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image]
'''활동 시기'''
1941년-1945년
'''병력 수'''
80,000명 ~ 800,000명
'''한국어 정식명칭'''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군과 파르티잔 분견대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정식명칭'''
Narodnooslobodilačka vojska i partizanski odredi Jugoslavije
'''이념'''
공산주의,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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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왕국 멸망 이후,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활동하던 저항 운동 조직이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끌었다. 추축국, 특히 나치 독일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최대 적으로 규정했다. [2] 나중에 파르티잔과 권력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추축진영에 협력하자 적대 관계가 되었다. 1943년, 티토와 파르티잔들은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의 독립을 선포하였고, 파르티잔은 유고민주연방의 지휘 아래 놓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 바뀐다.
추축국에 대항하는 저항 조직으로 대부분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이 많이 알려져있지만, 추축군에 저항하던 저항군들 중 가장 강력했고, 뛰어난 조직력을 보인 저항군이었다. 그냥 파르티잔 수준을 넘어서 전차, 심지어 소수였지만 공중 장비[3]들에 해군[4]도 보유했을 정도로 반 나치 저항군 중 가장 거대했던 저항군이였다.
초기의 파르티잔은 농민, 탈영병, 광부, 신문기자, 경찰등의 별볼일 없는 전투력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이었다. 하지만 독일 침공 이후 유고슬라비아 정규군의 30%이상이 합류하였고 무기도 좋아져서 MG42, 3호 전차, 박격포등을 운영하였다. 전쟁 말기이던 1944년 하반기에는 군부대 4개, 사단 52개, 총합 80만여명에 달하는 규모로 늘어났다. 저항군 주제에 아예 노획 전차로 독립 편재된 기갑부대를 운용했을 정도로 소뮤아 S-35에 6파운더를 달거나 스튜어트 차체에 노획한 PaK 40을 통째로 올리는 등 등 온갖 해괴한 마개조 기갑장비들을 운용해 소수 밀덕들 사이에서 컬트적 인기를 얻을 정도이다.
이 80만이라는 규모가 잘 실감이 안 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21세기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규군이 약 50만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실감 못하겠지만 대한민국은 결코 인구가 적은 소국이 아니며(주변 미일러중이 모두 인구대국이라 그렇지...) 거기다 징병제까지 실시하기에 동원할 수 있는 거대한 군조직이 국군이다. 대략 50만이라는 이 수치는 2019년 기준 무려 세계 8위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전 국토가 적대 세력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일개 저항군, 비정규군이 80만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현재 기준으로 세계 6위의 병력이며 90만인 러시아군과 비슷한 수준... 물론 파르티잔에는 중년, 여성과 미성년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긴 한다. 그래도 이쯤 되면 2차대전에서는 비정규군 중에선 굉장히 강성한 편인 폴란드 국내군과 프랑스 레지스탕스도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며,거의 정규군 클래스에 들어가는 수준이다. 저항군의 상징과도 같은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프랑스 정부 공인으로 약 22만명,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폴란드 국내군은 20-60만 정도로 보통 4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쯤 되면 티토가 저 80만 대군에게 보급은 어떻게 했는지 신기할 지경이며 그 냉혈한 스탈린이 동유럽을 통째로 괴뢰화하는 와중에도 유고를 괴뢰화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갈 정도이다.
그러나 냉전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내전으로 해체, 붕괴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숙청되었던 체트니크, 우스타샤 등은 귀신처럼 부활하였고, 당시까지 생존하였고 정계나 인민군 내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던 파르티잔 출신 인물들도 출신 민족과 국가에 따라 갈라져 내전에 참전하게 되었다.[5] 당장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인 프란뇨 투지만과 제2대 대통령인 스테판 메시치의 경우만 하더라도 파르티잔 출신이었으며 유고슬라비아 내전 초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지휘했던 벨리코 카디예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국방장관 역시 파르티잔 소속으로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이었고, 보스니아 전쟁 당시 학살 범죄자로 알려진 라트코 믈라디치 역시 과거 본인의 부친과 일가 친척들이 파르티잔 소속으로 우스타샤와 나치 독일군과 싸운 이력이 있었다. 민족 정체성 때문에 자신들이 격파하였던 적대세력들과 한편이 되고, 옛 파르티잔 동지들에게 총탄을 난사하게 되는 끔찍하고 잔혹한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물론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밀로반 질라스[6] 전 부주석처럼 유고 연방 유지와 각 공화국간 평화협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유고슬라비아가 내전과 민족/종파 대립으로 조각나는 상황에서 평화주의를 추구하던 일부 유고 정계내의 파르티잔 인사들도 없지는 않았다.


[1] 그림 속의 대원은 국기로 보아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추정된다..[2] 이 설명과 달리,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이 딱히 제대로 협력관계를 가진 적은 없다. 티토와 미하일로비치가 합동 반독전선을 위한 회담까지 가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은 상반되는 노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회담은 결렬되어 버린다.[3] 초기에는 연락기나 정찰기 몇기가 전부였지만 후반에는 추축군에게서 노획한 '''슈투카'''까지 운용한다. 유고군 도장을한 슈투카는 모델러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하다.[4] 달마티아 해안가는 수백개에 달하는 유인도와 무인도가 존재했고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추축국 진영이 이 도서 전체를 통제하는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파르티잔 해군 조직은 초기에는 몇몇 도서 지역에서 나중에는 연합군이 장악한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주로 해상을 통한 후방 잠입, 습격과 사보타주 등을 수행했다.[5] 알렉산다르 란코비치와 에두바르트 카르델 등 티토 정권 시기 고위직을 지냈던 파르티잔 출신의 유고 지도부 인사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전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노환으로 사망했으므로 제외.[6] 파르티잔 시절부터 티토의 최측근이었으며 열렬한 공산주의자였으나,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반공주의자로 전향해 오랜 수감 생활을 거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정권적 행보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지 '유고슬라비아'라는 통합 국가 자체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