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독립국
[clearfix]
1. 개요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 이탈리아 왕국의 괴뢰 국가이다. 우스타샤의 학살로 유명하다.
2. 상세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공격한 뒤 1941년 4월 10일에 설치되었다. 이 나라는 1941년 5월 19일 로마 협정에 따른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며 이탈리아 태생의 아오스타 공 아이모네(Tomislav II, 토미슬라브 2세)를 왕으로 모시는 군주국으로 1943년 9월 8일에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정부의 실권은 극우 파시즘 조직인 우스타샤와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쥐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동 주권 영토였으며, 이탈리아는 이탈리아군이 통제하는 지역에서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 이탈리아의 '우리 바다'(Mare Nostrum)라는 국토 회복주의의 일환으로 중부 달마티아(구 베네치아 영토)는 이탈리아령으로 귀속되었다. 전쟁 후에는 크로아티아령 여러 섬이 되었다. 1943년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은 종식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통제 지역을 흡수하여 항공기, 중화기, 중장비 등을 확보하여 잠시 동안 옆그레이드.
2차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점령되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나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정권과 크로아티아계 가톨릭이 우스타샤 민병대를 이용하여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을 41년-45년까지 75만명을 학살했다. 게다가 당시 가톨릭계는 이걸 실드쳐 주기도 했다! 반면에 크로아티아인은 나치 독일이 고트족의 후예라며 실드쳐 주었기 때문에 학살을 면했고, 도리어 대다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나치에 협력하였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홀로코스트 수용소도 야세노바츠 절멸수용소를 필두로 노동수용소까지 포함하면 크로아티아 독립국 영내에 세워진게 꽤 되었다. 유고 내전 때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의 연방 이탈을 무력으로 저지하려고 들었던 것도 크로아티아 내부의 세르비아인이 학살당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1][2]
3. 경제
나라가 지속되는 동안 크로아티아의 경제는 매우 나빴는데, 국가가 독일 제3제국 안감공급에 대해 전체 예산의 대부분을 부담해야 했다. 또한 전쟁중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해군력과 조선소를 비롯한 것들을 빼앗거나 마음대로 썼다. 그중 일부 지역은 지형을 이용해 농업이 발달해 그나마 나은 곳도 있었지만, 그것도 크로아티아 국민해방운동(유고슬라비아 레지스탕스의 일종)의 게릴라전술이나 지역 점령으로 인한 통제 하에 교통 노선이 막히는등 경제적 이득에 상당한 피해를 본다. 또한 이탈리아는 자국에 부족한 자원[3] 을 뺏어가기도 했는데 독일이 뺏지 말라고 해도 들을 리는 없었기에.. 크로아티아의 연간 보크사이트 수요는 최소 50만톤 정도였는데, 이는 독일 전체 알루미늄 수요의 무려 '''40퍼센트'''이상을 차지했기에 독일에게 매우 중요했다. 전쟁 이후, 산업의 일부가 독일에게 배치되었는데 전쟁 중 매우 중요한 제철소 중 한곳이었다.
또한 철도는 크로아티아 국영 철도로 유고슬라비아가 짓던걸 계승해 1941년 설립했다.
도시의 주민들은 가난했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처했다. 수입의 증가를 동반하지 않은 높은 인플레이션이 일자 국가는 실업자에게 출근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독일의 총 근로자 수(실업률 등)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는데, 독일에 의해 강제 노동으로 끌려간 사람이 20만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식량을 숨기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었고 가격 인상은 필요한 경우 심각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졌다. 덕분에 농민들은 제한된 가격으로 농산물 흑자를 크로아티아 국가에게 판매하는 대신 암시장에 팔았고, 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다.
통화정책은 크로아티아 국립 은행에 의해 결정되었다. 1941년 7월 8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100개의 지폐로 분할된 가치인 쿠나를 통화 수단으로 도입했다. 유고슬라비아 통화였던 디나르와의 교체는 11월 1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되었고, 크로아티아 법원은 1쿠나의 가치가 금 약 17.921mg에 대응한다고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