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황궁

 

[image]
伪满皇宫博物院
1. 개요
2. 주요 건물
2.1. 즙희루(輯熙樓)[1]
2.2. 근민루(勤民樓)
2.3. 동덕전(同德殿)
2.4. 궁내부사합원(宮內府四合院)
2.5. 창춘헌(暢春軒)
2.6. 식수헌(植秀軒)


1. 개요


만주국황궁.
위만왕의 황궁이라는 뜻은 아니고 중국에선 국민정부 시기부터 만주국에 있어서 앞에 거짓 위(僞)자를 붙여서 괴뢰국이라는 의미로 위만주국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만주국군도 위만주국군이라 부른다.
1932년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에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의 황제였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가 1945년 만주국을 해산시키기 전까지 거주한 황궁으로 지금의 지린성의 성도인 창춘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길림-흑룡강 교통국 청사였다가 만주국이 들어서면 만주국의 집정부였다가 푸이가 제정으로 바꾸면서 황궁이 된 케이스로 푸이는 만주국이 설립된 1932년부터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궁전은 크게 푸이가 공무를 보던 외정과 일상생활을 하던 내정으로 나뉘며, 주된 건물로는 황색 유리기와로 지붕을 장식한 근민루, 즙 희루, 동덕전 등이 있다. 모두 규모는 크지 않으나 중국 고유의 건축 양식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스타일을 하고 있다.
만주국이 해체된 후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962년 지린성에서 이곳에 위만황궁박물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만주국의 유물과 문서 등 당시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일부에는 고구려, 요나라, 금나라 등 중국 동북지방에 세워졌던 여러 국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사실상 중국의 마지막 황제라 할 수 있는 푸이 한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푸이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되어있다.

2. 주요 건물


[image]

2.1. 즙희루(輯熙樓)[2]


[image]
중국 전통 건축 양식과 러시아 건축 양식이 절충된 2층 건물로 정문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나오는 건물로 근민루와 함께 본래는 1913년 세워진 옛 길림-흑룡강 교통국 청사로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집정관이었던 푸이와 그 가족들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내부는 그 당시 그대로 복원되어 푸이와 그의 정실인 완용의 침실 외도 한약재를 모아둔 약실과 이발실 등이 그당시의 모습을 잘 구현했고, 푸이와 그 가족들을 본딴 밀랍인형으로 당시 생활사를 재현하고 있다. 즙희루 앞엔 중국어로 9월 18일을 "잊지 말자"[3]는 한자가 새겨진 비석이 놓여져 있는데 1931년 9월 18일은 만주사변이 벌어진 날이다. 하지만 2019년에 해당 비문이 철거되었다.

2.2. 근민루(勤民樓)


[image]
중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서양 건축 양식이 절충된 형태로 출입구 위로 녹색 돔이 걸쳐있고, 한가운데 푸이를 상징하는 복숭아 나무가 심어져 있는 중정이 있는 사각형의 2층 건물로 본래는 즙희루와 함께 옛 길림-흑룡강 교통국 청사로 1913년에 지어졌고, 1932년 만주국이 출범하면서 집정부로 사용되었고 이후 제정으로 이행되면서 편전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내부는 1층부터 일본의 침략과정을 보여주는 사진과 기록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일본·만주 의정서를 체결한 방이 보존되어 있고, 2층은 푸이의 집무실, 고관대작들을 접견하는 근민전, 관동군 중장 요시오카 야스나오의 집무실 등이 그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으며 동덕전과 연결된 통로가 있다.

2.3. 동덕전(同德殿)


[image]
중국 전통 건축 양식이 강하게 드러난 2층 건물로 1937년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 시공되어 1938년에 완공되었고 푸이와 그의 측실들이 거주할 곳이었으나 정작 푸이는 관동군이 도청장치를 설치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면서 거주하지 않고 그의 후궁들 중 한 명이었던 한족 출신의 복귀인(福貴人) 리위친(李玉琴)이 거주했다. 내부는 화려한 인테리어로 꾸며졌는데, 1층은 연회장과 접견실이 있으며 2층은 이위친의 방과 일본 전통 양식으로 된 일본관과 영화관, 당구장 등이 있다.

2.4. 궁내부사합원(宮內府四合院)


[image]
중국 전통건축양식의 단층 전각으로 근민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주국의 궁내부가 있던 곳으로 집정부의 일부였으나 1934년 3월 1일 제정으로 전환됨에 따라 궁내부로 바뀌었다. 현재는 만주국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는 곳이다.

2.5. 창춘헌(暢春軒)


[image]
중국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 벽체가 벽돌조로 되어 있으며 푸이의 누이가 거처하다가 이후 푸이의 만주국 황제 즉위 때 방문한 친부인 순친왕이 잠시 체류하였고, 푸이의 측실인 탄위링이 상귀인(祥貴人)으로 책봉되어 입궁한 뒤에는 그녀의 주요 활동 장소가 되었다. 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뜬 뒤에도 이곳에 안치되었다.

2.6. 식수헌(植秀軒)


1930년대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중국 전통건축양식의 전각으로 처음엔 푸이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동덕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푸이의 비자금을 보관했던 곳으로 이후 푸이의 누이 부부가 결혼 후에 살았고 이후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활용되었다.

[1] '집'희루는 오타다. 푸이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듯 저 건물명은 시경의 문왕편에 나오는 구절인 "於緝熙敬止(오즙희경지)"에서 따온 것이다. 한자 '집(緝)'자는 이 문장에서 '즙'으로 읽힌다.[2] '집'희루는 오타다. 푸이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듯 저 건물명은 시경의 문왕편에 나오는 구절인 "於緝熙敬止(오즙희경지)"에서 따온 것이다. 한자 '집(緝)'자는 이 문장에서 '즙'으로 읽힌다.[3] 勿忘"九.一八". 강택민의 글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