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코 믈라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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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전 당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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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체포된 이후의 사진. 오랜 도피 생활로 인해 굉장히 수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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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네덜란드 재판소에서의 모습 )
'''발칸의 도살자'''(The butcher of the Balkans)[1]
보스니아 전쟁 당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상급대장이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일으킨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내전의 최고위 전범 3명 중 한 명이었다.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체포됨으로써 현재 구속 상태에 있다. 2017년에 종신형으로 선고하였다. (링크)
1943년 3월 12일 당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일부이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믈라디치가 3살이던 1945년에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우스타샤 대원에게 사살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61년 군사 학교에 입학하여 1965년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는데 당시 최연소 지휘관이었다고 하며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에 입당하였다. 군사적 재능은 괜찮았던지 진급을 거듭하여 1991년에는 부군단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믈라디치와 군생활을 같이 했던 이들의 회고에 의하면 믈라디치는 운동과 사격에 재능이 있던 촉망받는 장교였다고 한다. 그는 열성당원이었던 데다 군사적 재능이 뒷받침되어 안정적으로 군 경력을 쌓아 나갔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대세르비아주의, 그리고 세르비아 내 방송국들이 유고슬라비아 내 타 공화국들을 비방하는 저열한 선동을 이어나가고 갈등의 씨앗이 뿌려지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 탈퇴를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밀로셰비치는 연방 분열을 막기 위해 기용할 인물로 믈라디치를 선택했고 믈라디치는 1992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의 참모장으로 영전했다.
여기까지야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분리독립 막겠다고 전쟁 벌이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방법이었는데, 초장부터 적극적으로 보슈냐크인들을 학살, 추방, 억압하면서 기를 꺾는 전략을 사용했다. 특히 그의 악명을 높인 사건이 바로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최악의 집단 학살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이 학살은 그가 저지른 가장 큰 학살일 뿐, 그것만 저지른 게 아니라는 점에서 얼마나 악질인가를 알 수 있다. 라도반 카라지치와 손을 잡고 보스니아에서 얼마나 많이 사람을 죽여댔는지 사라예보에서는 2020년 지금도 일가족 전체가 죽은 시체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1만여 명의 민간인들을 사망하게 만든 1993년 사라예보 포위전에도 관여한 바 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저격과 포격을 가했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군과의 교전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결국 협상을 시작한다.
그러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수도 사라예보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시민들을 학살함으로써, 우세한 여론을 등에 업은 NATO가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으로 명명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면 공습을 개시했다. 8월 경에 시작된 NATO 소속 항공기들은 사라예보 일대에 배치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야포 진지와 물자 집적소, 통신시설을 집중 폭격해서 싸그리 죽여버렸으며,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의 핵심 시설도 덩달아 폭격의 대상이 되어 이로서 스릅스카 공화국의 진격은 저지당했다. 정작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다고 하지만, 이 전쟁에 대한 NATO의 적극 개입 의지가 제대로 천명된 셈이었다. 이에 세르비아계는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실 폭격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고작 6발밖에 안 투하하는 등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스릅스카 공화국의 수장 라도반 카라지치[2] 가 이제 미국놈들에게 보여 줄 예의는 없다고 선포하며 반발심만 커지게 만드는 등 악효과만 끼쳤다. 여기에 세르비아 민병대가 2대의 NATO 항공기를 격추하면서 사기만 잔뜩 올려주고 말았으나, 다시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이를 완전히 뒤집은 셈이다.
믈라디치는 UN군 포로들을 전략 거점에 묶어서 인간 방패로 삼았고 프랑스 평화유지군 사령관이자 UN군 사령관 베르나르 잔비엘 장군에게 '폭격을 계속하면 보스니아 민간인들과 UN군 포로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이미 여론은 세르비아에 불리하게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이 선고 이후에 전세계는 이른바 "정의의 승리"라면서 이 결정을 환호했다. 그러나 이번 선고 직후 믈라디치 아들 다르코 믈라디치는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 모두 2020년 현재 항소심 재판 중이다.
▲ 내전 당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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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체포된 이후의 사진. 오랜 도피 생활로 인해 굉장히 수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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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네덜란드 재판소에서의 모습 )
1. 개요
'''발칸의 도살자'''(The butcher of the Balkans)[1]
보스니아 전쟁 당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상급대장이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일으킨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내전의 최고위 전범 3명 중 한 명이었다.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체포됨으로써 현재 구속 상태에 있다. 2017년에 종신형으로 선고하였다. (링크)
2. 행적
2.1. 내전 이전
1943년 3월 12일 당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일부이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믈라디치가 3살이던 1945년에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우스타샤 대원에게 사살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61년 군사 학교에 입학하여 1965년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는데 당시 최연소 지휘관이었다고 하며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에 입당하였다. 군사적 재능은 괜찮았던지 진급을 거듭하여 1991년에는 부군단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믈라디치와 군생활을 같이 했던 이들의 회고에 의하면 믈라디치는 운동과 사격에 재능이 있던 촉망받는 장교였다고 한다. 그는 열성당원이었던 데다 군사적 재능이 뒷받침되어 안정적으로 군 경력을 쌓아 나갔다.
2.2. 유고 내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대세르비아주의, 그리고 세르비아 내 방송국들이 유고슬라비아 내 타 공화국들을 비방하는 저열한 선동을 이어나가고 갈등의 씨앗이 뿌려지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 탈퇴를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밀로셰비치는 연방 분열을 막기 위해 기용할 인물로 믈라디치를 선택했고 믈라디치는 1992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의 참모장으로 영전했다.
여기까지야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분리독립 막겠다고 전쟁 벌이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방법이었는데, 초장부터 적극적으로 보슈냐크인들을 학살, 추방, 억압하면서 기를 꺾는 전략을 사용했다. 특히 그의 악명을 높인 사건이 바로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최악의 집단 학살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이 학살은 그가 저지른 가장 큰 학살일 뿐, 그것만 저지른 게 아니라는 점에서 얼마나 악질인가를 알 수 있다. 라도반 카라지치와 손을 잡고 보스니아에서 얼마나 많이 사람을 죽여댔는지 사라예보에서는 2020년 지금도 일가족 전체가 죽은 시체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1만여 명의 민간인들을 사망하게 만든 1993년 사라예보 포위전에도 관여한 바 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저격과 포격을 가했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군과의 교전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결국 협상을 시작한다.
3. 보스니아 내전
그러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수도 사라예보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시민들을 학살함으로써, 우세한 여론을 등에 업은 NATO가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으로 명명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면 공습을 개시했다. 8월 경에 시작된 NATO 소속 항공기들은 사라예보 일대에 배치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야포 진지와 물자 집적소, 통신시설을 집중 폭격해서 싸그리 죽여버렸으며,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의 핵심 시설도 덩달아 폭격의 대상이 되어 이로서 스릅스카 공화국의 진격은 저지당했다. 정작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다고 하지만, 이 전쟁에 대한 NATO의 적극 개입 의지가 제대로 천명된 셈이었다. 이에 세르비아계는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실 폭격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고작 6발밖에 안 투하하는 등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스릅스카 공화국의 수장 라도반 카라지치[2] 가 이제 미국놈들에게 보여 줄 예의는 없다고 선포하며 반발심만 커지게 만드는 등 악효과만 끼쳤다. 여기에 세르비아 민병대가 2대의 NATO 항공기를 격추하면서 사기만 잔뜩 올려주고 말았으나, 다시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이를 완전히 뒤집은 셈이다.
믈라디치는 UN군 포로들을 전략 거점에 묶어서 인간 방패로 삼았고 프랑스 평화유지군 사령관이자 UN군 사령관 베르나르 잔비엘 장군에게 '폭격을 계속하면 보스니아 민간인들과 UN군 포로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이미 여론은 세르비아에 불리하게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3.1. 전후와 재판
보스니아 전쟁은 세르비아의 패배로 끝났고 결국 라트코 믈라디치는 1995년 인종학살 혐의로 ICTY에 전범으로 기소됐지만 종전 직후 가족과 일부 치안부대의 지원을 받아 잠적했다. 잠적한 후 곳곳에서 믈라디치를 보았다는 증언이 잇따르면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자치령인 스릅스카 공화국 등이 믈라디치를 비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수차례나 제기되었다.[3] 그러나 16년간 도피 생활을 이어가던 믈라디치는 결국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로부터 100㎞ 떨어진 북부 라자레보 마을에 있는 사촌의 집에서 발견되었고 세르비아 당국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긴 시간 진행된 재판에서 유엔 산하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전범재판소(ICTY)는 2017년 11월 22일에 믈라다치가 1992부터 1995년 보스니아 전쟁 당시 각종 잔학행위와 인권유린, 전쟁범죄 등을 저질렀다며 종신형을 선고했다.당연하지, 당신 딸은 살해당했다. '''당신의 더럽고 치졸한 범죄가 당신 딸을 살해했다.'''
- 자신의 딸, 아나 믈라디치가 적군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하자 담당검사가 냉정하게 말하며
이 선고 이후에 전세계는 이른바 "정의의 승리"라면서 이 결정을 환호했다. 그러나 이번 선고 직후 믈라디치 아들 다르코 믈라디치는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 모두 2020년 현재 항소심 재판 중이다.
4. 관련 문서
[1] 인종, 종교 갈등으로 인해 세계의 화약고란 오명이 붙은 발칸 반도답게 이 별명를 가진 사람들로는 비단 이 믈라디치뿐만이 아니다. 우스타샤 정권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벨리치, 유고 내전을 일으킨 주범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믈라디치를 직접 통제하는 위치에 있던 스릅스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라도반 카라지치 등도 모두 발칸의 도살자라고 불린다.[2] 처음에는 임시주석이었다가 얼마 안 가서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으로 관직명을 바꿨다.[3] 내전 특성상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고,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전쟁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