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제

 



'''
太祖 天命帝
태조 천명제
'''
'''묘호'''
'''태조(太祖)'''
''''''시호''''''
'''만주식'''
더르기 황디
ᡩᡝᡵᡤᡳ ᡥᡡᠸᠠᠩᡩᡳ
Dergi Huwangdi
'''한자'''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한호''''''
수러 겅옌 한
ᠰᡠᡵᡝ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Sure Genggiyen Han
''''''휘''''''
'''중국어'''
아이신줴러 누르하치
(愛新覺羅 努爾哈赤)(애신각라 노리합적)
'''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ᠨᡠᡵᡥᠠᠴᡳ
아이신 교로 누르하치
''''''연호(후금)''''''
'''만주어'''
압카이 푸링아
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Abkai Fulingga
'''중국어'''
천명(天命)
'''몽골어'''
ᠲᠡᠩᠭᠡᠷᠢ ᠶᠢᠨ ‍ᠰᠦ᠋ᠯᠳᠠᠲᠦ᠋
Тэнгэрийн сүлдэт
'''신장'''
170cm[1][2]
'''생몰 기간'''
'''음력'''
1559년 2월 21일 ~ 1626년 9월 30일
(68세 총 24707일[3])
'''재위 기간'''
'''음력'''
1616년 2월 17일 ~ 1626년 9월 30일
(10년 225일)
1. 개요
2. 생애
2.1. 집안 내력
2.2. 조부와 부친의 복수
2.3. 여진의 통합
2.4. 대외관계
2.4.1. 조선
2.4.2. 명나라
3. 죽음
4. 외모
5. 업적
6. 전설
7. 청태조실록
8. 대중매체에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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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르하치는 후금의 건국자이자 청나라의 초대 황제다.[4] 1583년 추장에 오른 뒤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강성해졌다. 그러자 명나라가 경쟁 부족인 해서여진과만 무역을 하겠다고 금수조치를 내린다. 반기를 든 그는 만주를 통합하고 명나라로 쳐들어갔다가 명의 장수 원숭환에게 영원성 전투에서 패한 뒤 사망했다.[5][6]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애신각라])의 만주어 뜻은, '아이신(愛新)'이 ''을 뜻하고,[7] '기오로(覺羅)'는 큰 여섯 부족을 말한다. 국조 6조(六祖: 닝우타 버이러)의 부족들은 홍색 직물로 짠 허리띠를 맬 수 있었는데, 이를 교로(覺羅)라고 불렀다. 즉, '아이신교로'는 '쇠 부족'이라는 뜻이다. 누르하치(努爾哈赤[노이합적])의 뜻은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고.
분열된 부족을 통일해서 중국을 공격하고 제국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칭기즈 칸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다만 현대 만주족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걸로 모자라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버린 후대의 역사를 감안하면, 칭기즈 칸에 비해 그 명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다.[9]

2. 생애



2.1. 집안 내력


만주족인 그는 랴오닝성 출신으로 오도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였던 먼터무(孟特穆)[10]의 6대손이다.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여진족이지만 이성량이 이끄는 명군을 도왔다. 그러나 1583년 명군과 연합해 타 부족 마을을 치는 과정에서 명군에게 둘다 오인 사살된다.

2.2. 조부와 부친의 복수


24세의 젊은 나이로 추장(수러 바일러)에 오른 그는 푸순 동쪽 지방으로 부족을 옮겨 다스린다. 이성량은 그의 부친과 조부를 죽인 것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로 말과 토지를 하사했지만,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다. 남만주의 여진족을 통합하기 시작한 그는 1606년 수러 쿤둘언 한이 되었고, 1618년 1월 1일 랴오양, 묵던(Mukden,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나라를 세워 수러 겅옌 한으로 즉위하고 4월에 칭제한다. 옛 금태조, 천조제만력제를 자신과 같은 반열에 놓았다. 생여진의 완옌(完颜)부가 1115년 세운 옛 암반 안취운 구룬(大金國)를 계승해 국호를 '''암바 아이신(大金)'''으로 정하고, 연호를 '''압카이 풀링가(天命)'''라 했다. 그러나 황제를 칭하지 않고 칸을 칭했다.[11]

2.3. 여진의 통합


여진을 통합하고 청이 세워지는 과정을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명의 이성량을 도운 일부터 올라가야 하는데 이 이성량이라는 인물은 '''‘요동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당대에 뛰어난 장군이었다.[12] 실제 여진족들은 이성량을 두려워했고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세력을 키웠어도 눈밖에 나지 않게 뇌물을 보냈다. 그러나 이성량은 군비를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등 타락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는 이성량을 좌천시키고 새로운 관리를 요동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섣부른 판단이었는데 이성량이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누르하치와 그 세력을 제압하고 섬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명은 이성량을 좌천시키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보내버린 것. 새로운 인사들도 본국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놀랐고 함부로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선택은 대적도 아닌 뇌물이었다. 이성량과 싸운 여진족들이나 니탕개처럼 힘이 생겼다고 힘으로 대결하거나 경고한 것이 아닌 뇌물과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적대를 하지 않았다. 새로온 요동으로 발령난 사람으로서는 예상밖에 큰 누르하치의 세력과 구태여 적대하며 싸우기를 꺼렸고 재보를 보내주니 이성량처럼 누르하치의 여진 통합 과정을 눈감아 주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능력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뇌물을 보낸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결국 명의 본국에 이 일이 들킬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되면 명이 본격적으로 누르하치를 막기 시작한 것은 불 보듯 뻔할 수밖에 없는데...이때 '''명나라가 만력 3대정에 휘말렸다.''' 이 만력 3대정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로 이후 명의 시선은 전부 이 3대정에 집중되어 누르하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명의 시선을 거리끼지 않고 전력으로 여진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결국 야인여진을 제외한 모든 여진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성량의 요동 관리와 누르하치의 여진족 통합 과정은 사르후 전투 문서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2.4. 대외관계



2.4.1. 조선


여담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 지원을 두 차례나 제시하기도 했다. 1592년 8월에 "조상의 나라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습니다"라고 제안을 했고 당시 명나라에서 원군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라, 조선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했다.[13]
이어 임란이 거의 종료될 시점인 1598년 1월에도 "조상의 나라 원병?"이라며 제안해서 전투보다는 화친에 주력했던 명나라의 모습에 분개해 "원군 받아서 왜놈들 때려잡읍시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을 '조상의 나라'라는 존칭까지 써가며 원군 파병을 제안했다. 물론 누르하치가 순수한 뜻에서 조선을 도우려 했을 리는 없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피폐해진 틈을 타서 원군이란 명목으로 조선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14]

2.4.2. 명나라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를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하였는데, 이때 명나라에 파견된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과도 담판을 벌였다. 인조 반정 이전에는 광해군의 기미책으로 인해 조선과 후금 간의 충돌은 없었으나, 그 후 인조 반정으로 인해 후금에 부정적인 정권이 들어섰음을 알고 조선 배척 정책을 시행하였다. 1626년 영원성 전투 도중 홍이포에 맞아 부상을 입은 뒤에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자[15]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여덟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이었다. 1636년, 홍타이지는 후금의 국명을 청으로 개칭하였고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후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복릉(福陵)에 안장했다.
현재 중국에선 누르하치는 원래 명나라 하급 관리 출신이라는 논리로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당시 누르하치의 관직의 의미는 주변 여진족을 순화시키고 명나라에 복속시키는 임무로, 실질적인 임무를 가진 관료가 아닌 부족장으로서 받은 벼슬이라는 걸 감안하면 중국에서 무리수를 띄우는 셈.

3. 죽음


문서 참조 (누르하치가 아예 홍이포에 맞지도 않았다는 내용이다.)
누르하치는 1626년 1월 영원성 전투 이후 동년 8월 11일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반적으로 영원성 전투에서 입은 홍이포 부상으로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엄연히 청나라의 기록에는 '병으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7개월이란 기간 동안 누르하치는 4월에 '''직접 군을 이끌고''' 몽골 칼가 부족 원정에 떠났다. 또한 5월에 몽골 귀족인 오오바 훵 타이지가 찾아오자 직접 걸어나와 맞이한 행적도 있다. 홍이포에 부상을 입었다면 즉사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고조 같은 케이스를 보면 죽음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부상을 입고 멀쩡히 다니다 죽기도 한다. 더구나 홍이포에 입은 부상이 본래는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지 않았거나 치료를 받아 완화되는 도중 당시 나이로는 고령이여서 갑자기 덧나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홍이포에 부상을 입었다고 즉사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논리로 삼기에 부족하긴 하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아예 홍이포에 맞지도 않았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진짜 홍이포로 인한 부상으로 죽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다만 <만주실록> 등의 기록에서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 패배를 자책하는 걸 보면 그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확실한 것 같다.[16] 이런 심리적인 타격이 병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4. 외모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누르하치의 모습
만주실록,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등 각종 사서 및 기록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체구는 크지 않지만[17] 다부진 편이었으며, 턱수염은 없고, 봉황의 눈[18]과 큰 귀를 지녔고, 얼굴이 길고 야무지며, 코가 크고 곧은 편이었다고 한다.

5. 업적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와 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에 해당하는 팔기군을 편성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또한 어르더니 박시와 가가이 자르쿼치로 하여금 몽골 문자의 형태를 빌어서 만주 문자를 창제하였다. 그 이전부터 몽골 문자로 여진어-만주어(원래 금나라에서 별개의 문자를 창제했으나 별로 쓰이지 않아서 거의 사장된 상태였다.)를 표기했지만 표기법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건 아니라서 중구난방에 가까운 상태였는데 만주어의 표기법을 공식적으로 확정짓고 몽골 문자에서 표기되지 않았던 만주어의 음을 표기할 수 있는 자모를 추가한 건 누르하치의 공적이다.

6. 전설


야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수달이라고 한다. 수달이 누르하치의 어머니를 사모해서 밤에 찾아와 누르하치가 태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누르하치는 수영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인이 찾아와 천자가 될 명당 자리를 알고 있는데, 물속 깊은 곳이라 자신이 들어 갈 수가 없으니 누르하치에게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면 누르하치에겐 왕이 될 명당 자리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천자의 자리에 자기 조상의 유골을 묻어 결국 누르하치가 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전설은 왕조의 시조를 신격화하기 위해 만들어지곤 하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건 아니다.

7. 청태조실록


원제는 '''大淸太祖高皇帝實錄'''(대청태조고황제실록).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이미지는 여기서 볼 수 있다.

8. 대중매체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회천문과 남한산성에서는 백인철이 담당했다. 그런데 실제 인물과의 외모 차이가 크다보니 오히려 홍타이지 역이 더 어울려 보일 정도였다.

나는 에 의해 조부부친을 잃었다.

그 이후, 젊은 날의 나는 오직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할 뿐이었다.

허나 난 복수를 위해 명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힘으로 제압하고 부족을 통합하였다.

결국 나를 두려워한 명의 10만 대군을 궤멸시키고 요동을 석권했지.

이제 곧 산해관을 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나의 복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허나 그때가 되면 내게 복수란 무엇일까?

산해관을 넘으면..... 그때도 나의 전부일까?

나는 그 너머로 가려한다.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아라.

나의 칼이 되어서!

네이버 웹툰 칼부림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후금의 통치자로 등장. 사르후 전투요동을 석권하고 심양으로 천도한 이후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후금에 저항하는 요동 주민들과 여전히 견고한 명의 세력을 마주하며 조급해하기도 한다. 후금으로 망명한 주인공 함을 친위대로 기용하며 극의 주요 인물로 올라섰다. 작중 한창 국운을 떨치는 자신의 후금과 수비에 급급한 조선, 명을 비교하며 우월감에 도취된 모습을 보인다.[19] 그리고 4부 63화에서 원숭환이 쏜 홍이포에 맞아 경상을 입고 결국 후퇴한다.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1984)의 첫머리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누르하치의 유골'을 커다란 다이아몬드와 교환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고학자로서의 존스 박사의 양심은 완전히 타락해있다.

9. 둘러보기




[1]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2] 아래에 나온 누르하치의 외모에 대한 기록처럼 키가 생각보다는 크지는 않다.[3] 양력으로 15590329 ~ 16261118[4] 물론 살아생전에 청나라 황제가 된 것으로 국한하면 아들인 홍타이지가 청나라의 초대 황제다.[5] 영원성 전투에서 홍이포를 맞고 부상을 입어 이후 부상을 이기지 못하여 사망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영원성 전투 이후 후금군은 몽골 초원으로 진격하여 몽골군을 복속시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으로 상식적으로 자신들의 군주가 부상을 입었다면 본진인 요동으로 돌아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는가?[6] 그러나 몽골의 칭기즈 칸의 경우도 낙마로 인해 머리를 다치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서하에 대한 공격을 계속 진행해 멸망시킨 사례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아니라고 보기도 어렵다.[7] 또는 ''을 뜻한다. 실제로도 금나라<암바-안 안취-운 구룬>를 '암바 아이신 구룬'이라고 표기하였다.[8] 하지만 또 칭기즈 칸도 후예들이 제법 끈질기게 칸 혹은 대칸 자리를 유지해서 대칸 자리는 17세기까지 차지했고 칸 자리는 18세기까지 차지했다. 물론 몽골로서의 칸을 유지한 것은 아니었지만...[9] 게다가 누르하치가 정복한 영역은 기껏해야 만주 일대+연해주 정도인데 비해 칭기즈칸은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카스피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했다. 그 이후로도 정복은 계속되어서 대칸 지위를 이은 원나라만 해도 현 중국 영토보다도 큰데 사한국 영역까지 합치면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흑해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했지만 청은 아무리 전성기였어도 현 중국 영토+몽골+타이완+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일부 수준이었다. 그나마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는 분열없이 300년 가까이 이어진게 위안이라면 위안,[8] 물론 그 덕에 민족성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지만...[10] 흔히 몽골식 이름인 몽케 테무르 혹은 조선 왕조 실록에 실려있는 이의 한국식 독음인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로 알려져 있다. 먼터무는 원래 조선 왕조 함흥 주변부터 북쪽 무단장부터 쑹화강 유역까지 부족을 이끌고 다닌 여진족 추장으로 결국 대륙의 동북의 남부에 정착했다. 훗날 청나라에 의해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로 추존되었다.[11] 당시 조선과 명에서는 누르하치를 '후금국한(後金國汗)’ 대신 ‘건주위마법(建州衛馬法)’으로 칭하였다. 광해군 또한 누르하치에게 서찰을 보낼 때 '건주위마법족하(建州衛馬法足下)'라고 써놔서 누르하치가 노발대발했다하는데, 이유는 위 칭호를 쓴다는 건 동등한 군주의 위치로 보는 게 아니라 일개 장수 및 관찰사로 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 때문에 누르하치의 아들인 다이샨(온건파)과 홍타이지(급진파)가 사르후 전투 때 잡은 조선군 포로들을 모조리 죽이네마네하면서 다퉜고, 누르하치가 다이샨 편을 들어 다행히 사태가 극단으로 치닫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눈치챈 상당수 조선군 포로들이 탈출 시도를 하다 잡혀죽었다고 한다.[12] 참고로 이 이성량의 아들이 바로 임진왜란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이다.[13] 다만 조선도 당시 사정상 아쉬웠으나 반대했다. 그 류성룡안사의 난을 예로 들어서 반대한 데다가 누르하치의 출신인 건주 여진족은 세종 시절 4군 6진의 설치 과정부터 대립해 온 사이였던 데다 당시 이끌던 이만주까지 죽였기 때문. 물론 결과론적으로 보면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려는 계획이 무산된 덕분에 군사력을 아낄 수 있었다.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나라가 아니라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면 건주여진이 일본군과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엄청난 군사력을 소모하여 결국 아이신기오로 씨족이 주도하는 여진족 통일에도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경우 아이신기오로 씨족 등 건주여진 부족들이 임진왜란으로 군사력을 엄청나게 소모한 틈을 타, 이들과 대립하던 해서여진 부족들이나 야인여진 부족들이 건주여진 부족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이 여진족 통일을 주도했을 수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임진왜란에서는 조선, 명나라, 일본 3국이 모두 엄청난 군사력을 소모하여 국가 차원에서의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14] 실제로 멀리 안 가도 몽골 제국이 이와 비슷하게 원군을 빌미로 고려와 접촉하고 영향력을 확대한 후 침략하여 굴복시켰던 예가 있다.[15] 단, 과연 누르하치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이 부상의 악화인지는 약간의 의혹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명군의 화포에 맞아 사망한 사람이 누르하치가 아니라 그의 친족일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16] 아직 공성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후금 입장에서 영원성 전투 패배는 자신들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 것으로, 누르하치 생애 사실상 산해관 입성이 저지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7]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활과 화살의 길이를 통해서 확실히 키가 크지 않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게다가 머리도 크고 하체 또한 짧다. 물론 당시 만주족 평균 신장인 165cm보단 큰 170cm 정도로, 주변 장수들이 거구인 거지 단신은 아니었다.[18] 가늘고 길며 눈초리가 위로 째진 눈.[19] 하지만 어떤 나라든 흥망성쇠를 겪고 훗날 자신이 창건한 나라가 을 당할 지 아는 독자들의 입장에선 그저 오만하기 그지 없는 모습일 뿐이다. 당장 작중에서도 그 사람이 나온 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