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

 


圓光
(542/555 ~ 630/640)
신라승려이자 중국에서 배워온 새로운 불교지식을 신라에 전파한 고승. 속세 성씨는 박씨(朴氏) 혹은 설씨(薛氏)[1]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속고승전, 수이전에 수록돼 있다. 다만 수이전은 행적이 많이 다른데 현대 학계에서는 수이전보다는 속고승전 등의 내용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본래 유교, 도교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중국에서 학문을 배워오기 위해 25세 때 유학생으로서 중국 남조 진나라의 수도 금릉으로 건너갔다가 중국에서 어느 날 사찰에서 강의를 듣고는 불교 사상의 심오함에 감동해 돌연 출가를 결심해 566년에 불가에 입도해 승려가 되었다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즉 대부분 신라 출신 유학승이 출가한 후에 중국에 유학한 것과 달리 원광은 원래 신라에 있을 때부터 승려는 아니었고 유학을 간 이유도 다른 학문을 배우러 간 것인데 중국에서 공부하다가 불교에 귀의한 케이스다. 571년에 삼기산에서 들어가 금곡사를 지어 수도했으며, 575년에 주술을 좋아하는 승려가 가까운 곳에 암자를 짓고 2년을 생활하자 그 승려의 잘못을 지적했지만 듣지 않다가 화를 입고 죽자 불교 공부를 더 깊게 해 사람들을 제도하기로 했다.
578년에 중국 진(陳)나라금릉 장엄사에서 열반경, 성실론을 집필했으며, 서주의 서산사에서 구사론을 집필하면서 연구했다. 진나라에서 수나라로 바뀔 때는 전쟁통에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 겨우 살아남기도 했다. 속고승전에 의하면 588년 진나라가 멸망할 때 원광이 사찰의 탑 앞에 묶여 군인들에게 해를 입으려 하는 찰나 멀리서 이를 본 수나라 장수에 의해 구출됐다고 한다. 결국 원광은 폐허가 된 금릉 대신 589년에 수나라의 장안에서 섭대승론을 배웠고 이미 노년에 접어든 600년에 신라 사신 일행과 함께 고국 신라에 귀국했다. 중국에서 명망 높은 고승으로 등극한 원광에게 돌아와 달라고 신라 본국에서 줄곧 귀국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귀국 이후 그 동안 중국에서 터득한 새로운 불교 지식을 신라에 전수했으며, 경상북도 청도로 내려가서 가실사에 머물면서 귀산, 취항 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좋은 말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하자 세속오계를 제시하면서 이를 통해 신라 화랑도의 중심이념을 마련했다. 608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자주 침범하자 진평왕이 수나라에게 걸사표를 지어 도움을 청할 것을 명하자 수나라에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요청하는 걸사표를 지었으며,[2] 613년 가을 7월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자 원광 등이 맞아들여 불경을 강의했다.
615년에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를 열어서 인왕경을 강설했다가 630년에 입적했으며, 장사는 명활산에서 지내졌고 삼기산 금곡사에 부도(訃屠)가 세워졌다. 수제자로 원안(圓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1] 해동고승전[2] 사실 원광은 걸사표를 쓰고 싶지 않아했다. 진평왕의 명에 대답하기를 “자기가 살기 위하여 다른 이를 멸하는 것은 승려에 걸맞는 행동이 아닙니다만, 저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중국에서 오래 학문을 닦은 원광의 한문 실력은 당대 신라에서 제일이었을 것이고 수나라에 보내는 중요한 외교문서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원광이 승려임에도 시킬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