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
1. 西周
1.1. 견융의 침략 이전의 주나라를 지칭하는 말
주(周)나라가 견융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낙읍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의 주나라이다. 해당 문서의 2.1.2번 항목 참조.
1.2. 동주(東周)가 다시 분리된 이후 그 서쪽을 지칭하는 말
1.2.1. 소개
전국시대에 이르러 기원전 367년, 동주의 영토가 동, 서로 나뉘게 되자 서쪽을 차지한 국가. 마지막 주 천자였던 주난왕(周赧王) 희연(姬延)은 도읍을 이 서주로 옮겼는데, 힘을 잃고 유명무실한 상태였기에 국가의 주관은 서주의 군주인 서주 무공(西周武公)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후 진나라(秦)의 공격을 받아서 기원전 256년에 멸망한다.
1.2.2. 역대 군주
- 환공(桓公) 게(揭) - 기원전 440년 ~ 기원전 415년, 주 고왕의 아우.
- 위공(威公) 조(竈) -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67년, 서주 환공의 아들.
- 혜공(惠公) 조(朝), 재(宰) - 기원전 366년 ~ ?, 서주 위공의 아들.
- 무공(武公) - ? ~ ?, 서주 혜공의 장남.
- 문공(文公) 구(咎) - ? ~ 기원전 256년, 서주 무공의 아들.
2. 徐州
2.1. 개요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 중 하나이다. 'XU' 부분이 서주. 과거 항우의 거점이던 팽성이었고 후한 말에는 유비의 거점으로서 초한지, 삼국지 모두에 자주 등장하는 영예(?)를 누렸다.
현재는 강소성(장쑤성) 쉬저우시를 말하고 삼국지에서는 그 근방을 아우른 지역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말로는 서주라고 불린다. 교통의 요지로서 중국의 남방과 북방을 잇는 철도망이 지난다. 강소성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2.2. 삼국지에서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의 지역으로 후한 13주 중에 1주에 속한다. 서주 대학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도겸이 서주 자사로 지배하고 있었고, 조조에게 침략을 당하자 유비를 응원군으로 부른뒤, 죽으면서 유비에게 후사를 맡겨 이후 유비의 차지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도겸 항목 참조. 이후 유비가 동맹을 맺기 위해 불러들인 소패의 여포가 유비 뒷통수를 쳐 잠시 여포의 것이 되었다가 조조에 의해 여포가 멸망한 뒤 조조의 것이 되고, 조조는 부하 차주를 자사로 임명해 서주를 다스리게 한다. 얼마 후 유비가 속임수를 써서 조조에게서 도망친 뒤 차주를 죽이고 다시 잠시 서주를 차지하였다. 유비는 서주에서 세력을 굳혀 조조를 동쪽에서 견제하려 했으며, 하북의 강자 원소와의 충돌을 앞에 두고 있던 조조에게 이 상황은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친히 군을 움직여 유비를 서주에서 몰아냈으며, 이후 계속 조조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연의에서 표현은 인구가 100만이 넘고 물산과 인재가 풍부한 곳이라고 칭송되지만, 실제로는 주변에 조조, 원술 같은 강력한 군벌이 많은 데다가 진등 일가를 비롯해 토착 호족 세력의 힘이 너무 강하여 한 세력이 본거로 삼아 큰 기업을 도모하기엔 좋지 않은 곳이었다는 게 후대의 평가이다. 그러나 한때 조조조차 두려워한 군웅 도겸이나 서주 대학살 이후 약해진 서주를 도겸에게서 이은 유비가 서주를 통치하여 세력을 떨친 것을 감안했을 때 다분히 결과론적인 시각이라는 평가도 있다. 은근히 그냥 넘어가는 사실인데 서주 통치 당시 유비는 군웅들 중에서 순위권에 들었던 원술과도 대등하게 맞서 승부를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이는 원술이 중간 이상은 되었던 다른 능력들에 비해 군재가 부족했으며 유비 자체가 실은 만만치 않은 능력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여포 이후 장패가 서주 방면에서 조조 밑의 반 독자 군벌로 남아 있었던 것도 은근히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곳과 청주는 그 옛날 춘추 전국 시대의 강국 제나라의 강역으로 이 지역을 차지한 제나라의 영향력은 춘추 전국 시대 내내 강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기도 하다.[1]
이후 오나라가 합비를 자주 공격했으나(합비 공방전) 여몽이 결정적일 때 형주로 진출(형주공방전)한 이유도 서주 방면으로 진출한 경우 쉽게 뺏길 수 있다는 까닭이[2] 라고 여겨진다.
2.3. 이후 역사
물론 남조 정권이 북쪽으로 진출하려면 가장 먼저 획득해야 하는 땅인 것은 분명해서 오나라도 이후 계속 합비를 건드렸고 동진 말엽 ~ 유송 시기에는 남조가 이 지역과 예주, 청주를 확보하기도 했었다. 지형이 너무 평탄해서, 공격해서 빼앗기는 좋지만 방어하기에는 안 좋은 곳이라는 평가는 역으로 말하면 이렇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지형 때문에 당나라 때부터 대운하가 지나는 곳으로 번영을 누렸으며[3] 중일전쟁 시기에도 금세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이 중일전쟁 당시 서주 지방을 배경으로 한 전시 선전 가요가 있는데 바로 쇼지 타로의 보리와 병대(麦と兵隊)란 노래다. 徐州徐州と人馬は進む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내용은 일본군 장병들의 고난과 향수(...).
2.4. 관련 문서
[1] 제나라는 제환공 이후 부침은 있었지만 전국시대 후기 악의에게 비오는 날 먼지나듯 두들겨 맞아서 나라 망하기 직전상태로 가기 전까지 언제나 패권국 내지는 패권국을 위협하는 강국이었다.[2] 여몽 스스로도 오군의 육상전 능력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방이 평지인 서주는 위나라가 자랑하는 기병들에게 있어선...[3] 물론 이때의 서주는 한나라 때의 서주에 비해 매우 작다. 그리고 이정기 시절에는 주된 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