역할로 프로이센 왕국이 지명됐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여차저차 획득하게 됐다. 메테르니히는 대륙에서 프랑스의 견제자 역할을 포기하며 프로이센 왕국에게 그 역할을 떠 맡겼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오스트리아가 훗날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앞서 폴란드에서 러시아가 영국과의 충돌을 꺼리며 폴란드 영토를 일부 양보하고 메테르니히의 바람대로 작센을 프로이센에 완전 합병이 아닌 절반 규모로 존속하며 타협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에게 잭팟을 안겨주었는데 산업 혁명의 원동력인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하고 라인 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슐레지엔과 더불어 독일의 공업화를 이끄는 최선두 지역이 되었고 그 결과 프로이센의 국력이 폭풍 성장, 추후 프로이센 왕국이 통일 독일의 주역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원래는 포젠까지 러시아에게 양보하고 그 댓가로 작센의 완전한 합병을 요구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을 비롯한 타국의 견제로 작센의 60% 정도만 합병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과 전쟁 직전(?)까지 갔다.[8] 프로이센 왕국의 입장에서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은 프랑스 제1제국치하 라인 동맹이라는 체제로 너무 오래 있어서 혁명으로 오염된 지역이었던 데다가[9] 본토와 지리적으로도 분리되어서 별로 탐탁지 않았고, 거기다 특히 라인란트는 종교적으로 가톨릭이 주류인 지역이라 개신교가 중심이었던 프로이센 입장에서 좋다고는 얘기할 수 없었지만, 유럽 내에서 프랑스를 견제할 역할로 프로이센 왕국이 지명됐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여차저차 획득하게 됐다. 메테르니히는 대륙에서 프랑스의 견제자 역할을 포기하며 프로이센 왕국에게 그 역할을 떠 맡겼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오스트리아가 훗날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앞서 폴란드에서 러시아가 영국과의 충돌을 꺼리며 폴란드 영토를 일부 양보하고 메테르니히의 바람대로 작센을 프로이센에 완전 합병이 아닌 절반 규모로 존속하며 타협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에게 잭팟을 안겨주었는데 산업 혁명의 원동력인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하고 라인 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슐레지엔과 더불어 독일의 공업화를 이끄는 최선두 지역이 되었고 그 결과 프로이센의 국력이 폭풍 성장, 추후 프로이센 왕국이 통일 독일의 주역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또한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들에 대한 프로이센의 우려는 결국 프로이센 자신에 의해 현실이 됐다. 프로이센이 흡수한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에서 비관용적이고 군국주의적이며, 토지귀족 융커들의 이권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는 프로이센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등장하였으며, 바이에른 등 뒤따라 프로이센에 흡수된 나머지 독일 지역들에서도 강압적인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철권통치에 대한 저항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는 지속적으로 프로이센과 이후 등장한 독일 제국에 사회-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프로이센은 자신의 군국주의적 정체성을 지키고 통일 독일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두 번의 세계대전을 주도했으나, 결국 두 번 다 패배하였다. 이런 두 번의 패배에 걸쳐 프로이센 자신의 중심지인 빈 체제 성립 이전 프로이센 영토의 절반 이상이 폴란드와 러시아에 넘어갔고, 그나마 남아있던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그리고 다른 몇 개 주의 일부 지역들 또한 또한 소련 영향력 하의 독일 민주 공화국의 영토가 되면서 대대적인 프로이센으로부터의 단절 작업이 이뤄졌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프로이센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새로운 독일 건국을 주장한, 라인란트 출신의, 콘라트 아데나워를 비롯한 비프로이센계 독일인들에 의해 독일 연방 공화국이 건설되어 결국 동독과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리고 통일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들의[10] 프로이센을 지리적 명칭으로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 프로이센을 지리적 명칭으로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동서독이 함께 선언을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프로이센과의 단절이 확실해졌다. 즉, 빈 체제는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할 수 있게한 원동력이 됐지만, 결국 오랜 기간 이어진 우여곡절 끝에 프로이센은 본인이 통일한 독일로부터 축출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얻은 대신 노르웨이의 영토인 페로 제도와 그린란드는 덴마크의 영토로 잔존했다. 스웨덴령 포메른은 프로이센에 양보한다.
라이프치히 전투 때까지 나폴레옹을 편 든 덴마크 왕과 열심히 뒷통수 친 스웨덴 왕세자 덕에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전리품으로 넘어간다. 덴마크는 대신에 하노버 선제후와 동군연합이던 라우엔부르크 공작령을 획득하고 북부 독일에서 영토를 늘린다.
라이프치히 전투 때까지 나폴레옹을 편 든 덴마크 왕과 열심히 뒷통수 친 스웨덴 왕세자 덕에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전리품으로 넘어간다. 덴마크는 대신에 하노버 선제후와 동군연합이던 라우엔부르크 공작령을 획득하고 북부 독일에서 영토를 늘린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남부 네덜란드(오늘날의 벨기에)를 획득하며, 오라녜나사우 가문이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서 네덜란드의 국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한다. 이 결과 네덜란드 왕이 룩셈베르크 대공 자격으로 독일 연방의 회원이 된다. 그러나 15년 후 벨기에는 종교적 문제와 겹쳐서 독립전쟁으로 인해 분리되고, 50여 년 후에는 살리카법으로 인해 룩셈부르크도 분리된다.
부르봉 왕조로 왕정이 복고되었다. 물론 이 왕가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때부터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겸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비준을 1817년까지 거부했는데 예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털러가면서 영토할양을 했고 이탈리아에 방계 왕족의 영지를 확보해준다는 조건을 강대국들이 무시해서이다. 결국엔 스페인 왕가 방계인 부르봉-파르마 가문이 루카를 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가 덴마크처럼 정신 못차리고[11] 끝까지 나폴레옹 편을 든 대가로 국토의 60% 가까이가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당한다. 작센은 전범취급을 당해서 공식 초청도 안되었고 참관인을 보내서 간접적으로 청취만 해야 했다. 하지만 완전 병합은 영불오 삼국동맹의 견제로 못하게 되고 "독일 연방의 작센 왕국"으로 존속하게 된다. 같은 베틴가문의 본가 에른스트 계열의 작센 공국들에게 일부 영토를 할양했다. 이는 1547년 작센 왕국(알브레히트 계열)이 같은 베틴가문의 본가로 에른스트 계열로 부터 찬탈한 영토의 일부.
- 나머지 독일 지역
라인 동맹에 속했던 나머지 독일 지역은 나폴레옹 시대 이전으로 돌리기엔 소국들이 많아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라인강 유역의 3개 대주교구(마인츠·트리어·쾰른)은 소멸했고, 나머지 교회령이나 제국 직속도시 제국기사령, 기타 영방소국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기타 나머지 독일국가에 합병되었다.[12] 하노버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은 왕국으로 격상했다. 앞서 몰수한 교회령은 각국이 합병한 것을 그대로 인정받았는데[13] 유서 깊은 제국도시들, 레겐스부르크나 뉘른베르크 등도 모조리 합병되고 프랑크푸르트와 뤼벡, 브레멘, 함부르크 4개만 독립을 인정 받았다.안습...
이런 듣보잡 소국들을 나눠 먹은 최대 수혜자는 바덴 대공국으로, 혁명 이전보다 영토가 5배(!)나 증가 할 정도 였다고[14] 한다.
1648년 이후 300여 개가 넘는 독일의 독립 영방들은 이미 나폴레옹 덕에(?) 많이 정리되었고, 1806년 해체된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는 독일 연방이 1815년 결성 될 때는 35여개 국가(+ 4개의 자유시)로 정리되어 나름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듣보잡 소국들을 나눠 먹은 최대 수혜자는 바덴 대공국으로, 혁명 이전보다 영토가 5배(!)나 증가 할 정도 였다고[14] 한다.
1648년 이후 300여 개가 넘는 독일의 독립 영방들은 이미 나폴레옹 덕에(?) 많이 정리되었고, 1806년 해체된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는 독일 연방이 1815년 결성 될 때는 35여개 국가(+ 4개의 자유시)로 정리되어 나름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1] 1870년 화폐 기준으로 35만 유로에 해당한다는데 1814~5년이니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더 높았을 것이다.[2] 대륙봉쇄령에 적극 동참했고 그 대가로 프랑스에 스웨덴을 견제하라는 목적으로 특권을 받았다. 일찍 뒷통수치고 빠진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는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제국이고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도 한때는 나폴레옹에 쳐발려서 동맹 신세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작센처럼 정신 못차리고 라이프치히에서 개박살이 났는데도 끝까지 충성을 바치는 미련한 경우만 빼고...[3]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오스트리아 프란츠 2세의 아우 카를대공을 수반으로 이전 합스부르크령인 알자스 부르군드등을 묶어서 프랑스에 떼내 새로운 군주국을 만드려고 했으나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 등이 가볍게 무시했다.[4] 백일 천하 때는 동맹국에서 프랑스가 아닌 개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선전포고했다.[5] 어떻게 보면 당연했던게 이 두 국가만이 당시 유럽 국가들중 유일하게 나폴레옹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의 경우 나폴레옹의 침공직전까지 잠시나마 나폴레옹이 조성한 소위 신 유럽 질서에 자의 반으로 핵심 열강에 편입한 전적이 있고 기존의 대 동맹전에서 증원군으로 서유럽에 파병한 적은 많았지만 핵심적인 활약이 불분명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실패하고 러시아군이 유럽 본진으로 본격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지분이 높아진 점이 없지않아 있다.[6] 반면 영국의 경우 나폴레옹 스스로도 인정한 가장 최대의 적국으로 나폴레옹의 집권 이전이며 프랑스 혁명전쟁 초기인 1793년부터 개전했다. 아미앵 조약으로 인한 평화기간(이것도 상호평화조약이었지, 어느 한쪽이 굴복해서 맺은 종전조약이 아니었다,) 1년을 빼고 1815년까지 계속 맞섰다. 나폴레옹의 세력이 가장 최대였고 온 유럽이 굴복했던 1807 - 1811년 사이엔 오직 유일하게 적대했고 당대 최강이었던 영국 해군의 위력하에 본토가 침공받을 위험이 없이 전쟁기간 내내 함대결전에서 100% 승리하고 전 유럽의 해상을 장기간 봉쇄할수있었고 영국 육군도 1808년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파병되어 웰링턴의 걸출한 지휘하에 1814년 종전 무렵엔 남프랑스에 진입했다.[7] 하노버 왕가는 원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가문인데 수도를 이전하고 선제후 가문이 되고나선 하노버 가문으로 불렸다.[8] 단순히 메테르니히와 탈레랑이 프로이센 왕국을 견제(?)한다는 셈법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 때문이었다. 영국은 러시아 제국이 지나치게 서유럽에 팽창하는 것을 두드러기 내면서 결사 반대하여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가 양보하여 폴란드 전역을 합병하지 않고 프로이센 왕국과 나누는 선에서 타협하며 실마리가 풀렸다.[9] 의외로 라인란트 사람들은 프랑스의 지배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프랑스가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 치하에 있던 구시대적 전통들을 혁파하고 개혁을 실시하면서 주민들의 호감을 산 것이다. 만일 나폴레옹의 통치가 더 오래갔다면 라인란트 역시 알자스-로렌의 경우처럼 프랑스의 일부로 완전히 흡수되었을 것이다.[10]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소련 등이 사실상 동시에 프로이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독일의 통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만큼 현대 독일의 프로이센 계승 여부 문제는 주변국들에게도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1] 프로이센을 견제하는 역할로 프랑스에서 이권을 많이 받았는데 바르샤바 대공국 대공도 겸임했다. 라이프치히 전투 후에 포로로 잡히고 왕위 복귀가 유보 되었으나 복위는 승인 받는다.[12] 합병돼서 없어진 소국의 왕가들은 이전과 똑같은 결혼에서의 특권이 주어졌다. 즉 귀천상혼에서 제외되어 다른 왕가와 혼인이 계속 가능했다.[13] 교황청에서 성직제후령의 복귀를 강하게 주장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14] 바덴 대공국은 앞서 나폴레옹에 줄을 잘서서 받은 영토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받았는데 라인 강 이서 지역을 프랑스에 조공으로 바치는 대신 라인 강 동편에 8배에 달하는 대토보상(?)을 받았다. 여기엔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