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

 

'''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동북아역사재단 독도 누락 조작 사건
두음법칙 식민국어학설
1. 개요
2. 비판
2.1. 왜는 5세기 이전 전라도에 있었다?
2.1.1. 문헌 사료의 단장취의
2.1.2. 접(接)에 대한 견강부회
2.1.3. 전방후원분의 미스테리
2.2. 왜는 백제, 신라, 가라의 종주국?
2.3. 왜는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었다?
2.4. 왜는 5세기에 일본으로 이주했다?
2.5. 결론
3. 바깥고리
4. 같이보기


1. 개요


'''검찰의 질문''':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쓰에마쓰 야스카즈의 주장을 국내에서 인정한 학자가 있느냐"

'''이재석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거의 없다. 하지만 간혹 있다. '''전라도에 '왜'라는 표시를 하며 고구려에 진 뒤, 일본으로 갔다는 묘사를 한 책을 봤다'''. 이런 것이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 것이고, 증거로 내라면 낼 생각도 있다. 어떻게 이런 기술을 할 수 있는지 놀랐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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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2000, 41쪽

무섭게도 한국에서 주장되었던 한국 버전의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5세기 이전 왜는 영산강 유역에 있었으며, 백제 · 신라 · 가라의 종주국이었고, 고구려와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다툴 정도로 강력한 나라였다고 한다. 이렇게 잘나가던 왜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깨지고, 그 지원을 받은 내물 마립간에게 깨지면서 버티지 못하고 섬나라로 달아나 지금의 일본이 되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물론 다 거짓주장이다. 일본 우익이 좋아할 만한 주장.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김성호의 비류백제설에 버금가는 해괴한 주장이다. 1990년대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다수 발견되면서 반짝 인기를 끌었지만, 2005년에 전방후원분 오보사건이 터지면서 사장된 학설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주장했던 이덕일은 이후...

2. 비판



2.1. 왜는 5세기 이전 전라도에 있었다?


한반도에 왜인의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지금껏 왜라는 정치세력은 처음부터 일본열도 내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한전과 『후한서』 동이열전 등은 왜인이 처음부터 일본열도에 있었는지 의문을 갖게 해 준다. ……

"남쪽은 왜와 접해있다[南與倭接]"의 접(接)은 육지를 경계로 삼을 때 쓰는 용어지 바다를 경계로 할 때 쓰는 용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

이 기록에 따르면 왜의 위치는 마한과 진한, 변진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다. 따라서 왜는 적어도 이 기록이 말하는 시기인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3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왜가 중국 기록에 바다 건너 존재하는 것으로 나오는 때는 5세기부터다.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1~223쪽


2.1.1. 문헌 사료의 단장취의


여기에서 이덕일의 문헌 인용은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을 뚝 잘라놓은 결과'''다. 애당초 같은 삼국지 안에서도 정작 논의의 당사자를 기록한 '왜인전'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 이웃인 '한전'만을 거론하는 것이 비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도 그러할 것이, 삼국지 왜인전에서는 첫 구절부터 바로 왜국이 바다 한가운데 섬에 있는 족속임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주장과 상충되는 논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雲。

낙랑(樂浪) 바다 안에 왜인이 있으니 나뉘어 100여 국이 되었고, 해마다 와서 조공하였다 한다.

『한서』 지리지 하, 중국어 위키문헌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왜인은 대방(帶方) 동남쪽 큰 바다 안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해 나라를 이루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중국어 위키문헌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㠀爲居, 凡百餘國。

왜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안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해 살고 무릇 100여 국이다.

『후한서』 동이전 왜조, 중국어 위키문헌

게다가 삼국지의 찬자는 참 친절하게도 그 뒤로 대방군에서 왜국까지 가는 경로를 자세히 적어두고 있다. 요약하자면 구야국에서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가면 대마국이 나오고, 다시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가면 일대국이 나오고, 다시 바다를 건너가면 말로국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지리는 오늘날의 현해탄과 일치하는데다, 삼국사기에도 '대마도'가 바다 건너 섬으로 나오니 대마국이 현해탄 위에 있는 섬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삼국지에는 분명히 구야국에서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대마국에 다다른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덕일의 주장에 따라 대마국이 지금의 전라남도 어디쯤이라면 방위상 구야국은 지금의 태안반도 안면도 즈음이 된다. 가야의 위치는 자연히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것이 당연지사(...).

군에서 왜에 이르기까지는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한국을 경유하는데, 남으로 가고 동으로 가서 그 북안의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다다르기까지 7천여 리다. 처음으로 한 바다를 건너서 천여 리를 가는데, 대마국(對馬國)에 이른다. …… 다시 남쪽으로 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는데, 이름을 한해(翰海)라 하고 일대국(一大國)에 이른다. …… 다시 한 바다를 건너서 천여 리를 가는데, 말로국(末盧國)에 이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중국어 위키문헌

왕이 왜인이 대마도(對馬㠀)에 군영을 두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어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 군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하니,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신이 듣기로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渉巨浸]서 남을 정벌하는 것은 만일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삼국사기』 실성이사금 7년 2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단순한 반론에서는 벗어나는 여담이지만, 영산강 유역이 왜인의 땅이었다고 보는 논리의 위험성은 단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삼국지는 이후 말로국에서 동남으로 불미국까지 육로가 700리, 그리고 다시 불미국에서 남쪽으로 왜국들의 우두머리인 야마타이까지 수로가 한 달, 육로가 한 달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말로국에서 불미국까지의 왜국들을 영산강 유역에 비정한다면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야마타이는 지금의 북규슈나 주코쿠 지방 어디쯤이 된다.[2]
즉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규슈에 있는 야마타이국이 한반도 남부에 있는 나라들의 우두머리가 된 셈으로 임나일본부설과 판박이가 된다. 물론 이덕일이 직접적으로 이런 주장을 제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신이 도리어 일본인들에게 악용되기 좋은 논리를 개발해준 것만은 분명하다.

2.1.2. 접(接)에 대한 견강부회


위 인용문에서 이덕일은 접(接)이라는 한자가 육지를 경계로 삼을 때 쓰는 용어지 바다를 경계로 할 때 쓰는 용어는 아니라고 규정하면서 "왜와 한이 접하고 있다"는 기록을 왜가 한반도 안에 있었던 증거라고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다른 사서에서 엄연히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두 나라가 '접한다'고 기록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경기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었던 6~7세기의 고구려와 백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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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至小海, 北至舊夫餘。…… 南接百濟, 北鄰靺鞨。

남으로 소해에 이르고, 북으로 옛 부여에 이른다. …… 남으로 백제와 접하고[南接百濟] 북으로 말갈과 이웃한다.

『북사』 동이전 고려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東極新羅, 北接高句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동으로 신라에 닿고, 북으로 고구려와 접하며[北接高句麗], 서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에서 끝나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북사』 동이전 백제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외에도 삼국유사를 보면 7세기 전반인 636년을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 10년 병신에 자장법사가 서토로 유학을 가니 오대에서 문수보살이 법을 내림에 감응하였다. …… 중국 태화지(太和池)가를 지나는데 홀연히 신인이 나와서 물었다. …… 자장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잇닿고, 남으로 왜인과 접하며[南接倭人], 고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략이 종횡하니 이것이 백성의 걱정입니다."

『삼국유사』 탑상 제4 황룡사구층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위에서 이덕일은 3세기에 삼한의 남쪽에 '접하고' 있던 왜가 5세기에 열도로 이주했다고 주장했지만, 여기에서 보이듯 7세기에도 여전히 왜는 신라의 남쪽에 '접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가야도 이미 죄다 신라에 병탄되었기에 신라의 남쪽이라고 하면 에누리없이 그대로 남해바다다. 왜인들이 무슨 워크래프트의 나가족도 아니고 수중왕국을 세우지는 않았을테니, 바다를 건너 섬에 살아도 접(接)이라 표현했다고 보아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장법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는 말갈이라는 나라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자장법사의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또한 무리가 따른다.

2.1.3. 전방후원분의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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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운, 「한반도 전방후원분과 왜계석실의 분포유형 검토」, 2010, 84쪽

이덕일이 왜인 한반도설의 또 다른 근거로 제기하는 것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들인데, 문제는 5세기 전반에 왜가 이동했다고 본 이덕일의 견해와 달리 이것들 대부분이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반'''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전방후원분이 사라진 뒤에도 왜계 석실분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고 있다.
게다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5세기가 되어야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반해, 일본에서는 이미 야요이 시대부터 전방후원분의 맹아가 나타나기 시작해 4세기 전반에는 유형화되고, 이후 6세기까지 15만 기에 달하는 전방후원분들이 각지에 난립하면서 거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수혈식에서 횡혈식으로 발달했으며, 따라서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횡혈식 석실분은 그 최종형에 불과하다.[이정호,1996,141]
또한 5세기 이전까지 영산강 유역의 토착 묘제였던 주구토광묘~옹관묘는 전방후원분과 아무런 계승관계가 없다.

영산강유역에 왜인의 무덤이 있었다는 소위 '왜인설'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옹관고분이 왜인의 무덤이라는 것이었다.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는 나주 반남면 덕산리 3호분과 대안리 9호분의 분형과 주구의 존재 그리고 하니와 원통류품을 통해 이들 고분(옹관고분)이 '왜인의 무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의 고대사학자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왜인의 근거지가 일본 규슈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 즉 왜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다는 설은 임나일본부설이 점차 힘을 잃어갈 때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과 함께 출현한 것으로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부 국내학자들(이덕일·이희근, 1999)과 매스콤(EBS 8.15 특집프로, 1999)은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되었던 '광개토대왕 비문'과 《삼국사기》 등 일부 문헌을 근거로 4세기 말 경의 반남고분의 주인공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 한반도 내에 자리잡았던 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지극히 즉흥적인 주장이다. …… 당시 일본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곳은 옹관고분의 마지막 단계인 신촌리 9호분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 현재 일본학자들조차도 옹관고분의 주인공을 왜인으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라서 과거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신중한 검토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을 왜와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최성락, 「전방후원형 고분의 성격에 대한 재고」, 2004, 95~96쪽


2.2. 왜는 백제, 신라, 가라의 종주국?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왜는 한반도 정세에 여러 차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 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혼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4~225쪽

「광개토대왕 비문」 기사는 광개토대왕이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 왜군을 물리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 기사는 내물왕의 지원 요청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고구려군에 쫓긴 왜군이 도망간 지역이 임나가라인 점은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당시 임나가라가 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7~228쪽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를 쓰여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왜가 삼국+가야의 종주국이라는 식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이러한 서술은 현대에는 일본 학계에서조차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 주류다. 한국 및 중국 사서와 교차검증도 안 될 뿐더러, 일본서기 안에서조차도 아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문서 참조.

2.3. 왜는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었다?


그 후 영락 14년(404) 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침입한다. 고구려의 전력이 분산된 틈을 타서 왜와 백제가 공격해 온 것이다. 이때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왜·백제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185쪽

광개토대왕이 보낸 군사가 무려 5만에 달하는 것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군사는 보내야 물리칠 수 있었던 강적이 왜였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에 맞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왜국은, 이렇듯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400년에 남하한 고구려군에 타격을 받은 후 전열을 재정비해 404년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선제 공격하다가 또 다시 패배를 당했다. 두 번의 걸친 패배로 왜국의 국력은 약화되지만 여전히 신라왕이 선왕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8~229쪽


2.4. 왜는 5세기에 일본으로 이주했다?


최근의 일본사 연구자들은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정도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 결과다. 이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현해탄을 건너 신라를 공격할 만한 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4~225쪽.

이런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이 약하되어 가던 왜는 5세기 경 일본열도로 이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 무렵부터 일본 나라 지역에 거대한 고분들이 조성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열도로 이주하던 왜는 500년 무렵 그 중심 세력의 대부분이 이주를 마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 소지왕 22년(500) 3월 장봉진을 공격한 왜인을 끝으로 삼국사기는 왜인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8~229쪽

일부 이덕일 옹호세력들은 '이덕일의 주장은 일본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오히려 일본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고 옹호하는데 정작 '왜가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내용은 무시한다. 왜가 일본열도를 지배했으면서 이주했다면 결국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세력이 일본의 선조라는 황당한 주장이 된다.'''

2.5. 결론


이덕일은, 김석형 과 김현구 등이 박살낸 임나일본부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왜가 백제신라까지 지배하며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경쟁하다 밀리니깐 열도로 이주했다는 왜곡을 벌였다.
거기다 부흥 카페에서 확인한 결과 이덕일이 사료장난을 친 것이 나타났다. # 사료에 따르면 왜는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한가운데 섬'에 있었는데 이걸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 처럼' 편집을 했다.'''
그리고 이거 매우 내선일체같은 해석이다. 내선일체에 영향받은 환단고기의 완역을 축하하고 총독부 근무와 황해 은율군수를 지낸 친일파 문정창을 선생이라고 했다. #
참고로 광개토대왕비문을 그대로 해석해 저런 주장을 하는 것과 다르게 김현구는 이렇게 해석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보아서 일본은 직접 고구려와 대립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문 404년 기록에 보이는 왜는 백제가 끌어들였다고 할 수 있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66쪽

백제가 왜를 용병으로 끌어들인 게 아니라, '''왜가 백제와 연합해서 침입'''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영락 14년(404) '''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침입한다.''' 고구려의 전력이 분산된 틈을 타서 왜와 백제가 공격해 온 것이다. 이때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왜·백제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185쪽

그런데 여기서 '''대방'''이란 말도 이상하다. 이덕일은 '한반도에 대방이 있었다'를 식민사관의 내용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다 소우키치는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으며''' 삼한도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했다. - 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역사의 아침, 2009, 211쪽

본인이 식민사관이라 했던 '한반도 내부 대방설'을 정작 자기책에선 아무렇게나 썼다.

3. 바깥고리



4. 같이보기



[1] 이덕일 박사의 김현구 교수 명예훼손 공방 ⑥ 이재석 한성대 교수 향한 이 박사 측 고압적 증인신문 [2] 애당초 삼국지에 기록된 야마타이의 위치 비정이 기나이설과 북규슈설로 나뉘는 것이 '거리를 중시하여 방향을 보정한다'면 지금의 기나이 지방을, '방향을 중시하여 거리를 보정한다'면 지금의 북규슈 지방을 야마타이로 비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반도 남부가 왜인의 땅이었다는 이덕일의 주장을 반영한다면 거리와 방위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서 북규슈 지방이나 주코쿠 지방을 야마타이로 비정할 수 있다![3] 물론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553년 이후, 즉 6세기 중반이다. 중국 역사서에서 이에 대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한반도 상황을 제대로 반영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즉, 『북사』가 편찬될 무렵 중국에선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므로 『북사』의 내용을 근거로 '접(接)'이라는 한자가 바다를 건넌 영토끼리도 사용하는 한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이정호,1996,141] 이정호, 「전방후원형 고분의 연구사 검토」, 1996,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