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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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나치 독일

일독이 방공 트리오(日独伊防共(にちどくいぼうきょうトリオ)
발표: 1938년 5월
작사: 나가타 미키히코(長田幹彦(ながたみきひこ)
작곡: 아베 타카오(阿部武雄(あべたけお)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일본 제국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이탈리아 왕국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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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좋은 세 나라((なかよし三国(さんごく)》[1]
한국어: 추축국
한자: 樞軸國
영어: Axis powers
중국어: 轴心国(zhóuxīnguó)
일본어: 枢軸国(すうじくこく)
독일어: Achsenmächte
이탈리아어: Potenze dell'Asse
헝가리어: Tengelyhatalmak
루마니아어: Puterile Axei
불가리아어: Страните от Оста
슬로바키아어: Štáty Osi
크로아티아어: Sile Osovine
핀란드어: Akselivallat
태국어: ฝ่ายอักษะ
1. 개요
2. 유사 사례
3. 과정
4. 상세
4.1. 결속력
4.2. 전체주의 국가 동맹으로서의 추축국
4.3. 유엔의 '적국' 조항
5. 전쟁 이후
6. 가입국
7. 추축국이 점령한 지역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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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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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러 아돌프 히틀러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덴노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axis)"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다.'''

베니토 무솔리니, 1936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세계정복을 시도한 진영'.[2] 1940년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3국이 체결한 삼국 동맹 조약으로 시작되었으며, 대표적인 저 세 국가를 따로 삼국 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이디어는 헝가리 왕국의 쥐울러 굄뵈시(Gyula Gömbös) 총리가 내었으며, 추축국이라는 명칭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발언에서 유래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상호 협정으로 두 나라가 국제 정치의 중심축(추축)이 된다는 각오가 담긴 이름이다.
한자로는 樞軸國이라고 표기하며, 영어로는 Axis powers라고 한다. Axis alliance, Axis nations, Axis countries라고도 하며 간단하게 Axis라고도 표기한다.

2. 유사 사례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독일이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서 패전했으며, 당시의 협상국을 연합국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당시의 독일측 국가를 추축국, 그들의 군대를 추축군이라고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때의 독일은 속칭 제2제국으로 불리는 독일 제국이며 옆동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등이 한편이었고, 이탈리아와 일본이 반 독일 세력에 섰다. 그래서 영문 명칭은 Central Powers라고 부르며, 국가는 중앙(유럽)국, 동맹국으로, 군대는 중앙(유럽)군, 동맹군으로 부른다.

3. 과정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 추축국으로 맺어진 과정.
맺어지는 과정도 상당히 드라마틱했는데, 일본 제국만 하더라도 초기에 나치 독일과 맺어지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거셌다.

3.1.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은 이 추축국의 리더에 해당하는 나라였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이후 독일은 자국의 재군비에 제동을 거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노골적으로 재군비 준비를 하였고, 급기야 1936년 3월에 라인란트 재무장으로서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하며 재군비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이 무렵까지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이 3나라 사이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적이라 하기도 그렇고 동맹이라고 하기도 그런 미묘한 관계였다.
일본이야 이미 1933년에 독일과 같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막장으로 가기로 결심한 나라였지만 문제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여전히 국제연맹에 잔류하면서 나름대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다. 특히 베니토 무솔리니는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히틀러를 탐탁찮게 생각했으며,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자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영국, 프랑스와 스트레사 체제를 결성하여 "만약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고 엄포를 놓으며 독일에게 강경하게 대응했다. 아무리 반쪽짜리 유사 열강 이탈리아라지만 이제 막 재무장을 시작한 독일이 지금 이탈리아에게 덤벼들면 어떻게 될 지는 자명했고 결국 히틀러가 한발 물러나면서 전쟁은 피했다.
그러나 1931년에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이후로 점점 국제 왕따가 되어가던 일본과 1936년에 재군비 선언으로 역시 국제 왕따가 되어가던 나치 독일은 서서히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고, 같은 왕따끼리 힘을 합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특히 독일이나 일본이나 모두 강력한 반공 국가였는데, 두 나라 사이엔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국이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팽창을 같이 힘을 합쳐 견제하자는 발상을 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1936년에 독일과 일본 두 나라는 방공 협정을 체결해 사실상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이탈리아가 슬슬 꼽사리를 끼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스트레사 협약 체결로 영국, 프랑스와 대독일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1935년 영국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몰래 단독으로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인정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기껏 대독일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했더니 영국이 그걸 먼저 깨버렸다고 판단하여 대독일 공동 대응 전선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탈리아는 스트레사 체제로 독일을 영프이 공동의 적으로 만들어 놓으면 이탈리아가 노리고 있던 에티오피아를 침공해도 영프가 개입하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1936년 전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는데 이 에티오피아 침공이 국제적으로 비난 여론을 받아 이탈리아 역시 국제 왕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비난한 국가들에는 이탈리아가 대독일 동맹국이라고 생각한 영국과 프랑스도 있었고 배신감을 느낀 이탈리아는 결국 영국, 프랑스에 대한 기대를 접고 독일에게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도 1937년에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했고, 그 해 11월 6일에 방공 협정에 가입해 사실상 추축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했던 이탈리아가 한 편이 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결국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병합했고 같은 해엔 수테텐 지방 병합을 구실로 아예 체코슬로바키아까지도 모두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 약해 빠진 평화주의자인데다 독일에 다소 우호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이었고 또 이탈리아까지 독일의 편을 들어준 덕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모두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독일은 이탈리아의 쥐트티롤 등지 영유권을 인정했고 무솔리니는 그걸 이용해 쥐트티롤의 이탈리아화를 단행하게 된다.
그리고 1939년에 독일은 이탈리아와 강철 조약을 맺으면서 다시 한 번 우의를 다졌다.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이 3국은 소련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동맹을 구상했지만,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왜냐하면 독일이 소련과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어 이 추축국들 사이에서 분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독소 불가침 조약의 문제는 독일이 소련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이탈리아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독소 불가침 조약 방침을 사전에 통보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리벤트로프의 독단으로 스탈린과 접촉하고 조약을 맺어버렸으니, 일본과 이탈리아 내에서는 엄청난 반발이 생긴 것.[3]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사건이었다. 이미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영국, 미국 등과 척을 지게 된 상황에서 일본이 추축국을 이탈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이탈리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이 삼국은 영국, 미국 등에 대항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힘을 합치자고 뜻을 모으게 되었고, 결국 1940년 9월 27일에 정식으로 삼국 동맹 조약을 맺어 추축국을 공식적으로 결성하게 된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 직후에도 독일은 매우 당황하긴했으나 선제적으로 미국에 선전포고함으로서 추축국은 유지되었다.

3.2. 일본 제국


일본은 이 추축국 멤버 중 유일한 아시아 국가이자 유럽 외 국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협상국 측으로 참전해 승전국 대열에 끼긴 했지만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전리품 분배 몫이 매우 적었다. 그것도 이유가 있는 것이 당시 일본은 협상국 측에 줄 선 덕에 전승국이 되었을 뿐 전쟁에서 한 발 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본은 중국 산동반도 일대에 주둔 중이었던 독일군과 전투한 뒤로 대부분은 협상국 측에 물건 팔아먹어 돈 벌기에만 골몰했다.[4]
그러나 당시 1차 대전의 주 전선은 유럽이었고, 독일로서는 한낱 조차지인 산동반도에 주력 부대를 투입시킬 순 없었다. 즉, 일본은 산동반도에 있던 독일군 약체 부대와 싸워 이긴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유럽 전선으로 지원 병력을 보낸다든지 하는 짓은 전혀 안 했다. 그러니 연합국 측에서도 주도적으로 싸웠던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이렇게 전공을 날로 먹은 일본이 괘씸해서 보상이라고는 꼴랑 중국 내 독일의 조차지와 각종 이권들을 일본이 승계하는 것 외에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매우 격렬하게 반발했고, 군축 조약도 위반하며 슬슬 막가파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1929년에 세계 대공황이 터지자 일본 경제는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영토가 넓고 천연 자원과 노동력이 풍부했던 미국은 뉴딜 정책으로 공황을 극복했고, 해외 식민지가 많은 영국과 프랑스는 블록 정책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라고는 조선대만 밖에 없었다. 거기다 조선과 대만 모두 천연 자원이 부족한 나라들이라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뽑아먹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식민지를 늘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1932년에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그 나라의 허수아비 황제로 세웠다. 이에 국제연맹은 일본을 비난했고, 서서히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결국 일본은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더욱 막가파로 나갔다. 그러면서 침략 야욕은 더욱 강해져 조선과 만주로도 부족했는지 이젠 중국 대륙 전체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가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편, 그 무렵에 독일 역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며 막가파의 길을 걸었다. 이에 독일과 일본은 서로 동질성을 느끼며 방공 협정을 체결해 함께 힘을 합쳐 소련을 견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엔 이탈리아가 방공 협정에 가입해 셋이서 힘을 합치게 된다.
이후 일본은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더욱 노골적으로 막장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는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라는 초강경 대응이었다. 이제 일본의 선택은 여기서 스톱하느냐, 아니면 못 먹어도 고냐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은 후자를 택했고, 역시 석유가 풍부한 동남아시아를 침략해 확보하기로 했다. 이제 영국, 미국과는 완벽하게 적대 관계가 되었으므로 일본은 더욱 독일, 이탈리아와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본은 삼국 동맹 체결을 강력하게 원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있었다. 삼국 동맹 체결에 대해 가장 거세게 반발했던 곳이 바로 일본 제국의 해군이었다.[5] 이후 찬성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삼국 동맹 체결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아 육군측과 삼국 동맹을 긍정하는 측의 여론에게서 크게 비난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군측의 삼국 동맹 체결에 반대하는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이다.
그런데다 독일이 이탈리아, 일본 몰래 독단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방공 협정이 결렬 위기에 놓였다. 당시 일본은 몽골을 침략해 소련-몽골 연합군과 함께 할힌골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독일의 행위는 배신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방공 협정 파기를 원하는 여론도 높아졌다. 그러나 결국은 어찌어찌 뜻을 모아서 1940년에 삼국 동맹을 공식적으로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독일의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을 비난했던 일본은 정작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전선을 확대해 나가자 배후의 소련을 걱정해 소일 중립 조약을 체결하였다. 독소전쟁 당시 독일이 유럽 러시아 방면으로 진격하면 일본이 시베리아 방면으로 진격해 후방 교란을 해줄 것으로 믿었던 히틀러의 구상은 그렇게 공상이 되었다.

3.3. 이탈리아 왕국


사실 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라였다. 물론 파시스트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았긴 했지만, 무솔리니는 의외로 초반에는 나름 점잖은 편이었다. 나름 국제연맹에서 상임이사국으로 한 자리 하던 나라였고, 줄을 잘 선 덕분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과 함께 주요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등과 행보를 발 맞춰 했다. 특히 1934년에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자 그 때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시엔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고 강경하게 맞서 히틀러의 야욕을 저지한 바 있다. 거기에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 중인 독일을 경계하여 영국, 프랑스와 함께 스트레사 체제를 결성하여 대독일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대외적 행보와는 달리 대내적으로는 연합국 동지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다. 우선 이탈리아의 제일 큰 불만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승전국임에도 정작 이탈리아에게 돌아온 전리품이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최대 적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갖고 있는 이탈리아계 영토와 막대한 식민지를 약속한 영국과 프랑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동맹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는데 졸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소모전을 걸어 국력의 막대한 소모를 유도하고[6] 보다 못한 독일의 개입에 대패를 당해 밀려났으나 항복하지 않고 버티며 결정타를 날리면서 결국 동맹국의 중추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항복을 받아낸 나라가 바로 이탈리아였다.
그렇게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승리를 거둔 이탈리아는 약속한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파리 강화 회의에서 평화 14개 원칙에 입각한 우드로 윌슨의 도덕외교로 인해 민족자결주의 명분으로 겨우 얻은 트렌티노알토아디제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반도 말고는 보상을 하나도 얻지 못하고[7] 약속했던 아프리카 식민지는 영국과 프랑스 둘이서만 갈라먹자 이탈리아에서는 '불구의 승리(Vittoria Mutilata)'라면서 여론이 폭발했다. 이 분노한 국내 여론은 전쟁 종결 직후 무솔리니와 파시즘 세력이 쉽게 집권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거기에 영국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게 통보를 하지 않고 단독으로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의 재건을 용인하면서 무솔리니는 강한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영국, 프랑스와 사이가 틀어진 결정타가 바로 1936년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아프리카는 마치 유럽 국가들의 거대한 케이크가 되어 몇 개 나라를 빼고는 전부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 갈라먹은 상태였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이탈리아가 차지할 만한 식민지는 거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 때 노린 나라가 바로 독립국이었던 에티오피아였다. 이탈리아는 40년 전인 1896년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침공했다가 아드와 전투에서 패하고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인정한 바 있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식민지를 넓히고 40년 전의 패배를 갚을 겸해서 에티오피아에 50만 대군을 보내 고전 끝에 정복하고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에 노골적으로 비판을 가했다. 이에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너희는 1차 대전 끝나고 독일 식민지 다 갈라 먹었으면서 우리가 식민지 늘리는 건 왜 안 되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이 에티오피아 정복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점점 국제연맹에서 고립되어 갔고, 결국 1937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탈리아는 새로운 연합 상대를 모색했고 결국 독일과 협력하게 된다.
이후 1939년에 독일이 독단적으로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는 바람에 이탈리아는 잠시 독일에 불만을 품었으나 이미 에티오피아 침공 건으로 영국, 프랑스 등과 사이가 틀어졌기에 추축국을 이탈하는 건 불가능했고 결국 1940년에 독일, 일본과 함께 삼국 추축 동맹을 결성해 추축국을 완벽하게 결성하게 된다. 이후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는 독일군의 보조 역할을 하게 된다.

4. 상세



4.1. 결속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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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영국을 붙잡고 이탈리아가 이를 뽑는 모습
처음 이들 추축국들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미국, 영국소련과 껄끄러웠던 관계였던 것처럼.[8] 한 예로 중일전쟁에서 중국 국민혁명군은 초반에 일본군과 싸울 때 독일이 퍼다준 '''독일제 무기'''로 싸웠다. 게다가 1928년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을 조직, 한스 폰 젝트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같은 장군을 보내서 상하이-난징 간 방어선도 짜줬고, 차관을 주면서 여러 모로 국민혁명군의 현대화, 아니 독일화를 도왔다. 간단하게 중일전쟁 초반의 국민혁명군은 나치 군복을 입고 싸웠다. 그리고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 만들어 놓고 간 방어선은 국지적인 전투에서나마 국민당군의 전과답지 않게(?) 일본군을 갈아버리는 전과를 세우고, [9] 종전 후 장개석은 폰 팔켄하우젠에게 무려 100만 달러를 보내준다.[10][11] 그러나 이는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하기 이전부터 이루어진 협력 관계이고, 곧 나치 독일에서도 이런 황당한 상황을 깨닫고 중화민국과의 협력 관계를 단절하고 폰 팔켄하우젠을 소환한다.[12]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중화민국이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가 되었다.
일본 제국에서는 추축국이긴 하지만 1939년 폴란드 침공이 벌어지자 아베 노부유키 일본 총리가 앞장서서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을 거세게 비난했다.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했던 폴란드 제2공화국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인 우방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폴란드 제2공화국을 추축국 강철 동맹에 끌어들이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독소 불가침조약, 곧바로 이어진 폴란드 침공으로 일본의 계획이 틀어지자 일본은 히틀러를 비난한 것이다. 일본은 일본 국내에 있던 폴란드 대사관을 온전히 보존하고,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에 대해 계속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고 한다. 독소전쟁 발발 후 히틀러의 기대와 달리, 일본이 소련을 치지 않은 것도 폴란드 침공으로 독일이 일본한테 뒤통수를 날린 것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1941년 연말 태평양 전쟁을 일본이 일으키자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일본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대 일본 선전포고는 영국의 강요로 인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선전포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폴란드 망명 정부 역시 형식적인 선전포고 이후 일본 제국과 1945년 9월 9일까지 별다른 전투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당시 지멘스의 중국 지사장이자 많은 중국인 난민들을 살린 욘 라베일본 점령 하 난징의 참상히틀러에게 알리려 했지만, 이미 힘러가 보고를 받고는 독-일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게슈타포로 대응했다(...) 히틀러는 난징과 욘 라베에 관한 보고는 티끌만큼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욘 라베가 반역 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게슈타포도 알고 있었기에 주의만 주고 풀려났다. 욘 라베는 전쟁이 시작되고 독일의 지멘스 본사에서 근무하며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선에서 끝냈다.
이탈리아의 경우 독일보다 심각한데, 1933년에 히틀러가 총리가 되고 1934년에 처음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도하자,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이를 막으려고 했다.''' 결국 아직 전쟁을 치를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한 히틀러가 합병을 보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가 가까워진 것은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해서 국제적으로 왕따가 되었을 때 유일하게 독일, 일본만이 이탈리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합국에는 절대강자인 미국에다가 역시 강대국인 소련, 영국, 프랑스[13] 등이 있었지만, 추축국에 소속된 국가들 중에 제대로 된 강대국은 독일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전세계와 싸울 만큼의 국력을 가지진 못했다. 하나하나 보자면 일본은 군부가 장악하고 있어 정부의 제대로 된 통제가 불가능했고, 이탈리아는 1870년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기 직전까지 별 볼일 없는 도시국가 집단에 불과했다. 한편 독일도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있다가 제2제국으로 통합된 시기(1871년)가 비슷하기는 하나, 독일은 강국이었던 프로이센 왕국 주도로 통합된 것이고 1차대전을 거의 혼자서 이끌 만큼 강대한 국가였다. 물론 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긴 했으나, 전쟁 피해 자체는 보통 수 년 뒤면 복구되기 때문에 독일의 국력은 1차대전 직후 혼란기를 제외하면 언제나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편이었고, 전간기 말기에 독일을 휩쓸었던 대공황은 전세계가 휘말렸던 재앙이었으니 독일만의 문제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문제는 독일의 역량이 양면전선을 치르며 연합국들을 동시에 상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14], '''결국 독일은 이를 둘 다 상대해야 했다.'''
당장 이러한 안습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대전 기간 동안 생산된 전 세계 군수물자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던 미국의 압도적인 공업력이었다. 추축국의 핵심 국가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전쟁 기간 내 군수물자 생산력을 전부 합쳐도 미국 하나보다 모자랐을 지경이었다.
물론 추축국이 연합국에 비해서 살림에 여유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들도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는데 독일과 일본의 예가 단적이다. 독일은 최신 무기와 그 설계도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까지 잠수함으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 공여해주었으며(물론 일본 잠수함들이 운반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 또한 해군 관련 기술을 독일에게 전수해주는 등 서로 도움을 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이고 독일 또한 그렇게 전수받은 기술을 써먹지 못했다.[15] 게다가 심지어는 일본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습으로 미-일 태평양 전쟁이 개시되자 독일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공격에 기뻐하며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하였다. 태평양 게릴라 전술은 덤.
물론 이는 일본의 적국인 미국을 독일이 공격해주면 일본이 독일의 적국인 소련을 공격하거나 최소한 견제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기인한 판단이었으나, 이러한 히틀러의 생각과는 달리 일본은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황이었고, 소련과의 대치 지대에 있는 관동군의 정예사단을 포함한 나머지 병력을 인도네시아에 몰빵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게 없다지만 당시 히틀러의 판단대로 관동군이 시베리아까지 진격은 무리여도, 최소한의 견제나 소련 병력 분산을 도왔다면 '''독소전쟁의 양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물론 전체적인 전쟁 양상은 변함이 없다. 애초에 히틀러의 계획대로 일본 제국과 함께 소련을 점령했어도 추축국의 이념과는 아주 반대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남아있기 때문이다.[16] 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져서, 일본은 1945년 8월 소련의 선전포고로 불가침 조약이 일방적으로 파기[17]될 때까지 독일과 전쟁 중이던 소련을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18]
독일과 일본이 이런 상황이면 이탈리아라도 제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 거 없다. 당장 이탈리아는 지방의 힘이 더 강해서 무솔리니가 제대로 권력을 잡고 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더욱이 독일과 일본은 초기에 선전이라도 했지, 이탈리아는 고작 그리스에게 전쟁 걸었다가 털리기까지 했으니 도움이 되기는 커녕 도움을 줘야 할 판이다. 히틀러 자신도 멋대로 그리스에게 선빵 때렸다가 털리는 이탈리아에 분노해 처음에는 그리스의 승전을 축하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더불어 추축국에 속한 기타 국가들도 군사적인 면에 한정해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마니아 왕국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루마니아가 빼앗아간 도브루자, 트란실바니아 같은 영토 문제로 인해 원수 관계였다. 1940년 군부 쿠데타로 미하이 1세가 복위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소전선에 참여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독소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하이 1세는 군부를 축출하고 귀신같이 친소국가로 돌아섰다. 물론 연합국은 루마니아를 패전국으로 분류했고, 소련은 왕정을 무너트린 후 위성국가로 편입시켰다.
불가리아 왕국은 애초에 나치의 압력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려가다시피 했었고, 역사적으로도 독일보다는 러시아와 더 굉장히 친밀했기에 독소전 참전에도 부정적이었다.[19] 하지만 히틀러가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넣은 덕분에 루마니아로부터 발칸 전쟁 때 잃었던 도브루자 등 영토 일부를 양도받고, 덤으로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 일부도 나눠받아서 추축 진영에 가담했다. 그러나 끝내 독소전에는 파병을 거부했고, 전쟁 당시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 홀로코스트에 맞서 유대인들을 나치에게 넘기지 않으며 독일과 대립하였다.[20]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바그라티온 작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고 소련이 동유럽, 발칸 반도 일대로 밀고 내려오자, 불가리아는 바로 독일과의 국교, 동맹 관계를 파기하여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점령지 영토들을 포기하고 소련에 붙어 독일군을 공격하였다(...)[21] 그러나 얄짤없이 나치 패망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일당제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어 소련의 위성 동맹국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의 경우 끝까지 독일과 함께 싸웠지만 2차대전 말기 은근슬쩍 강화하려고 하다가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독일의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다만 별개로 헝가리군독일군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핀란드 역시 독일과 일본군 다음으로 추축국 군대 중 가장 잘 싸웠지만 알다시피 독일 뒤통수를 치고 소련과 강화하고, 라플란트에서 독일군과 싸우기도 했다.[22]
태국은 일본 제국을 도와 동남아 전선에서 일본에게 협력하기도 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강압에 일본군과 강제적으로 동맹을 맺다시피 했었고,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태국 처녀들이 종군 위안부로 징발되어 일본군에게 강간, 성폭행 당하기까지 했었다. 게다가 내부에서도 전쟁을 주도했던 쁠랙 피분송크람 총리 내각과 전쟁을 반대했던 왕실이 갈등을 빚었고, 일제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세력들이 태국 왕실 등 지배층 세력의 지원하에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했었다. 제2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던 프랑스영국, 네덜란드 등 서유럽 연합국들은 태국이 일제에 협력한 것을 이유 삼아 독일이나 일본처럼 영토 강제 할양, 군정 지배, 전쟁을 주도했던 군부, 지배층들에 대한 전쟁범죄자 재판 회부 등 태국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아시아, 태평양 전선의 연합군 주도권은 미국에게 있었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국이 일본 제국에 의해 억지로 끌려갔던 전적을 고려, 참작해 태국에 대한 처벌을 부과하지 않았다.
이라크 왕국은 한동안 영국의 심각한 내정 간섭을 받다가 민족주의자인 라시드 알리를 중심으로한 정변으로 인해 잠시 반영으로 돌아서고 추축국 측에 참전하다가 1달 만에 패배하였기에 딱히 영향을 준 것도 없다.
결론적으로 추축국은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협조하질 않았다.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부터가 서로간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4.2. 전체주의 국가 동맹으로서의 추축국


추축국들은 핀란드[23]를 제외하면 전체주의권위주의에 찌든 독재 국가라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대전 이후 극단적 민족주의나 독재를 철저하게 배척하고, 민주주의를 장려하고 인간의 권리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당장 조지 워커 부시이란, 북한, 이라크를 가리켜서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추축국은 다른 동맹의 국가들과는 달리 악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한 범죄 행각을 매우 많이 저질렀다.
일본 제국을 뺀 나머지 주요 2국은 독신세 제도가 있었고, 전쟁 이후 공산치하의 루마니아에서 시행했다가 죄다 나라 자체가 망해버렸다. 하필이면 루마니아도 2차대전 당시엔 추축국이었으니... 하다못해 소련이나 중국같은 공산진영이 이들에 비해서는 정상으로 보일 지경.

4.3. 유엔의 '적국' 조항


지금도 유엔의 규칙 중에 '옛 추축국이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등의 불온한 움직임이 보일 경우 '''연합국이나 기타 국가가 선전포고 없이 바로 기습적으로 전쟁을 개시해도 무방하다.''''는 조항이 남아있을 정도로 취급이 나쁘며, 이게 흔히 말하는 '''적국조항'''이다. 유엔헌장 53조와 107조로 이곳을 참조.
유엔 헌장 제53조 #
1.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권위하에 취하여지는 강제조치를 위하여 적절한 경우에는 그러한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을 이용한다. 다만, 안전보장이사회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강제조치도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에 의하여 취하여져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이 조 제2항에 규정된 어떠한 적국에 대한 조치이든지 제107조에 따라 규정된 것 또는 적국에 의한 침략 정책의 재현에 대비한 지역적 약정에 규정된 것은, 관계정부의 요청에 따라 기구가 그 적국에 의한 새로운 침략을 방지할 책임을 질 때까지는 예외로 한다.
'''2. 이 조 제1항에서 사용된 적국이라는 용어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이 헌장 서명국의 적국(추축국)이었던 어떠한 국가에도 적용된다.'''
유엔 헌장 제107조 #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제2차 세계대전중 이 헌장 서명국의 적이었던 국가에 관한 조치로서, 그러한 조치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정부가 그 전쟁의 결과로서 취하였거나 허가한 것을 무효로 하거나 배제하지 아니한다.

5. 전쟁 이후


말 그대로 석기시대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으나, 냉전이 그들을 살렸다. 독일은 동부 지역이 다른 나라에게 뜯겼을 뿐만 아니라 그 뜯어진 영토의 절반이 소련에게 점거되어 공산화되었고, 나머지 동유럽 역시 소련의 영향하에 놓였다. 중국 대륙에 있던 일본군이 물러나고 소련이 한반도 북쪽을 공산화시키자, 추축국을 연합국이 나눠서 점령해려고 했던 계획은 여러 과정을 통해 깨지고, 미국은 2차대전 후 '소련'을 새로운 적으로 간주. 이탈리아와 일본, 그리고 나머지 독일 절반을 붙들고[24] 엄청난 경제 지원을 하며 소련에게 맞설 대항마로 내세웠다. 결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모두 G7에 소속되어 있다. 특히 일본은 고도 성장을 거쳐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다만 이탈리아는 강대국의 말석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독일도 자국의 지위를 전쟁 전보다 더 올리지는 못했다.[25]
경제 성장 이후 세 나라 모두 선진국 중에서도 유독 낮은 출산율을 유지했고, 그 결과 구 추축국 세 나라가 세계에서 초고령사회에 1, 2, 3위로 진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추축국 시절처럼 민족주의가 강해 외부 인구 수혈에 배타적인 경향도 여전하다.[26] 다만 대처하는 방법은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독일은 과감히 다민족 다문화 국가로 정체성을 바꾸는 실험을 시작해 사회 혼란은 좀 있지만 인구 규모의 감소를 최소화한 반면, 일본과 이탈리아는 인구가 급감 직전인데도 정부가 대책없이 손만 빨고 있다.

6. 가입국


일단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한 국가와 비슷하지만, 각 국가의 사정이 있어서 목록이 약간 다르다.
그리고 추축군과는 약간 개념이 달라진다. 상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고하라.

6.1. 유럽



6.1.1. 나치 독일


<v|1>
퓌러
아돌프 히틀러
독일 대통령
카를 되니츠
독일 총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루츠 폰 크로지크
가입 목적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빼앗긴 땅 수복
1차 대전 이후 독일 시민들은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독일의 영토와 인구, 식민지를 전부 상실하게 되어 매우 모욕받다고 느끼고 있었다. 1920년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독일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배상금으로 인해 부담이 커졌다. 그러던 중 아돌프 히틀러가 나타나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독일을 집어삼킨다.
1936년 3월에는 재군비 선언과 라인란트 재무장을 함으로써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포기했다.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병합,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뮌헨 협정)와 리투아니아의 메멜을 1939년에 얻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든 체코 지역을 1939년에 점령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은 독일에 합병하고,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만들었다.
1939년 8월 23일에는, 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고, 독일은 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침공한다. 1941년까지 독일은 유럽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으나 독소전쟁 시작 후,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과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 대부분의 군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서방 연합군은 프랑스 상륙과 이탈리아 상륙을 전개했으며, 히틀러가 1945년에 총통벙커에서 자살하자 항복했다.

6.1.2. 이탈리아 왕국


<v|1>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피에트로 바돌리오
가입 목적
제1차 세계 대전 때 적은 영토를 받은 것에 대한 불만
1차 대전 이후 내부 불만 및 경기 침체로 인한 불만을 수용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였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나타났다. 국가 파시스트당은 새로운 로마를 주장하며 지중해 지배를 목표로 하였다. 1936년까지,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에티오피아를 합병, 파시스트 정부는 이탈리아 제국을 선포했다. 1937년에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같은 해에 방공 협정에 일본, 독일과 함께 서명했다. 1939년에 이탈리아 군대가 알바니아 왕국을 침공하여 합병하였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에 참가했다.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그런데 1941년에는 이탈리아 군대가 대패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스-이탈리아 전쟁과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의 패배의 결과였다.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공방전 등 독일의 개입을 통해 이탈리아 군사의 붕괴와 도시 함락을 막기 위해 노력했었다. 결국 1943년에 파시즘에 정나미가 떨어진 이탈리아 사람들은 무솔리니에 대한 신뢰를 잃고, 더 이상 전쟁을 지원하지 않았다. 연합국은 북아프리카를 5월에 점령하고 시칠리아를 7월에 침공했다.
1943년 7월 25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내각을 출범시켰으며, 무솔리니를 체포하며 연합국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1943년 9월 8일에 연합국에 가입하고, 연합국과 휴전하며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1943년 9월 12일, 무솔리니는 오크 작전으로 그란사소 습격에 의해 독일에 의해 구조되었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며 종속국의 상태에서 약간의 권력만 가지고 삼국 동맹 조약에 따라 모양만 추축국의 일원으로 다시 참가한다.

6.1.3. 헝가리 왕국


<v|1>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
총리
텔레키 팔
케레스피셔 페렌츠
바도시 라즐로
스칼레 미클로
스조이 도메
라카토스 제자
살러시 페렌츠
가입 목적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빼앗긴 땅 수복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일방적으로 추축국으로 끌려간 오스트리아와 달리 헝가리는 추축국 설립 아이디어를 낸 국가이다. 따라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추축국 사이에서 준 메이저 행세를 했고, 1944년에는 할 거 다 해먹은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소련에 붙으려 했으나 이에 반발한 살러시 페렌츠화살십자당과 독일군이 전 국토를 점령해 일본과 함께 끝까지 독일 편에 서서 싸우기도 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소련 등지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도 만만찮다. 전후 소련에 점령당해 공산화된다. 하지만 의식 있는 국민들 몇몇은 폴란드인들을 돕기도 하는 일면을 보여주었다.[27]

6.1.4. 루마니아 왕국


<v|1>
콘두커토르
이온 안토네스쿠
가입 목적
소련에 뺏긴 베사라비아 지역 수복
자국의 파시스트 요소를 달래기 위한 일환으로 카롤 2세는 친독계 성향의 이온 안토네스쿠를 총리로 1940년 9월 6일에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철위대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1941년 철위대가 반란을 시도해 붕괴되었고, 그 이후 안토네스쿠의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이틀 후, 안토네스쿠는 젊은 아들을 임명하기 위해 미하이 1세를 왕좌에 오르게 하고, 그 때 자신은 콘두커토르로서 독재를 선언하였다. 루마니아는 삼국 동맹 조약을 1940년 11월 23일 서명했다. 그에 따라 독일 군단은 1941년에 루마니아에 진주했고, 유고슬라비아와 소련 침공의 발판으로 삼는다. 루마니아는 석유와 곡물을 제공했다.
루마니아는 소련 공격에 1941년 6월 22일에 합류했다. 거의 80만명 이상의 루마니아 병사가 동부 전선에서 전투하였다. 소련에 의해 합병되었던 영역은 다시 루마니아로 반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전세가 연합국에게 돌아가자 나치와 동맹을 끊었으나, 결국 소련군에게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다. 1989년에 동유럽 혁명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당시 독재자였던 이온 안토네스쿠 자체가 히틀러의 모방하에 유태인 학살도 저질렀으며 이쪽도 나치 독일, 일본 제국 못지 않게 학살 등 전쟁 범죄도 만만치 않게 자행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쪽이 나치 독일, 일본 제국 다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전한 국가이다. 약 45만 명의 루마니아군이 전사하였는데, 이는 독일, 일본을 제외한 추축국 국가 중에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수치이며, 심지어 이탈리아보다도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28]

6.1.5. 핀란드 공화국


<v|1>
대통령
리스토 뤼티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총리
요한 빌헬름 랑겔
에드빈 링코미에스
안티 학젤
우호 카스트린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가입 목적
소련에 뺏긴 카렐리야 지역 수복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소련은 1939년 9월 나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후 북유럽으로 눈을 돌려 발트 3국을 압박함과 동시에 핀란드를 침공하여 겨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핀란드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약소국인 핀란드는 결국 소련에 항복하여 소련이 점령한 영토보다 훨씬 많은 땅을 소련에게 양도하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핀란드 국민들은 소련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고,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편에 가담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소련의 눈치를 봐 핀란드의 도움 요청을 외면했기에 핀란드에게는 독일과의 동맹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특히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핀란드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핀란드는 추축국이자 패전국으로서 소련에 오히려 배상금을 물게 된다...
하지만 핀란드의 경우에는 소련에게 빼앗긴 지역만 되찾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SCAPIN 1757호와 1912호에선 타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특수 지위 국가(Special Status Nations)에 분류되어있다. 또 공산화된 동유럽의 추축국들(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과는 달리[29]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적개심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공산화를 면했다.
그래서인지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추축국이었단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진 않다. 전반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소련의 침략 전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다. 미국, 영국도 같은 연합국인 소련의 전쟁 범죄 행위를 쉬쉬하였기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사정을 이해하는 일반인들조차 지금은 조용히 사는 국가인 핀란드가 뜬금없이 '''과거에 추축국'''이었단 사실 자체에 충격 먹은 사람들이 많다. 타 추축국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국가이지만, 어찌되었든 레닌그라드에서 추축군에 의해 어마어마한 소련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죽었기에 결국 승전하던 소련에게 덜미를 잡혀, 냉전 기간 동안부터 지금까지도 소련/러시아의 입김하에 강하게 놓여있다.[30] 실제로 중립이라고는 하나 냉전 시기부터 소련 앞에서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군사 훈련이나 무장 등은 러시아의 군사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상태이다.

6.1.6. 불가리아 왕국


<v|1>
국왕
보리스 3세
시메온 2세
총리
보그단 필로프
페테르 가브로브스키
도브리 보질로프
이반 이바노프 바야요노프
콘스탄틴 무라비에프
가입 목적
나치 독일의 위협에 의해 강제적
남부 도브루자와 마케도니아 등 발칸전쟁 당시 빼앗긴 구 영토 수복
나치독일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가입하긴 했지만 당시 보리스 3세 전 국왕[31]과 권력층들이 국내의 반대 여론을 탄압하고, 독일과 동맹 조약을 맺고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여하여 독일군에게 영공, 영해, 육로 등을 개방하고 군대 병력까지 파병하였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연합국에게 유리해지자 독일과 동맹을 끊고 소련, 영국, 미국,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 연합국의 편에 서서 독일군을 공격했으나, 결국 나치 패망 이후 소련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어 1989년 동유럽 혁명 과정에서 민주화되었다.
그렇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추축국들에 비해서상대적으로 전쟁범죄가 적었고[32] 가입 과정도 일제의 강압, 위협에 의해 추축국에 가담해야 했던 태국처럼 나치의 강압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가담해야 했고, 불가리아도 제2차 대전 당시 자신들이 제2차 대전 당시 전범 국가가 아닌 전쟁 피해국이라고 주장하는 등 과연 불가리아를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 봐야 할지는 역사 학자들마다 논란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도 나치의 외압에 의해 일방적으로 독일과의 동맹 조약을 맺고 추축국에 들어간 뒤에도 독일군 점령지, 주둔지의 차별적 대우를 받고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는 등 불가리아 사람들의 독일에 대한 감정은 그리 썩 좋지 않다고 한다. 오죽하면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서도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하고 있는 체코나 폴란드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게 피해를 입었던 동유럽 연합국 국가들의 반대 입장을 적극 지지하며[33] 나치 독일이 유럽 일대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 만행들을 들먹이면서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래도 발칸 전쟁 당시 루마니아한테 빼앗긴 남부 도브루자 지역을 나치 독일군의 지원으로 되찾는 등 제2차 대전 이전의 국경선으로 되돌아가거나 오히려 그 이전보다 영토들을 전승국들에게 강제 할양당하고 종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 국가로 전락해버린 일본이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헝가리 등 다른 추축국들[34]에 비하면 수혜자로 볼 수도 있다.

6.2. 아시아



6.2.1. 일본 제국


<v|1>
천황
쇼와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가입 목적
대동아공영권에 의한 아시아의 대통합 목적
1920년대에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로 내부 불화가 커지자, 일본은 군국주의의 확장 발전론을 펼친다. 일본은 자급자족할 천연 자원이 부족해지자, 아시아의 패권을 확립하고 일본 본토에서는 풍부한 천연 자원의 지역을 점령하면서 성장한다는 대동아공영권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이 정책은 국제 연맹에 의해 1930년대 중반에 소외된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이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독일과 일본의 초기 군사 동맹으로 함께 시작한 방공 협정은, 두 나라는 소련이 공격하면 다 함께 공격하기로 맺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을 발발시키고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다. 일본은 이후 1941년에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하며 소련과 잠재적인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었다.
유럽에 관심이 집중되는 동안, 일본은 유럽의 식민지를 얻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비시 프랑스 동안, 독일은 인도차이나의 점령을 허락했으나 연합군은 일본과 전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수출 금지령을 선포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일본 제국 해군은 1941년 12월 7일 미 해군 태평양함대의 기지가 있는 진주만에 진주만 습격을 지시했다. 일본군은 , 사이판말레이시아, 홍콩을 습격했다. 처음에는 연합국에 피해를 입혔지만 미국의 생산력이 증가하여 미국은 일본 열도를 향해 대규모의 반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군부가 항복을 하지 않자 1945년 트루먼 정부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실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됐다.

6.2.2. 태국


<v|1>
국왕
라마 8세
총리
쁠랙 피분송크람
가입 목적
영국과 프랑스에 빼앗긴 인도차이나 지방 회복
일본 제국의 위협에 의해 강제적
일본 제국의 동맹국. 추축국이긴 했지만 추축국의 가입 과정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우리는 원치 않게 일본과 손 잡아야 했다'라고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태평양 전쟁의 서방 연합국에게 사과하며 면죄를 받으려고 애를 썼다.[35] 전쟁 중에도 태국 내에서 반일 세력이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주미 태국대사가 귀국을 거부하고 미국에서 이를 지원하기도 했다. 사실 태국이 일본의 뒤통수를 친 것은 당시 친일 군사 독재자였던 쁠랙 피분송크람 총리의 실각이 결정타이기도 했다.


6.2.3. 이라크 왕국


<v|1>
국왕
파이살 2세
총리
라시드 알리
가입 목적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괴뢰 국가에 가까웠다. 1939년 이라크의 왕위에 어린 파이살 2세가 즉위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지친 라시드 알리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의 반영 민족주의자들은 정변을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친독일 정책을 피고, 추축국에 가입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이라크의 석유를 독일이 차지할까봐 두려웠던 영국은 빠르게 대처했다. 결국 1달도 안 돼서 패배하였고, 이라크는 영국에 항복하여 추축국 중 가장 먼저 항복한 국가가 되어버렸다. 영국은 이라크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이라크를 괴뢰국화한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8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한다.

6.3. 괴뢰 정부



6.4. 친추축국 성향 국가


엄밀하게는 추축국이 아니며, 나중에 연합국이 된 국가도 많다.
  •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발트 3국) - 전쟁 이전부터 소련에 점령 당했었고, 일시적으로 동방 국가판무관부라는 이름하에 나치 독일의 영토로 들어서지만, 전후부터 소련 붕괴기까지 소련에 대한 앙금이 크기 때문에 지금도 대체적으로 (국가나 개개인의 정치 성향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연간하면 소련보다 나치 독일에 훨씬 호의적이다.
  • 스페인국 - 파시스트 정권.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승리한 후 프랑코가 정권을 잡으며 친독 성향이 강해졌으며, 독소전 당시 의용군도 파병하였다. 그러나 내전 수습 등의 이유로 의용군 외에 공식 참전은 하지 않았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후 바로 등을 돌리고 연합군에게 항구를 개방하는 등 적극 협력하여 프랑코는 전쟁 후에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소련 - 처음에는 독일을 경계하여 좋지 않게 보고 영국프랑스에게 친화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양국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소련을 무시했다(이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엄청난 까일 거리가 되었다). 결국 소련은 히틀러에게 접근, 독소 불가침조약 이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을 용인하고 독일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대량 수출함은 물론 발트 3국 점령과, 핀란드 침공 같은 팽창 또한 꾀했었지만, 어디까지나 독소전쟁이 터지기 전까지의 일이며, 독일의 선제 공격이 시작된 이후에는 당당한 연합국의 가장 중요한 멤버 중 하나로 활동했다.
  • 인도[37] - 1차대전 때 영국을 돕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마하트마 간디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2차대전 때는 무반응,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인도 독립을 보장받자 그제서야 영국을 돕기 시작.[38] 그러나 인도 내에서는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맞먹는 독립운동가인 찬드라 보세는 추축국과 협력하여 인도를 독립시킨다는 계획으로 추축군에 소속되어 싸웠다. 현재는 의도는 좋았다고 평가받는 편.
  • 칠레 - 이웃 남미 국가인 아르헨티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친독일 성향이 강했고[39] 종전 이후 아르헨티나와 비슷하게 파울 셰퍼, 발터 라우프, 안테 파벨리치 등의 나치 독일과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 구 추축국의 전범 인사들을 숨겨주거나 도피 루트를 제공해주기도 했었다.
  • 터키 - 오스만 제국 시절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이었으나, 같이 패전하여 나라가 멸망하는 일을 겪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1차대전의 동맹이었던 터키를 꼬드겨 추축국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터키는 방공 협정에 가담하고,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등 친독일 성향이 있긴 했으나, 과거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는 뼈 아픈 경험을 한 뒤라 2차대전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터키 공화국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이미 2차 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히틀러에 대해서 제 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평해서 그 본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이지"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리고 또 한 번 벌어질 세계 대전에 미국은 필연적으로 참전할 것이며, 미국에 의해 종결될 것이라 예언했다(...) 아타튀르크의 식견에 따라 터키는 결국 마지막엔 연합군 측에 줄을 서게 되며, 이후 줄곧 친미 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 폴란드 제2공화국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 독일, 헝가리 등 추축국 국가들과 같이 뮌헨 협정에 약조하여 주테텐란트, 톄신 등 체코슬로바키아가 차지하던 영토들을 강탈한 적도 있었지만[40],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연합국의 편에 선다.
  • 덴마크 - 독일이 침공하자 하루만에 항복하고 독일의 보호령(덴마크 보호령)임을 선언했으며, 독일과의 협력 정책을 고수하였다. 방공 협정에도 가담하여 사실상 추축국 가입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까지 보면 독일이 점령했으니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39년 5월 31일,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역사가 있다.
  • 바티칸 - 정확히 말하자면 교황 비오 12세는 개인적으로는 나치를 혐오하였고, 1937년에는 나치즘을 비판하는 독일어 회칙도 발표했다. 또한 유대인 난민들에 대해서도 협조적이었다. 다만 종교로서의 가톨릭이 아닌 국가로서의 바티칸은 이탈리아를 무솔리니가 꽉 잡아버린 바람에 묶여있었다. 또 무솔리니가 '로마 카톨릭의 수호자'라고 스스로를 홍보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주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비시 프랑스,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 추축국의 괴뢰 국가들을 승인하기도 했다.[41]
  • 스위스 - 나치의 은행 역할을 하며[42] 전쟁 내내 나치와 협조했다.[43]

6.5. 추축국의 인물들


※ 유명하고 군의 간부 및 국가원수/정부수반들만 서술하기 바람.

7. 추축국이 점령한 지역


추축국/점령지 문서 참조.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1] 1938년 제작된 일본의 프로파간다 선전물이다. 좌측은 히틀러, 우측은 무솔리니인 가운데 중앙은 히로히토가 아닌 현직 총리대신(수상)인 고노에 후미마로이다.[2] 실제로 추축국은 한때나마 '''영국소련의 일부와 중립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과 북아프리카,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심지어 태평양의 섬들까지''' 영향력 하에 둔 적이 있다.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셈이다.[3] 정작 당시 일본은 소련과 그 해 5월부터 9월까지 할힌골 전투(일본명: 노몬한 전투)라는 국지전을 치르며 깨지는 중이었다. 결국 일본은 1941년 4월 독자적으로 일소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타이밍이 절묘한 것은 그해 6월에 독일이 소련을 무단으로 침공하면서 독소전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독일이야 멋대로 불가침을 맺고 끊고를 반복했지만, 서로간의 주적을 대항하느라 여념없던 소련과 일본은 4년간이 넘게 이 조약을 유지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와중에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일각에서 소련의 중재 같은 헛꿈을 꾸고 있는 와중인 8월 8일 소련이 조약을 깨고 만주 작전을 시행, 만주국몽강연합자치정부를 멸망시켰다. 이후 일주일만에 일본의 항복 선언이 이어졌다.[4] 이 때 떼돈 벌었던 인물들을 일본에선 나리킨(벼락부자)이라고 불렀다.[5] 때문에 패배한 이후 여론은 해군과 해군 출신 인물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돌아서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6] 물론 오헝제국이 이탈리아와 달리 3면전선을 치뤄서 전력을 쏟아붓지 못한 점도 감안해야겠으나 동부전선은 전쟁 초반 그 러시아 제국한테도 탈탈 털리고 갈리치아까지 내주자 보다 못한 독일이 동부전선에 개입하여 멱살캐리했고 이탈리아의 참전 이전 오헝제국의 주력을 쏟아부은 발칸 반도의 남부전선은 오헝제국보다 훨씬 약소국인 세르비아 하나도 제대로 밀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다가 불가리아의 참전으로 겨우 밀었다. 그렇게 불가리아의 도움으로 겨우 남부전선을 끝낸 후 주력 대부분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결국 오헝제국 역시 전쟁 중반부터는 사실상 이탈리아와의 1면전선이었던 셈이다.[7] 그나마 1920년 자다르를 획득하긴 했다.[8] 애초에 두 세력은 이념이 달랐던 나라로, 미국과 영국은 세계 최초로 나타난 공산주의 국가를 경계하는 입장일 수 밖에 없었다. 반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적백내전 당시 반혁명군을 지원했고, 병력을 보내 직접 개입했기 때문에 서구 국가들이 언제든 다시 침공해올 수도 있는 잠재적 적국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련도 외교적인 마찰을 자주 일으켰는데, 자국 영토에 불시착한 영국과 미군 전투기들을 갖은 이유를 대며 압류한 다음 멋대로 뜯어서 기술을 빼갔다. 이 외에도 연합국 대사관 직원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는 등 영국과 미국 수뇌부를 분노케하는 짓을 소련은 태연하게 저질렀다. 특히 폴란드 문제라든지...[9] 제공권, 제해권도 일본군이 장악한 지라 함포와 항공폭격도 모자라서 중포와 독가스까지 아낌없이 들이붓었으니 별 수 없긴 했다.[10] 물론 이 갈아버렸다는 건 국지적인 전투일 뿐 큰 전투에선 대부분 중국군이 갈려버리며 패하고, 그 증거로 중요 도시와 거점을 모두 잃었다.[11] 일본이 노구교 사건을 기점으로 중국 침략을 가속화하자 '너 왜 우리 동맹국 때려?!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던 게 나치 독일이다.[12] 이 부분은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에 구현되어있다. 안습한 중화민국의 유일한 중간급 성능의 연구진으로 폰 팔켄하우젠이 등장하는데, 중일전쟁 이후 중화민국이 밀린다 싶으면 독일 군사 고문 소환 및 만주국 승인 이벤트가 뜨며 사라진다. 반대로 중화민국이 일본을 압도해서 밀어내고 만주로 진격하면 싹수가 노란 일본을 버리고 중화민국을 챙기려는 건지 그런 거 없다.[13] 물론 그다지 도움은 안됐다...[14] 사실 소련의 경우 1941년 시점에서 단독 국력으로는 1:1 대결에서 해볼만한 상대였다. 소련은 미국보다는 훨씬 경제력이 약한 나라였고(소련의 경제는 미국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불시에 기습적인 침공을 감행한 충격 효과와 대숙청 때문에 소련 내부의 사정이 혼란했다는 점 및 초기 독일의 생산력 우위가 먹혀 들어가서 초기에는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나, 양면전선을 치르는 독일 상황상 반쪽자리 국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고, 초기에 소련의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 시점부터 독일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그냥 압도적 국력의 초강대국이였다. 게다가 지리적으로도 아예 독일이 사실상 미국 본토를 타격할 방법이 전혀 없다(일단 영국도 넘어서지도 못했고, 다음으로는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는 점과, 자원이 부족한 독일과는 달리 미국은 광활한 북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으로 자본을 두둑히 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쌍방간 기술력에서도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독일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거기다 초반에 졸전해서 그렇지 영국도 만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도 영국 본토를 점령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못 이룬 상태에서 이탈리아의 북아프리카 전선을 돕겠다면서 영국의 식민지 또한 점령해야 될 목표에 추가했으니, 진짜로 전세계 정복을 이뤄야 했을 판이었다. 식민지를 모국에게 끊어서 말리면 된다지만, 이미 해군이 잠수함으로 물자를 막고 있었는 데다, 상식적으로 식민지 모국을 항복시키는 게 빠를까, 아님 모국보다도 넓은 식민지를 점령하는 게 더 빠를까. 단순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 지역만 해도 얼마며, 끝의 남아프리카는? 과연 보급이 될까? 결국 북아프리카 전역은 영국이 반격해 점령한 지역만큼의 이탈리아 식민지를 회복했을 뿐이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쳐도 체급이 밀린다면 안 나서는 게 정상이다마는 독일 수뇌부와 북아프리카 독일 지원군 사령관의 전략적 식견이 근시안적인 건 부정 못할 듯 하다.[15] 독일이 제공한 U-511, MG 151/20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군의 기술로는 어찌 써먹는 것이 한계였고 양산은 불가능했다. 독일 또한 우선순위에서 밀려 일본이 전해준 군함 건조 노하우를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16] 물론 관동군도 병력 '''규모로만''' 본다면 굉장히 위협적인 전력임엔 틀림없었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처음 독소전쟁에 몰빵할 때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두려워했었다. 허나 리하르트 조르게의 첩보 덕분에 비로소 안심하고 대독 전선에 병력을 몰빵할 수 있었다.[17] 여담으로 일본 우익사관에서는 이걸 바탕으로 '1945년에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깨고 일본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한다. 그러나 소련은 전쟁에 돌입하기 이전에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 상태에 돌입할 것임을 선포하였다. 더구나 4월에 이미 소련은 소-일 상호 중립 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을 일본 정부에 통보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대일전 참여의사를 전달한 상태였으므로, 갑작스러운 뒤통수치기라고 할 수도 없다.[18] 물론 상식이 있는 국가라면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통보도 안 하고 쳐들어가는 짓 따위는 안 하는 게 맞다. 이와는 별개로 능력도 없었기도 한데, 진주만 공습 특히 원인 항목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얘네들은 애초에 양면전쟁을 할 능력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중일전쟁(이기고 있는 것 같아도 인구가 많고 국토가 넓으니 무한 전쟁에 가깝다. 중공군 개입 이후의 6.25 전쟁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에게 선전포고한 것도 양면전쟁의 상황이었다. 여기서 소련까지 치면 '''삼면전쟁'''이라는, 병신력의 막장 상황이 오게 된다.[19] 실제로 러시아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불가리아를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시킨 적이 있었다. 인종적으로도 불가리아는 슬라브계다.[20] 이 때문에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의한 유대인 사망자가 단 1명도 나오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집계되기도 했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유대인 얘기일 뿐 불가리아가 자국 영토로 합병한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일대의 그리스인과 세르비아인 등 다른 소수민족 상대로는 마음껏 전쟁범죄를 저질렀다.[21] 루마니아로부터 얻은 남부 도브루자 지역과 기존 나머지 본토 지역은 유지.[22] 그리고 핀란드는 추축국의 주요 국가들인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처럼 파시즘, 전체주의에 경도된 지배층들이 집권하면서 추축국이 된 것이 아니라 소련이 겨울전쟁으로 카렐리야 등 영토를 강탈하는 바람에 소련이 빼앗아 간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나치독일과 손을 잡고 추축국에 합류했기에 경우가 다르다.[23] 여기는 소련과의 전쟁을 치루던 나라였기에 참전. 또한 1944년에는 아예 소련의 편에 붙어 자국 내의 독일군을 쫓아내기도 했고, 나름대로 전범 재판도 치렀다. 하지만 피해국가들에 대한 사과나 배상은 소련을 제외하곤 냉전 붕괴 이후로 연기했다.[24] 원래는 영국/프랑스/소련과 함께 나누는 것이 예정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독일 절반을 점령한 후, 미국은 독단으로 서독, 일본, 이탈리아를 점거했다.[25] 2차 대전 이전에는 영국의 1.5배. 프랑스의 2배로 확고한 경제적 우위를 보유했으나 지금은 앞서기는 하지만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며, 핵무기 보유 여부와 상임이사국 여부를 따졌을 때, 영프 각각과 비교시 독일이 국력에 있어 확고히 위에 있다 보기는 힘들게 되었다. 물론 독일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독일 중심으로 유럽연합을 개편하는 등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지만 동유럽 중심으로 2차대전 피해국들이 모조리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26] 독일이 과거사 반성을 했다지만 언제까지나 유대인 학살, 폴란드 등지에서 벌인 반인륜 범죄 등 나치 범죄에 대한 반성이지, 독일민족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나 일본은 과거사 반성은 커녕 대놓고 전범을 미화하는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날뛰고 있으며, 단지 정부가 대놓고 그들과 손잡지 못할 뿐이다.[27] 자세한 것은 폴란드의 폴-헝 관계 참조.[28] 겨우 7만명 정도의 차이이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이탈리아루마니아를 비교하면 국력으로나 인구로나 당연히 이탈리아가 많은 전사자를 내어야 정상이다.[29] 그러나 아래 항목에서 보듯이 불가리아는 좀 논란이 있다.[30] 다만 핀란드가 2차 세계 대전에 끌려가게 된 계기가 소련의 선제 침략이었던 겨울전쟁이었음이 감안되어 공산화와 전범국 지위는 면했으며, 나름 동정받는 부분이 당대에는 물론이고 현재도 꽤 많다.[31] 당시 불가리아 왕가는 독일계였다. 보리스 3세의 부왕인 페르디난트 1세#s-3 문서 참조.[32]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일 뿐 불가리아한테 직접적으로 당한 그리스와 세르비아에서는 당연히 다른 놈들이랑 똑같은 죽일 놈들 취급이다.[33] 심지어 이 국가들은 불가리아가 제2차 대전의 전범국이 아닌 전쟁 피해국으로 인정까지 해주고 있다. 일단 제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싸웠지, 불가리아하고 싸운 게 아니니까.[34] 일본-쿠릴 열도, 남사할린, 남양제도, 대만, 만주, 조선 등 식민지와 영토들을 미국, 중국과 소련에게 할양하거나 독립시키고 현재의 혼슈, 홋카이도, 시코쿠, 큐슈 등 일본 열도 4개 섬으로 영토 축소, 독일-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폼메른을 폴란드와 소련에게 상실하고 전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 이탈리아-이스트리아 반도와 리예카 시, 로도스 섬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게 할양, 루마니아-베사라비아(몰도바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을 소련에게 할양, 헝가리-뮌헨 협정,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빼앗아 먹었던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들을 다시 원래 지배하던 주변국들에게 다시 내주고 전쟁 이전이자 현재의 영토 면적으로 축소되었다.[35] 실제로 제2차 대전 종전 후 영국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 연합국들은 태국을 일본이나 독일 같이 전범국으로 처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실제로 태평양 전선에서의 연합군 발언권은 미국에게 있었고, 미국은 전쟁 당시 태국이 일정부분이나마 일본 제국에게 강제로 동맹국으로 끌려갔던 이력이 있었던 것을 감안해 태국을 용서해줬다. 덕분에 미국은 전후 냉전이 시작되고 동남아에 든든한 우방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특히 태국군은 6.25 전쟁에 미군과 함께 UN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36] 이후 독일의 괴뢰국이 됨.[37] 인도 제국 정부가 추축국에 호의적이었다는 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이 호의적이었다.[38] 중국(이 때의 중국 정권은 국민정부)과 미국이 인도 독립운동진영을 지지해 준 덕도 크다.[39] 아르헨티나보다 더하면 더한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게 현재 칠레군에서 예전 나치 독일의 국가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의 곡조를 이용해 만든 해병대 군가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놈들이다![40] 소련과의 전쟁 및 빌뉴스 강탈로 인한 폴스카의 고립, 도이칠란트와의 무역전쟁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내세운 노선인 듯하다. 실제로 피우스트스키 체제도 독재 체제였다.[41] 다른 중립국들은 스페인을 제외하면 이런 짓을 하진 않았다.[42] 전쟁 교전국의 화폐 가치는 급락하기 때문이다. 도이칠란트가 무역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중립국의 화폐가 필요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위스 프랑으로의 환전 과정을 거쳤다. 이는 나치가 타넨바움 작전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43] 단, 독일이 강제 병합 의사를 보이자 청야전술까지 꺼내며 강경하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