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결렬
영어: Sino-Soviet Split
중국어: 中苏交恶
러시아어: Советско-китайский раско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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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마오쩌둥이 농민을 상징하는 낫을, 흐루쇼프가 노동자를 상징하는 망치를 서로 들고 대립하고 있다.
형제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역사적 앙금, 사상적, 영토적 분쟁으로 인하여 1950년대 말기 동맹관계를 청산하고 준적대관계로 돌아선 일을 말한다.
양국간 불화는 1969년의 중국-소련 국경분쟁만 알려져 있지만, 중공 정권이 수립되기도 전인 1930년대에 중국 혁명에 관한 마오쩌둥과 코민테른(즉, 이오시프 스탈린)의 견해 차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깊은 것이었다. 즉 국경분쟁은 그냥 구실일 뿐이고,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해석에 관한 문제가 그 뿌리였다. 그러므로 이미 중공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당시 중국과 소련의 결렬은 이미 잠재적으로 그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올라간다면 소련군이 양차대전 전간기 중화민국군을[1] 개작살낸 봉소전쟁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도 껴있는 나선정벌도 포함될 수 있다. 다만 이 때는 아직까지 서로 문화적, 사상적으로 충돌하기보단 일반적인 국경분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명, 청나라 때부터 이미 몇 번의 충돌이 있던 만큼 두 국가가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 공산당은 창립 이후부터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으며 당 노선을 정했다. 이런 배경으로 쑨원과 소련 외교관 요페의 회담 끝에 소련은 중국 국민당을 원조하고, 국민당과 소련이 함께 반제국주의 노선을 펼치기로 함에 따라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원이 개별적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는 방법으로 일단 국민당이 군벌을 물리치고 중국에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을 돕기로 했다. 이에 따라 소련의 원조를 받은 국민당군은 광둥성에서 출발하는 북벌(국민당의 1차 북벌)을 벌여 각지의 군벌을 격파하고 상하이까지 함락시키게 된다.
하지만 1927년 3월 상하이를 점령하고 나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었고,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공산당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고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국공합작은 붕괴되고 전체 공산당원의 80%가 처형되면서 국공 양당은 원수지간이 된다.
공산당은 이에 따라 복수를 위해 소련식 전략을 추종하여 봉기하지만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 앞에 모두 진압당하고, 소련식 전략 대신 "중국 실정에 맞는 혁명 전략"을 추구하는 마오쩌둥이 특유의 게릴라 전법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또다시 마오쩌둥이 구축한 해방구에 소련식 전략을 추종하는 소련 유학파 중국 공산당원(소위 "28인의 볼셰비키")를 내보내고, 여기에 전략지도를 위해 프룬제 군사대학을 나온 독일인 오토 브라운까지 함께 보내 마오쩌둥의 지휘권을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은 다시 실패로 돌아갔고 중국 공산당은 광서성에서 중국 대륙을 시계방향으로 반바퀴 돌아 산시성까지 도피하는 대장정을 벌이게 되는데, 이 와중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렇게 경쟁자들의 삽질로 중국 공산당 내에서 신화적인 위치가 된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상을 중국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확립하고 점점 소련의 입김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 옅어지게 된다.
하지만 소련이나 스탈린의 권위는 마오쩌둥이라도 쉽게 격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에도 외교적으로는 소련의 입장을 충실히 지지한다(물론 중공정권 수립 후 소련이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긴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집권 후 스탈린을 격하할 뿐만 아니라 서방과의 화해를 모색하자 아직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하게 받고 있던 마오쩌둥 및 중국 지도부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점점 중소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2]
중국이 소련에 실망하게 된 첫번째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스탈린은 원래부터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3]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중국측에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끝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북한이 멸망할 것을 우려한 중공은 빈약한 무장임에도 막강한 병력 수를 앞세워서 무지막지하게 갈려나가며 버텼지만, 정작 중국군의 참전을 부추긴 소련의 지원은 겨우 공군뿐, 그것도 평양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에만 공습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출격했으며, 그 이남에서 제공권 없이 싸우는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한반도에 신경쓰느라 양안통일이 물건너 간 것은 덤이다. 이 때문에 중국 지도부는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인 소련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미군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MiG-15와 같은 고가무기나 장비[4] 를 대량으로 구입해서 참전했지만, 소련은 우방국의 우대 가격이라고 중국 측에 사기를 치고는 제3세계 국가에 제공하는 원조 가격보다도 훨씬 비싸게 팔아먹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지도부는 격노했지만, 이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산권에서 소련에 필적하는 국력과 역량을 지닌 유일한 국가였던 중공은 동유럽과는 달리 순순히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을 수가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중국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청나라 강희제 시절의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영토 10배나 되는 엄청난 땅을 빼앗아갔다. 청나라 말의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서방과 중국을 중재해주는 대가로 그간의 숙원이던 부동항의 최적지인 연해주를 손에 넣었고, 뒤이어 만주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만 소련 성립 직후 한동안은 정국이 혼란스러웠기에 더는 영토 확장을 할 겨를이 없었으며, 이후 중국까지 공산화된 뒤 양국간의 교류와 협력이 더 활발해지자 중국 측도 그동안 영토를 억울하게 강탈당했다는 감정을 일단 접어두었으나 이후 양국 관계가 나빠지면서 이는 반소 정서와 함께 수면으로 다시 떠올랐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를 시작한 1955년부터 양국의 긴장은 높아지더니, 1958-1959년부터는 노골적으로 양국이 대립했다. 특히 흐루쇼프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자(당시 중국은 미국에 의해 해상진출이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측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1950년대의 미국의 정책은 중국을 어떻게든 봉쇄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국제적 고립을 염려하게 되면서 소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5][6]
중국은 1959년 중순부터 대약진 운동에서 크게 실패하여 식량이 부족했고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는데, 소련은 이런 사정을 잘 몰랐고,[7] 식량으로 상환하는 기술 라이선스비를 독촉했다. 이런 가운데 소련은 특히 라이선스 협정에 포함되어 있었던 핵무기나 탄도탄의 핵심 기술은 알려주지 않았다. 또한 이 밖의 여러 사업(전투기, 잠수함, 구축함 등)에서도 소련은 설계도만 달랑 주고 핵심 노하우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합작사업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을 통해 마오쩌둥에 모두 보고되었고, 마오쩌둥은 소련의 불성실한 기술 이전에 크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도 두 대국은 번번히 견해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대체로 중국의 공식 이념이었던 마오쩌둥 사상(마오이즘)은 공산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주관적인)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반면, 스탈린주의[8] 는 기술을 중시했다. 또한 스탈린주의의 관점에서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이고, 농민은 오히려 반동에 가까운 존재[9] 에 불과한 데 비해 마오주의에서는 농민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혁명에 대한 관점도 달랐고,[10] 이것이 양국의 결정적인 이념 차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은 역시 스탈린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진 않았고, 이러한 이념 차이를 양국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에 각자 사정에 맞는 노선을 택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오히려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부정하자 수정주의라고 반발했을 정도.
1959년 흐루쇼프는 중국을 10월 방문했는데, 마오쩌둥과 서로 계속 의견 충돌을 빚었고, 양국은 화해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마오쩌둥(왼쪽)과 흐루쇼프(오른쪽)의 만남. 서로 웃고 있지만, 이 만남 이후 중소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결국 1959년 소련과 중국은 여러 합작사업을 파기하고, 중국은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으며, 특히 1962년에 벌어진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 소련이 인도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양국은 완전히 적대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소련과 중국은 이때부터 1989년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때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였다. 대규모 지상군이 동원된 1969년의 중국-소련 국경분쟁은 물론 그 뒤에도 1970년대 내내 국경선이 불확실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만주 접경에서는 양국 국경수비대 간의 국지전이 수시로 벌어졌다.[11] 하지만 핵전쟁을 우려한 양국 정부가 모두 분쟁을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대신에 소련과 중국은 국제적인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제3세계는 물론 심지어는 제1세계에서까지 경쟁하였다. 이때부터 중국과 소련의 외교에서 이념은 포장지에 불과했고, 자신들과 얼마나 가까운지가 핵심이었다.[12] 특정 국가 혹은 정치세력이 소련과 밀착하면 중국은 거리낌없이 반대쪽을 지지하였다. 예를 들어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부가 CIA의 사주를 받은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자 소련은 곧바로 칠레와 단교했으나 중국은 오히려 반공(!) 노선을 내걸고 좌익세력을 탄압하던 피노체트 군부독재를 지원하였다. 한편 소련은 마오이즘에 호의적이었던 체 게바라를 못마땅히 여겨서 체 게바라가 벌이던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싸늘하게 대했고, 결국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CIA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외에도 앙골라, 나이지리아 등 중국과 소련은 수많은 제3세계 내전에 경쟁적으로 개입해서 서로 다른 정파들에 무기를 지원하였다.[13][14]
또한 중국과 소련의 전폭적 지원으로 북베트남이 베트남 공화국을 전복하고 접수한 이후, 민족주의파와 친소파가 득세하면서 베트남이 친소, 친일노선으로 기울어졌고, 특히 친중정권인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 정권을 전복시키자, 중국은 베트남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 베트남과 한바탕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베트남을 괴롭히기 위해 미국(...)과 함께 크메르 루주를 1980년대 중반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 전까지 이어진 미중 밀월도 바로 중소결렬의 결과이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1950년대 이래 중국을 봉쇄하던 전략을 180도 전환해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의 주도로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었고, 1979년에는 대만과 단교하면서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미중간 군사협력까지 이뤄질 정도로 우호관계가 있었다. 특히 중국의 덩샤오핑 정권은 개혁개방을 위해선 서방세계와의 무역 및 기술협력이 필수라는 판단하에 미중친선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대응해 소련과 그 위성국들은 일본과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갔다.
하지만 1989년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6.4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미국과 서방세계에선 중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여기에 냉전이 종식되고 1991년에는 아예 소련이 무너지면서 반소동맹으로서의 미중군사협력은 목표를 상실하였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무역을 확대하면서도 군사적, 외교적으로는 대결하는 관계가 되었다.
미국은 중국을 자신들의 세계패권을 위협하는 미래의 경쟁자로 인식하고 일본, 한국, 유럽, 호주, 동남아, 인도 등을 끌어모아서 중국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러시아와 군사교류를 확대하면서 상하이 협력 기구를 창설하고 일대일로 정책으로 터키, 이란 같은 유라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대양진출을 위해서 해군력 증강에 힘을 쏟고 있다.
한편 이 중국과 소련의 분열은 주체사상을 통한 북한의 김일성 유일 지도체제 구축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공산주의 세계의 분열과 대립 상황에서 북한 내부에선 체제 강화와 결속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김일성은 이를 이용해서 유일 지도체제를 구축했다.[15]
중국어: 中苏交恶
러시아어: Советско-китайский раско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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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마오쩌둥이 농민을 상징하는 낫을, 흐루쇼프가 노동자를 상징하는 망치를 서로 들고 대립하고 있다.
1. 개요
형제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역사적 앙금, 사상적, 영토적 분쟁으로 인하여 1950년대 말기 동맹관계를 청산하고 준적대관계로 돌아선 일을 말한다.
양국간 불화는 1969년의 중국-소련 국경분쟁만 알려져 있지만, 중공 정권이 수립되기도 전인 1930년대에 중국 혁명에 관한 마오쩌둥과 코민테른(즉, 이오시프 스탈린)의 견해 차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깊은 것이었다. 즉 국경분쟁은 그냥 구실일 뿐이고,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해석에 관한 문제가 그 뿌리였다. 그러므로 이미 중공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당시 중국과 소련의 결렬은 이미 잠재적으로 그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올라간다면 소련군이 양차대전 전간기 중화민국군을[1] 개작살낸 봉소전쟁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도 껴있는 나선정벌도 포함될 수 있다. 다만 이 때는 아직까지 서로 문화적, 사상적으로 충돌하기보단 일반적인 국경분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명, 청나라 때부터 이미 몇 번의 충돌이 있던 만큼 두 국가가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배경
중국 공산당은 창립 이후부터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으며 당 노선을 정했다. 이런 배경으로 쑨원과 소련 외교관 요페의 회담 끝에 소련은 중국 국민당을 원조하고, 국민당과 소련이 함께 반제국주의 노선을 펼치기로 함에 따라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원이 개별적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는 방법으로 일단 국민당이 군벌을 물리치고 중국에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을 돕기로 했다. 이에 따라 소련의 원조를 받은 국민당군은 광둥성에서 출발하는 북벌(국민당의 1차 북벌)을 벌여 각지의 군벌을 격파하고 상하이까지 함락시키게 된다.
하지만 1927년 3월 상하이를 점령하고 나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었고,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공산당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고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국공합작은 붕괴되고 전체 공산당원의 80%가 처형되면서 국공 양당은 원수지간이 된다.
공산당은 이에 따라 복수를 위해 소련식 전략을 추종하여 봉기하지만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 앞에 모두 진압당하고, 소련식 전략 대신 "중국 실정에 맞는 혁명 전략"을 추구하는 마오쩌둥이 특유의 게릴라 전법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또다시 마오쩌둥이 구축한 해방구에 소련식 전략을 추종하는 소련 유학파 중국 공산당원(소위 "28인의 볼셰비키")를 내보내고, 여기에 전략지도를 위해 프룬제 군사대학을 나온 독일인 오토 브라운까지 함께 보내 마오쩌둥의 지휘권을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은 다시 실패로 돌아갔고 중국 공산당은 광서성에서 중국 대륙을 시계방향으로 반바퀴 돌아 산시성까지 도피하는 대장정을 벌이게 되는데, 이 와중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렇게 경쟁자들의 삽질로 중국 공산당 내에서 신화적인 위치가 된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상을 중국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확립하고 점점 소련의 입김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 옅어지게 된다.
하지만 소련이나 스탈린의 권위는 마오쩌둥이라도 쉽게 격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에도 외교적으로는 소련의 입장을 충실히 지지한다(물론 중공정권 수립 후 소련이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긴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집권 후 스탈린을 격하할 뿐만 아니라 서방과의 화해를 모색하자 아직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하게 받고 있던 마오쩌둥 및 중국 지도부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점점 중소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2]
3. 전개
중국이 소련에 실망하게 된 첫번째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스탈린은 원래부터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3]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중국측에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끝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북한이 멸망할 것을 우려한 중공은 빈약한 무장임에도 막강한 병력 수를 앞세워서 무지막지하게 갈려나가며 버텼지만, 정작 중국군의 참전을 부추긴 소련의 지원은 겨우 공군뿐, 그것도 평양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에만 공습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출격했으며, 그 이남에서 제공권 없이 싸우는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한반도에 신경쓰느라 양안통일이 물건너 간 것은 덤이다. 이 때문에 중국 지도부는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인 소련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미군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MiG-15와 같은 고가무기나 장비[4] 를 대량으로 구입해서 참전했지만, 소련은 우방국의 우대 가격이라고 중국 측에 사기를 치고는 제3세계 국가에 제공하는 원조 가격보다도 훨씬 비싸게 팔아먹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지도부는 격노했지만, 이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산권에서 소련에 필적하는 국력과 역량을 지닌 유일한 국가였던 중공은 동유럽과는 달리 순순히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을 수가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중국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청나라 강희제 시절의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영토 10배나 되는 엄청난 땅을 빼앗아갔다. 청나라 말의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서방과 중국을 중재해주는 대가로 그간의 숙원이던 부동항의 최적지인 연해주를 손에 넣었고, 뒤이어 만주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만 소련 성립 직후 한동안은 정국이 혼란스러웠기에 더는 영토 확장을 할 겨를이 없었으며, 이후 중국까지 공산화된 뒤 양국간의 교류와 협력이 더 활발해지자 중국 측도 그동안 영토를 억울하게 강탈당했다는 감정을 일단 접어두었으나 이후 양국 관계가 나빠지면서 이는 반소 정서와 함께 수면으로 다시 떠올랐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를 시작한 1955년부터 양국의 긴장은 높아지더니, 1958-1959년부터는 노골적으로 양국이 대립했다. 특히 흐루쇼프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자(당시 중국은 미국에 의해 해상진출이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측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1950년대의 미국의 정책은 중국을 어떻게든 봉쇄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국제적 고립을 염려하게 되면서 소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5][6]
중국은 1959년 중순부터 대약진 운동에서 크게 실패하여 식량이 부족했고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는데, 소련은 이런 사정을 잘 몰랐고,[7] 식량으로 상환하는 기술 라이선스비를 독촉했다. 이런 가운데 소련은 특히 라이선스 협정에 포함되어 있었던 핵무기나 탄도탄의 핵심 기술은 알려주지 않았다. 또한 이 밖의 여러 사업(전투기, 잠수함, 구축함 등)에서도 소련은 설계도만 달랑 주고 핵심 노하우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합작사업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을 통해 마오쩌둥에 모두 보고되었고, 마오쩌둥은 소련의 불성실한 기술 이전에 크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도 두 대국은 번번히 견해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대체로 중국의 공식 이념이었던 마오쩌둥 사상(마오이즘)은 공산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주관적인)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반면, 스탈린주의[8] 는 기술을 중시했다. 또한 스탈린주의의 관점에서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이고, 농민은 오히려 반동에 가까운 존재[9] 에 불과한 데 비해 마오주의에서는 농민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혁명에 대한 관점도 달랐고,[10] 이것이 양국의 결정적인 이념 차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은 역시 스탈린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진 않았고, 이러한 이념 차이를 양국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에 각자 사정에 맞는 노선을 택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오히려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부정하자 수정주의라고 반발했을 정도.
1959년 흐루쇼프는 중국을 10월 방문했는데, 마오쩌둥과 서로 계속 의견 충돌을 빚었고, 양국은 화해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image]"이렇게 된 거 우리 합작사업 다 파기합시다."
▲ 마오쩌둥(왼쪽)과 흐루쇼프(오른쪽)의 만남. 서로 웃고 있지만, 이 만남 이후 중소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결국 1959년 소련과 중국은 여러 합작사업을 파기하고, 중국은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으며, 특히 1962년에 벌어진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 소련이 인도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양국은 완전히 적대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4. 결과
소련과 중국은 이때부터 1989년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때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였다. 대규모 지상군이 동원된 1969년의 중국-소련 국경분쟁은 물론 그 뒤에도 1970년대 내내 국경선이 불확실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만주 접경에서는 양국 국경수비대 간의 국지전이 수시로 벌어졌다.[11] 하지만 핵전쟁을 우려한 양국 정부가 모두 분쟁을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대신에 소련과 중국은 국제적인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제3세계는 물론 심지어는 제1세계에서까지 경쟁하였다. 이때부터 중국과 소련의 외교에서 이념은 포장지에 불과했고, 자신들과 얼마나 가까운지가 핵심이었다.[12] 특정 국가 혹은 정치세력이 소련과 밀착하면 중국은 거리낌없이 반대쪽을 지지하였다. 예를 들어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부가 CIA의 사주를 받은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자 소련은 곧바로 칠레와 단교했으나 중국은 오히려 반공(!) 노선을 내걸고 좌익세력을 탄압하던 피노체트 군부독재를 지원하였다. 한편 소련은 마오이즘에 호의적이었던 체 게바라를 못마땅히 여겨서 체 게바라가 벌이던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싸늘하게 대했고, 결국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CIA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외에도 앙골라, 나이지리아 등 중국과 소련은 수많은 제3세계 내전에 경쟁적으로 개입해서 서로 다른 정파들에 무기를 지원하였다.[13][14]
또한 중국과 소련의 전폭적 지원으로 북베트남이 베트남 공화국을 전복하고 접수한 이후, 민족주의파와 친소파가 득세하면서 베트남이 친소, 친일노선으로 기울어졌고, 특히 친중정권인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 정권을 전복시키자, 중국은 베트남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 베트남과 한바탕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베트남을 괴롭히기 위해 미국(...)과 함께 크메르 루주를 1980년대 중반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 전까지 이어진 미중 밀월도 바로 중소결렬의 결과이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1950년대 이래 중국을 봉쇄하던 전략을 180도 전환해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의 주도로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었고, 1979년에는 대만과 단교하면서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미중간 군사협력까지 이뤄질 정도로 우호관계가 있었다. 특히 중국의 덩샤오핑 정권은 개혁개방을 위해선 서방세계와의 무역 및 기술협력이 필수라는 판단하에 미중친선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대응해 소련과 그 위성국들은 일본과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갔다.
하지만 1989년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6.4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미국과 서방세계에선 중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여기에 냉전이 종식되고 1991년에는 아예 소련이 무너지면서 반소동맹으로서의 미중군사협력은 목표를 상실하였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무역을 확대하면서도 군사적, 외교적으로는 대결하는 관계가 되었다.
미국은 중국을 자신들의 세계패권을 위협하는 미래의 경쟁자로 인식하고 일본, 한국, 유럽, 호주, 동남아, 인도 등을 끌어모아서 중국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러시아와 군사교류를 확대하면서 상하이 협력 기구를 창설하고 일대일로 정책으로 터키, 이란 같은 유라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대양진출을 위해서 해군력 증강에 힘을 쏟고 있다.
한편 이 중국과 소련의 분열은 주체사상을 통한 북한의 김일성 유일 지도체제 구축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공산주의 세계의 분열과 대립 상황에서 북한 내부에선 체제 강화와 결속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김일성은 이를 이용해서 유일 지도체제를 구축했다.[15]
[1] 당시 중원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통제력이 전부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벌들의 군웅할거 역시 여전했다. 그러나 동북역치로 봉천군벌은 중화민국 소속으로 봐야 한다.[2] 다만 중국이라고 마냥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몇년동안 미군을 등에 업고 싸우던 장제스를 무너트린지 10년도 안된 상황에서, 한국전쟁 등 여러가지 면으로 미국의 압박을 받는 중국이 소련처럼 미국과 화해하자고 달려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3]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땡깡과 징징거림으로 소련이 간신히, 그것도 반신반의하며 겨우겨우 승인하여 개전할 수 있었다. 거기다 중국의 경우 코 앞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북한이 끝까지 몰아붙이나 싶었더니 곧 전황이 뒤집혀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이 중심으로 이루어진 UN군이 압록강까지 광속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충격과 공포를 얻어먹은 반면, 소련은 머나먼 변방 끝자락에 붙은 한반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4] 그렇다고 소련이 고가 무기를 재대로 판 것도 아니다. 6.25 때 UN군은 2차대전 때 사용하던 구형 M4 셔먼 전차와 M26 퍼싱 전차, 냉전 후 등장한 최신형의 M46 전차와 초기형 센츄리온 전차를 주로 사용했는데 당시 소련에는 M4나 M26 같은 구형전차는 물론이고 M46이나 초기형 센츄리온 같은 UN군의 신형 전차마저도 압도할 정도의 성능을 가진 T-54나 IS-3, IS-4 같은 강력한 중전차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전차들을 전혀 판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6.25 때 공산측 전차는 T-34나 IS-2 같은 2차대전 시기 전차들만 등장했다. 전차는 고사하고 소화기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5] 지금이야 중국이 수출로 먹고 살지만 당시에는 정말 소련말고는 믿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동남아 국가들도 아직까지 좌/우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나마 믿을만한 국가라고 하면 북한과 반쪽짜리 북베트남, 그리고 몽골 정도 밖에 없었다. 그런대 소련까지 통수를 치고 중국을 봉쇄한다라고 치면 중국은 이제 공산주의고 나발이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던 시기이다. 이러다보니 소련의 친미정책에 매우 큰 반감과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6] 이마저도 덩샤오핑이 주창한 흑묘백묘론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부분적 도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그 이전에 리처드 닉슨 미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아울러 수교로 인한 결과로 인해 생긴 부산물이었다. 미국이 소련을 주적으로 정하고 중국의 관계를 개선하기로 결정지은것이 중국으로서는 행운이었다.[7] 이는 중국 당국이 체면 세운답시고 정확한 실상을 타국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사실 여기에 대해서 딱히 중국이 할 말은 없다.[8] 흐루쇼프 이래로 스탈린이 격하되고 스탈린식 통치 체제가 완화되기는 하지만 소련의 공식 이념은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스탈린주의였다.[9] 노동자야 공장을 국영화하는 데에 대한 반감이 적지만, 농민으로서는 자기 땅을 뺏어서 나라가 소유하겠다는데 저항이 없을 수가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여촌야도 현상을 겪어봤으니 이런 이론을 주장했으며 실제로 1920년대 말 소련에서 농업 집단화에 대해 농민들이 격렬히 저항하기도 했다.[10] 마오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는 의지주의적인 측면이 강했는데, (물적, 사회적 기반이 아닌)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의지주의에 대해 마르크스 자신이 격한 반감을 드러낸 바 있다. 또한, 농민은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지적 입장(생산수단을 비롯한 사회적 소유관계 자체의 재설정을 바라지 않고, 단지 기존의 소유권 내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경작할 땅을 갖는것을 가장 선호하는 입장)을 보인다는 것 역시 마르크스 자신의 주장이었다.[11] 이 지역의 국경선은 2004년에야 최종확정되었다.[12] 물론 냉전시대 당시에 펼쳤던 미국과 소련의 외교란 바로 그런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잔혹한 독재자라도 자신을 지지하기라도 하면 지원했던 것이 당대 외교의 현실이었다. 미국이 19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을 주도한 수하르토를 지원했던 일이나 소련이 수십만을 학살하고 수백만을 아사시킬 정도로 악독한 인물인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지원했던 일을 보면 이념은 그냥 허울뿐인 껍데기에 가까웠다.[13] 앙골라 내전에서 소련은 좌익 공산주의 단체인 MPLA를, 중국은 미국과 함께 우익 단체인 UNITA를 지원했으며 비아프라 전쟁에서 소련은 나이지리아 정부를 지지하였고, 중국은 비아프라를 지지했다.[14] 특히 이 과정에서 중국은 자신들이 생산한 AK-47 계열 총기를 대규모로 살포했다. 냉전 시대부터 생산된 AK-47 계열이 대략 2억정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중에 제일 많은게 중국산 무단복제품이다. 수천만정 이상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15] 이 시기에 8월 종파사건이 겹치며 북한 내부의 친중/친소 세력은 완전히 실각하였다. 북한은 소련, 중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실리적인 외교를 하여 자주적인 노선을 취했고 미국과 서방국들 말고도 중국이든 소련이든 예외없이 외세로 보면서 간섭을 철저히 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