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시

 



[image]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성급시 | 후베이성의 성도
武汉市(Wǔhàn Shì '''
우한시 | Wuhan City


'''면적'''
8,494km²
'''하위 행정구역'''
13구
'''인구'''
약 1,061만 명
'''여행경보'''
'''특별여행주의보: 전 지역'''[1]
1. 개요
2. 역사
3. 지리
3.1. 인문 지리
3.2. 기후
4. 경제
5. 행정 구역
5.1. 도시 지역
5.2. 외곽 지역
6. 관광
7. 스포츠
8. 교통
9. 사건사고
10.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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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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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베이성의 성도(省都)로 부성급시(副省級市)[2]이며, 중국 중남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행정구역이다.[3]
원래 우한3진으로 유명한 '''우창'''(무창, 武昌), '''한양'''(한양, 汉阳), '''한커우'''(한구, 汉口)의 3개 도시 였다가, 1926년 통합된 도시이다.
이름 역시 우창의 '武'와 한양, 한커우의 '汉'을 합한 것이다. 이 중 우창은 과거 아편전쟁청나라영국에 개항한 항구 중 하나였다. 다른 항구들은 상하이, 샤먼, 광저우, 톈진 등이었다.
많은 철로, 도로,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장강 물류의 중심인 내륙 항구이고, 우한 톈허 국제공항은 중국 국내선 항공의 허브공항이기도 하기 때문에, 육해공 모두의 교통의 중심지이다. 그리하여 종종 "중국의 시카고"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중국 전 지역으로 가는 교통이 모두 모인다. 애초 중국 대륙의 정 중앙부이기 때문에 교통요지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런 지리적 입지 때문에 붙은 이 도시의 별명이 "아홉 성으로 통하는 거리"라는 뜻의 구성통구(九省通衢).[4] 한국으로 따지면 대전광역시와 매우 유사한 셈. 많은 연구소 또한 대전과 흡사하다!!
중국 남부가 다 그렇듯이 중국 국민당과 인연이 있는데 군벌 우페이푸 지역의 중심지였고 1927년 장제스의 북벌이 성공하면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잠시 이곳으로 천도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상하이에서 잠시 우한에 머물렀다가 충칭으로 이전했다.
2020년 1월 23일부터 4월 7일까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으로 우한 전역이 봉쇄되었다. 이후 코로나 감염자수가 줄면서 출입이 부분적으로 가능하나 핵산 검사를 받고 음성일때만 출입이 가능하며, 주택단지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한다고 밝혔다.

2. 역사


도시의 기원은 상나라 때 세워진 걸로 추정된다.
삼국지손견이 사망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나라 대에는 강하군 소속이었으며, 형주 공방전으로 형주가 위와 오로 분리되자 오나라는 자국 영토의 강하군 일부에 무창현을 두었고 손권과 손호가 천도를 하기도 했다. 서진시대 이후 무창현 부근은 무창군으로 떨어져나간다. 지금의 우한 시는 이렇게 해서 형성된 무창(우창)현에 기원한다.
한편 우창은 신해혁명의 진원지로 청나라 만주족 황조의 멸망에 결정타를 날린 곳이기도 하다. 1911년 이 도시의 전신인 우창에서 일어난 우창 봉기가 그 시작이었다. 봉기의 이유는 청 황실이 철도 국유화를 감행하려 하자 '''보로운동''' 즉 철로를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으로 번진 것이었다. 이후 군벌 우페이푸가 장악하여 그의 중심지가 되었고 1921년부터 노동운동이 성행했으나 1923년 2.7 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됨으로 1926년 10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손에 들어갔다. 상계군벌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장제스가 우한 천도론을 주장하면서 11월 우한 천도가 결정되었지만 공산당, 국민당 좌파, 탕성즈가 연합하여 반장운동을 벌이자 장제스가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난창 천도를 주장하면서 천도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3월에 정식으로 우한 국민정부가 출범하였으나 1927년 4월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 국민정부를 세운 후 난징 정부와 대립하다가 장제스 사퇴를 조건으로 영한합작이 이뤄지면서 우한 정부가 난징 정부에 통합된다.
이때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점령하려 안휘성으로 쳐들어가서 깽판을 치다가 리쭝런, 바이충시에게 토벌당한 후 잠시 계계군벌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이후 국민정부에서는 광서파, 서산회의파, 개조파 등이 알력을 벌이다가 결국 장제스가 복귀했고 장제스는 우한을 다시 우창, 한커우, 한양의 우한 3진으로 환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커우가 국민정부의 12개 직할시 중 하나로 승격하는 등 우한 3진은 중국의 중요한 대도시로 남았다.
국민당의 2차 북벌까지 마무리된 이후 장제스가 계계군벌 견제를 위해 루디핑을 호남성 정부주석에 임명하면서 루디핑과 광서파가 대립하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광서파가 호남 사건을 일으켜 허젠을 호남성 정부주석에 임명하고 루디핑을 파면하면서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고 이것이 반장전쟁으로 번진다. 여기서 장제스가 승리하면서 계계는 우한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만주사변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을 통해 일본의 침략 야욕을 파악하게 된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대규모의 공업기지 육성에 나섰다. 이때 장제스는 내륙 깊숙히 위치한 우한을 일본의 침략시 맞서 싸울 거점으로 계획하고 우한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7년 12월에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국방최고위원회와 여러 주력부대가 우한으로 퇴각하면서 사실상의 수도가 되었다.[5]

1938년 우한 전투 당시 모습. 포격하는 일본 강방함대, 일본 함선들을 노리고 폭격하는 중국 공군, 돌격하는 일본 보병대의 모습이 담겼다.
하지만 1938년 10월, 우한 또한 결국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일본군 11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중지나방면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결국 국민정부는 쓰촨성 등 서남부 지역으로 가까스로 옮긴 극소수의 공업시설 만을 가지고 일본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일본군이 항복한 후 우한은 국민정부의 손에 들어갔으나 국공내전 후반부인 1949년 5월 우한 3진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우한 3진을 통합시켜 우한 3진은 최종적으로 우한이라는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조반파와 보수파 홍위병들의 내전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일대 혼란의 장이 되었으며 7.20 사건이 일어나 중국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한커우는 명조 중경 이후에 자연발생한 도시이며 역사는 비교적 짧지만, 조 말기에는 한양과 우창을 능가하는 큰 상업도시가 되어 장강 중류의 물류, 상업의 중추로서 성장하였다.
그 후 대에는 한커우진은 서산 상인이나 섬서 상인, 휘주 상인(신안 상인) 외 각지의 상인이 모이는 상업도시가 되어, 강서성경덕진(景徳鎭), 허난성주선진(朱仙鎭)(현재의 카이펑 시 부근), 광둥성포산시(佛山鎭)과 함께 《4대 명진》의 하나로 불렸다.
1891년에는 한양에 한양조병창이 설립되어 총기의 생산을 맡게 되었다. 주로 독일제 총기를 라이센스 생산하였는데 Gew88, MG08, 마우저 C96, Gew98등의 총기를 생산하였다.

3. 지리


징한 평원 동부 양쯔강한수이의 합류 지점에 위치해있다. 북부와 중앙은 낮고 평평하며 남부는 구릉 지역으로 창 강과 한수이가 도시를 통과한다. 도시의 고도는 해발 37m에 불과한 저지이다. 크고 작은 호수가 200여개나 되어 전체 면적의 1/4 이 호수나 강인 호수도시이다.

3.1. 인문 지리


도시권은 남동쪽의 우창, 중북부의 한커우, 남서쪽의 한양의 세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일반적으로 "우한 삼진"으로 불린다. 그래서 우한이라는 이름은 우창의 앞글자 "우"와 한커우, 한양의 첫글자 "한"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도심을 둘러싸고 이 세 지역을 모두 통과하는 외곽순환도로인 "이환선"과 "삼환선"이 있다. 우창 동부에는 동호, 양서호, 양동호, 남호, 탕손호, 양자호, 보한호, 부두호 등 많은 호수가 있다.
중간에 장강이 지나간다. 강북과 강남을 나눈다.
오랜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여러 중국도시에 비해서는 관광지로써의 매력은 다소 떨어진다는 평이다. 물론 도심 곳곳에 마천루가 많지만 마천루는 중국 여느 대도시에서나 볼수있기 때문에 중국의 주요 대도시를 냅두고 굳이 우한으로까지 가서 마천루 구경을 할 매리트가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손권이 지었다는 황허루[6]가 있는데다가 신해혁명의 발상지라서 역덕이면 가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며, 후베이성 박물관의 마왕퇴 유적도 유명하다.[7]

3.2. 기후


남해안 지역 도서와 비슷한 온대기후로 평균적으로 온난한 날씨를 보이며, 무덥고 습한 여름과 서늘한 겨울을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17.1℃로 서귀포보다 높다. 미국과 비교해보면 대략 중남부 아칸소주 남부나 조지아의 애틀랜타와 비슷한 셈이다. 1월 평균기온은 4.0℃으로 제주시의 1월 평균기온보다 낮다.
겨울에 춥다고 말 할 수 있는데 -10℃ 아래로 1년에 한 번씩은 내려간다. 또한 한국의 겨울과는 다르게 우한의 겨울은 습도가 75% 정도 된다. 대략적으로 겨울 날씨는 서유럽이나 뉴질랜드 남섬과 비슷하다. 실제로 서유럽과 겨울 기온이 비슷하고 습도와 강수도 비슷하기 때문에 우한에서의 겨울은 한국의 건조한 겨울과는 다르게 습하며 숫자상 기온과 달리 체감온도가 낮아서 아주 뼈 시린 추위를 느낄 수 있다.
여름엔 굉장히 더운 곳이다. 7월 평균기온은 29.1℃며 상대습도는 약 77%으로 여느 동아시아처럼 후덥지근한 날씨를 자랑한다. 8월 역시 28.4도로 대구광역시 쯤은 거뜬히 넘는다.
역대 최고기온은 서울과 같은 39.6도며 역대 최저기온은 -19도다.
'''열섬 현상이 심각하다.''' 충칭, 난징과 더불어 엄청난 열섬 현상을 맛볼 수 있는 도시로 중국에서는 아예 이 3개 도시를 엮어 화로성시(火爐城市, 불가마 도시)라는 용어를 따로 만들어낼 정도다.

4. 경제


우한의 GDP는 2014년 기준으로 약 1,610억 달러이고, 1인당 GDP는 15,764달러이다.
우한은 50여개의 프랑스 기업을 유치해 현재 우한 지역 투자의 1/3을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우한시에 SK종합화학, 포스코가 공장을 운영중이고, 셀트리온은 바이오의약품 생산공장을 유치하기로 우한시와 MOU를 체결했지만 하술할 사태로 공장 건설이 지체중인 상태다.

5.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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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커우 구[8], 장안 구, 장한 구, 둥시후 구는 옛 한커우 시, 한양 구는 옛 한양 시, 우창 구는 옛 우창 시에 해당된다.

5.1. 도시 지역


  • 차오커우 구
  • 장안 구
  • 장한 구
  • 한양 구
  • 우창 구
  • 칭산 구

5.2. 외곽 지역


  • 훙산 구
  • 차이덴 구
  • 둥시후 구
  • 한난 구
  • 장샤 구
  • 황피 구
  • 신저우 구

6. 관광


  • 황학루
  • 우한 박물관

7. 스포츠



8. 교통


도시철도우한 지하철이 운행 중이며, 9개의 노선이 도시 곳곳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다.
항공편의 경우 교외에 우한 톈허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인천 - 우한 직항 노선을 대한항공중국남방항공, 티웨이항공에서 운항 중이다. 사실 우한 자체는 서울특별시와 같은 급의 대도시지만 그렇게 관광지로 썩 인기있는 편은 아닌 곳이다.[9] 대신 창사와 함께 장가계에 가기 위한 관문 정도의 역할을 한다. 장가계는 서울에서는 정기편 없이 전세기만 뜨기 때문에 보통 우한에서 국내선 환승 혹은 창사에서 육로로 이동을 택한다.[10]
한편 2020년 기준 저가 항공사들이 새로운 한중 노선으로 취항하려 했지만 전염병이 퍼지는 바람에 무기한 연기하였다가 2020년 9월 16일부로 국내 연결편이 재개되었다.

9. 사건사고



9.1. 7.20 사건




9.2. 2019년 중국 우한시 환경 시위




9.3.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최초 발생 지역





10. 출신 인물




[1] 외교부는 2020년 1월 25일부로 중국 우한시를 포함한 후베이성 전역의 여행경보를 3단계(철수권고)로 상향 조정하였다. 이번 조정은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코로나 19가 후베이성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음에 따라 우한시 및 주변지역에 대한 대중교통 이용이 전면 통제되고 있고 국내에서도 우리 국민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급속한 확산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파력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우리 국민의 동 바이러스 감염 예방을 위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한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이후 8월 10일 3단계 철수권고를 해제하고 특별여행주의보를 발령하여 여행경보를 완화했다.[2] 1급 행정구역인 후베이성 아래 2급 행정구역인 지급'시'가 있다. 부성급시는 지급시중 크고 아름다워 독립적 권한을 부여받은 곳으로 중국 전역에 15개가 있다.[3] 한자로 '市'를 쓴다고 한국의 시와 대응하면 안된다. 우한시의 면적은 충청남도보다 조금 더 큰 8,494.41km²에 달한다. 우한시의 중심부인 장안구, 장한구, 차오커우구, 한양구, 우창구, 칭산구, 홍산구의 총 면적과 인구는 각각 888.42km², 643만 명(2010년 기준)이다. 그냥 한국의 '도'로 생각하면 되고, 대도시의 경우에는 그냥 한국의 수도권이나 동남권같은 도시권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기도 하다. 중국의 행정구역상 2급행정구인 지급'시'아래 10여개의 3급 행정구역중 한국의 '시'에 해당하는 '市'와 군에 해당하는 '현'이 있는 구조이다.[4] 실제로는 우한이 속한 후베이성은 6개의 성과 맞닿아있다. '구(九)'가 옛 한문에서 '많음'을 상징하는 수 중 하나였기에 '아주 많은 지역으로 통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5] 공식적인 임시수도는 이때도 충칭이었으나 사실상 우한이 수도였다.[6] 물론 손권이 지은 당대의 모습이 남은것은 아니고 여러 차례 불에 타고 재건되길 반복했다.[7] 한나라 때의 고분인 마왕퇴 1호분에서, 아주 온전한 상태의 여성 미라가 발견되었다.[8] 상단 지도에는 차오커우 구의 한자 표기가 훙산 구(洪山区)로 잘못 적혀 있지만 실제 한자 표기는 '硚口区' 이다.[9] 삼국지 매니아들에게나 어필하지 그렇지 않으면 그간 이 도시의 존재조차 모르던 사람이 대다수다. 정말 나쁘게 말하면 아래 언급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때문에 이름을 알리게된 매우 억울한 케이스.[10] 창사도 그 자체는 관광지로서 매력은 없다. 중국인들은 마오쩌둥 관련 유적지가 있어서 많이 가긴 하지만 한국인한텐 딱히 매력적이지 않고 특히 반공 성향인 사람에겐 거부감도 준다. 그러나 장가계를 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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