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원
圓明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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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근처에 있던 청나라 황실의 호화 정원'''이었다'''.
자금성의 5배 가량인 3.5km2의 면적에 서양식 건축물, 중국 각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아놓은 건물들이 있었으며, 만원지원(萬園之園, 만 개 중의 정원, 정원 중의 정원)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청 황실에서 소장한 진귀한 보물과 동식물을 보관한 장소이기도 했다.
유럽식 건축양식의 서양루 등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다른 유럽인들이 참여하여 설계했다.
1860년 아편전쟁 도중 프랑스군의 약탈에 이어, 포로 살해에 대한 보복인[1] 영국군의 공격으로 불에 타 소실되고 소장품들은 모두 약탈당했다. 이에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비판했다.[2]
서태후가 함풍제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던 곳이기도 하다. 원명원이 불타 없어진 후 서태후가 거금을 들여 원명원 재건사업을 추진하려고 했으나[3] 재정낭비라며 동태후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동태후는 서태후가 함풍제와의 사랑의 장소가 재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다. 만약 재건되었다면 [4] 현대에 이화원 못지않은 관광지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
현재는 공원화되었다.
원명원의 파괴 이전과 이후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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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동태후의 바람도 21세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는지 후손들이 저장성에 실물 크기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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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경 근처에 있던 청나라 황실의 호화 정원'''이었다'''.
자금성의 5배 가량인 3.5km2의 면적에 서양식 건축물, 중국 각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아놓은 건물들이 있었으며, 만원지원(萬園之園, 만 개 중의 정원, 정원 중의 정원)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청 황실에서 소장한 진귀한 보물과 동식물을 보관한 장소이기도 했다.
유럽식 건축양식의 서양루 등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다른 유럽인들이 참여하여 설계했다.
1860년 아편전쟁 도중 프랑스군의 약탈에 이어, 포로 살해에 대한 보복인[1] 영국군의 공격으로 불에 타 소실되고 소장품들은 모두 약탈당했다. 이에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비판했다.[2]
서태후가 함풍제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던 곳이기도 하다. 원명원이 불타 없어진 후 서태후가 거금을 들여 원명원 재건사업을 추진하려고 했으나[3] 재정낭비라며 동태후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동태후는 서태후가 함풍제와의 사랑의 장소가 재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다. 만약 재건되었다면 [4] 현대에 이화원 못지않은 관광지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
현재는 공원화되었다.
원명원의 파괴 이전과 이후 모습들
2.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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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동태후의 바람도 21세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는지 후손들이 저장성에 실물 크기로 복원하였다.
[1] 39명이 협상장에 갔다가 체포되어 포로가 됐는데, 다구 포대 전투에서 청군이 너무 깨져서 분노한 청군들이 20명을 죽였다.[2] 게다가 원명원을 불태운 8대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의 아버지 7대 엘긴 백작 토마스 브루스는 그 유명한 엘긴 마블을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온 인간이시도 하다.[3] 서태후는 원명원을 재건해 함풍제와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했다고..[4] 아마 청나라판 경복궁 중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훗날 고종 치세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재건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