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문룡
毛文龍
ᠮᠠᠣ ᠸᡝᠨ ᠯᡠᠩ[1]
(1576년 – 1629년)
1. 개요
명나라 말기의 무장으로 동북 지역과 조선 북부에서 활동하면서 후금에 대항했다. 지상전 병력도 있었으나, 주력은 수군이었기 때문에 해군 사령관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모로 조선과도 관련이 많은 인물로, 정묘호란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이기도 했다.
수군 운용에 뛰어났고 화포의 제작과 포격전에 능한 인물이었으나, 후금 정벌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에 몰두했던 탓에 실제 후금을 상대로 한 전공은 보잘것 없었다. 오히려 그의 사후, 그의 휘하에 있던 부장들이 후금의 뒤를 이은 청나라에 귀순하면서, 청나라는 막강한 수군을 거저 얻게 되었다.[2]
다만, 후술되는 것처럼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기 때문에 이런 이유만으로 그를 졸장이라고 보기에는 논란이 있다.
조선과 조선 서북민들에게 약탈과 협박으로 막대한 피해를 줘서 원망이 많았다.
2. 활동
2.1. 초기 생애
출신지가 어디인지 불명확한데, 1576년 항저우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고, 산시성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으며, 다른 설도 있다. 이처럼 출생지마저 확실치 않을 정도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가 어울렸던 사람들의 수준을 보거나 출세한 후에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은 점을 보면, 보잘것 없는 집안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소시적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600년경에 군인으로 입대한 것으로 보이며, 산해관에서 복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평생을 군인으로 지냈으나 1621년이 되기 전까지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면, 입대 후 20년 동안은 크게 출세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2.2. 조선으로 가다
1621년, 심양과 요양이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을 점령했다. 하지만 후금의 병력이 다시 공격해오자, 7월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에 상륙하였다. 조선에서 철산, 용천, 의주 등 평안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이 무렵 요동에서 도망쳐와 조선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의 패잔병과 난민을 수습하였다. 이들을 조직하여 압록강을 건너 진강의 후금군을 습격하여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621년, 후금의 아민(阿敏)은 모문룡을 치기 위하여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모문룡은 평안도 용천 관아에 있다가 조선인 복장을 하고 도망쳤다.
2.3. 가도에 주둔하다
1622년 광해군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에게 평안도 철산 앞바다인 가도(椵島 또는 皮島)에 주둔하도록 권유하였다.[3] 모문룡은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였으며, 명군과 난민 1만명이 모문룡을 따라서 가도에 머물게 된다. 모문룡은 명으로부터 은자 20만냥을 지원받아 동강진을 유지했지만, 좁은 섬이라 군량이 부족했으므로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여 식량을 징발하였다. 이 식량이 매년 10만석에 달했다. 흉년으로 조선 측의 식량 지원이 여의치 않자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모문룡의 부하들이 약탈을 과도하게 벌이자 평안북도 의주 부윤 이완이 (그 유명하신 충무공의 조카이다.) 그들 가운데 몇몇을 붙잡아 곤장을 쳤으나, 모문룡은 분노하여 "상국의 병사를 때리냐"며 조선 조정에 항의했다. 결국 이완은 벼슬이 강등되었다. 이처럼 모문룡의 군사들이 군기가 좋지 않아, 조선에서는 이들의 전투력을 불신하게 되었다. 약탈이나 하는 오합지졸들이 후금의 정예병과 제대로 싸울 리가 없다는 것이다.
1622년 10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총병을 제수받았고, 1629년에는 좌도독이 되었다.
그러나 공적은 변변치 않았다. 모문룡은 후금과 한 번도 싸우지 않았으면서 18번을 이겼다고 거짓말을 하고, 6명의 적군을 포획하고 나서 6만 명의 목을 얻었다고 명나라 본국에 거짓 보고를 올렸다. 이때 모문룡은 자신의 허위 공적을 날조한 자서전 모대장전(毛大將傳)을 지어서 뿌리며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선에 대한 무례가 심각했는데, 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축하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물이 나체의 여인을 상아에 조각해서 만든 춘의(春意)라는 누드 조각상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런 걸 보냈으니 기겁할 노릇.[4] 춘의를 받아든 권진기는 모문룡이 무례하다고 꾸짖으며 돌려보냈다. 부하 모유견이라는 자는 말을 타고 조선 궁궐에 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모문룡은 가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한다"는 거짓 정보를 지어내서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면서 조선을 협박하였고, 심지어 "모문룡이 조선을 공격하여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모문룡은 자신이 많은 명나라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구실로, 식량과 은자를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지급받았다. 하지만 정작 명나라 난민들에 대한 식량 지원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가도의 명나라 난민들이 기아로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에서는 급히 식량을 추가 지원하였지만, 난민의 규모에 비해서 엄청난 식량이 지원되는데도 굶주림이 발생하는 기묘한 일이라, 모문룡이 식량을 횡령하여 후금에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게다가 모문룡은 자신이 후금과 싸우고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면서, 정작 정묘호란 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가도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1624년 12월 22일, 그의 패악이 어찌나 심했던지 인조가 장만, 남이흥 등과 접견하여 국토 방비 문제 등 여러 문제를 논의하던 중에 모문룡의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특히 도원수 장만의 언사는 다른 이들과 달리 더욱 과격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1627년 4월 17일에는 모문룡의 군사들이 용골 산성의 첩서를 가져가던 사람을 살해했으며, 안융창에 있던 난민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마구 죽였다. 평안도 정주에 피난 갔던 조선 백성 1만여명을 공격하였으며, 이들은 물에 뛰어들어 3백여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살해당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급히 병력을 보내 모문룡을 막도록 했고, 충돌이 벌어졌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전략)
상(上)이 이르기를,
“1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있어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1달 양식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힘을 다해 꾸려나가야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놔둘 수 있겠는가.”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서쪽의 근심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는데, 신(臣)은 한 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의 일은 어찌할 것입니까. 관서(關西)에 가면 그 쪽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드릴까 하는데, 묘당에서 선처해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독(都督)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우리나라를 침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모병(毛兵 : 모문룡의 병사)이 갈수록 더 침해하고 있는데, 조만간 내지(內地)에서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난동을 부린 뒤에는 격파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승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격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일단 이기고 난 다음에 장차 국가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서관(西關)은 옛적부터 번화하다고 일컬어져 사행(使行)이 오갈 적에 혹 주색(酒色)에 빠지는 등 일대의 고을에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태평시대라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텐데, 더구나 이러한 때이겠습니까. 이번에 남이흥이 내려가게 되었으니 계칙(戒飭)해서 보내는 한편 방백에게도 하유하소서.” (후략)
정묘호란 3개월 뒤인 6월에는 군선 50여 척을 이끌고 평안도 의주로 향했으나, 후금군 기병 20여명을 만나자 모문룡의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군선에 올라타서 도망가버렸다.[5]
나중에는 조선에 대한 횡포가 점점 심해져서 인삼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 고관이나 후금에 보내는 뇌물로 쓰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를 접견한 회례관 황호는 “남의 재물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탐하는 장사꾼과 같다.”고 혹평했다. 황호가 “지금 조선도 국고가 탕진되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 줄 수 없다.”라고 거절하자 모문룡은 앙심을 품었다.
1628년 2월 26일, 모문룡은 "내가 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매우 불길한 징조가 있어,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조선의 종묘 사직이 망한다"는 악담을 보냈다.
1628년 10월 17일, 모문룡이 역관 장예충에게 “후금이 나를 유예로 삼으려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유예는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북송 시절, 제남부의 장관을 지냈는데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초토화 되자 금나라가 세운 괴뢰 국가인 제나라의 황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에 인조는 “'''모문룡은 짐승과 다름없다.''' 황제 같은 지존에게도 꺼리는 바가 없는 자이니 예로써 책망할 수 없다. 그의 뜻을 보건대 이미 발호할 기미가 드러났다.”고 탄식했다. 실제로 명나라 천계제가 사망했을 때, 모문룡은 가도에서 이 소식을 듣고도 풍악을 연주하며 주연을 벌였다. 한마디로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조차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11월 22일에는 명나라로 파견되는 조선의 사절단인 동지사 일행이 가진 은과 인삼을 강탈했다.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조공물을 마음대로 빼앗아간 것이다. 급기야 모문룡의 하인 왕학승이 같은 집 종 15명을 거느리고 평양 인근의 군현들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약탈을 하고 심지어 고을 수령을 붙잡아 가두고 모욕하는 짓까지 벌였다.
1629년 3월, 가도에 가서 모문룡의 동정을 살피고 온 특진관 이경직은 “그의 군세가 너무나 피폐해져 있으며 군대 수를 과장하고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면서 명나라에 거짓 보고나 올리고 있습니다. 도망쳐 온 명나라 백성들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와 붙어 있는 것이지,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군율도 엉망이며, 병력과 장비도 전혀 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욕심은 실컷 차리면서 재물과 물자를 약탈하면서도 정작 군기는 개판이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모문룡의 행패는 종말을 맞이하는데 1629년 4월 27일, 원숭환은 모문룡을 산동 반도의 쌍도로 불러서 군사 문제를 논의한다고 하였다. 두려움을 느낀 모문룡은 병선 40여 척에 2만 8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쌍도(雙島)로 출발했다.
1629년 6월 5일, 모문룡은 쌍도에 이미 와 있던 원숭환과 만났다. 그러나 원숭환은 다음날 모문룡을 즉각 체포하고 그의 죄를 질책했다.
그리고 원숭환은 모문룡을 참수하면서 "모문룡이 가도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조선 국왕(인조)의 덕분으로 호사를 누렸는데,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명나라에 수치를 끼쳤으니 내가 황제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모문룡을 제거했다"고 밝혔다. 그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장수가 외부에 있을 때는 감독을 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거부하였고, 있지도 않은 승전 사실을 조작해 허위로 보고하여 감히 황제 폐하를 속였으며, 사사로이 시장을 열어 오랑캐와 내통하였고, 상선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조선 백성들을 마구 죽여 이웃나라에 피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10년 동안 수만 석의 곡식을 받아 가면서도 한 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너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을 살려둬서 무엇에 쓰겠느냐?”
모문룡에 대해서도 따로 편지를 보내 언급했다.
까기는 정말로 시원하게 까고 있다. 조선은 모문룡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2.4. 모문룡 사후
1633년 모문룡 휘하 장수였던 공경, 공유덕, 경중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명나라의 진압을 피하여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명나라 격파에 큰 공을 세워서 후일 삼번의 난의 주역이 된다. 또한 청은 삼전도의 굴욕 이후 조선에 군사를 요구해 조·청 연합군의 '가도 정벌' 작전을 실행해 남아 있던 명군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3. 평가
일반적인 평가는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의 영향력이 극도로 미미했고 도움이 되기는커녕 조선에 민폐만 끼쳐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당히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
3.1. 긍정적 평가
조선에 막대한 민폐를 끼쳤다는 점과, 청나라를 자극해서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는 점, 그리고 그럴 때 청군과 맞서싸우는 게 아니라 가도로 달아남으로써 군사적으로 조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현대 중국에서는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다.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이 잘못인가 글 / 주가웅원숭환(袁崇煥) : 군사 재능이 과대 평가되었는가 글 / 누흔)[6]
이렇게 재평가하는 입장은 대체로 모문룡이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결전을 회피하고 청나라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청군이 공격해 왔을 때 결전을 회피하고 섬에 틀어박힌 것도 군사력을 보존하고 청을 견제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모문룡의 견제가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는가인데, 효과가 있었다는 쪽은 바로 모문룡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영원성을 공격할 때에도 장기전을 벌이지 못하고 일찍 후퇴한 반면, 모문룡이 처형된 이후에는 몽골 쪽으로 장성을 우회해서 북경을 직접 공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작전을 벌일 수 있었다고 본다.[7]
이렇게 보면 원숭환의 죽음은 모문룡의 처형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게 되는데, 북경이 청군의 공격에 직접 노출된 것이 바로 원숭환의 죽음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문룡을 처형한 것은 사형감이지만 원숭환만큼 능력이 뛰어난 자가 없어서 숭정제가 일단 용서했는데, 청군의 북경 공격을 허용함으로써 원숭환의 능력에까지 회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원숭환이 청군을 격퇴했다고는 하지만 단지 적지 깊숙한 곳에서의 기습에 실패한 청군이 물러갔을 뿐이며, 이를 기회로 본 숭정제가 추격을 명령했지만 원숭환은 딱히 이렇다할 전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점 또한 원숭환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 외에도 모문룡이 비록 부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업 수완이 뛰어났고 상업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서 명나라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관점도 있다.[8]
모문룡 처형 이후 청나라에 투항한 모문룡의 부하들이 결과적으로 청의 화포 역량 발전에 영향을 끼쳤고 막강한 수군을 이끌고 투항하여 청이 갑자기 해군력에서도 명과 맞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던 공유덕, 상가희 등은 뒷날 청나라 번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모문룡 처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원숭환의 화포를 쓴 수성 전략은 적군이 강한 공성포로 맞서면 쓸모 없었으니 심각한 문제였다.[9]
3.2. 부정적 평가
위에도 있지만 원숭환은 모문룡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설사 위의 긍정적인 면을 모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모문룡이 조선에 부린 행패는 그야말로 극악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 끝날 때 조선을 돕기는 커녕 오히려 부하들을 보내 청군에 의해 머리를 깎은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다가 명나라 조정에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더구나 조선 서해안가를 중심으로 무역하다가 기분 내키면 약탈을 저지르고 조운선이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도 털었던지라 평안도 사람들은 모문룡을 모강도라 부르며 청나라 군대보다도 더 무서워할 지경이었다.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밖에 안 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 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륙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시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원숭환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나라를 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동맹국이어야 할 조선을 거의 적국으로 돌릴 만한 모문룡의 행패를 더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숭환은 모문룡의 목을 친 다음에 조선에 편지를 보내서 "모문룡이 그간 벌인 행패를 참다 못해서 죽였으니, 이제 양국이 힘을 모아서 청에 맞서자"는 편지를 보냈다.
4. 모문룡의 처형
원숭환이 명장이 아니라는 설은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불과하지만, 모문룡의 처형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요즘 나온 얘기가 아니라 명나라 말기나 청나라 초기의 기록에도 이미 이 논란이 나온다. 이는 원숭환이 몰락 및 죽음을 맞는 직접적인 계기의 하나가 되었는데, 문제는 원숭환이 도대체 왜 모문룡을 죽였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아무리 객관적으로 서술해도 모문룡에게 문제가 많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가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선에는 큰 민폐였는데, 인조가 즉위하고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모문룡에게 의지하자[10] 이걸 빌미로 조선에서 미친 듯이 수탈을 시작하고 양곡으로만 26만 8천 7백여 석, 은으로는 맨 마지막 해만 50만 냥을 뜯어간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문룡의 이름이 총 580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큰 해악을 끼친다.
물론 "타국에는 민폐라도 자국에게는 명장이 될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웅정필과 원숭환의 전략은 조선의 힘을 빌려서 함께 청나라를 무찌르는 것이었고, 특히나 인조가 친명반청을 기치로 내세운 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민폐를 끼쳤던 건 큰 문제였다. 가도를 경영하고 명나라의 유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명나라 본국으로부터 매해 '''20만 냥의 은'''을 받아간다.
또한 모문룡의 군대가 후금을 어느 정도 견제한 것은 사실이고, 미약하지만 약간의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진강성을 빼앗고 성주를 죽이고 + 가도진 건설 후 6차례 후금 본국으로 진입하여 후금을 짜증나게 했으며, 간계에 능하여 후금 내의 한족 반란도 모문룡이 지원하였으며, 병사들 역시 본국에서 뽑아간 건 200명 뿐이고, 건달들과 패잔병들 및 후금에 납치되었다 도망친 명나라 병사들을 모아서 총 7만 명의 병력을 편제할 정도로 크게 세를 키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금을 상대로 승리한 적은 없으며''', 심지어 조선 조정에서도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걔네가 도움이 되겠냐"는 질문에 '''"모문룡이 거느리고 있는 것이 모두 오합지졸인데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라며 디스 당할 정도로 군사들의 자질도 개판이었다. 원숭환이 이후 모문룡에게 5가지의 개혁안을 보냈던 것만 봐도, 모문룡의 조직 체계 자체가 문제가 많았다.
게다가 원숭환의 주장에 의하면, 모문룡은 숭정제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기까지 했다!''' 만약 숭정제가 이를 알았다면 숭정제의 성격으로 봤을 때 모문룡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교차 검증할 경우, 원숭환의 주장이 맞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단 40명의 기병에게 패배하고는 며칠 후 "무려 만 명의 후금군을 상대로 승리했다"며 조선에 "지켜줬으니 물자 내놓으라"며 자랑 겸 꼬장을 피우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모문룡은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숭정제로부터 임명을 받은 장수임에는 틀림없고[11] 원숭환이 임의로 처형할 수 있는 부하 장수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순신이 열받은 나머지 원균을 죽여 버린 것'''과 비슷한 상황인 셈인데,[12] 원숭환이 아무리 공적과 명성이 높았다고 해도 모문룡을 죽인 것은 명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원숭환이 이런 절차상의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모문룡을 죽여야 할 급박한 이유는 없었다는 점이다. 모문룡이 명나라에 큰 도움은 안 되었을지 몰라도 청나라에 투항해서 명나라를 공격한다거나 하는, 시급히 주살해야 할 정도의 반역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모문룡의 부하들도 건달패에 가까운 자들이었지만, 나름대로 뛰어난 통솔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원숭환은 모문룡을 죽이고 사후 처리를 엉망으로 해서, 결국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은 그대로 살아남아 해적이 되거나, 반란을 일으킨다.[13] 명에서는 수군 대도독 주문욱과 7만의 군대를 보내어 이들 반란군을 진압하였지만 이들은 청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하여 청의 군사가 된다.[14]
결론적으로 모문룡 자체는 별거 아닌 인물이지만 문제는 모문룡의 휘하 장수들이 잘난 인물들이라는 것에 있다. 모문룡 본인이 무능아에 무뢰배일지언정 그 휘하장수들이 수군 전문가, 화포 전문가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경우도 조조가 장수가 별볼일 없는 빙다리 핫바지임에도 불구하고 장수를 휘하에 두려했던 것은 장수 휘하에 뛰어난 책사인 가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원숭환이 순간적으로 분노해서 칼을 뽑아 죽인 것도 아니고, 주연을 즐기는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기회를 노리다가 불시에 포박해서 죽인 것으로 보아, 명백히 계획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숭환은 이에 대해 숭정제에게 석고대죄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것이 석고대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았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 일단 첫 번째 원인으로 뽑을 만한 것은 원숭환과 모문룡의 관계 자체가 그다지 좋지 않았었고, 원숭환은 모문룡의 가도진에 문제가 심각하게 많다는 것을 인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원숭환 같은 경우 모문룡에게 5개조의 가도 개혁안, 즉 병사 훈련 좀 제대로 시키고, 부정 축재 하지 말고, 명령 좀 잘 듣고 등등의 개혁안을 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의 반응은 "니가 뭘 아냐?!" 하고 끝.
다만 나름 이름 있는 가문 출신의 원숭환에게, 모문룡을 처형하는 데에 약장수나 범죄자 출신이며 교양도 없는 모문룡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가 좀 더 작용했을 수는 있기야 하다.
- 또 하나의 원인 중 하나로 뽑을만한 것은 원숭환의 전임자였던 웅정필의 처형. 즉 웅정필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원숭환이 아무리 옳은 지휘를 해도 부하가 제멋대로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서 실책을 저지를 경우 정작 그걸 말린 상관인 원숭환도 함께 처형당한다는 점에서 원숭환이 모문룡의 행패와 명령 불복종에 대해서 큰 위기감을 느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상황은 아니지만, 당시 막장인 명나라 상황에서 이미 웅정필 이외에도, 자기는 누르하치가 쳐들어온다고 정확하게 보고했을 뿐인데 막상 장슴음이 싸우러 나가서 깨지니까 처형당한 이유한이나, 사르후 전투에서 지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예전에 관계 좋을 때 누르하치 동생 딸이랑 결혼했다고 니가 배신해서 진거 아니냐고 추궁당해서 자살당한 이여백 등 수 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 여기에다 모문룡이 조선에 부리던 행패가 단순한 민폐 수준이 아니어서 조선과 협력하여 후금을 견제 공략하려는 원숭환에게 모문룡이 엄청난 장애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 끝날 때 도우라는 조선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부하들을 보내 청군에 의해 머리가 깎인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 조정에다가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 서해안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다가 꼴리면 약탈을 자행하고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을 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평안도 사람들이 "모강도가 쳐들어온다"는 말에 "청나라 군대가 오는 것보다도 무섭다"면서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원숭환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을 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동맹국이 되어야 할 조선을 거의 적국으로 돌릴 만한 모문룡의 행패를 더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숭환은 모문룡의 목을 친 다음에 조선에 편지를 보내서 "모문룡이 그간 벌인 행패를 참다 못해서 죽였으니, 이제 양국이 힘을 합쳐서 청에 맞서자"는 편지를 보냈다.
- 당파적 문제로 모문룡을 죽였다는 설도 있다. 이건 명말 청초의 야사 등에서 보이는 것. 원숭환은 동림파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인데 전용석은 일찍이 예부 시랑까지 승진했지만 천계년간에 위충현에 의해 쫓겨난 이력이 있는 인물로, 숭정제 즉위 이후 위충현이 실각시키고 위충현의 당파인 엄당 제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 어느 날 같은 동림파의 선배인 진계유(陳繼儒)가 터럭 하나(一毛)[15] 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게 어떠하냐고 넌지시 권했다는 것이다. 전용석은 처음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후 원숭환을 만난 자리에서 일모(一毛)가 바로 엄당의 자금줄이던 모문룡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원숭환에게 모문룡 제거를 권했고 원숭환이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만약 모문룡이 조정에 뇌물을 많이 바쳐서 등의 이유로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면,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썩어빠진 조정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청나라와의 일이 급해서 원숭환이 일단은 용서받았지만,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조정에서 즉시 원숭환을 잡아들여 죄를 묻는 게 당연한 대응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동료 장수를 임의로 죽이는 것은 반란의 첫 번째 단계가 되는 동시에 반란으로의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으로 간주된다.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원숭환은 자신의 죽음을 상정하지 않고 나중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16]
4.1. 원숭환 입장 옹호
원숭환이 모문룡을 명 조정이나 숭정제에게 알리지 않고 죽인 것은 상황을 보면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당시 명의 정상적인 체계를 통해 조정과 숭정제에게 모문룡 처형을 주청하고 숭정제가 조정 대신들과 논의를 거쳐서 모문룡을 처형한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형 주청 자체가 기각될 가능성도 있고, 설령 결정이 내려져도 논의되는 과정에서 이미 모문룡에게 호의적인 엄당 세력에 의해 모문룡도 원숭환이 자신을 죽이려 함을 다 알게 될 것이다. 숭정제에게 몰래 직보한다 해도 환관들의 손을 거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엄당 세력에 의해 정보가 새나갈 수 밖에 없다.
조선 역관 장예충 앞에서 '호적(후금, 청)이 나를 유예로 삼으려 한다.' 라고 하거나 본국에 보내는 상주문에 '남경(南京)을 취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 라는 대역무도한 말을 쓰고 인조에게조차 '황제같은 지존에게도 꺼리는 바가 없는 자' 라는 평을 들은 모문룡이 숭정제와 명 조정의 처형 결정에 순순히 목을 내놓을 가능성은 없다. 분명 모문룡은 명이나 동맹국 조선으로 칼끝을 돌렸거나, 전 병력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여 2만 8천여 명의 함대가 그대로 적의 손에 떨어지는 엄청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문룡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게,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하면서 조목 조목 내뱉은 처형 이유가 12가지나 되었는데 이를 계속 좌시하는 것은 병부를 총괄하는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의 직무유기이다.
거기다 모문룡의 횡포로 조선에서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명에 대한 악감정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수군이 강하다는 인식이 명과 청에 퍼져 있었고, 만약 조선이 청과 손을 잡고 명을 적대하게 되면 청은 굳이 산해관을 공략할 필요도 없이 조선 수군과 합세하여 바다를 통해 북경 근처나 산둥 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러면 명의 산해관 방어선은 유명무실해지며 설사 이를 격퇴한다고 해도 그 피해는 막대한 만큼 명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사태이기에 조선이 청과 제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청의 후방을 공략하는 것이 명이 모문룡에게 내린 임무였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는커녕 조선을 상대로 행패를 일삼아 조선에게 명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고 있으니 이는 명이 청을 상대하는 기본 전략을 뿌리채 뒤흔드는 꼴이었다.
결국 원숭환이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한 가지, 선참후보(先斬後報) 뿐이었다. 또한 모문룡만 주살했을 뿐 가도의 진영을 유지하기 위해 원숭환은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휘하인 부총병 서부주(徐敷奏)를 붙여 감시하긴 했으나 가도 진영 지휘 자체는 모문룡의 부하인 진계성에게 맡겼고, 모문룡을 죽이고 가도의 군대 2만 8천여 명을 4군으로 나눌 때 모문룡의 아들을 한 군의 수장으로 삼았으며, 모문룡의 부하들이 배신할까 봐 급료도 올려주었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투항한 것은 원숭환이 처형당하고 2년이 지난 후의 일로 모문룡 처형이 후금이 해군력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홍이포를 통한 공성전 전략이 무력화되는데 일조하였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공유덕과 경중명은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평소 요동 장병들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동래순무 손원화(孫元化)에 의해 유격에 임명된 자들이다. 그러다가 1631년 대릉하성이 청에게 포위되자 명에서는 이들에게 1,000명의 병력을 주어 대릉하성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들은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산둥의 임읍성과 능사성 등을 공격하였다. 이후 이들은 등주성을 공격, 요동 출신 두승공의 내응을 얻어 함락에 성공하였고 명 조정은 끝까지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그 둘은 이를 무시하고 북경으로 진군하다가 토벌군에게 패하자 후금군에게 귀순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들은 명나라로부터 홀대는커녕 후대를 받아 왔고, 별다른 이유 없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후금으로 귀순한 것이다. 잘못을 따진다면 공유덕과 경중명의 야심, 당대 명나라 정치의 잔혹성, 숭정제의 의심병에 잘못을 물어야지 원숭환에게 잘못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