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주

 


'''수말당초 군웅
劉武周 | 유무주
'''
'''묘호'''
없음
'''시호'''
없음
'''가한호'''
정양가한(定楊可汗)
'''연호'''
천흥(天興, 617년 ~ 620년)
''''''
유(劉)
''''''
무주(武周)
'''생몰 기간'''
? ~ 620년
'''재위 기간'''
617년 ~ 620년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유무주는 수말당초의 군웅 중 한 명이다.

2. 생애


유무주는 하간군(河間郡) 경성현(景城縣) 출신의 인물로, 부친인 유광(劉匡) 때 마읍(馬邑)으로 옮겨 살았다. 유무주는 용맹하고 활쏘기를 잘 하였으며, 호협들과 교류하였다. 하지만 유무주의 형인 유선백(劉山伯)은 유무주에게 사람을 가려서 교유하지 않으면 집안을 파멸시킬 것이라며 유무주를 모욕하였다. 유무주는 유선백의 모욕으로 인해 집을 뛰쳐나가 태복(太僕) 양의신(楊義臣)에게 의탁하였다.
한편 수나라에서는 당시 황제였던 수양제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며 군사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유무주는 여기에 참가하여 군공을 세우고 건절교위(建節校尉)로 제수되었다가, 마읍으로 돌아간 뒤에는 응양부(鷹揚府) 교위가 되었다.
유무주가 마읍으로 돌아왔을 때, 마읍군의 태수였던 왕인공은 뇌물을 받아먹고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지 않았으며, 유무주를 가까이 하여 후하게 대우하였다. 하지만 유무주는 자신이 왕인공의 시녀와 몰래 간통했다는 사실이 왕인공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였고, 결국 반란을 일으켜, 왕인공에게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았다는 죄목을 물어 그를 살해하였다. 왕인공을 살해한 유무주는 스스로 마읍 태수를 칭하고 마읍을 장악하였으며, 창고를 열어 궁핍한 이들을 구휼하였다. 이때가 617년의 상황이다.
반란을 일으킨 유무주는 돌궐의 가한인 시필가한에게 사신을 보내 그와 제휴하였고, 안문군, 누번군, 정양군 등의 여러 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수나라에서는 안문군승 진효의(陳孝意)와 호분장(虎賁將) 왕지변(王智辯)를 파견하여 유무주를 진압하도록 하였지만, 돌궐의 군대가 들이닥치면서 왕지변이 전사하고 진효의는 안문군으로 후퇴하게 된다. 유무주는 직후 분양궁을 점거하여 사로잡은 수나라의 궁인들을 포로로 붙잡아 돌궐군이 돌아갈 때 넘겨준다. 정양군을 함락시킨 직후, 돌궐의 시필가한은 유무주를 정양가한(定楊可汗)으로 세운다. 돌궐의 가한 책봉을 받은 유무주는 황제를 참칭하고 천흥(天興) 연호를 선포한다.
이후 송금강이 두건덕을 공격하였다가 패배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유무주에게 의탁해오자, 유무주는 송금강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하여 그를 송왕(宋王)으로 책봉하였다. 송금강은 유무주의 대우에 감사해하며, 자신의 아내를 돌려보내고 유무주의 누이에게 장가를 들었다.
619년, 유무주가 남하하여 병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유무주의 목적은 진양(晉陽)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당나라의 우복야 배적이 진주도 행군총관이 되어 유무주와 맞서싸웠으나 큰 피해를 입었고 이원길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야말로 당나라는 태원이 유무주에게 함락당하는 최악의 위기가 찾아왔다. 유무주는 뒤이어 진주(晉州)까지 공격하여, 강보의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여숭무(呂崇茂)라는 이가 현령을 죽이고 유무주에게 내응하고, 송금강의 휘하에 맹장 울지경덕까지 있는 상황에서, 당고조 이연은 한때 하동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유무주와 당나라의 대치 형국은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반전을 맞이하였다.
바로 '''진왕 이세민의 출병'''이었다. 진왕 이세민의 출병은 당나라에게 있어서 역전의 한 수였다. 이세민이 송금강의 보급로를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송금강은 보급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결국 유무주와 송금강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세민은 유무주와 송금강을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공격하였고, 하루에 8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결국 송금강의 부하였던 울지경덕과 장만세 등은 이세민에게 항복한다.
이세민이 병주를 수복하면서, 620년에 유무주와 송금강은 형세가 불리함을 알고 돌궐로 달아난다. 하지만 돌궐에서는 이미 유무주와 송금강에 대한 이용 가치가 없어졌고, 결국 돌궐에 의해 살해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 둘러보기