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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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頤和園'''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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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고건축급역사기념건축물(古建築及歷史紀念建築物)
시대
청나라
일련번호
1—122
소재
베이징시 하이뎬구(海淀区)
등재
196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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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베이징의 황실 정원, 이허위안
영어
Summer Palace, an Imperial Garden in Beijing
중국어
北京皇家园林-颐和园
프랑스어
Palais d'Été, Jardin impérial de Beijing
국가·위치
중국 베이징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8년
등재기준
(i)[1], (ii)[2], (iii)[3]
지정번호
880
1. 개요
2. 역사
3. 주요 건축
3.1. 전산(前山)
3.2. 후산(後山)
3.3. 동제(東堤)
3.4. 남호도(南湖島)
3.5. 서제(西堤)
4. 기타
5. 같이보기

중국어 번체
頤和園
중국어 간체
颐和园
중국어 병음
Yíhéyuán
한자음
이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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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베이징시 북서쪽 하이뎬구(海淀区)에 위치한 황실원림. 총면적 2.9 km²에 달하며 베이징에서 현존하는 황실원림 중 건축규모가 제일 크고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중국 고전원림의 본보기이기도 한 이화원은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과 면적 2.2 km²인 곤명호(昆明湖)가 있다.
'''중국 국가 AAAAA급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2. 역사



2.1. 금나라원나라


만수산은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 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 m도 안 되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1153년 금나라 해릉양왕이 이곳 산기슭에 행궁을 짓기 시작했고,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대도(大都)로 천도하면서 대운하를 통한 조운을 원활히 하고 궁중의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1262년과 129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수감 곽수경에게 명해 옥천산의 샘물을 옹산 기슭에 막아 물을 끌어들여 서호를 준설 확대해 수역을 크게 늘리도록 했다. 이때 서호에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놓게 해 원래보다 크게 높아졌다.

2.2. 명나라


1497년 홍치제가 유모 조성부인(助聖夫人)을 위해 옹산에 원정사(圓靜寺)를 지었지만 나중에 폐사되었다. 그 후 놀기 좋아하던 정덕제는 이곳에 호산원(好山園)이라는 행궁을 건축하고 옹산을 금산(金山)으로 개칭했다. 정덕제가정제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천계제 시절 위충현이 호산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2.3. 청나라


이화원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건륭제의 치세 때였다.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생모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조영하도록 명령하고, 홍치제가 지었던 원정사 터에는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세우도록 했으며, 이듬해(1751)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라 개칭했다. 청의원은 은자 480만 냥을 쏟아 부어 공사한 끝에 1764년 완공되었다. 청의원 내에는 '바다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이 있다'는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곤명호 위에 남호도(南湖島), 단성도(團城島), 조감당도(藻鑒堂島)를 만들었고, 강남의 풍경과 원림을 좋아한 건륭제의 취향에 맞춰 항저우의 서호를 위시해 강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승지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황실원림으로 유명한 '3산 5원', 즉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향산(香山) 정의원(靜宜園)·옥천산(玉泉山) 정명원(靜明園)·만수산(萬壽山) 청의원(淸漪園)을 형성해 장관을 연출했으나 도광제 때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재정이 쪼들리면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다가 1860년(함풍 10)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3산 5원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 청의원의 목조 건축은 전소되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4], 청의원의 중건을 개시해 1884년(광서 10)부터 1895년(광서 21)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 개칭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 겨우 복구해놨지만 1900년(광서 26) 또다시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훼손되었다. 이때는 청나라가 몰락하던 시기였으므로, 1902년 서태후는 베이징에 돌아온 뒤 전산(前山)과 원내의 동쪽 부분만 재보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2.4.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이화원은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남았다가 1924년 선통제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북평시가 접수해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1951년부터 수차에 걸친 자금조달과 보수공사를 통해 원내의 대부분의 전각과 정원이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했다. 1961년 국무원은 이화원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3. 주요 건축



3.1. 전산(前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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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동궁문(東宮門)'''
이화원의 정문으로 앞에는 1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는데,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불렸다. 문 위에 걸린 '이화원' 세 글자의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소(東八所)가 있었다.

'''인수문(仁壽門)'''
이화원의 이중 궁문으로 편액은 한자만주어로 적혀 있다. 인수문 뒤쪽에는 정치활동구의 중심인 인수전이 있다. 원내의 양편에는 남북 9경방(九卿房)이 설치되어 있는데 청나라 대의 9경(九卿)과 6부(六部)의 수직실이다. 인수문 맞은편에는 태호석이 있는데 생김새가 노수성(老壽星)을 닮았다 해서 수성석(壽星石)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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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전(仁壽殿)'''
1750년(건륭 15)에 지어질 때는 근정전(勤政殿)이었다가 광서제 때 재건하면서 인수전으로 개칭했으며, 동향으로 된 정면 9칸의 전각이다. 서태후광서제는 이곳에서 정무를 돌보며 외국 사절과 그들의 부인을 접견했다. 인수전 앞에는 건륭제청동으로 주조한 봉황, , 항아리, 향로가 놓여 있는데, 중국 고대의 예제에 따르면 은 제왕을 상징하므로 가운데에 놓여야 하지만, 서태후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을 밀어내고 봉황을 가운데에 놓아 황제보다 우월한 서태후의 권력을 과시했다. 인수전 북쪽에는 연년정(延年井)이라는 이름의 우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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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자친(水木自親)'''
곤명호 북쪽에 자리한 수목자친은 물가 앞에 부두가 있고 5칸으로 된 천당전(穿堂殿) 형식 건물로 낙수당의 정문이기도 하다. 서태후는 수로로 이화원에 올 때는 이곳에서 내려 낙수당 침궁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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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당(樂壽堂)'''
전각의 명칭은 논어에 나오는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2중 정원의 사합원(四閤院)으로 좌우에 각각 곁채가 하나씩 있다. 광서제서태후는 이곳을 침궁으로 사용했다. 내부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낙수당 앞에 놓인 청동 사슴(鹿)·학(鶴)·병(甁)은 한자음을 빌어 '육합태평(六合太平)'을 상징한다. 낙수당 본채는 서태후가 일상적으로 활동하던 장소이고 서난각은 침실이며 동난각은 탈의실이다.

'''옥란당(玉蘭堂)'''
인수전 서쪽에 있는 호숫가에 자리한 사합원 형식의 건물로 1750년(건륭 15) 지어졌으며 광서제 때 중건된 황제의 침궁이었다. 이곳은 서태후가 이화원에서 광서제를 연금하던 장소로, 당시에는 정문 이외의 다른 통로는 벽돌로 막아 봉쇄했는데 그때 쌓았던 담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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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루(夕佳樓)'''
옥란당과 의운관 사이에 있으며 호숫가에 자리한 2층 건물이다. 청나라 황제와 황후들이 만수산고 곤명호의 경치를 완상하며 휴식하던 장소였다.

'''의운관(宜芸館)'''
옥란당 북쪽에 있으며, 건륭제 때는 도서를 보관하던 장서처였다가 광서제 때 중건하면서 황후의 처소가 되었다. 무술정변 이후 옥란당과 이어진 통로는 벽돌 담장으로 막혀버렸다. 광서제의 아내 효정경황후가 이곳에서 거주했다.

'''영수재(永壽齋)'''
영수재는 낙수당과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건물로, 서태후의 심복 환관인 이연영(李蓮英)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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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풍(揚仁風)'''
낙수당 서쪽 산중턱 소나무 숲 속에 있으며 건물의 평면과 지붕의 선이 부채꼴을 이루고 건물 앞에 깔린 한백옥석이 부챗살처럼 놓여 있어 선면전(扇面殿)이라고도 부른다.

'''덕화원(德和園)'''
면적 3천여 m²에 정원 3곳이 있는 덕화원은 대희루(大戱樓), 이락전(頤樂殿), 경선당(慶善堂) 등 건물로 이루어진 경극 관람용 건축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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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희루(大戱樓)'''
건륭제 때는 대희루 자리에 이춘당(怡春堂)이 있었다. 자금성의 창음각(暢音閣), 승덕 피서산장의 청음각(淸音閣)과 함께 3대 경극 공연 건축으로 꼽히는데 이들 중 대희루가 가장 크다. 1891년에 착공해 4년 만에 완공했는데, 높이 21 m, 아랫부분 무대의 너비 17 m로 상중하 3층 무대이다. 3층 무대는 동시에 공연을 할 수 있고, 무대와 무대 사이에는 '천정(天井)'을 설치하여 서로 통하게 했으며, 아래층 무대 밑에는 '지정(地井)'을 설치해 귀신과 신선에 대한 극을 공연할 때 이용했다. 이밖에 2층으로 된 분장루가 무대와 이어져 있어 배우들의 분장실로 제공되었다. 대희루가 완공된 뒤 서태후는 당대의 유명 경극 배우들을 불러들여 공연하도록 했는데 그 덕에 경극이 발탈하였으므로, 이곳을 경극의 요람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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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락전(頤樂殿)'''
대희루와 마주한 이락전은 서태후가 경극을 관람하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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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당(慶善堂)'''
덕화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경선당은 정면 5칸 전각으로 좌우에 각각 곁채가 하나씩 있다. 서태후가 극을 관람하다가 잠깐씩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다.

'''장랑(長廊)'''
건륭제가 어머니 효성헌황후의 산책을 돕기 위해 만든, 낙수당 서원(西院)에서 시작해 석장정(石丈亭)에서 끝나는 길이 728 m, 273칸짜리 길다란 회랑. 4계절을 상징하는 유가정(留佳亭)·기란정(寄瀾亭)·추수정(秋水亭)·청요정(清遙亭) 등 4개 정자가 부속되었다. 장랑의 들보에는 1만 4천여 폭 소식채화(蘇式彩畵)로 된 그림이 있는데, 항저우 서호의 풍경을 비롯해 꽃·나무·곤충·새·산수, <서유기>·<삼국지연의>·<수호지>·<봉신연의>·<요재지이> 등의 고전소설과 같은 다양한 소재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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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전(排雲殿)'''
만수산 남쪽 중턱에 위치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원래는 명나라홍치제가 세운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였다. 서태후가 이곳에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했다. 명칭은 '신선이 구름을 헤치고 나오니(神仙排雲出) 보이는 것은 금과 은으로 된 대였노라(但見金銀臺)'는 시구에서 비롯되었다. 자소전(紫霄殿)·옥화전(玉華殿)·방휘전(芳輝殿)·운금전(雲錦殿)의 4개 배전이 딸려 있으며 배운전 뒤쪽에는 덕휘전(德輝殿)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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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향각(佛香閣)'''
만수산 전산 비탈 높이 20 m에 기단을 쌓아 만든 41 m 높이 8각 4중 처마의 3층 목탑으로 이화원 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자 이화원 전경을 담은 사진에서 빼놓지 않고 나오는 건물이다. 강남의 황학루를 본떠서 지었는데,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이 자리에 '''9층탑'''을 지으려고 했다가 원안을 수정해 8층탑으로 변경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891년 서태후가 3층으로 중건되었다. 불향각 1층에는 1574년에 제작한 나무대비관세음보살(南無大悲觀世音菩薩)을 봉안했는데, 높이 5 m, 얼굴 12개, 눈 36개, 팔 24개가 달린 보살상으로 꽃잎 999장이 조각된 연화보좌 위에 서 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불향각과 보살상이 훼손당했지만 이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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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해(智慧海)'''
불향각의 뒤쪽, 만수산의 정상에 자리한 건물로 나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석재와 유약을 입힌 다양한 색깔의 벽돌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4개 벽에는 불감과 불상 1008좌가 장식되어 불교의 지혜가 무한함을 칭송하는 의미를 나타냈으나, 여러 전란을 거치면서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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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장(轉輪藏)'''
전륜장은 불향각 동쪽 산비탈에 보운각과 대칭으로 마주 서 있는 종교 건축이다. 가운데는 3층의 정전이고, 양쪽은 각각 장경정(藏經亭)과 연결되어 있다. 정자 안에는 전경목탑(轉經木塔)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티베트 불교의 법기(法器)를 건축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정전 앞에는 건륭제의 어필로 된 '만수산곤명호비(萬壽山昆明湖碑)'가 세워져 있다. 비문 뒷면에는 당시 곤명호를 파고 베이징의 수리를 조절한 상황에 대해 적혀 있다.

'''보운각(寶雲閣)'''
배운전 서편에 있으며, 겉보기에는 일반적인 정자와 다르지 않지만 모든 부재가 나무를 모방한 '''청동'''으로 지어져 일명 '동정(銅亭)'이라고도 불린다. 1755년에 청동으로 목구조물의 부재를 모방해 만들었다. 높이 7.55 m, 무게 207 t에 달하며,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이 이곳에서 황제와 황후를 위해 기도와 염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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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石舫)'''
곤명호 북단의 서쪽 호숫가에 자리한 배 모양의 건물이다. 길이 36m이고 선체는 거석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2층으로 되어 있다. 배의 내부는 꽃무늬 벽돌로 바닥을 깔았고 창문에는 채색유리를 상감했으며 천장은 벽돌 조각으로 장식했다. 1755년(건륭 19)에 건조된 석방은 건륭제가 곤명호의 경치를 감상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통치가 반석처럼 공고함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존의 석방은 1860년(함풍 10)에 훼손되었고, 현존하는 석방은 1894년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할 때 선체를 서양식으로 바꾸고 '강물이 맑고 바다가 평화롭다(河淸海晏)'는 의미를 취해 청안방(淸晏舫)으로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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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리관(聽鸝館)'''
장랑의 서쪽 구간 북쪽 만수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청나라 때 황제와 황후가 희곡이나 음악을 감상하며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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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유(畵中游)'''
불향각 서쪽의 건축군으로 3개의 정자(동쪽 정자는 차추정(借秋亭), 서쪽 정자는 애산정(愛山亭)), 누각 2채, 재 1채, 패방 1채로 구성되었다. 산세의 기복과 변화를 이용해 입체적인 평면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올라서면 만수산과 곤명호의 풍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어 마치 그림 속을 유람하는 듯하다고 화중유라 이름지었다.

3.2. 후산(後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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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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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가(蘇州街)'''
후호(後湖)의 중심에 있는 소주가는 건륭제 때 건설되었다. 강남 수상도시의 시장을 모방하면서도 베이징 시장의 특색을 겸비했으며, 한 줄기 물길을 따라 양안에 2갈래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총길이 약 300 m, 각종 점포 60여 곳이 줄지어 있지만, 황제와 황후가 경치를 감상하던 장소일 뿐 실제로 장사를 하진 않았다. 1860년에 영불 연합군이 침입하여 전소되었는데, 뒷날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할 때 소주가는 미처 보수하지 못했다. 지금의 모습은 1987~1990년에 재건한 것이다. 현재 이곳의 상점가에는 관광객을 위한 점포가 들어서서 청나라 때 동전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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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취원(諧趣園)'''
건륭제 때는 해산원이라 명명했다. 강소성 무석(無錫)의 기창원(寄暢園)을 모방한 것으로 강남 사가(私家) 원림의 특징을 지녔다. 가경제 때 개축하면서 건륭제의 <해산원팔경시서(諧山園八景詩序)>의 '일정일경(一亭一徑) 족해기취(足諧奇趣)'라는 구절을 따 해취원으로 개칭했다. 1860년에 전소되어 광서제 때 개축했다. 해취원 내에는 정자·대·전당·수상 정자가 연못을 둘러싸고 있으며 100칸 유랑(游廊)이 건물들을 연결하고 있다. 건륭제는 이곳의 시취(詩趣)·수취(水趣)·교취(橋趣)·서취(書趣)·정취(亭趣)·화취(畵趣)·낭취(廊趣)·방취(倣趣) 등 8취(八趣)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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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부주(四大部洲)'''
만수산 후산의 증축선 위에 자리한 대규모의 티베트 불교 건축군이다. 티베트 삼마야사(三摩耶寺)를 모방한 이 건축군에는 티베트풍과 한족풍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건축군은 1860년(함풍 10) 영불 연합군의 방화로 불탔고, 현존 건축군은 나중에 재건되었다. 주요 건물인 향암종인지각(香岩宗印之閣)에는 삼세 불상을 봉안했고, 주변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 우주론을 반영하여 동승신주(東勝身洲)·남섬부주(南贍部洲)·서우화주(西牛貨洲)·북구노주(北俱盧洲) 등 사대부루를 세웠으며, 각 부주의 양쪽에 소주(小洲)를 하나씩 만들어 8개 소부주라 한다. 전각의 남동·남서·북동·북서 모퉁이에는 백·흑·녹·홍 등 네 가지 색으로 라마탑이 있어 4범탑(四梵塔)이라 부르는데, 불교의 4지(四智)를 의미한다. 기타 부속 건물로 일광대(日光臺)와 월광대(月光臺)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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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각(花承閣) 다보유리탑(多寶琉璃塔)'''
화승각은 만수산 후산의 동부에 위치한 반원형으로 된 건축이었으나 1860년(함풍 10)에 파괴되고 현재는 다보유리탑 하나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높이 약 1 6m, 8면 7층 처마에 도금한 보정을 얹었고 탑신은 황·남·녹·백색 유리벽돌과 불상으로 장식했다.

3.3. 동제(東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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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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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각(文昌閣)'''
곤명호의 동제 북단에 위치한 성관(城館)식 건축이다. 관문 위에 십자형 2층 누각이 있고 누각 안에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도교에서 공명과 복록을 주관하는 문창성(文昌星)에서 명칭을 따왔는데, 만수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숙운첨(宿雲檐) 내에 안치한 무성(武聖) 관제(關帝)상과 대칭을 이루어 문무보정(文武輔政)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곽여정(廓如亭)'''
팔방정(八方亭)이라고도 부르며 17공교 동단에 위치한 8각 2중 처마의 정자이다. 안팎으로 24개의 원기둥과 16개의 사각기둥이 있다. 면적이 130여 km²에 달해 중국의 정자 건축 중에서는 가장 크다.

'''동우(銅牛)'''
17공교 동쪽에는 구리로 주조한 1마리가 꽃무늬를 조각한 석좌 위에 앉아 있는데, 수환(水患)을 줄이기 위해 1755년에 설치한 것이다. 의 등에는 전자(篆字)체로 <금우명(金牛銘)>이라는 명문이 있다.

'''야율초재사(耶律楚材祠)'''
거란 종실 출신으로 몽골의 네 칸을 섬긴 중신이었으며 제국의 기틀을 잡는데 큰 기여를 한 야율초재를 모신 사당으로 건륭제 때 개건했다. 정면 3칸이고 내부에는 청나라 때 만든 야율초재 채색 조각상이 있다.

3.4. 남호도(南湖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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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17공교(十七孔橋)'''
남호도와 동제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아치 17개가 있다. 길이 150 m, 너비 8 m이고 난간에는 돌사자 조각 544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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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묘(龍王廟)'''
남호도 복판에 자리한 용왕묘는 '광윤영우사(廣潤靈雨寺)'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서해 용왕 광윤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대에는 에게 비바람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 용왕묘를 세워 수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다.

'''함허당(涵虛堂)'''
남호도 북단의 호숫가에 있으며 산석을 쌓아 만든 높은 대 위에 건축되었다. 건륭제 때는 강서성의 등왕각(滕王閣)을 모방한 망섬각(望蟾閣)이라는 3층 건물이었지만 광서제 때 중수하면서 단층으로 바꾸었으며, 곤명호 건너편의 불향각과 마주본다.

3.5. 서제(西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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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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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호교(界湖橋)'''
곤명호와 후호를 나누는 경계에 있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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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대교(玉帶橋)'''
서제의 6개 다리 중 유일한 아치형이라 그 밑으로 배가 다닐 수 있다. 옥대교는 곤명호로 물이 흘러드는 수로로, 청나라 때 황제와 황후가 배를 타고 곤명호에서 옥천산으로 들어가려면 이 다리 밑의 수로를 거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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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풍교(豳風橋)'''
이중 처마의 장방형 누각 다리이다. 붉은 기둥에 잿빛 기와를 얹고 처마는 채화로 장식했다. 원래 이름은 상저교(桑苧橋)였으나 광서제 때 <시경>의 빈풍(豳風)이라는 시를 인용해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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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루(景明樓)'''
서제의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호남성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를 모방한 건물이다. 가운데 건물은 2층이고 좌우 양쪽에 곁채가 부속되었다. 명칭은 북송의 범중엄이 쓴 <악양루기(岳陽樓記)>의 "화창한 봄날 경치 아름다운데(春和景明) 물결이 잔잔하여(波瀾不惊) 하늘과 일색을 이루니(上下天光) 실로 벽파가 만경이로다.(一碧萬頃)" 하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1860년(함풍 10)에 전소되었다가 1992년에 중건되었다.

'''경교(鏡橋)'''
건륭제 때 만들어진 후 광서제 때 중건되었다. 명칭은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시 <추등선성사조북루(秋登宣城謝眺北樓)>의 '두 줄기 강물은 거울이 되어 서로 비추고(兩水夾明鏡) 두 다리는 무지개를 늘어뜨려 놓은 것 같네(雙橋落彩虹)'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4. 기타


청말 민국초의 문학가, 고고학자였던 왕궈웨이는 곤명호에 투신자살하였다.
천안문 6.4 항쟁을 다룬 로예 감독의 영화 <여름궁전>의 원제도 이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영어 이름이 Summer Palace였고 그게 한국에 넘어오면서 역으로 여름궁전으로 번역된 것.
이화원은 여름에 간다면 평범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겨울에 가면 그렇지 않다. 엄청난 추위 때문에 호수가 전부 얼어붙는다. 그래서 빨리 건너가겠다고 다리 대신 그냥 호수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다.[5] 다리 밑을 그냥 지나갈 수 있는데, 유적을 파손하는 건 아니어서 그런지 공안이 달려와서 잡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6]
베이징 지하철 4호선, 베이징 지하철 시자오선을 이용해 올 수 있다.

5.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해군 경비가 유용되었다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당시 청의 1년치 예산의 30%인 은 3천만 냥을 마구 쏟아부은 건 비판의 대상.'''[5] 베이징의 겨울 추위는 한국이랑 차원이 다르다. 위도상 신의주보다도 살짝 높은 곳에 있다.[6] 오히려 베이징 시민들의 겨울철 스케이트 장소로 애용된다. 외국 여행사이트를 보면 겨울에 베이징에서 할 만한 것으로 추천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