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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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말기의 장수이다.
2. 생애
성격이 강직하고 병법에 밝았으며, 궁술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159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어사로서 요동에 파견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사르후 전투 대패의 책임이 있는 양호가 해임되어 감옥에 갇힌 후,[2] 웅정필은 양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웅정필은 취임하고 나서 요동 방위 전선에 대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싸우지 않는 것'''이었다. 웅정필의 생각에 지금은 싸우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사실 안 그래도 당시 명군 자체가 쇠퇴현상이 심했는데,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여 사기는 전혀 회복되지 않아 병사들이 만주 팔기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무기와 마필 등도 어지러워 정비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그 위세가 대단하고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 했으므로, 지금 당장 싸우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상황이었다. 최소한 웅정필은 그리 판단했다.
그래서 웅정필은 어지러운 군심을 다독이고 변방을 쥐어짜서 18만의 대군을 만들어낸 다음 각지에 배치하여 연락망을 만들고,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후금군의 작은 공격은 방어력을 이용해서 막아내고 큰 공격은 서로가 바로바로 구원을 올 수 있도록 하였으며, 소규모 유격대를 조직하여 기습 작전을 벌이기도 하고 군사훈련을 계속 시키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누르하치도 명군의 이런 태도에 잔뜩 긴장해서 1년이 넘게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다.
따라서 웅정필은 후금을 저지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통쾌하게 적을 물리치는 싸움을 못하니, 눈에 띄는 전공이랄 것은 없고, 이는 내부에서 공격당할때 책임을 돌릴만한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3] 이를 알고 있었던 웅정필도 자신이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내부에서 흔들어댈 것을 걱정하여 만력제에게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놓고 현장에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만력제가 그 사이에 죽어버렸기 때문에, 쉴드를 쳐줄 사람이 사라졌고 사방에서 웅정필을 마구 쪼아대기 시작했다.
고조(顧慥)와 요종문(姚宗文) 등의 관리들은 웅정필이 도무지 싸우려 들지 않고, 변방에서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한다고 고발했다. 결국 웅정필은 물러나 버렸고, 그 후임으로 원응태(袁應泰)라는 사람이 임명되었다. 원응태는 관리로선 제법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관리로서의 유능함과 장수로서의 유능함은 당연히 전혀 다른 문제였다. 웅정필이 해임되었다는 사실일 알게된 누르하치는 기회를 잡게되었고 바로 명의 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응태는 후금군의 침공에 대응하기 시작했으나 웅정필만큼 군재가 부족한터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패하기 시작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후금군의 공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지고, '''50여개의 요새와 70여개 성이 무너져 내렸다.''' 눈 깜작하는 사이에 요하(遼河) 동쪽에서 명나라의 영역은 거의 사라지고 없어졌던 것이다. 이는 명의 조정에 큰 충격을 준다.
화가 난 내각 대신 우일경이 웅정필을 내각 대신으로 보냈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것이라 말했고, 다급해진 명나라 조정은 웅정필을 다시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왕화정(王化貞)을 요동순무(遼東巡撫)로 기용했는데……이 인사조치가 문제를 일으켰다. 웅정필은 싸우지 않는 것을 전략으로 내세우는 인물인데 비해, 왕화정은 큰 공을 세울 비책을 노리는 성향이었다. 둘은 각자 조화가 되기는 커녕 여러모로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왕화정의 비책이란 당초에 무순에서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던 이영방에게 사람을 보내 내통을 권유하고, 피도(皮島) 즉 가도(椵島)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의 뒤를 치겠다는 이야기를 믿었던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몽골에서 40만 대군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봐도 이건 말이 안 되지만, 이런 헛소리를 깊이 믿었던 왕화정은 이렇게 되면 승리야 뻔한 일이니, 자신이 공을 차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요동순무인 자신은 요동경략인 웅정필의 밑에 있는 처지니, 공을 독점하려면 웅정필과 불화하여 이를 소문을 내야만 자신의 의사로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 거기다 왕화정은 위충현과 친하기도 했기에 이런 점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수비를 중히 여기는 웅정필은 "이것은 꿈과도 같은 소리다."라고 하면서 반대했지만 왕화정은 웅정필이 자신이 세울 공을 시기한다고 믿었기에 별로 중하게 듣지 않았다.
둘의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지, 왕화정이 군대의 명칭을 평요(平遼)군이라고 하자 이 지방에서 오래 근무했던 웅정필은 요동 지역의 遼자를 사용하는게 사람들의 불쾌감을 줄 것을 우려해 동쪽을 평정한다는 평동군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왕화정은 곧바로 성을 내는 판국이었다.
또한 웅정필은 명과 후금 쌍방의 실력과 전력을 분석한 뒤 군사를 삼면으로 나눠 광녕을 막고, 등주, 내주, 천진에 수군을 배치하고, 산해관에 경략을 특설해 세 곳을 통제하는 형태로 가자고 했지만 왕화정은 요하 지역에 전군을 배치, 6만 군대로 일거에 승리를 거두자는 주장만을 고수했다. 이러한 불화는 결국 누르하치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고, 1622년 정월 누르하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서로 진격해 들어갔다.
요서로 접어든 누르하치는 광녕은 일부러 공격하지 않고 전초인 서평을 공격해 서평을 지키던 나일관을 전사시키고 명군 3,000명을 죽였다. 이 소식에 놀란 왕화정은 손득공(孫得功)의 조언에 따라 3만 군대를 그에게 주어 서평을 구원토록 하려고 했는데, 정작 이 손득공이 적과 만나자마자 명군이 패배했다고 소리 지르며 말에 채찍질을 하며 달아났다. 대장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당연히 병사들은 당황하여 제대로 싸움다운 싸움도 못해보고 패배했다. 사실 손득공은 이미 후금 쪽으로 넘어가버린 사람이었다.
손득공은 광녕으로 돌아와 의도적으로 후금군이 가까이 왔다고 하며 성 내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왕화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사무만 보고 있다가, 갑자기 "적이 와서 다급하다. 어서 피해야 한다." 는 소식을 듣자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리며 앉아 있었다. 왕화정에게 이런 말을 한 참장은 다짜고짜 그를 말 위에 태워 서쪽으로 도망보내 버렸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손득공의 인도에 따라 무사히 광녕성에 입성했고, 왕화정을 200여리 추격하다가 그만두었다.
결국 이영방의 내통도, 모문룡의 교란도, 몽골의 천지를 가를 듯한 40만 대군도, 무엇 하나 없었고 패배만 했던 것이다. 왕화정이 개꼴이 돼서 웅정필을 만나자, 웅정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제서야 후회를 한 왕화정이지만 그런다고 무슨 도리가 생길 리가 없었고, 둘은 아무 방법도 없이 산해관으로 들어갔다. 이 일은 고작 20여일 만에 결판이 난 싸움이었고, 요동 전 지역을 완벽하게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왕화정과 웅정필 모두 체포되어 죄를 추궁받았다.'''"6만 군대면 금나라 군을 일거에 무찌르겠다는 사람이 아니오? 그래, 이젠 어찌 할 셈입니까?"'''
굳이 죄를 따지자면 왕화정의 죄가 더욱 컸고, 웅정필은 상관이라 책임도 따라온다는 측면은 있었으나 애시당초 그가 무엇을 해볼 방법이 없었으니 상관이라 해도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위충현 등으로 인해 책임을 혼자 덮어쓰고 참수되었다. 웅정필의 목은 변방의 9곳(遼東, 薊州, 宣府, 太原, 大同, 延綏, 固原, 寧夏, 甘肅)으로 조리돌림을 당했다. 처형이 집행된 것은 1625년의 일이었다. 웅정필은 마지막 절명시를 남겼다.
웅정필은 1629년에 숭정제 시절에 대학사(大學士) 한광(韓爌)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양민공(襄愍公)의 시호를 받았다.'''"이 혼이 다시 살아나길 바랄쏘냐? 절필하고 탄식하니 그 한숨 소리에 날이 밝구나."'''
[1] 현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우한시 장샤(江夏)구.[2] 양호의 처형은 숭정제가 즉위한 해에야 집행되었다.[3] 눈에 확 띄는 공이 있었다면야 그 공을 쉴드로 삼으면 되는데 파비우스의 승리처럼 눈에 띄는 공이 없으니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