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타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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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반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 파시즘과 민족주의, 가톨릭이 섞인 결과물으로 2차대전 이전인 1929년 파시스트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1889~1959)에 의해 창설되었다. 우스타샤란 말은 '서다', '오르다'라는 뜻의 'ustati'에서 나왔으며 반란을 뜻한다. 당연히 이들도 나치식 경례를 채용했었는데 경례구호는 '''"Za Dom, spremni!(조국을 위해 준비하라!)"'''였다.
슬라브족이면서도 나치 독일에게 인정받아 같은 슬라브족인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실제로도 크로아티아의 네오 나치들은 서로 우스타샤 후신임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나치 독일은 크로아티아인들을 고트족의 후예라고 선전했다. 이들의 하위 무장 조직으로는 우스타샤 민병대가 있다.
2. 활동과 만행
2차대전 당시인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 약칭 NDH)이 괴뢰국 형태로 추축국이 점령한 유고슬라비아 일부에 세워졌다. 이 나라는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며 군주국이었으나 정부의 실권은 우스타샤와 그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쥐고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는 물론 공동 점령국이었던 나치 독일과 헝가리 왕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점점 세력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이 동안 우스타샤는 '1/3론'이라는 정책을 세웠는데,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1/3은 죽이고, 1/3은 개종시키고, 1/3은 쫓아낸다는 소리다. 그 결과 세르비아인 25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40만여 명의 세르비아인과 10만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하였고, 20만 명이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당했다. 세르비아인 학살 피해자는 최대 75만 명까지 추산된다.[1] 게다가 총으로 쏴 죽이고 산 채로 태워 죽이기에서부터, 심지어 우스타샤 신병에게 팔다리를 묶은 세르비아인 또는 유태인들을 '''배를 갈라 죽이게 하는 시험'''을 보게 했다고 한다(사진까지 남아있다!). 심지어 임신부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게 하여 학살하기도 했다. 이를 주도한 비밀경찰청장이라든가 하는 공직들은 가톨릭 사제들로 채워졌고 강제수용소 소장도 가톨릭 사제 출신이었다.
당시 발칸 지역에 주둔하던 독일군들(SS가 아닌 일반 독일 국방군 병사)조차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자그레브에 위치한 점령군 사령부도 그들의 잔혹함에 질려서 "얘네랑 손 끊으시죠?"라고 히틀러에게 전보를 치며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인자츠그루펜이나 SS는 오히려 이에 감탄(...)하며 살인 기술을 배워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민 알후세이니의 협조로 이곳에서 무장 SS 사단인 한트샤르가 징집되기도 하였다.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됨으로서 이탈리아가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1944년 헝가리가 자국 보호를 위해 도망가고 독일군까지 물러나자 우스타샤는 파르티잔에게 쫓겨나 궤멸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인민재판으로 궐석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나, 정작 파벨리치는 스페인 및 아르헨티나, 칠레 등 여러 나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망명 도중 1957년 아르헨티나에서 결국 유고 티토 정부에서 보낸 암살자의 총탄에 맞았다.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1959년 스페인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병원에 누워있다가 죽었다.
우스타샤의 제4 군단장을 맡은 라파엘 "란코" 보반(Rafael „Ranko” Boban, 1907–1945?)은 전후 행적이 묘연한데 1947년 크로아티아에서 살해되었다는 설과 미국으로 이민 가서 이후 미 육군에 입대해 한국 전쟁에 종군 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일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세르비아계의 체트니치(Четници)도 있다. 체트니치는 체트니크(Четник)의 복수형인데 단수형인 체트니크라고도 알려져 있다. 체트니치는 원래 나치 독일과 그들에 빌붙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저항하는 조직으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문제는 얼마 안 가 변질되어 독일군보다는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과 대립했으며,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는데 힘을 쏟았다. 결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망명 정부도 이들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리고, 끝에 지도자인 드라골류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Драгољуб „Дража” Михаиловић, 1893–1946)는 아들마저도 배신자로 규정하고 외면한 끝에 재판을 받고 종전 뒤 처형당했다. 결국 체트니치는 시작은 우스타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세르비아인의 모임이었으나 스스로도 우스타샤의 학살을 답습하면서 파르티잔의 공세를 받아 붕괴되었다.
3. 평가
우스타샤의 학살은 세르비아계에 뿌리 깊은 피해의식을 남기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을 보복 학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티토 사망 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나 라도반 카라지치 등 세르비아계 유고 연방 정치가들이 "국민 여러분, 우리 세르비아 인들이 뭉치지 않으면 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무슬림 놈들이 우리를 제2차 세계대전 때처럼 학살하고 공격할 겁니다." 하면서 선동을 하여 대세르비아주의를 유행하게 했고 급기야 내전이 벌어져 우리가 학살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는 논리로 다른 민족을 공격해 학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스니아 내전 중에 체트니크도 재결성되었고 유고 연방군, 아르칸들과 함께 학살을 주도했다.
실로 크로아티아 근현대사에서 가장 추악한 과거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느 추축국들이 그랬듯 크로아티아에서 우스타샤의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를 대놓고 애국자로 추앙하는 이들도 있다. 하영식의 <굿바이 바그다드>를 보면 나오는 우스타샤 기념비라든지... 물론 세르비아에서는 학살자를 기린다고 분노했다. 사실 이는 크로아티아의 일만은 아니다. 2차대전 당시 폴란드 남동부의 볼히니아(Volhynia)와 동부 갈리치아(Galicia) 무려 '''12만여 명'''의 폴란드 인들을 대량학살하고 나머지는 내쫓아서 인종청소를 감행한 스테판 반데라와 휘하 조직 우크라이나 봉기군(Ukrainian Insurgent Army)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조직(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은 우크라이나 일부에서는 조국 독립에 몸바친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물론 폴란드에서는 대량학살자를 찬양한다고 반발한다. 우크라이나의 진보적인 사람이나 친러적인 사람들도 반발한다.
아직까지도 크로아티아는 유럽에서 발트 3국과 더불어[2] 나치에 부역한 역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UEFA 네이션스 리그/2018-19 시즌에도 크로아티아 홈경기는 무조건 무관중이었다. 이유는 유로 2016 때 크로아티아 관중들이 대놓고 '''나치식 경례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가톨릭계에서 우스타샤를 마치 광복군처럼 찬양하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한국 가톨릭 교계 신문인 평화신문이 우스타샤를 가톨릭 광복군이라는 투로 보도했다가 진실이 드러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선술한 <굿바이 바그다드>를 쓴 하영식은 오죽하면 이걸 언급하면서 '한국 가톨릭계의 학살자 찬양, 기관총을 든 신부님'이라는 비난에 일부 가톨릭계가 반발하기도 했다.
당시 교황인 비오 12세가 이들을 비호한 혐의 때문에 나치에 호의적이라는 의혹이 나오게 된 큰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3] 물론 가톨릭 교계에서 나치에 동조한 성직자들만 있었던 건 아니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같이 나치에 항거한 성직자도 있었다. 진중권이 과거 자신의 저서에서 하느님의 안기부장이자 안보의 데이빗 카퍼필드를 비판할 때 가톨릭도 잘한 게 없다는 논거로 비오 12세의 나치 비호(설)와 우스타샤에 대해 잠깐 언급하기도 했다.
4. 당가
'''Puška Puca'''[4]
5. 미디어에서의 등장
레인보우 식스 시리즈 중 레이븐 쉴드의 메인 악역인 백만장자 니콜라 고스피치(Nikola Gospic)가 이 우스타샤 출신이라는 설정이다. 개 버릇 남 못준다고, 아르헨티나 대통령 자리에 자신의 꼭두각시를 앉혀서는 남미의 유전지대를 장악하고 대규모 테러를 일으켜서 자기 유전지대의 가치를 급속히 상승시켜 세계에 파시스트 혁명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망상을 실현시키려다가 레인보우 팀에게 싹 털리고 본인도 세상 하직한다.
Hearts of Iron IV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연합국에 가입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반란을 일으키며 추축국에 가입한다. 이때 지도자는 안테 파벨리치. 반대로 유고가 추축국에 가입하면 페타르 2세가 반란을 일으켜 유고 연방이 연합국에 가입한다. 나라가 찢어지는 꼴을 막으려면 소련을 인정하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때는 사방이 추축국에 포위된 상태에서 이탈리아의 침공[5] 을 막아내야 한다.
[1] 물론 대다수 살아남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 주민들은 학살과 탄압을 피해 크로아티아의 고향을 버리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물론 일부는 살던 터전을 버리지 못해 우스타샤의 학살을 피하려고 크로아티아인, 카톨릭교도인척 하며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고.[2] 다만, 발트 3국 쪽은 사정이 약간 다르다. 발트 3국 점령, 동방 국가판무관부참조.[3] 우스타샤에 적극 협력해 세르비아인 학살에 앞장섰던 알로지제 스테피나츠 자그레브 대주교가 전범재판에서 16년형이라는 죄에 비해 대단히 관대한 형을 받았음에도 이에 반발하며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해버렸다. 분노한 티토는 스테피나츠를 석방하고 단교해버렸다. 더군다나 이 인물은 요한 바오로 2세에게 1998년 시복까지 받았다[4] 굳이 번역하자면 "총들은 발사되고'' 이다[5]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와 친선을 맺는 포커스가 있긴 하나 거의 반드시 유고 침공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