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치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56위 '''

'''57위 십방숙후 옹치'''

'''58위 백지정후 허온'''
雍齒
? ~ 기원전 192년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중국 진(秦)나라 말기부터 전한 초기 인물로 패군 사람이다.

2. 생애


아주 마이너한 인물이지만 한고조 유방을 엿먹이고도 오히려 나중에 열후로 봉해진 일화가 유명하다.[1] 유방과 동향 사람으로 호족 및 유력자 출신이다. 왕릉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방과는 사이가 나빴다. 이 탓에 왕릉까지 봉작을 뒤늦게 받아야 했다고 한다. 진나라 2세 황제 원년(서기기원전 209년), 유방이 거병하여 풍읍과 패현을 기반으로 삼고 이듬해에 옹치에게 풍읍을 맡겼다. 그러나 옹치는 자신은 호족 출신인데 서민 출신이자 무뢰배였던 유방을 멸시하여 위나라 왕 위구에게 풍읍을 바치고 항복 해버렸다. 패현이 남아있긴 했지만 고향 사람들에게 배반당해 어처구니 없이 땅을 잃은 유방은 홧병으로 잠시 쓰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유방은 오히려 여러 성을 함락시켜서 세를 불리다가[2] 나중에는 항량의 휘하에 들어가 받은 군대까지 데리고 와 풍읍을 공격했고, 위나라로 도망간 옹치는 초한전쟁 중 어느샌가 유방에게 항복하여서 공로를 세웠다. 유방은 옹치가 여전히 미웠지만 세운 공을 생각해서 해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후 공신들을 열후에 봉했는데 특히 공로가 큰 20명을 열후에 봉했다. 그러나 공적 다툼이 결론나지 않아 봉작을 내리지 못했는데 봉작이 내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제장들 사이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음을 장량이 알았다. 장량은 유방과 상담하여 유방이 특히 한을 품기로 유명한 자를 열후에 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도록 말했다. 이에 고조는 옹치를 십방후에 봉하고 봉읍으로 2천 5백 호를 내렸는데 제장들은 유방을 배신하고 골탕먹였던 옹치가 후에 봉해진 것을 보고 "저런 놈도 상을 받는데 우리(가 상 받을) 차례는 언젠가 틀림없이 오겠구나" 하며 안도했다.[3] 기원전 192년에 사망했고, 숙후(肅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옹거록(雍鉅鹿)이 작위를 이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유배지로 받았던 촉 지역의 땅을 골라서 건네준 부분에서 유방의 마지막 뒤끝이 엿보이기도 한다.(...) 옹치가 봉지에 부임했다는 언급은 없으므로[4] 세금만 받으면서 살았다면 아주 나쁜 건 아니었겠지만.
옹치의 후손으로 삼국시대 유비 사후에 익주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옹개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옹개는 자기 선조처럼 모시던 주군을 배반하고 남에게 투항했는데,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 정작 같이 반란을 일으켜도 보상을 받은건 옹개가 아니라 맹획이였다.

3. 대중매체에서


옹치는 유방을 배신한 적이 있고 유방이 직접 가장 싫어하는 신하라고 말했던 사람이라 창작물에서 옹치는 유방과 앙숙인것으로 묘사된다.
초한전기에서는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에서 유비 역을 맡은 우용이 분하였다.한국 더빙판 성우는 조규준.
유방네 사수정의 이웃인 동악정 사람으로 그곳 왈패들의 우두머리 격. 한고제 주변 인물들이 대부분 꼬질꼬질하게 생기긴 했지만, 옹치는 특히나 얼굴이 시커멓기에 가장 더럽게 보인다(...) 유방과 물길을 두고 우격다짐을 벌이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5] 이때는 유방의 꾀에 넘어가 관아에 끌려갔고 이후 유방이 여산 공사를 위해 인부들을 이끌고 떠날때 꽁꽁묶여서 등장한다.
유방이 거병한 후 따르긴 하는데 성질이 급하고 온갖 트러블에 다 말려드는데다 수시로 유방을 인정 못한다며 툴툴거려 유방의 아우들과는 앙숙지간. 과부를 겁탈해 마을사람들의 고발로 아예 목이 달아날 뻔했지만 과부가 애걸복걸해 사실을 겁탈이 아니라 원해서 한거라는게 드러나 사형은 면하고 채찍형만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래도 패현 공격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서 번쾌와 함께 앞장서서 활약했고, 독단이긴 했지만 복병으로 패현을 공격한 진군을 격퇴시키는 등 용맹은 쓸만해서, 한고제는 옹치에게 병사들 훈련담당이나 자신의 부재시 패현을 사수하는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결국 유방이 패현을 비운 사이 옹치는 그를 배신해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이후 유방의 가족들에게 해코지를 하려다 심이기에게 배신당해 사로잡혔는데 유방의 선처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자신을 살려준것에 감사하지만 결국 후회하게 될거라는 말을 남기고 퇴장.
왜 배신했냐는 유방의 물음에 '주군소리가 듣고 싶었다'라고 답했다. 이 일화는 영포의 일화에서 빌려온 듯 하다. 영포는 왜 반역했냐는 유방의 물음에 '제(帝), 즉 황제가 되고싶었다'라고 심플하게 답했다. 이때 유방이 '어이구 그렇게 주공이 되고 싶으셧세요?' 하면서 큰절을 올리는 인성질을 시전한다(...)
이후 홍문연 때 초군에 들어간 것으로 재등장. 연회자리에서 빠져 나온 유방에게 조무상이 이간질을 했다는 걸 알려주고 과거에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초군 진영을 빠져 나게게 도와준다. 한번 분풀이로 무릎을 꿇으라고 시키긴 했지만. 차림도 그렇고, 조무상이 배신할때 항우에게 바친 증거도 챙겨나올 정도면 병졸도 아니고 나름 지위가 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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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유방전에서 우군, 적으로 등장한다. 병과는 적병. 능력치는 무력 85, 지력 74, 통솔 55, 민첩 68, 행운 84. 성격은 보통.
망탕산에서 산적 질을 하다가 성 축조를 위한 부역자들을 이끌고 가는 유방을 습격했지만 패해서 번쾌와 단기접전에서 패하고 붙잡힌다. 옹치와의 싸움으로 일꾼을 데려갈 수 없게 된 유방이 산적이 되자 옹치는 어쩔 수 없이 유방 일행과 동행한다.
유방이 패현을 점령하고 거병하면서 유방이 풍읍을 맡겼지만 옹치는 위구의 설득으로 유방을 배신했으며, 유방이 항량의 지원을 받아 풍읍을 공격하면서 사로잡혔다가 유방을 배신한 이유에 대해 유방이 욕을 너무 많이 한 것, 강한 세력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 유방에게 주공 소리 듣고 싶었다는 것 등을 말하자 유방이 납득해 죽이지는 않고 추방하는 처벌만 내리기로 해서 풍읍을 떠난다.
초군으로 있다가 고릉 전투에서 계포와 함께 고릉성의 북문을 공격했다가 한군에게 붙잡힌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는 유방의 거병 초창기부터 등장한다. 성우는 남도형.[6]
거병 이후 풍읍을 위나라에게 바치고, 항량의 군사를 받고 난 뒤 다시 항복한다.(첫번째 배신) 그 후 등장이 없다가 팽성대전에서 유방을 추격하는 초나라군 장수로 등장한다.(두번째 배신) 마지막으로 광무 대치 시점에서 왕릉 과의 연으로 다시 한에 귀순한다.(마지막 배신)
이후 한나라 건국 후 장량의 계책으로 제후직으로 받는 것으로 더 이상의 등장은 없다.
[1] 물론 이것은 휘하 공신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장량의 계책이었다.[2] 옹치의 배신 직후에 가까운 곳에서 거병한 사람에게서 군사를 빌리려고 할 때 장한측의 별동대가 진승을 쫓다가 초나라로 진입하자 이걸 쳐서 이긴 다음 빼앗은 점령지의 사람들을 징발해서 군대를 늘렸고, 이러던 와중에 장량을 만났다.[3] 과거 진문공이 자기 통수 쳤던 두수(頭須)를 용서해서 같은 이득을 취한 적이 있었다. 비범하게도 이 두수라는 자는 자기가 직접 '''저를 용서하지면 정치적으로 이득이 있을 겁니다''' 라면서 딜을 걸었다(...)[4] 장량, 진평, 역기 등 봉지를 받고도 끝까지 장안에서 지낸 인물들을 보면 주어진 영토를 직접 다스리지 않는 경우도 많았던 듯하다.[5] 이 장면은 감독이 적당히 시눕시스만 알려주고 연기는 전적으로 배우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다들 연기력이 장난이 아니라서 정말 왈패들 다툼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코믹한 장면이 연출되었다.[6] 후속작에서 후손인 옹개도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