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독일제국의 초대 재상'''
'''본명'''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1]
(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출생'''
1815년 4월 1일
프로이센 왕국 쇤하우젠
'''사망'''
1898년 7월 30일 (83년 120일)
독일 제국 프리드리히스루
'''국적'''
프로이센 왕국 [image] (1815-1871)
독일 제국 [image] (1871-1898)
'''직업'''
외교관, 정치인, 변호사
'''작위'''
후작[2]
'''신체'''
190cm[3]
'''학력'''
그라우엔 클로스터 김나지움 (졸업) (1830-1832)
괴팅겐 대학교 (법학) (1832-1833)
베를린 대학교 (법학) (1832-1835)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
'''종교'''
개신교 루터회
'''배우자'''
요한나 폰 푸트카머 (1847-1894)
'''자녀'''
마리, 헤르베르트, 빌헬름
'''정당'''
무소속
'''경력'''
프로이센 재상 (1862-1873 / 1873-1890)
북독일 연방 연방재상 (1867-1873)
프로이센 외무대신 (1862-1890)
'''독일 제국 제국 재상 (1871-1890)'''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초기 활동
2.2. 재상 재임기
2.2.1. 독일의 통일을 이끌다
2.2.2. 비스마르크 동맹 체제
2.2.3. 통일 이후의 내치
2.3. 퇴임과 사망
3. 평가
3.1. 화려한 외교술
3.2. 독단적인 국정운영
4. 개인적인 면모
4.1. 일화
5. 기타
5.1. 숫자 3과의 연관성?
6. 어록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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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과 피만이 통일을 가져다준다."'''

― 세계사 100장면 '독일 통일을 이룬 비스마르크' 中 ―

19세기 후반 프로이센, 독일 제국의 재상. '''철의 재상(Eiserner Kanzler)'''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4] '''절묘한 외교술'''로 19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을 주도했으며,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와 일부 타협해 불만을 안정화 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독단성과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점차 인기를 잃어가다 빌헬름 2세와 갈등을 겪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5] 쇤하우젠(Schönhausen) 출신 융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크 가문은 15세기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봉해지기 전부터 거주하던 가문으로 프리드리히 대왕 치세에 비스마르크의 큰아버지인 에른스트, 프리드리히가 군공을 세워 장성으로 진급하는 등 일약 출세했다. 그러나 오토의 아버지인 카를은 체면치레로 예비역 장교 지위만 획득한 흔한 지주였고, 전사한 에른스트와 자식이 없던 프리드리히의 토지가 가문의 상속법에 의해 듣도보도 못한 친척에게 상속되는 등[6] 오토가 장성한 시점에는 별 볼 일 없는 가문이었다.
반면 외가인 멩켄 가문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부르주아 지식인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법학 교수, 외조부는 대사를 역임했으며[7] 비스마르크의 어머니 빌헬미나 루이스 멩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와 소꿉친구였었다. 원래 빌헬미나는 오토의 큰아버지 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했으나,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외삼촌의 반대로 오토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렇게 결혼한 부부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정적이었으나 우유부단해 아내에게 눌려 지냈고[8], 어머니는 화려하고 강단있으며 사교적인 성격이었지만 가정에는 무심했다.[9] 그 와중에 태어난 베른하르트, '''오토''', 말츠위나 남매는 어린 나이에 기숙사 달린 학교로 보내져[10] 명절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때 오토는 학업에 별다른 재능이나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언어와 고전에 심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장성한 오토는 괴팅엔 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11]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는 매일을 술, , 주먹과 함께 보내며[12] 걸핏하면 결투하자고[13] 난동을 부려 주변에 악명이 자자했다. 그리고 이때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라는 자유주의자 모임에 잠깐 가입했다 탈퇴하기도 했고[14], 나중에는 각종 도박과 사치에 눈이 돌아 빚이 쌓이자 자퇴하고 베를린 대학교로 편입해 들어갔다.
베를린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잃어 성적은 중간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다닌 기숙사에서 배운 유럽 각국의 언어와 고전, 라틴어 덕에 어떻게든 졸업할 만한 성적이 나와 간신히 졸업했다. 이렇듯 오토에게 대학 시절은 혼란 그 자체였으나, 후일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 유용했던 인맥을 쌓고, 조금이나마 자유주의 물을 먹어 사고의 융통성이 생겼다.
이후 오토는 법관이 되기 위해 시험을 쳐서[15] 법원 서기가 되었으나[16], 1년 정도 다니고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 생각해 퇴사하였다. 그리고는 외조부의 직업인 외교관에 흥미를 보여 외교관 시험[17]을 보고, 합격해 외교관이 되었으나 듣보 집안 출신이였기에 외국이 아닌 국내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연방 외교관으로 발령난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경력에 도움이 된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수습 기간은 아헨에서 하게 되는데 어떤 여성과 약혼까지 했지만 빚을 지고 몇 주동안 결근했다가 면직 처벌되었다. 하지만 외교관 시험 동기[18]의 도움으로 복귀에 성공했다. 여기에다 또 17살짜리 영국 귀족 처녀 꽁무니를 쫓아 다니며 스위스까지 무단 결근하고 넉 달동안 여행을 떠났고 당연히 짤렸다. 그럼에도 이번에도 '''역시나 운 좋게도 별 다른 징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후에도 도박빚을 많이 지는바람에 아헨에서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25세 무렵 나이에 도피성으로 육군에 입대해 버린다.
육군 장교 군복을 입고 나온 초상화가 많아서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다른 귀족 출신 자제와는 달리 군대를 싫어했고[19] 대학 시절 결투 시에 입은 오른팔 부상을 근거로 병역 면제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을 정도였다. 병역은 외교관서 짤린 시기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소집 기간 1년을 채워야 되는데 귀찮아서 몇 달 다니다가 대충 땡땡이를 쳤는데도 전시도 아니고 관대한 지휘관을 만나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훗날 독일 통일 후에 땡땡이나 치던 이 예비역 소위는 '육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는다.
군대 생활은 프로이센 왕실의 거처 포츠담 부근의 근위 연대였는데 당연히 높으신 분들 자제들이 몰려있는 땡보직이었다. 이마저도 1년을 못 채우고 땡땡이쳤는데 '''뒤늦게 농사를 배우려고 농업 학교에 다녀서'''였다. 농업에 깊이 관심을 보이면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포메른 농장과 가까운 곳으로 가서 농장 일에 몰두했다. 이때 농사를 시작한 건 코스프레가 아니라 진짜였는데, 농부들과 격의 없이 사투리로 대화할 정도로 농장 일에 깊이 빠졌고, 농업 학교 당시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당시 최신 기술로 만든 비료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와 공장까지 만들면서 수완 좋게 농장을 경영하여 '''대학 시절과 외교관 시절에 얻은 도박 빚을 다 갚았다.'''
성공한 지주가 되자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 들었는데 마침 고향 근처에 수재#s-2가 나자 제방 감독관을 탄핵하고 스스로 해 보겠다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무렵 막 수립된 의회에서 마침 보궐 선거 자리가 나자 본격적으로 공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공직 생활 초기에는 튀어 보이려는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1848년 혁명 당시엔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자기 영지의 농민 40명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가서 군중 폭동을 진압하려 했다.'''[20] 이후 베를린으로 잠입해서 왕실 인사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역쿠데타의 주역이 되려고 했는데 이 때 오해로 오히려 빌헬름 왕자의 부인이었던 작센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에게 역적 취급을 받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수십년간 비스마르크를 괴롭히게 된다.
어쨌든 혁명 진압 이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부르주아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 들여 납세액에 비례한 제한 선거를 허용해서 기득권층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의회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자신들의 의회마저 없애달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때 국왕의 뜻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시기 전후로 비스마르크를 매우 눈여겨 보았는데 혁명 후 비스마르크가 결혼을 하고 베네치아신혼여행을 하자, 마침 우연히 그곳에 체류 중이던 국왕이 직접 비스마르크를 불러 독대하고[21]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듣보잡 비스마르크를 일약 독일 연방 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하게 된다. 이런 벼락 출세 덕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의 예전 행적을 들어 '''술고래 대학생, 타락한 융커, 포메른의 돼지치기'''는 안 된다는 여론의 반발이 있었고 왕세제 빌헬름 왕자조차 "한낯 예비역 기병 소위 에게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면 곤란하다."라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쨌든 이런 해프닝 이후 1851년부터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프랑크푸르트 독일 연방 의회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맞서서 북독일의 프로이센 위주의 복수주도권을 주장하게 된다.
연방 회의에서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일화로 소위 '위신 투쟁'이라 불리는 사건도 있다. 당시 연방 회의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던 오스트리아 제국 대표만이 회의석상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가?'라며 의장에게 직접 불을 청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고작 담배 한 개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행동은 꽤 큰 파장을 불러온 초유의 사태였다. 당황한 각국 대표들은 심지어 본국에 이를 보고하며 '담배를 피워도 되겠는가'를 묻기까지 했고, 결국 바이에른 왕국 대표 카를 폰 슈렌크(Karl von Schrenck)를 시작으로 비흡연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들이 차례로 담배를 피워 물기 시작했다. 작센 왕국 대표 율리우스 고틀롭 폰 노스티츠(Julius Gottlob von Nostitz)는 내각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하노버 왕국 대사가 피우는 것을 보고 고심 끝에 그 다음 석상에서 결국 실행에 옮겼다. 본인 말로는 '칼집에서 칼을 뽑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비흡연자들까지 '조국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희생'을 하였고, 마지막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남은 것은 단 한 명 헤센다름슈타트 대표 뿐이었다. 프로이센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담배 한 개피로 주장한 것이다.
이후 독일 연방의회에서 임기가 끝나고 1858년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쫓겨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어 중립을 주장한 인연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발령받았다. 이 때 알렉산드르 2세차르 가족까지 몰려 나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기본 방침 중 하나인 '''대러 친선'''은 이 시기부터 이어진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죽고 빌헬름 왕세자가 즉위한 후, 군비 확대와 징병제 기간 연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하자 전격적으로 프로이센 수상에 임명된다.

2.2. 재상 재임기


[image]
피켈하우베를 착용한 모습.

2.2.1. 독일의 통일을 이끌다


프로이센 왕국 재상으로 취임하자마자 맡은 난관은 징병제 기간 연장과 육군 조직 개편이었다. 명목은 세금 내는 부르주아들이 세금 내기 싫어서 빼애액거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프로이센 육군 편제는 1815년 해방 전쟁 시기 편제와 동일하게 15만명에 불과했는데, 19세기인구가 폭증한데다가 , 1848년 혁명 진압 시 드러났듯이 군부에서 인원 부족을 호소했고, 군인을 늘릴 필요성은 부르주아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부르주아들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예비군[22] 지휘관을 현역 프로이센 장교가 지휘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군대는 상명하복 조직이라 권위주의를 젊은이들에게 강요할 것인데다가, 현역 장교가 유사 시 예비군을 지휘하게 되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악용할 소지가 높아서 너무 위험하다는 것.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군에서 융커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역 장교 직위는 접근하지 못했으나 예비역 장교 직위를 일정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보상으로 하사받기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축소되는것으로 여겼다. 이런 국면에서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타협으로 가장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마지 못한 척 다른 요구를 일부 들어 주기도 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협상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아예 의회라는 제도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의원들을 비아냥거리면서 의회 예산권은 무시하고 국가는 항시 존속해야 하기 때문에 의회의 예산 승인이 없어도 준예산으로 운영한다는 식으로[23]으로 밀어 붙여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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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 승리 이후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하는 유명한 그림. 원래 비스마르크도 검은색 육군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빌헬름 1세 황제의 특별 지시로 그림에서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흰색 예복을 입은 것으로 그려졌다.'''[24]
빌헬름 1세를 도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일 제국 건국을 이뤄낸 주역이다. 취임사에서 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무기)과 피(=전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국가를 준전시상황으로 상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지를 없애고 헌법을 무시하며 방식의 국가 운영을 이끌어 간 것으로 분명 비민주적인 정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딱히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제국 정체가 유지되고 있던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조차 나폴레옹 3세가 독재를 하던 시절이다. 정작 비스마르크가 무너뜨리긴 했지만… 당시 정치적 반대파인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등 가혹한 처벌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점에서는 평가를 좋게 줄 수 있다. 즉 반동복고 전제 군주파였으나 강압적 수단에만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들을 엿먹이기 위해서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25]이 운영하는 출판사의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했다.
군비 확장 이후 비스마르크의 초기 외교는 전쟁을 회피하지 않았다. 재임 시절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점령),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제2제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했는데, 육군 수뇌부인 헬무트 폰 몰트케와 갈등을 빚을 정도로 정치 우위를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이라는 발상이었다. 이 때문에 몰트케를 비롯한 독일 육군 사령부들과 계속하여 갈등이 생겼으나 프로이센 육해군최고사령관인 빌헬름 1세의 신임을 이용해서 끝내 관철시켰다.
비스마르크가 특히 유명한 것은 1860 ~ 1870년대의 외교 정책과 전쟁 과정 때문으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는 프랑스가 제시한 보상책에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은채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 프랑스의 기대감을 이용했고,[26]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뒤에는 엠스 전보 사건등을 이용하여 국내외 여론에 불을 붙여 구실을 찾던 프랑스에게 미끼를 던져 선제 침공을 유도함으로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발발(1870년)시키고, 독일 내에서는 물론 국제 여론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그 결과 프랑스의 제 2제정은 패망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북독일 연방에 남부 독일 국가들이 결합하여 독일 제국이 성립하여 중부유럽 강대국이 탄생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비스마르크는 근대사의 중요 인물이다.
이 시기의 일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독일 제국 성립 전에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나갔길래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문관 출신임을 비꼰 것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주눅 들지 않고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그 유명한 알자스-로렌을 빼앗아 온 것도 당시의 일이다.[27][28] 백년전쟁 때 알자스의 동레미에서 잔 다르크를 배출해낸 지방이라고도 하는데, 이후 독일 지역의 제후령이었다. 그 후 17세기에 30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재점령했는데, 이백 년이 조금 지나 비스마르크 시대인 19세기들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이 다시 점령해 반 세기 정도 통치하다가 1차대전의 결과 이 지역은 다시 프랑스에게 돌아갔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경계에 있는 이 지역에 얽힌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경제통합, 나아가 유럽연합 구상의 기원이기도 하다.

2.2.2. 비스마르크 동맹 체제


  •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
  •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29]
보불전쟁 이후 절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독일의 안전이 보장되었던 1890년대까지의 유럽의 외교 구도를 흔히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베르사유 체제라든가 냉전 체제와 다르게, 외교사에서 한 체제에 특정 인물의 이름이 붙은 몇 안 되는 사례이다.[30]
사적인 반동 복고 주의적 가치관과는 별개로 재상으로서 활동한 공무에서 유일하게 까이는 점이, 비스마르크 같은 능력자가 아니면 유지하기 곤란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비스마르크는 퇴임 이후에도 자신을 멀리하는 황제에게 간언하거나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하는 등, 계속 업무를 유지했으면 체제는 더욱 굳건해져 뛰어난 외교관이 없어도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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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풍자한 그림. '''고립되어 울상인 마리안'''이 요점.
독일 제국의 수립 이후 비스마르크는 숙적 프랑스가 세력을 재건하여 독일에 복수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외교 정책의 제1 과제로''' 삼았다. 또 비스마르크는 일관되게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는 철칙을 강조했고, 프랑스의 고립도 이 수준의 원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유럽 중부에 위치한 독일의 여건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필연적으로 '''양면전쟁'''의 양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러시아 혹은 프랑스 중 한 나라와는 친하게 있을 필요가 있다.[31]
영국이 각지의 식민지 확장 등으로 기타 강대국들과 갈등이 심한 가운데 유럽 내에서는 중립적 태세를 취하자,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손을 잡는 동시에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이를 통해서 프랑스가 유럽의 어떠한 강대국도 우방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원천봉쇄시킨 것이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다. 이렇게 독일, 오-헝제국,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를 3제 동맹이라고 하는데, 세 국가가 모두 제정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내 세력 균형의 효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범슬라브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잦은 위기가 벌어졌는데,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발칸 국가들의 영토 확장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축소시키면서 갈등이 심각해져 한때 3제 동맹은 중단되었다. 비스마르크 본인은 러시아가 다시 독일과 손을 잡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1881년 재건된 3제 동맹은 1884년에 재확인되고, 1887년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재보장 조약이 맺어져 비스마르크의 해임까지 생명을 유지한다. 이렇게 3제 동맹이 재건되기는 했지만, 이미 러시아는 베를린 회의에서 독일이 러시아편을 들어주지 않고 중재자 위치를 고수한 것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3제 동맹은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유능한 외교관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비스마르크 개인 능력에 의존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퇴진 이후, 독일은 러시아와 전통적 우호관계를 중단하고 말았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3세#s-2와는 성향상 자주 대립했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또한 집권 초기에는 철과 피를 외치며 전쟁으로 독일 통일을 달성했지만,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항상 보수적 현실주의자였고, 독일이 통일된 지배적 강대국이 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에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를 비롯한 팽창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15년 후 삼국 협상이 성립되고 독일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양면전쟁에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그가 해임된 1890년 이후 17년 만에 유럽 내에서는 삼국 동맹삼국 협상의 대립이 심해졌고, 그 원인도 빌헬름 2세의 반영 - 반러시아 정책이었다. 다만 기폭제가 된 발칸 반도 문제는 오히려 1870년대 이후로 계속 심각해지던 문제로, 비스마르크도 '여리박빙'의 상황에서 다루었던 문제이다. 일례로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2국 동맹을 각각 맺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이 난제를 잘 다룬 것이 비스마르크의 업적에 포함된다.[32] 하지만 결국 2국 동맹은 빌헬름 2세의 재보장 조약 갱신 거부로 인해 깨지게 되었고, 분개한 러시아는 1892년에 프랑스와의 러불동맹을 맺어서 독일 포위를 사실상 완성시켰다.
이렇게 보면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독일 입장에서도 더 낫겠지만, 식민지 쟁탈전에 막차를 탔던 그때의 독일(=빌헬름 2세) 입장에서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면서 팽창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는 중립을 지켰던 과거와 다르게 아프리카와 뉴기니 그리고 산동반도를 차지하게 되니 기존 식민지를 많이 확보한 영국과 프랑스와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고, 또한 보어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지원을 해준 보어전쟁과 직접적으로 프랑스와 외교로 싸운 모로코 위기로 영국과 프랑스와의 극심한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자 당연히 물러설 리 없는 빌헬름 2세가 해군을 팍팍 밀어주면서 영국의 역린을 건들었고,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러시아와 함께 중요했던 영국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와 영불협상이 성사되는 결과가 일어났다.
유럽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비스마르크 체제는 유지되기 극히 어려운 곡예 외교적인 산물이었다. 영-러는 숙적, 독-오도 몇번이고 전쟁했던 사이, 러-오는 발칸을 두고 대립중 등등. 1차대전만 해도 발칸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이 외교상태 유지를 위해 유언비어나 선동 등에 의지했고, 동맹으로 얻을 이득보다는 '동맹을 위한 동맹'에 가까운 정책을 펼쳤다. 이렇다보니 시간이 지나자 외교가에선 비스마르크가 뭔가를 하면 일단 삐딱하게 보는 기조가 확산되었다.

2.2.3. 통일 이후의 내치


반면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정착을 방해하는 헌법적 규범과 의회의 의사를 제멋대로 개변하고 무시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제국 재상은 제국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규정인데, 이 때문에 독일의 학자들에게서는 국내 정치에 관한 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자본주의를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한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아예 대놓고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독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이라고 깐다. 다만 이 규정은 사실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반면에 빌헬름 1세는 말 그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33]
그 자신의 보수성도 엄청난데 1848년 혁명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하고 무력진압에 찬성하는 동생 빌헬름 1세를 국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 계획 때문에 차후 빌헬름 1세의 재상이 되었을 때도 빌헬름 1세의 왕비는 비스마르크가 실제론 영국으로 일시 망명한 빌헬름 왕세제 대신 야심가인 국왕과 왕세제의 조카를 왕위에 앉힐 음모로 여겼기에 상종하지 못할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수십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소작농을 무장시켜 수도로 진격하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전통적 군주제와 반동적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과격성은 이후 어느 정도 누그러지게 된다.
그런데 그 사상과는 반대로 세계최초로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연금보험 등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즉 현재 4대 사회보험 중 3개가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4대보험중 하나인 고용보험법은 1927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서 3번째.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의 투쟁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더 큰 것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선을 그어버린 것.[34][35] 사회주의 견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복지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하면서 독일이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1871년 이후 "문화 투쟁(Kulturkampf)"이라고 불리는 반가톨릭 정책을 폈는데, 비스마르크는 1873년 유명한 ‘5월법’을 공포하고 성직자의 임면(任免)감독권을 국가에 이양할 것을 규정하였다. 또한 1875년 ‘5월법’은 프로이센 내의 모든 수도원을 폐쇄하며 수도자들은 추방한다는 조문을 명시하고, 예외적으로 병자 간호에 종사하는 수도회만이 내각이 정한 바에 따라 지속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예수회원 추방령인 ‘예수회원법'을 발표하였다. 가톨릭 신자가 많은 바이에른라인란트 등의 서남부 그리고 프로이센령 포젠의 폴란드인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셌고[36], 결국에는 사회주의의 성장이 더 위험하다고 보고 교황청과는 타협했다. 1878년 이후에는 반사회주의자법을 통과시켜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회, 조직, 출판물 등을 금지했지만 사회주의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2.3. 퇴임과 사망


반가톨릭 문화투쟁과 반사회주의자법에도 불구하고 1888년에 빌헬름 1세가 사망한 뒤부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3세가 자유주의 성향이라서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가 3개월만에 세상을 뜨면서 자리를 이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후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사회 안정을 위해서 가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과 화해를 모색하여 충돌이 이어졌다. 루르 광산 파업에서 비스마르크가 강경 진압을 주장한 데 반해서 빌헬름 2세가 중재를 하자고 하면서 황제와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이 때는 황제가 작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 증진과 가톨릭계와의 화합을 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국은 비스마르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1890년 총선에서 가톨릭계 정당인 중앙당(Zentrumspartei)이 최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시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요 정당으로 부상)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37] 이 총선에서 親비스마르크파의 주요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이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등 親비스마르크파는 대패했고, 이로써 그 동안의 사회주의자-가톨릭 탄압 정책에 대한 명분을 잃은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결국 제국 수상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두 인물에 관한 오늘날의 상반된 평가를 생각하면 언뜻 의외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권좌에서 밀려나자, 독일 내에서는 이 조치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비스마르크가 반대파들을 기만하는 행태에 보수파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죄다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장원[38]으로 은퇴할 때는 의장대군악대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송별식을 해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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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의 수상 퇴임을 풍자한 만평. 배에서 떠나는 선장(비스마르크)의 모습을 바라보는 빌헬름 2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약 50년쯤 후, 윈스턴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총선거에 패배하여 퇴임할 때도 이를 패러디한 만평이 등장했다.
후대에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빌헬름 2세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결정적이었고,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 재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실의 원로가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못하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것이라고 직언했을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가지긴 했으나 역시 전 재상의 충언을 듣는 체 마는 체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정계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는 있어도 어찌되었건 일평생 일선에서 열심히 뛴 인물임은 분명하다. 한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었고 평화주의자로 불릴만한 발언도 했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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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에 위치한 비스마르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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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스루흐[39]에 있는 비스마르크 영묘 안에 안치된 비스마르크의 석관. 오른쪽은 아내의 석관이다.
말년 황제와의 갈등관계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신하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석관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라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을 쓰라고 유언했다.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고, 국장도 제안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사망했을 때,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일부 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그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돌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파파라치 사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연히 병자였던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 지저분한 모습.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고, 이후 그의 사진은 온건한 임종 모습이 유포되었다. 평온히 자는 모습이긴 하나 혐짤 가능성 있으니 주의.

3. 평가



3.1. 화려한 외교술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보통 널리 알려져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재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쉽게 말해 그가 치렀던 덴마크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의 보불전쟁은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지 독일 제국의 정복 야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일화처럼 그는 전장에서 불구가 된 참전 용사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
그 유명한 연설도 "국가의 대문제" 즉 독일 통일을 두고 한 이야기지 일반적으로 나 불도저요! 한 것이 아니다. 당시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대독일주의를 주창하며 대를 이어 알프스 이북 독일연방에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오스트리아, 커다란 중부유럽 통일국가를 이웃으로 두는 것을 [40] 경계하는 프랑스를 어떻게 배제하느냐였는데, 이것이 외교적으로 해결될 전망은 없었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시절 발생한 전쟁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는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외교관 출신답게 유럽 내 많은 국가들에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41]
비스마르크는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 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과 경제력, 그리고 실전에서의 증명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확보에 회의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제직 시절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졌다.[42] 정작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린 빌헬름 2세의 성과는 시원찮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충언을 마지막에라도 들었어야 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안 듣고 군함과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열강의 어그로를 끌 만한 짓만 골라서 일으키더니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가 져서 자신의 왕좌와 서프로이센포젠, 알자스-로렌, 북부 슐레스비히, 상슐레지엔, 벨기에 국경의 영토 일부를 잃었다. 이것은 또한 아돌프 히틀러나치가 발호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서 패배하는 바람에 독일은 남아 있던 동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대부분, 브란덴부르크 중 노이마르크 지역인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을 영구히 폴란드러시아에 할양해야 했고, 남은 영토마저도 동독서독으로 분단되어 40년 간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3.2. 독단적인 국정운영


비스마르크는 정치교육을 전혀 못 받은 국민들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 결과 정치 분야에서 국민들의 수준은 이미 20년 전에 도달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 1917년, 막스 베버

앞에서의 평가처럼 비스마르크는 수많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고수했고, 그것을 대체로 달성했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해당사자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순수한 국가이성(reine staatsräson)에 따라 움직였고 따라서 그는 수시로 적과 동지를 바꿨으며 절차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했다.
비스마르크의 이런 행태는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결집시켜 정적들을 양산했고 대중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실무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28년간이나 비스마르크의 비위를 맞춰야 하다 보니 그런 생활에 넌더리를 낸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외무성의 정치부장인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Friedrich von Holstein)이다. 홀슈타인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전략에서 결정적인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이 연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 비밀조약이 러시아에게는 많은 이득을 주지만 독일이 얻는 것은 거의 없다고 확신했고, 또 비스마르크의 작품인 이 밀약이 갱신되면 다시 비스마르크가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다른 외무성의 관료들과 함께 빌헬름 2세를 설득했고 황제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관용과 소통이 부족한 정치지도자가 오랫동안 독일의 정치무대를 독점하는 바람에 '''신흥강국 독일의 정치문화 낙후'''라는 결과가 만들어진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후,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조국이 파멸한 원인에 대해 분석했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평은 곱씹어 볼 만하다.

비스마르크의 업적에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정신보다는 힘을 강조한 독일제국의 문화는 독일국민들의 가치관을 타락시켰으며, 정치적인 성장을 가로막았다. 그리하여 독일 국민은 빌헬름 2세의 무책임한 행동과 나치즘의 범죄를 용인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4. 개인적인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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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 재상의 강인하고 냉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신경쇠약 때문에 자주 과식했고 사망원인도 과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물도 많았다고 한다. 아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려 하자 울면서 자살하겠다고 말린 적도 있으며 보오전쟁의 보상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 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번은 비스마르크가 '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임하겠습니다!'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 비스마르크가 더 필요하니 내가 퇴위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어찌 됐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가 설득하면 마뜩찮아 해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이후 빌헬름 2세가 자기 말을 안 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무시하자 열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란 카더라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 찌라시의 보도였고, 실제로는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모독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어도 결코 예의를 잃지 않았다. 총리 임기 말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일일히 문서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자 뚜껑이 열려서 잠시 이성을 잃은 적이 있지만, 퇴임 이후에도 아들뻘 나이의 빌헬름 2세에게 훈계하려고 했지 한판 붙자는 식으로 대들진 않았다. 초 대귀족도 아닌 그냥 총신에 불과한 비스마르크는 그러는 그렇게 막나갈 파워가 없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두 전쟁 모두 중요한 전투에서 이긴 다음 고삐를 쥐고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1870년 독일 통일 이후 실각할 때까지 그의 정책 목적은 철저히 전쟁을 막기 위한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데 있었다.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말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정치를 싫어했다.''' 말트리는 비스마르크의 대학 동창이었고, 이후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는 노년까지 쭉 편지로 교류했다.
왕년에 언어공부에 심취했던 적이 있는 만큼 여러 가지 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영어에 능통해 역시 영어에 통달한 이홍장과 만났을 때는 통역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4.1. 일화


여하튼 사생활 및 사고방식이 꽤나 독특했던 듯하며, 여러가지 일화나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제일의 저술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다만 19세기 독일 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대 몰트케와 비교한다면 밀리기는 한다.
  • 젊은 시절 늪에 친구가 빠졌는데 구해줄 자신이 없자 빠진 친구를 구해주지 않고 총을 친구에게 겨누고 "너를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없이 죽여주겠다"하고 말을 해서 친구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오게 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평소에 너 정말 꼴 보기 싫었지만 내색은 못 하고 있었는데 이 참에 여기서 뒈져라!"라며 도발했다는 판본도 있다. 결국 이 말을 듣고 잔뜩 빡친 친구는 겨우 빠져나오고 나서 "구해주지는 못할 망정 나더러 죽으란 거냐!"라며 비스마르크를 두들겨팼더니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사죄하면서 말하길, "날 용서하게, 내가 겨눈건 자네의 포기하는 마음이네"라고 하자 친구가 그제서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워낙 황당한 일화라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훈육용으로 지어낸 거짓말[43]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하지만 이 일화는 비스마르크 생전인 1882년에 나온 신문기사에도 이미 언급된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다. 물론 세설신어에 조조와 원소 버전으로 동일한 이야기가 실린 것을 생각해보면 동서고금으로 널리 퍼져있던 교훈적인 민담 내용이 비스마르크의 일화로 각색된 것일 수도 있다.
  • 귀족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때 장인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과 노력을 해 사기친 일화같은 카더라식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던 이신론(理神論.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규칙의 일환으로서만 인정한다)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것이고, 그나마도 33세 때였다. 러시아 대사시절 47세의 나이에도 러시아 대사의 25살난 아내와 연애행각을 벌였다.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대인배라서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해서 꽤나 골치아팠을 것이다.[44]
  • 개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애견이 죽어가는 모습을 비스마르크에게 보이기 싫어 자취를 감추어버린 적이 있다. 개를 비롯해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이런 습성이 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말썽 부리는 줄 알고 개를 야단치려고 찾고 있었던 사실을 몹시 후회한 기록도 있다. 임종시에도 그 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술탄. 그레이트 데인이다. 개를 자기 오른편에 놓고 협상을 하기도 했다. 상대방이 흥분해서 주먹쥔 팔을 휘두르자 개가 주인님을 공격하려는 줄 알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든 일화도 있다.
  • 훈장에 관련된 일화도 유명하다.
>원수 시절, 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사병이 있었다. 원수인 비스마르크가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때 철혈재상이네 웃음을 모르네 하던 걸로 소문이 자자하던 비스마르크가 갑자기 씩 웃으면서 그 사병에게 농담을 했다.
>"내가 자네라면 이 훈장을 집어치우고 돈으로 100마르크를 받길 원하겠네."
>그러자 사병이 질문했다.
>"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
>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이거… 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마르크 밖에 안 될 걸세."
>그러자 그 사병도 즉각 우렁차게 말하길, "그럼 저는 그 훈장과 99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
>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잠깐 멍해있다가 크게 껄껄 웃으면서 사병이 원하던 대로 해주었다고 한다.
단순한 유머 혹은 대담한 병사 개인에 대한 주목을 위한 이야기로 자주 받아들여지지만,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치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지적할 때 언급되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뼈 있는 일화다.[45] 이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탈무드에서 유머로 언급한다. 그런데 공산주의 유머에도 똑같은 일화가 있다.[46]
  • 사랑의 학교에 따르면 은퇴한 후 비스마르크가 몰트케를 만나기 위해 마차를 타고가다 한 소년을 보고 태워줬다. 그 소년은 가난한 연극배우로 홀로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주머니의 돈을 드린 다음 극장으로 가려고 하자 그가 극장에 좀 늦게 가면 어떠냐고 말하자 소년이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냐고 이야기했다. 그 소년의 모습에 감동 받은 그는 극장으로 찾아가 화환을 보내 경의를 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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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곳인 프리드리스루흐는 현재 당시 철도역 건물을 개조한 비스마르크 박물관이 있다. 비스마르크의 상징이 되는 레인코트, 베르사유 독일 황제 선포식 그림, 훈장 등 엄청난 레어템들이 가득하다. 다만 찾아가기는 조금 껄끄러운데, 함부르크에서 S반(전철 격)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역 다음 역(2km 상당)에 있다는게 문제. 이 구간(즉 한 정거장 구간)을 걸어가든가 아니면 2시간마다 한 번씩 오는 차 시간 맞춰서 맞는 승강장에서 기다려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돈을 내야 하지만 말 그대로 한 정거장 구간에 열차표 검사는 거의 하지 않으므로 돈은 들지 않는다. 역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 입장료는 저렴한 편이다. 비스마르크와 아내의 석관이 안치된 영묘도 근처에 위치하며, 찾아간다면 참배도 할 수 있을 듯.
  • 한편 쇤하우젠(Schönhausen, 작센-안할트 주)에 있던 비스마르크 생가는 1700년경 비스마르크의 조상이 짓고 비스마르크가 태어난 쇤하우젠 1성(Schönhausen I)[47]과 70회 생일 선물로 받은 쇤하우젠 2성(Schönhausen II)이 있었는데, 하필 쇤하우젠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민주공화국에 들어가면서 1958년에 "프로이센 융커와 잔재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쇤하우젠 1성을 파괴해 버려 이제는 부속 건물밖에 없다.
  • 당시 한반도는 조선 말기로 비스마르크는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실제 사망년도도 1898년으로 같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흥선대원군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고, 흥선대원군이 비스마르크보다 5개월 정도 먼저 죽었다. 그러나 사상이 크게 다르다보니 둘이 잘 비교되지는 않는 편이다.
동시기 청나라에서 활동한 (8년 늦게 태어나 3년 늦게 죽은) 이홍장과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둘은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 1896년 서로 만나기도 했다. # 면담 내용을 수록한 동아일보 기사 둘 모두 '제국'을 몸으로 보여주는 듯한 거구가 인상적이다.
  • 가끔 비스마르크 때의 독일을 제2제국, 히틀러 때의 독일을 제3제국이라 해서 비스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에 가담한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20세기 되기 전에 사망했다. '비스마르크 체제' 항목에 설명되어 있지만,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평화와 세력 균형을 꾀했던 인물이다. 만일 비스마르크가 살아있었다면, 가담은 커녕 극구 반대했을 일.
  • 악마의 사전에 따르면 한번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주도인 비즈마크(Bismarck)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독일계 미국인이 이 주에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도시 자체는 전형적인 행정 중심 도시로, 노스 다코타 주 안에서는 파고(Fargo)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 그러나 인구 적기로 유명한 노스 다코타답게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고 해 봤자 광역권 다 합쳐서 약 12만 명밖에 안 된다.
  • 아돌프 히틀러 연간에 나온 2부작 영화에는 유태계 정치인들의 마수 때문에 물러나고 독일은 또다른 제국을 세워야 한다고 고뇌하는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 2012년 2월 비스마르크의 육성이 발굴되었다. 1957년에 발견된 저장 장치가 있었는데 별 생각없이 방치했다가 2014년부터 미국 에디슨 연구소가 혹시 에디슨이 맨 처음 녹음한 동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 분석해보니 123년 전(1889년) 비스마르크가 한 연설이 녹음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것. 원래 목표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꽤 큰 성과다. 참조 링크.
  • 1945년 당시 미 육군청이 제작한 군사교육용 영상물('Your Job In Germany,' 1945)에서는 총리(Chancellor)가 아닌 '총통(Fuhrer)'으로 왜곡당했다. 본 영상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오직 '철과 피'만을 외치며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침략한 호전적인 전쟁광으로 그려져있는데, 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선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상들이 다 그렇듯 정확한 역사적 분석은 배제한 채 비스마르크를 전형적인 전쟁광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예 빌헬름 2세[48], 심지어는 진짜 '총통'과 동일선상에 놓였다.

5.1. 숫자 3과의 연관성?


대중서적에서 막 갖다 붙인 느낌은 있으나 호사가들 사이에선 이런 이야기도 있다.
  • 학창 시절 3번 전학했다.
  • 3국 대사로 일했다.(프랑크푸르트 독일 연방의회는 외국으로 치기 어렵고, 파리 대사는 임명되자마자 베를린 복귀라 치기 미묘)
  • 3번의 전쟁을 치렀다.
  • 3마리의 말을 잃었다.
  • 3번의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 3국 동맹을 결성했다.
  • 쇤하우젠은 비스마르크 가문의 다른 분파 (브리트리)가문[49]과 구별하느라 쓴 것이고 지금은 압도적으로 유명하니 별 쓸모가 없다. 라우엔부르크(Herzog zu Lauenburg)는 작위명인데 빌헬름 2세에게 쫓겨나면서 받은 거라 거절하고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쓴 적 없다.
  • 작위가 3개(백작, 후작, )였다. 역시 앞서 서술한대로 빌헬름 2세에게 받은 라우엔부르크 공작(Herzog zu Lauenburg)은 악감정 때문인지 죽을 때까지 쓰지 않았다. 대신 빌헬름 1세에 수여받은 후작 작위(Fürst von Bismarck)만 썼으며 석관에 새겨진 글귀까지 이 후작 작위를 사용했다.
  • 암살 기도가 3번 있었다.
  • 3번 사임했다.
  • 자식이 3명이었다.
  • 참나무 잎 3개와 세잎 클로버가 뒤엉킨 문장을 달고 다녔다.

6. 어록


"비록 군비가 우리의 빈약한 몸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몸에 지니는 정열을 지녀야 야 할 것이며, 또한 감히 그와 같이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인 것입니다. 지금의 대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연설 전문

"모든 군인과 정치가들은 전쟁을 가볍게 여겨서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음악이란 사랑처럼 무상으로 주어져야 한다."

"우리 독일인은 신을 두려워할 뿐,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국회에서의 연설 중. 매우 호전적인 발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평화를 촉구하며 한 발언이다.[50]

"그리고 우리가 자유를 사랑하고 가꾸는 것, 그것이 정말 신을 경외하는 것이다." - 위의 연설에 이어서. 연설의 핵심이지만 앞의 자극적인 발언에 묻혔다.

"겸손은 훌륭한 미덕이지만 정치가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51]

"황제께서는 매일같이 생일상을 받으려 하신다." - 빌헬름 2세에 대해 탄식하며

"미국이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52]

"일을 할 때는 절제와 도덕성이 중요하며 특히 먹는 것과 술을 멀리해야 합니다." - 1889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녹음.

[53]

- 비스마르크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이 말을 했다는 주장은 1930년대에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비슷한 논지의 말이 실린 최초의 문헌은 1869년 3월 29일자 The Daily Cleveland Herald에 실린, 미국의 시인 겸 변호사인 존 고드프리 색스(John Godfrey Saxe)[54]

의 기고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Wikiquote 링크



7. 둘러보기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비스마르크'가 되지만, 오랫동안 '비스마르크'로 알려졌기에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 버질 판데이크를 '판데이크'가 아닌 '데이크'라고 부르는 것(표준 아님)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2] 비스마르크는 Fürst von Bismarck 작위Herzog von Lauenburg 작위를 모두 보유하고 있었으나 후자의 경우 빌헬름 2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은퇴할 때 보상으로 받은 작위였기에 정작 본인은 공식석상에선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3] IMDb[4] Eiserner는 철을 뜻하는 단어지만 한, 중, 일에서는 주로 철혈재상으로 의역된다.[5] 현재 작센안할트 주.[6] 이 토지는 비스마르크 지지자들에 의해 70세 기념 선물로 반환된다.[7] 외증조부가 자유주의자여서 여러 불이익을 당했으나, 스웨덴 공사 시절 나폴레옹 전쟁으로 다른 직원들이 모두 도주하는 바람에 20대에 스웨덴 대사가 되었다.[8] 그래도 자식들과의 관계는 우호했다.[9] 가족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10] 이유는 어머니 빌헬미나가 놀러다니기 위해서였다.[11] 당시 대학의 도시라 칭해지던 하이델베르크로 가지 않은 것은 오토의 어머니가 '얘 성격에 거길 보내면 큰일나겠다'싶어 그랬다고 한다.[12] 한번은 친구들이 오토를 빼놓고 파티를 열였는데, 이를 알고서는 잠긴 문을 총으로 쏴서 열어 결국 파티에 참가했다.[13] 총 25번의 결투를 했다.[14] 2년 후 프로이센 당국으로부터 반정부 단체로 지정 받아 가입자들에게 공직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정적들에게 이 일로 공격을 받았었다.[15] 일주일간 벼락치기로 공부했는데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16] 당시 관습상 법관이 되려면 서기를 거쳐야 했다.[17] 말이 시험이지 연줄 닿는 고위 공직자가 써오란 논문 몇개 써오는게 전부였다. 또한 이때 오토가 쓴 논문의 내용은 지극히 평범했다고 한다.[18] 그의 아버지가 매우 유명한 교수였다.[19] 기숙학교 시절에는 체조와 체육을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의 교육과정에서는 체육 과목을 매우 중요시했으나 비스마르크에게는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20] 옛 상관 포츠담 연대장에게 이를 알리자 연대장은 국왕의 진압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고 떨어진다고 해도 농부들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했다. 비스마르크도 자신의 계획이 허망함을 알고 포기했다.[21] 비스마르크의 베프인 알브레히트 폰 론(Albrecht von Roon) 장군이 국왕의 수행 무관이었다. 폰 론 장군은 보불전쟁 당시 국방장관으로도 활약한다.[22] 현역 복무 후 4년간 예비군. 예비군 제대 후엔 란트베어(지역방위군)으로 5년간 편성됨.[23] 의회 초창기라 제도적 미비 탓도 있었다.[24] 이 그림 중에서 빌헬름 1세의 위치는 단상 위에서 얼굴이 잘 보이는 인물들 중 원형탈모 백발에 카이저 콧수염을 가진 인물이다.[25] 마르크스가 환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무지하게 까댔던 사람인데 라살을 진정한 폴란드 유대인이라며 칭찬했다. 폴란드 유대인은 마르크스曰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족속이랜다. 마르크스는 서부 독일 트리어 출신에 아버지대에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해서 자신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26] 애초에 프랑스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를 털길 바랐기 때문에 반대편에 붙을 일은 없었다.[27] 19세기에 와서는 이 지역이 산업, 자원적으로 알짜기도 했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 이 지역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28] 이 부분이 더 궁금하면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유럽의 영토분쟁과 역사분쟁"을 참조.[29]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을 했던 비스마르크 본인이 베를린 회의에서 중재자 위치를 고수함으로 인해 러시아의 대독감정이 엄청나게 악화된다[30] 앞선 19세기 초반 메테르니히 체제의 사례도 있으니 유일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있지만, 빈 체제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31] 훗날 히틀러도 이를 반영해 2차대전 초기에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초반의 성공에 도취되어 소련까지 공격해 양면전쟁을 자초했고, 결과는 패망으로 이어졌다.[32] 다만 비스마르크 본인도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가 독일에 악감정을 품게 하는데 상당한 책임이 있다. 또한 러시아의 전통적인 수출수단이던 독일로의 곡물수출에 관세를 매겨 이 점에 대해서도 러시아는 상당히 분노했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재상이던 시절에는 본인 능력으로 어떻게든 살살 달래가며 관계를 파탄내지 않을 수 있었지만...[33] 수상이 의회를 대표하고 견제를 받는 시스템이 존재했는데 비스마르크가 없앤 게 아니라, 그런 게 애초에 없었다는 말이다.[34] 이러한 '점진적인 개혁'의 원조는 영국이다.영국은 마그나 카르타, 권리장전, 권리청원 등으로 느리지만 꾸준히 국왕과 귀족들의 권력을 국민들에게 (정확히는 부르주아)에게 분배했고, 그 결과 21세기에도 영국에는 귀족 계층이 존재한다. 반면 프랑스는 절대왕정시기 국민들을 너무나 쥐어짰고 그 대가로 시민혁명이 일어나 수많은 피를 보아야 했다.[35] 이러한 조치들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일본이 1925년에 치안유지법을, 1927년에 의료보험법을 제정하면서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36] 당시의 폴란드인 중에서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은 크라쿠프의 폴란드인들은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을 포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주민들 대다수가 자신들처럼 가톨릭을 믿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대한 악감정과는 별개로 종교적으로는 프로이센 치하나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인들보다 훨씬 자유로웠다.[37] 독일 제국의 선거법이 복잡했기 때문에 득표수와 의석수가 불일치.[38] 함부르크 근교의 프리드리히스루흐(Friedrichsruh)[39] 위치는 함부르크 근교에 있으며,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S반 타고 가야한다.[40] 이 말을 샤를 드골이 한 것으로 흔히들 알고 있으나,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한 것이다.[41] 다만 여기서 문제는 뭐였냐면, 프랑스를 굉장히 왕따 취급했다는 점이다. 보불전쟁 이후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제2제국을 선포한 것이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이었는데, 이것을 보게 된 프랑스인들은 이에 분노하게 되었다. 여기에 후술할 빌헬름 2세의 실책까지 더해지면서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독일에 복수할 명분이 더더욱 강해지고 말았으며, 결국 진짜로 복수가 성사되어버렸다.[42] 다만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난 헤레로족 학살은 비스마르크가 죽은 후에 일어났다.[43] 일례로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린다거나 하는 등의 엄격한 교육을 미화하는 예문들.[44] 러시아 대사가 국익을 위해 참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 중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거물급 친러 외교관이므로 그가 프로이센의 외교 정책을 주도하게 된다면 친러 정책을 폈을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45] 다만 나치 독일의 황금금강석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처럼 각종 보석과 귀금속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훈장은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 외에도 ‘물질적인’ 가치 역시 인정되어 높은 값이 매겨질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저 훈장 역시 나치 독일이 무너진 현재로써는 물질적인 가치로 더 인정을 받을 것이다.[46] 사실 공산주의 유머와는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데, 그쪽에선 훈장을 주는 정치위원이 다른 선택지로 상금을 제시하고 거기에 훈장을 받는 사병이 훈장의 값을 묻자 정치위원이 화내면서 값을 말해주는 것, 마지막에 그 사병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정황상 훈장이나 상금은 고사하고 징계를 받았을 확률이 높다) 등의 차이점이 있다.[47] 자란 곳은 가족의 다른 영지인 포메른의 크니프하우젠(현 폴란드 땅)[48] 이 사람도 어디까지나 센 척하려고 호전적인 발언을 한 거고, 실제로는 전쟁광과 거리가 먼 유약한 성격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49] 오토 폰 비스마르크 보다 먼저 정치인으로 활동한 먼 친척이 있다. 브리트리의 비스마르크는 앞서 언급한 가문의 영토의 큰 부분을 소유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쉰하우젠의 비스마르크가 같은 정치인인 브리트리의 비스마르크와 관계가 소원했다고 추측하고 있다.[50] 하지만 강경론자는 물론이고, 언론까지 다 호전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이고 인용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는 이 발언을 한 걸 후회했다.[51] 이홍장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52] 비스마르크는 잔뼈가 굵은 외교관 출신인만큼 미국의 잠재력에 대해서 꿰뜷어본 것으로 보인다. [53] 현대에 와서는 비교적 위생적인 가공 과정과 원료로 만들고, 특히 이 분야의 본진인 독일조차도 소시지를 만들 때는 엄격하게 위생 규정을 지키도록 하기에 큰 염려 없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소시지 공장과 거기에 쓰이는 고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소시지 항목 참조.[54] '장님과 코끼리' 이야기의 창작자로 유명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